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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임박함에 대하여, 긴급함과 명령에 대하여, 이것들 속에서 기다리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강조하는가? 이는 오늘 우리가 말해 보려는 것을, 오늘날 마르크스의 저작에, 곧 또한 마르크스의 명령에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우리는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징표를 가지고 있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을,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적 명령을, 분류된 저작에 대한 차분한 주석으로 중립화하려는 시도, 어쨌든 약화하려는 시도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우리는 문하 속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에서 어떤 유행 내지 멋 부리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낀다. [중략] 이러한 최근의 상투적 경향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마르크스주의 문헌에 대한 참고를 근본적으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기껏해야 관용의 탈을 쓰고서 우선 [마르크스의-옮긴이] 저작/신체를 무력화하고, 여기에 깃든 반역성을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잠재적인 힘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사람들은, 무엇보다 반란, 분개, 봉기, 혁명적 도약을 고취할지도 모를 반역성이 복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가운데서야 비로소 귀환을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귀환 또는 마르크스로의 회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단 이는 단지 해독할 뿐만 아니라 행위하도록, 또는 (해석에 대한) 해독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변혁으로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지령을 침묵으로 지나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중략] 귀를 기울이면 이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시오, 마르크스는 어쨌든 다른 이들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였고, 그 많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제 침묵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교수자격시험 목록에서 배제되어 왔는데 이제 그만한 자격을 갖춘 위대한 철학자로 이름을 올릴 때가 된 것 같소. 그는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당들에 속하지 않고, 우리 서양 정치철학의 위대한 고전 속에서모습을 드러내야 하오. 마르크스로 돌아갑시다. 이제 마침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읽어 봅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고 또 앞으로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로 향하는 또는 돌아가는 이 순간 여기서 시도해 보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오늘날 새로운 이론주의가 중립화하는 마취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르크스에 대한 철학적, 문헌학적 회귀가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명령을 강조하게 될 만큼, 이는 "다른 어떤 것"이다.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77-79쪽
이 문장을 옮겨 적고 있으려니 얼마 전 은퇴한 맑스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가 생각난다. 그의 은퇴 소식이 이런저런 언론에서 보도된 것을 보면, 서울대 경제학부의 유일한 맑스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이 꽤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긴 한가 보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 경제학부에선 후임 맑스 경제학자를 임용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하고 이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이 임용을 촉구하는 연서를 쓰기도 했다는데, 결국 김수행 교수에 대한 조중동 같은 언론의 관심은(조선은 인터뷰도 했다) 이제 유령이 조용히 자기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영하는 자축 파티인 셈이다. 아직 맑스를 체제 내로 받아 들일 만큼 '세련'되지 못한 학계에 맞서 학문의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면서 한 자리 만이라도 맑스를 위해 내어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상황에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박사 과정에서 9 명이나 공부하고 있다니 한 자리가 아니라 그 몇 배쯤 늘어나 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여담인데 석사 과정의 전공자는 3명 뿐이라고 한다. 이런 급감에 세태 변화도 한 몫 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몇해 전인가 대학원 입학 학점이 높아져서 학부 때 운동하느라 학점 관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예비 맑스 경제학자들이 그 문턱을넘기가 만만치 않아졌기 때문이란다. 대학에서 맑스를 몰아내려는 고도의 음모는 이미 몇해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ㅎㅎ)
0.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교과서에서 배운 로크식 사회 계약론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낯설다. 이기적인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논의가 결국에는 군주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홉스의 전제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도 이 권리 만큼은 군주의 권력 앞에 내어 줄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권을 옹호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국민의 이 권리는,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존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를 근대 인권 사상의 출발점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똑같은 사상에 근거해 홉스 정치론의 위험성을 공격하는 사람도 역시 많다. 고백하자면 나는 <<리바이어던>>은 일부만 읽었고, <<시민론>>은 손도 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전에 근거해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주제는 안 된다. 그런데 홉스의 정치 사상이 일견 모순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그의 사상을 로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사회 계약론에 대한 통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현대 정치 질서에 엄존하는 한 경향을 대변하는 치열한 사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홉스는 중세를 벗어난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대중'의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한 사람이고, 이 문제는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화두가 되니까. 이에 대한 재밌는 논문들을 몇 편 읽어서 정리를 좀 해 보려고 한다.
