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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교과서에서 배운 로크식 사회 계약론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낯설다. 이기적인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논의가 결국에는 군주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홉스의 전제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도 이 권리 만큼은 군주의 권력 앞에 내어 줄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권을 옹호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국민의 이 권리는,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존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를 근대 인권 사상의 출발점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똑같은 사상에 근거해 홉스 정치론의 위험성을 공격하는 사람도 역시 많다. 고백하자면 나는 <<리바이어던>>은 일부만 읽었고, <<시민론>>은 손도 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전에 근거해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주제는 안 된다. 그런데 홉스의 정치 사상이 일견 모순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그의 사상을 로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사회 계약론에 대한 통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현대 정치 질서에 엄존하는 한 경향을 대변하는 치열한 사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홉스는 중세를 벗어난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대중'의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한 사람이고, 이 문제는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화두가 되니까. 이에 대한 재밌는 논문들을 몇 편 읽어서 정리를 좀 해 보려고 한다.
1. 고원과 진태원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을 참조하며 스피노자와 홉스를 비교하고 있는데,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가 대중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홉스의 대중 개념에서 재밌는 것은 그가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대중은 대중mass에 대한 현대의 통념과 비슷하다. 일관성이 없고, 멍청하다. 현대에 인민 또는 민중people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자각한 대중을 가리키거나 또는 (결국엔 같은 말일 수도 있지만) 대중을 그런 정치적 자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된다. 홉스도 마찬가지로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개념화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도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도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Hobbes, On the Citizen
인용문에 홉스 자신이 적어 놓은 것처럼, 이런 관계는 역설적이다. 진태원은 이에 대해서 홉스가 대중과 인민을 구분하며,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행위자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이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고, 홉스가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배제가 가능한가? 이는 홉스의 의인疑人person 이론에 근거한다.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 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각의 작용과 반-작용의 체계일 뿐, 인간의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결국 타인들이 그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건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의해서만 보장되므로, 사회를 전제한다. 단순화시키면,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 인간으로 존재하며 법적, 규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사회 안에서 의인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의인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계약의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계약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자연권을 하나의 의인에게 양도한다. 의인은 물론 다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의인이 국가를 대표한다. 즉, 하나의 의인이 국가의 주권자이며,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인민'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인민이 아닌 것이다. 개인이 의인, 즉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에 참여하는 한에서인데, 국가란 권력을 양도 받은 하나의 의인으로 인해 성립가능한 것이므로, 주권자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고, 따라서 주권도 없다. 이런 논리는 나아가 대중을 정치적 행위자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근거가 된다. 행위란 행위자를 상정한다. 행위자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을 "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의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은 행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있어야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다.
2.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홉스에게서 국가가 국가에 포함되는 무차별적 인간 다수와 일치하는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권력의 구심점과 동일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현대의 국가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를 구성 요소는 영토, 인민, 주권이라 말해진다. 주인 없는 땅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열 사람 집어 넣는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거다. 그 열 사람이 '우리는 열 명이지만 그래도 하나야, X 란 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야.'라고 말하면 그들은 X 라는 국가를 만드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 '하나'는 뭔가? 열 명을 정체불명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 보다 힘든 일이다. 홉스는 그래서 의인이란 인공적 인간 개념을 설정하고, 열 명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든 뒤 그 인간이 국가라고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필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적 인간'이란 말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의 속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삶을 영유하는 공동체는 당연한 것이지 정체를 물어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의 개념사를 고찰하는 김기봉에 따르면 서양에서 지금의 국가를 지칭하는 state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다소간의 시기차가 있지만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state는 라틴어 status 가 어원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국가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기까진 많은 변화를 거쳤다.