1. 고원과 진태원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을 참조하며 스피노자와 홉스를 비교하고 있는데,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가 대중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홉스의 대중 개념에서 재밌는 것은 그가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대중은 대중mass에 대한 현대의 통념과 비슷하다. 일관성이 없고, 멍청하다. 현대에 인민 또는 민중people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자각한 대중을 가리키거나 또는 (결국엔 같은 말일 수도 있지만) 대중을 그런 정치적 자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된다. 홉스도 마찬가지로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개념화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도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도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Hobbes, On the Citizen
인용문에 홉스 자신이 적어 놓은 것처럼, 이런 관계는 역설적이다. 진태원은 이에 대해서 홉스가 대중과 인민을 구분하며,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행위자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이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고, 홉스가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배제가 가능한가? 이는 홉스의 의인疑人person 이론에 근거한다.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 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각의 작용과 반-작용의 체계일 뿐, 인간의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결국 타인들이 그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건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의해서만 보장되므로, 사회를 전제한다. 단순화시키면,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 인간으로 존재하며 법적, 규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사회 안에서 의인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의인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계약의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계약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자연권을 하나의 의인에게 양도한다. 의인은 물론 다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의인이 국가를 대표한다. 즉, 하나의 의인이 국가의 주권자이며,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인민'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인민이 아닌 것이다. 개인이 의인, 즉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에 참여하는 한에서인데, 국가란 권력을 양도 받은 하나의 의인으로 인해 성립가능한 것이므로, 주권자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고, 따라서 주권도 없다. 이런 논리는 나아가 대중을 정치적 행위자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근거가 된다. 행위란 행위자를 상정한다. 행위자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을 "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의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은 행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있어야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다.
2.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홉스에게서 국가가 국가에 포함되는 무차별적 인간 다수와 일치하는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권력의 구심점과 동일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현대의 국가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를 구성 요소는 영토, 인민, 주권이라 말해진다. 주인 없는 땅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열 사람 집어 넣는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거다. 그 열 사람이 '우리는 열 명이지만 그래도 하나야, X 란 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야.'라고 말하면 그들은 X 라는 국가를 만드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 '하나'는 뭔가? 열 명을 정체불명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 보다 힘든 일이다. 홉스는 그래서 의인이란 인공적 인간 개념을 설정하고, 열 명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든 뒤 그 인간이 국가라고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필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적 인간'이란 말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의 속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삶을 영유하는 공동체는 당연한 것이지 정체를 물어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의 개념사를 고찰하는 김기봉에 따르면 서양에서 지금의 국가를 지칭하는 state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다소간의 시기차가 있지만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state는 라틴어 status 가 어원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국가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기까진 많은 변화를 거쳤다.
우선 status 는 인간의 지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특수하게 주로 지배자로서의 위치, 지위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것이 나아가 지배자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는 말로 이용됨으로써, 왕의 권력이라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status 는 단순히 상태(condition)나 형태(form)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이 나아가 왕국이나 공화국의 상황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로 이어진다. 여기서 status 는 공공적인 것과 좋은 것이란 뉘앙스를 갖게 된다. status 의 근대적 의미로의 전환의 분수령은 마키아벨리인데, 그에게서 status 는 "지배를 받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과 그 영역을 총칭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군주가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명령권력"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국민과 영토란 근대적 국가 구성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status는 "명령권력이면서 동시에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이는 국민 스스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근대 국가의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 개념과 관련한 그의 큰 기여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가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덕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처음으로 정치 권력의 문제를 도덕적 문제와 분리시켜 제시했고,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과 유지 그 자체였다. 이 문제가 국가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진 영주의 소유물이든, 신이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곳이든 뭐든 간에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갖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닌 비인격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자체를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했다. 자율적autonomous이란 말은 스스로에 대한 통치력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근대 주권 개념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김기봉은 근대 주권 개념에 대해서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초월하여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이루는 공권력의 한 형식"이란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이는 주권의 담지자인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인격적 실체들인 지배자와 피지배자들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이다.
홉스는 이에 대해서 국가=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의인(인민)의 것, 따라서 국가 주권=의인(인민) 주권이란 대답을 내린 것이지만, 이는 당연히 이런 국가 개념 안에 시민적 권리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홉스식 사고에선 시민적 권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진태원이 지적하듯이 홉스 계약론의 특징은, 자연 상태를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병리적 상태로 생각하고, 계약에 의해 시민 사회 또는 국가가 탄생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려면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와 시민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지."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왜 우리가 불법체류자의 인권을 신경 써 줘야 하느냐?"라는 분노에는 인권은 천부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가 법적으로 부여해 준 것이란 생각, 국가를 인간 관계를 규율하는 최고의 원리이자 가치 척도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 사상의 문제점은 도덕적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자칫하면 현실적, 합리적이지만 당위가 결여된 홉스와 이상적인 로크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정의론>>에서 롤즈의 작업처럼 정치 철학의 관건을, 합리적 계약론과 도덕적 당위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협소한 지평으로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홉스 정치 철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기 보다 오히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3. 홉스의 국가와 대중에 대한 생각은 논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가가 하나라면 국가 주권도 하나여야 하는 반면에 대중은 행위의 담지자인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따라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즉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홉스의 생각은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주체의 자격을 논하고, 따라서 정치 주체를 하나의 특질 아래 묶일 수 있는 동질적인 무엇으로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거권이 돈 많은 사람들한테 주어져 있던 시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부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중세의 농민 봉기를 정치 행위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홉스 같은 이가 아무리 열외자들을 정치에서 몰아내려고 하든 말든 간에 실제 정치에서는 언제나 하나로 셈해 지지 않는, 무한한 대중이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진태원과 고원의 논문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지만 홉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는 인민과 대중을 정치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상태와 사회/국가 상태를 단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계약에 의해 국가가 만들어졌어도 그 안에 사고와 정념의 이질성으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의 절대적 안정성이 보장된 홉스의 이상 국가와는 달리 스피노자의 이상 국가 속에선 사회에 적대 관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국가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 계약을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하고, 종교적 계약은 홉스에게서처럼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통해 국가 설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설정된다. 이런 스피노자식 설정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구분하고, 이데올로기의 호명呼名을 종교적 모티프로 설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조롱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인 '대중'을 정치적 주체성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덧. 사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독어로 원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한국 글은 3월까지만 보겠다고 다짐하고-_-;; 여전히 찔끔찔끔 논문들을 찾아서 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를 멀리하는 나를 늘 다그치던 선배는, 내 근황을 묻는 동기에게 걔는 독일까지 가서도 한국 글만 본다며 흉을 봤다고 한다-_- 어쨌든 놀기만 하는 건 아니잖슈ㅠ 하여간 정리한베낀 논문은 아래와 같다.
고원, <대중이란 무엇인가>, <<영국 연구>> 16호,
김기봉, <국가란 무엇인가 : 개념사적 고찰>, <<서양사론>> 82호,
진태원,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다 봤으니 몇 자 적어 놓으련다.