우선 status 는 인간의 지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특수하게 주로 지배자로서의 위치, 지위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것이 나아가 지배자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는 말로 이용됨으로써, 왕의 권력이라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status 는 단순히 상태(condition)나 형태(form)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이 나아가 왕국이나 공화국의 상황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로 이어진다. 여기서 status 는 공공적인 것과 좋은 것이란 뉘앙스를 갖게 된다. status 의 근대적 의미로의 전환의 분수령은 마키아벨리인데, 그에게서 status 는 "지배를 받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과 그 영역을 총칭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군주가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명령권력"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국민과 영토란 근대적 국가 구성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status는 "명령권력이면서 동시에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이는 국민 스스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근대 국가의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 개념과 관련한 그의 큰 기여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가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덕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처음으로 정치 권력의 문제를 도덕적 문제와 분리시켜 제시했고,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과 유지 그 자체였다. 이 문제가 국가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진 영주의 소유물이든, 신이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곳이든 뭐든 간에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갖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닌 비인격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자체를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했다. 자율적autonomous이란 말은 스스로에 대한 통치력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근대 주권 개념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김기봉은 근대 주권 개념에 대해서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초월하여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이루는 공권력의 한 형식"이란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이는 주권의 담지자인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인격적 실체들인 지배자와 피지배자들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이다.
홉스는 이에 대해서 국가=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의인(인민)의 것, 따라서 국가 주권=의인(인민) 주권이란 대답을 내린 것이지만, 이는 당연히 이런 국가 개념 안에 시민적 권리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홉스식 사고에선 시민적 권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진태원이 지적하듯이 홉스 계약론의 특징은, 자연 상태를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병리적 상태로 생각하고, 계약에 의해 시민 사회 또는 국가가 탄생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려면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와 시민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지."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왜 우리가 불법체류자의 인권을 신경 써 줘야 하느냐?"라는 분노에는 인권은 천부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가 법적으로 부여해 준 것이란 생각, 국가를 인간 관계를 규율하는 최고의 원리이자 가치 척도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 사상의 문제점은 도덕적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자칫하면 현실적, 합리적이지만 당위가 결여된 홉스와 이상적인 로크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정의론>>에서 롤즈의 작업처럼 정치 철학의 관건을, 합리적 계약론과 도덕적 당위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협소한 지평으로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홉스 정치 철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기 보다 오히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3. 홉스의 국가와 대중에 대한 생각은 논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가가 하나라면 국가 주권도 하나여야 하는 반면에 대중은 행위의 담지자인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따라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즉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홉스의 생각은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주체의 자격을 논하고, 따라서 정치 주체를 하나의 특질 아래 묶일 수 있는 동질적인 무엇으로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거권이 돈 많은 사람들한테 주어져 있던 시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부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중세의 농민 봉기를 정치 행위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홉스 같은 이가 아무리 열외자들을 정치에서 몰아내려고 하든 말든 간에 실제 정치에서는 언제나 하나로 셈해 지지 않는, 무한한 대중이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진태원과 고원의 논문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지만 홉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는 인민과 대중을 정치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상태와 사회/국가 상태를 단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계약에 의해 국가가 만들어졌어도 그 안에 사고와 정념의 이질성으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의 절대적 안정성이 보장된 홉스의 이상 국가와는 달리 스피노자의 이상 국가 속에선 사회에 적대 관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국가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 계약을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하고, 종교적 계약은 홉스에게서처럼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통해 국가 설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설정된다. 이런 스피노자식 설정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구분하고, 이데올로기의 호명呼名을 종교적 모티프로 설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조롱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인 '대중'을 정치적 주체성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덧. 사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독어로 원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한국 글은 3월까지만 보겠다고 다짐하고-_-;; 여전히 찔끔찔끔 논문들을 찾아서 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를 멀리하는 나를 늘 다그치던 선배는, 내 근황을 묻는 동기에게 걔는 독일까지 가서도 한국 글만 본다며 흉을 봤다고 한다-_- 어쨌든 놀기만 하는 건 아니잖슈ㅠ 하여간 정리한베낀 논문은 아래와 같다.