하고 싶은 말은 칭찬, 칭찬, 칭찬 뿐이다. 정말 가진 게 많은 애니메이션이다. 연출과 작화 모두 흠잡을 데 하나 없고-흠 잡기는 커녕 감탄하기 바빴다-, 학원 코메디, 미스테리, 사이버 펑크 등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잘 버무려 놓은 데다가, 셋 중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어서 충실한 종합 선물 세트를 받는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모든 요소 가 '전뇌 안경'이란 소재와 딱 들어 맞게 연결 되어서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뇌 코일>>의 세계에선 정보 송수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달로 일상 공간에 전뇌 공간을 덧 씌우고, '전뇌 안경'을 통해 그렇게 일상과 겹치게 전뇌 공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캡쳐한 화면에서 보이는 미사일은 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보인다는 설정). 내겐 이 설정이 상당히 재밌었는데, 내가 다른 작품들에서 본 사이버 스페이스는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구분돼 있는데 반해 <<전뇌 코일>>에서는 이 두 세계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뇌 코일>>은 이 독특한 설정을 마음껏 사용해서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는데, 학원 코메디의 성격을 갖는 전반부에선 주인공들의 모험을 '전뇌 안경'의 비주얼적 가능성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고, 후반부에선 미스테리 속에 소재가 던지는 인간학적인 질문을 잘 풀어내며 사이버 펑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분위기가 취향에는 훨씬 맞긴 하지만, 후반부의 구성에 높은 평가를 주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인데, <<전뇌 코일>>은 소재에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진부한 인간학적 관점을 추상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가 저런 문제점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데, 두 개의 세계가 두 개의 액션 스타일을 낳을 뿐인 <<매트릭스>>야 말할 것도 없고, 의체와 네트를 통해서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논하는 <<공각기동대>>도 인용을 통해 17세기 유물론식 문제를 평면적으로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 두 영화에선 세계의 이원성은 그저 배경으로 놓여 있을 뿐 주인공들을 삶에 대한 고민으로 이끌어 가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트리니티에 대한 네오의 사랑은 매트리스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 같고, <<공각기동대>>의 네트는 미지의 공간일 뿐이다. 반면에 <<전뇌 코일>>은 소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위에서 <<전뇌 코일>>에선 현실과 가상 공간의 애매함이 다뤄진다고 했는데, 이야기가가 전개됨에 따라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이었던 전뇌 공간은 놀이 이상의 진지한 체험, 타인과의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숨겨진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가상 세계가 인물들이 심리적인 갈등을 겪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삶의 공간으로 그려짐으로써, 단순한 배경이나 설정이 아니라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상 세계란 소재도 전적으로 드라마 내적인 과정 속에서 마무리된다. 작품의 후반부, 부모들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 믿으라"며 안경을 뺏어갔을 때, 아이들은 "마음이 아픈 곳에 진실이 있다"면서 안경을 쓰고 다시 한 번 가상 세계로 들어가는데, 나는 이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기술의 진보란 인위성과 인간 영혼 또는 육체의 순수함이라는 대립적인 테마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한 주인공들의 감정이 전개의 구심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기술 변화가 초래하는 변화를 받아 들이며 새로운 문제에 진지하게 마주하려는 감독의 자세를 느낄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주인공은 안경을 벗지도 쓰지도 않고, 이마 위에 걸치고 있는데 여기서도 감독의 낙관적인 생각이 엿보인다. 그 낙관이 대책 없는 긍정은 아니란 것은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놓고 여성의 성에 대한 상품화가 확대되었다거나, 어린 소녀에 대한 로리타 컴플렉스가 인기의 원인이라거나 하는 비판 또는 걱정어린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현상을 놓고 보면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다지 생산성 없는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 멤버들이 나이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십대 소녀들이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이들이 나오기 전에도 노골적으로 섹시 컨셉으로 활동했던 그룹들도 있지 않은가? 로리타 컴플렉스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성들의 십대 소녀들에 대한 욕망은 이미 원조교제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고 있다는 듯이 호들갑을 떠는 건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시청자들의 guilty pleasure 에 그럴 듯한 이유를 하나 붙여 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10대 소녀들의 성이 상품화되는 (우려할 만한) 사회 현상'이라는 틀로 바라 보면 성적 욕망과 그 실현의 문제를 도덕의 잣대를 통해서 바라 볼 수 밖에 없고, 그것은 보수적인 도덕적 훈계나 얄팍한 자기 변명 만을 낳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남성들의 로리타 컴플렉스가 처음으로 공식적인 욕망의 기호로 사회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조교제는 불법이고 심각한 도덕적 일탈로 여겨지지만, 이들 그룹에 대한 욕망은 인정되고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억압되었던 욕망이 사회적인 인정을 얻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인정이란 말은 기존에 존재했지만 억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분명하고, 비-의식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모호한 그 '무언가'가 최근에 와서야 의식적인 추구가 가능한 분명한 욕망으로 규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원조교제의 형태로 표출된 이 '무언가'는 당시에는 그저 심각한 사회적 일탈로 취급되었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서 비로소 이것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형상을 부여 받아, 그러니까 개념을 부여 받아, '욕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게는 이 사실이 무척 중요하게 생각되는데, 이 욕망이 그저 남성의 다양한 성적 욕망들 중 하나로서의 '로리타 컴플렉스'인 것 뿐만 아니라, 모종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로 나타난 이 욕망을 한국 사회의 남성 욕망 패러다임의 커다란 전환점이나 심지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의식적으로) 표현된 최초의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군대에 가 있는 친구와 군인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TV-Angels 라는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도를 했는데, 출연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반을 일본 여자 연예인으로 하여 일종의 국가 대항전 컨셉으로 연출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친구의 반응은 "확실히 일본 여자애들이 '제대로' 할 줄 알더라"라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한 '제대로'는 성적 욕망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적 기호들을 잘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였다. 한국 여자 연예인들이 성적인 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강한 행위를 연출하는 반면에 일본 여자 연예인들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의미를 부여 받은 기호들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안경, 고양이 귀와 같은 것들을 생각하면 된다). 대상과의 유사성에 따라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을 구분했던 퍼스Peirce의 기호론에 적용해 보면 한국의 것은 도상에 가깝고, 일본의 것은 상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상과 지표가 대상과의 경험적 유사성 및 연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면, 상징은 의미와 기호의 결합이 사회적 규범과 약속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경험적이라는 사실은 또한 상징이 개념적인 것임을 의미하는데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적 다양성에 상관 없이 무언가를 '그 자체로' 논할 수 있다(의자라는 개념을 의자의 무한한 경험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퍼스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 인간에게 있어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좌우하는 것은 그것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다는 것이고, TV-Angels는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남성의 욕망이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또는 일본 사회와는 달리 한국에는 남성의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비근한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영화 <<조폭마누라2>>에는 기억을 잃은 전 조폭 보스인 신은경이 다방 종업원에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다방 종업원이 신은경에게 가르친 것은, 가슴을 흔들며 끈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일본의 영상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일본 영화라면 결코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흔쾌히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남자의 유형에 따라 다른 다양한 상징들의 사용법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한국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스프레 플레이'와 같은 일본에서 발달한 성매매 시스템도 이의 한 예로 보인다. 한국이나 유럽에서, 성매매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반쯤 벗은 여성들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본의 '변태' 문화를 그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게는 이게 욕망이라는, 극히 경험적이라 간주되는 그 무언가가, 경험의 구속을 벗어나 자립했음을 보여 주는 다양한 예들로 보인다. 그리고 내게는 개념화 또는 상징화를 통한 자립은 일반적으론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경험적 한계를 벗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안경 만세, 하악하악" 이러는 오타쿠들이나 성행위에 관련된 얘기를 하며 낄낄대는 사람들이나 음담패설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같은 음담패설이라도 오타쿠의 그것이 더 큰 문화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성적 욕망이 이런 식으로 변해가는 것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인 양상을 지켜 보며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통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을 이런 욕망의 상징화(개념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아주 간략하게 윤곽이라도 그려 보는 것이다.