고원, <대중이란 무엇인가>, <<영국 연구>> 16호,
김기봉, <국가란 무엇인가 : 개념사적 고찰>, <<서양사론>> 82호,
진태원,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두 가지 정체성의 간극에서
말할 것도 없이 이 실천은 도시나 국가의 통치가 단일하고 다의적일 수 없는 공동체 원리를 근거로 할 것을 원하는 자에게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민주주의의 이중 구속dobule bind, 이중성, 또는 허위에 대한 끝 없는 지탄, 플라톤에서 사무엘 헌팅턴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현실이 그 이름과 모순됨을 증명하려고 하는 지속적인 시도가 행해져 왔던 것이다. 이 지탄의 가장 잘 알려진 정식은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에서 보여진다. 이 대립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훨씬 오랜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쓰여진 법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인 생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플라톤의 구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도 있다. 플라톤의 모델에서는 민주주의자의 개인주의적 생활은 법의 엄격함에 겉보기로 참가commitment하는 것의 진짜 내용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면, 즉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생활'을 은폐하는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대립한다. 그러나 결론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논의의 구조는 동일하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립하는 평등의 외관이다. 이 '현실'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쾌고快苦의 계산에 종속되는 민주주의적 개인의 전적인 쾌락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은 사적소유와 사적이해의 현실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한 것처럼, 정치적인 나타남의 영역의 반짝임, 빛남, 을 '단순한 소여성의 어두운 배경'에 대치하는 것에 의해 그 관계를 역으로 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이상의 어느 경우에서든, 민주주의는 나타남(=외견)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라는 필터를 통해 접근된다. 이 대립을 통해 민주주의는 묘사되고, 위장 당하고, 궁극적으로는 밀쳐내진다. 겉보기에는 대립적인 해석이 등가라는 사실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혁명적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비판 속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그런 권리는 '인권'으로 발전했다. 우리들이 인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2세기 이상에 걸쳐, 버크, 마르크스, 아렌트 처럼 다양한 저자들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는 무언가 그릇된 것, 즉 이중성이 있음을 가리켜 왔기 때문이다. 독립한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며, 거기에는 무언가 착오가 숨어 들었을 것이다. 이런 논의가 이들 저자들에 의해 행해져 왔던 것이며, 최근에도 <<호모 사케르>>(주1) 속에서 죠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기술한 것처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실제로는 재산 소유자인 '인간'의 권리이다. 버크와 아렌트에 의하면 그런 권리는 우리들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그런 권리는, 시민의 권리이거나 인간의 권리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비정치적인 개인의 권리이다. 이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권리는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는 자의 권리인 것이 되며, 이것은 무와 같다. 또는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즉 시민이 기존의 입헌국가에 귀속하기 때문에 소유하는 권리이다. 그런 권리는 권리를 갖는 자의 권리이며,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이런 언설이 우리들에게 두개의 주체를 제시한다면, 그 하나는 위장용 껍데기일 것이다-이 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정치 주체는 하나이며 또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 중 어느 것이 '진짜' 주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신기루이던가, 정치 주체가 헌법의 텍스트가 정의하는 것과 같은 것이던가, 그 어느 것인가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정치 주체는 상이한 아이덴티티 사이, 특별히 인간과 시민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은, 인간의 권력도 시민의 권력도 고정하지 않고, 인간과 시민 사이의 결합과 분리의 형식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시민은 정치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되는 것이며, 이 이름의 법적인 기재가 정치적인 과정의 소산인 것이다. 인간과 시민은 또, 분쟁적인 이름, 그 외연과 내포가 경합적이며, 시험 또는 검증의 공간을 여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시민이라는 정치적인 이름은 민주주의의 투쟁에 있어서 사용되어 왔던 것이며, 사용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시민성citizenhip이란 인간으로서-즉, 소유주와 사회적 지배층의 권력에 종속하는 사적인 개인으로서-열등하거나 우수하거나 한 사람들 사이의 평등의 지배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인간'이란 누구라도 갖는 평등한 수용력의 긍정을 의미하고, 이것은 시민성의 제한, 즉 인민의 많은 범주를 시민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또는 다양한 문제를 시민의 범위 밖에 두는 제한과 대립한다. 인간과 시민은 함께 배제원리에 대한 포함원리의 역할, 개별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인 것의 역할을 연기한다. 민주주의가 이해의 개별성에 대한 법의 보편적인 권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폴리스의 논리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개인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것은 항상 상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것은 새롭게 분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시험 삼아, 프랑스 혁명기의 페미니즘의 저항운동의 형식에 주석을 다는 것을 통해 이를 지적했다(주2). 