남성중심으로 짜여져 왔고, 짜여져 있는 이 사회에서 언제나 긍정되고, 장려되는 것이 남성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만한 것이다. 남성의 자위는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반면에 여성의 자위는 여전히 금기시되는 대화 주제이고(자위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로 화제를 모았던, 구성애의 아우성도 여자의 자위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었다), 이성 연애에서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먼저 하도록 기대되는 것은 주로 남자이다. 이런 식의 예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적 욕망의 주체로서의 남성의 이면은 주체적인 욕망을 전혀 갖지 않는, 단순히 욕망하는 기계이기도 하다. 남성적인 욕망의 판타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로, 그러니까 그의 욕망을 추동해서 그를 일탈하게 하고,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이것을 단순히 다양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들 중의 하나라고 가볍게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런 판타지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이 아니더라도,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강간의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혁명 의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관해 논의가 벌어졌을 때, 여성의 참정권 부여에 반대하는 주장의 근거로 나왔던 것 중에는,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라 국무에 방해된다는 것도 있었다(조앤 스콧Joan W. Scott의 <<페미니즘 위대한 역설(원제:Only Paradoxes to Offer)>>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지금 책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대충 맥락은 맞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팜므 파탈을 통해서 남성들은 여전히 그들이 머물고 싶어하고 갖고 싶어하는 이미지에 따라, 자기를 통제할 수 있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가진 존재로 남을 수 있었다. 원래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국가의 일 같은 공적인 일을 보기에 적합한 사람들이지만, 이 죄 많은 여성들이 간악한 유혹의 힘을 갖고 있어서 가끔 이성이 흔들리고 일탈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여성은 남성의 유혹자인 것이다. 이 논리대로 하면, 남성은 욕망에 있어서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여성의 이끔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고 물론 이 논리는 남성이 쾌락 달성과 여성에 대한 성적 지배라는 이중의 목표를 추구하는데 훌륭한 수단으로 기능하였지만, 나는 한편으로 모든 당위와 논리가 그렇듯이 이것도 순수한 위선으로 기능했다기 보다 실제로 남성들의 삶을 규율하는 어떤 규범으로 작동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남성의 성적 욕망의 표현에 대한 어떤 강력한 규제적 틀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물론, 여성의 경우에는 성적 욕망의 표현이 아예 인정되지 않거나, 남성의 우월한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는 한에서 모든 것을 하도록 허용되는 팜므 파탈이라는 틀을 만들어 냈지만). 남성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세계를 포함하여 자기 자신의 강력한 통치자여야 하기 때문에 욕망도 그러한 남성적 주체성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자는 성적 관계에서 언제나 주도적이어야 하고, 성행위에 있어서도 그 유명한 악기의 비유처럼 여자의 몸을 잘 '연주'할 수 있어야 하며, 마치 학문을 하고 신체를 단련시키는 것처럼 그쪽 방면의 기술도 터득해야 한다(역시나 유명한, "좋았어?"라는 멘트를 상기하자). 한국에서 이것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 같은데, 수많은 남자들이 연하의 여자와의 연애에 집착하는 것에는 관계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스스로를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그려 보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역시나 유명한 "오빠만 믿어"를 상기하자). 남성들은 점잖게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 주거나,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정복'하거나 해야 하는 것이지, 촐싹거리면서 여자를 뒤쫓아서는 안 된며,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지금까지 아이돌에 대한 팬덤은 주로 여성들의 것이었다. 소년팬들의 열광을 받는 여자 가수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팬덤 문화는 여성들의 것이었고, 공개방송에서 비명을 지르고 오빠를 연호하고, 숙소 앞에 장사진을 이루며 연예인을 기다리는 것은 경박한, 여자들이나 하는 일이었고, 남자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남성의 욕망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그 논리에 따라, 욕망은 추구될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확고한 규범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시 일본과 비교해 보자. 모닝구 무스메의 콘서트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내 귀에 들리는 연호하는 관중들의 음성은 거의가 남자들의 것이었다. 몇 만 명이나 되는 남자 관객들이 여자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보러 가서, 그들 노래의 온갖 세부적인 디테일에 맞춰서 구호를 넣고,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정말 낯선 광경이었고, 동시에 약간은 낯이 뜨거워지는 장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 저런 부끄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 부끄러운가? 우리는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들이 그들의 콘서트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것을 그다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하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것이 남성의 성적 표현의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등장은 이런 구도에 아주 미미한, 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표현되지 않아야 할, 또는 근엄한 지배자의 형상으로 표현되어야 할 성욕이 아니라 아이돌에게 환호하는 '퇴행적'인 욕망의 표출로서의 성욕 또한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고 있다는. 이것을 욕망의 패러다임의 변화, 그러니까 예전에는 권위적이고 은밀하게 작동했던 남성의 성욕이 지금은 덜-권위적이고,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성욕(하지만 그렇다고 덜-폭력적일까?)으로 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위에서 언급한 논리적 모순에 따라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는 것으로 막연하게 존재하던 그 '무언가'가 자기 개념을 획득하여 비로소 구체적인 욕망이 되었다고(성 상품 구매의 옵션이 증가?), 따라서 이성적인 남성에게 드디어 욕망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후자가 좀 더 재밌을 것 같다. 약간은 더 긍정적인 측면이 있을 것도 같고.
물론 내가 인터넷에서 접한 이들에 대한 열광은 아이돌에 대한 순수한 열광이 아니라 키치적인 감수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하여 원더걸스나 소녀시대는 마치 대선에서 허경영이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변하는 인터넷 유행 중의 하나가 될 것인가? 한국의 분위기를 직접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원더걸스나 소녀시대가 아니더라도, 박진영은 확실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할 수 있고, 일단 남성의 성욕이 구체적이고, (그러나)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채널이 열린 이상 앞으로 이와 비슷한 상품들이 계속 만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미 무시할 수 없게 확장되어 버린 한국의 오타쿠 문화를 이러한 경향과 분리시킬 수도 없을 것 같고, 오히려 하위 문화로서의 오타쿠적 감수성이 주류 문화 속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적은 '욕망의 개념화'라는 이해가 옳다면, 하나의 새로운 개념은 기존의 개념 체계 전체의 의미를 새롭게 짜는 것이기 때문에 소녀시대와 원더걸스가 한국 사회에 남기는 문화적 영향력은 막강할 것이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엄숙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한국의 남성 성 문화에 다양성과 발랄함이 도입되는 긍정적인 징후로 보아야 할 것인가, 또다른 남성 중심주의의 표현으로, 여성의 성에 대한 더 강력한 지배로 읽어야 할 것인가? 사실 전자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에 대한 남성팬들의 시선에서 "오빠가 다 해 줄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두 그룹의 등장을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더라도, 아직 시작일 뿐이고, 아이돌 팬인 남자는 분명 여전히 '남성성을 결여한' 사회적 소수자일텐데 그들에게서 소수자로서의 자기 방어와 조심스러움을 느끼는 경우보다는 여전히 주류 남성의 감수성을 느끼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팬 활동을 하는 성인 여성들은 대개 부끄러워 하면서도 즐겁다며 자신의 감정을 소박하게 표현하고는 하는데, 소녀시대나 원더걸스의 남성 팬들이 이러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이것을 팬덤에서도 여전히 작동하는 남성적 논리와 감수성의 한계로 볼 것인지, 아니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키치적인 문화아이콘으로 소비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할 것인지는, 좀 더 지켜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덧. 졸려서 비몽사몽하며 써서 글이 무척 엉성하다. 기호니 상징이니 하는 건 완전 다 엉터리로, 개념들을 '개념없이-_-' 마음대로 써 먹은 것이다. 개념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 되거나,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내 사고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법을 깨우쳐야 할텐데. 한 동안 이 주제가 머리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앞으로 며칠간 글을 쓸 기회가 없을 것 같아 급하게 두드렸다. 사실 나는 농담으로라도 "소녀시대짱!" "원더걸스쵝오!" 라는 말은 못할 만큼 저 두 그룹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덧2. 이글루의 방송&연예 밸리에서 어떤 블로그에 들어가 보고 씁쓸해졌다. 블로그 프로필에 아이돌 팬 활동과 동인 활동에 거부감이 있을 사람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나는 별로 법을 중요하게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범죄라고 다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한테 미리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인터넷 공간에서 그만큼 많은 혐오와 조롱에 노출되었었다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이너리티들의 마이너리티로서의 자각과 약간의 겸손함과 수줍음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이돌 팬인 남자가 많아지면 좀 나아지려나?
헤센 주의 일년 등록금은 최대 1,000 유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2005년에 보수 세력이 등록금 징수 금지에 반대하는 소송을 걸어 승리를 했고, 기독민주당원인 헤센 주지사도 이에 참여하여, 헤센 주에 올해부터 등록금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헌법에 등록금 금지 조항이 있는 탓에, 등록금(Studiengebühren)이 아니라, 학업기여금(Studienbeiträge)이라는 기만적인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학생들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괄징수하는 것이니 실제로는 등록금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고세훈 교수가 복지 한국의 가능성에 대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글에 흥미로운 분석이 있었다. 복지 수준이 높은 국가일 수록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이 높아서 복지 정책이 추진되기가 더 쉬운 반면, 복지 수준이 낮은 국가일 수록 국민들이 복지에 대한 기대 수준 자체가 워낙 낮다 보니, 복지가 더 절실히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복지 정책이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 내용을 무척 신선한 분석이라고 생각하면서 읽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이 당연한 사실을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복지가 시작되려면 아직 멀었네, 한국 경제 구조에선 서유럽 식의 복지는 시기상조네. 하는 주장들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한국 경제 수준에서 복지가 가능한지를 증명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다 보니, 너무나 당연한 정치의 논리를 새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라는 주제만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내가 놓쳤던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은 결코 정책적 합리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기본적인 사실이었다. 빼어나고 우수한 관료가 뛰어난 정책으로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독재를 긍정할 가능성이 다분한 위험한 사고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전망이라는 점에서 비합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세상 어떤 관료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어떤 정책이 모든 이해관계를 넘어서 투명하게 작동할 수 있겠는가? 중우정치의 위험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상투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사람의 관계에는 불투명성과 불합리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승인으로부터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나라 안팎 사정을 손금 보듯 꿰뚫어 보는 관료 도사들이 도맡아 하는 것이 아니고, 시민 모두가 마치 자신이 그 도사 자리에라도 앉은 양 생각하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필요하면, 자신의 필요를 근거로 해서 요구할 수 있다는 사실 말고, 어디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는가?