여성의 활동은 가정생활의 개별성에 귀속하지만 시민성은 보편성의 영역이다, 라는 이른바 공화제 원리에 따라, 여성들은 시민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개별적인 것의 영역에 있었던 결과, 여성은 보편적인 것에는 포함될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 자신의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 주체일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이 '자-명'한 언명에 대해, 올랭 드 구즈는 여성들은 단두대에 올라갈 자격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집회'의 연단에 올라갈 자격도 똑같이 부여 받은 것이다, 라는 잘 알려진 이론異論을 제기했다. 그녀의 논증은 이른바 벌거벗은(裸形) 생의 개별성에 수반되는 보편성을 제기하는 것에 의해, 영역의 분할을 애매하게 한 것이다. 여성들은 혁명의 적으로써 죽음을 선고당해 왔으니까, 여성의 벌거벗은 생은 정치적이었다. 단두대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했다. 죽음의 선고의 보편성은 정치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의 '자-명한' 구별을 던져 버렸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시민으로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에 의한 권리의 긍정은, 버크 또는 아렌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스스로가 갖는 권리를 갖지 않으며, 스스로가 갖지 않았던 권리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한편에서, 여성들은 모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에 귀속하는-권리(인권) 선언에 따르면- 권리를 빼앗겼었던 것이며, 그녀들에게 부정당했던 권리를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스스로의 항의 운동에 의해 그 정치 능력을 증명했다. 여성들은 스스로 그런 권리를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두 개의 아이덴티티 사이의 간극에서 주체화 형식을 창조하는 것,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이중의 관계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보편성의 사례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과정이 동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법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일 수만은 없는 것은, 법의 보편성은 통치행동의 논리에 의해 부단히 개인화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공적생활의 끊임없는 개인화에 저항하는 주체화의 형식과 검증의 사례에 의해 대리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화는 두 가지 형식을 갖는다. 그 명료한 형식은 성적, 사회적 또는 민족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인구의 어느 부분에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다. 그 암묵적 형식은, 일련의 일정한 제도, 문제, 행위자, 절차에 시민성의 영역을 제한한다. 전자가 서양에서는 시대 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반대로, 후자는 현대의 중요한 문제이다. 근대화라는 부드러운 이름 또는 신-보수주의 혁명이라는 솔직한 이름이, 30년 이상에 걸쳐 노동이나 건강이나 연금과 같은 '사적 생활'의 문제를 평등한 시민성과 관련한 공공의 관심사로 바꾸는 것을 통해 공공역역을 넓혀 온 민주주의의 과정을 역전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사회' 국가 또는 '복지' 국가 개혁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린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공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나 효용과 개인이 사적으로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균충均衝보다도 훨씬 큰 문제이다. 노동과 건강의 조정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성common'에 관한 이해이다. 시민성의 정치적 영역과 사적인 약속이 지배하는 사회적 영역을 나누는 선은, 누가 공적인 일에 참가할 수 있으며 누가 할 수 없는가를 결정한다.
1995년 겨울 프랑스에서 공공운송기관의 노동자들이 행한 상당히 긴 파업 동안, 사적이고 재정적인 이해와, 공통선共通善의 정치적인 추구와 장래 세대를 배려하는 능력을 대비하는, 많은 아렌트적이고 슈트라우스적인 논의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업이 진행되는 사이에 점점 분명해진 것은, 파업의 주요한 목적은 특정한 인간집단과 제도가 공동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배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규범적인 구별은 실제로는 공통의 문제와 장래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자와, 사적이고 직접적인 관심사를 넘을 수 없다고 간주된 자 사이의 구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과정 전체는 이 경계선의 이동을 둘러싼 것이다.
주1 :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주2 : Cf. Jacques Ranciere, 'Who is the Subject of rhe Rights of Man', 103/2 South Atlantic Quarterly, spring/summ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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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론에 대해 소개한 글을 찾았다. 진태원 선생이 아감벤, 호네트, 랑시에르를 현대 유럽 정치철학 3인방으로 묶어 소개한 글인데, 랑시에르의 police, politics, the political 의 구분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진태원 선생은 police 를 '치안/통치'로 옮겼는데, 원어를 그대로 쓰는 것보다 의미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진태원,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읽어보기: http://blog.aladdin.co.kr/balmas/111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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