12월 14일 토요일에는 데모와는 도통 인연이 없어 보였던 인구 10 만의 소도시 다름슈타트를 포함해서 독일 곳곳에서 등록금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등록금 인하가 아니라 등록금에 반대하는 것이고, 교육이 상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낯 뜨거운 이상을 말짱한 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낳는 것이 2만불과 3만불이라는, 한국과 독일의 국민소득 차이는 아닐 것이다.
주인공 Tobi 와 그의 친구 Achim. 누운 자세를 보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독일은 동성애에 대한 차별의식이 한국보다 현저하게 낮다. 유럽이 그렇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저녁시간의 공중파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침대에서 포옹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동성 파트너를 소개한 후 오히려 지지율이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니 공적 영역에서는 차별이 많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테고, 사람들의 의식이나 문화 수준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걷다가 실제로 동성 커플을 마주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는데, 아직은 사적 영역에서 당당히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은가 보다. 한국에서는 윤리적 판단이 정치적 계산에 밀려, 어이없게도 법이 동성애 차별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꼴같잖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제도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로 잡는 것보다 일상에 뿌리 깊게 스며든 편견에 맞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며, 오히려 더 깊은 고민을 필요로 하는 법, 이런 독일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는 영화가 한 편 있어서 소개해 본다.
영화 <<여름폭풍Sommersturm>>의 미덕은 공적인 영역에서는 동성애가 어떤 식으로든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 영역에서는 편견이 끈질기게 작동하는 양상을, 사춘기 소년의 경험을 통해 섬세하게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으로 남자 조정부 주장을 하던 남자 아이가, 여름 합숙 캠프에서 자기 단짝 친구의 여자친구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기분이 대체 어떻겠는가? 한국에서라면 어쩐지 집단 린치 신이라도 들어가야 그림이 나올 것 같은 상황이지만, 독일 영화인지라 옆 캠프에는 베를린에서 온 퀴어 조정팀이 합숙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게이들이 다른 남자 캐릭터들 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개성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당당하다. 티셔츠에는 큼지막하게 Queer Team 이라고 박아 넣었고, 몸짱도 하나 있는 데다가, 자신들이 게이임을 알고 움찔거리는 '일반 남자' 들에게 윙크를 날려 주는 센스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수자이자 약자의 것으로 순순히 받아 들이지 않을 때 오히려 주눅드는 것은 '일반 남자' 들인데, '나만 건드리지 않으면 네가 게이든 뭐든 상관 없어'라고 선심 쓰듯 말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여자 꼬시겠다는 생각에 희희낙락해 하며 온 놈들이 도리어 꼬심을 당하는 위치에 서게 됐으니 얼마나 무섭고 당혹스럽겠는가? 이 영화는 게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가득찬 '일반 남자'들이 게이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과 공포를 역으로 이용해서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이를테면, 가장 호모 포비아가 심한 녀석이 심부름 하러 캠프에 찾아 올 때 일부러 그의 망상적인 공포에 맞춘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디를 통해 편견을 전복적으로 조롱하는 한 편으로 게이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편견을 유감 없이 깨뜨리는 실제 게이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당혹스럽다. 편견과 다르기 때문에, 그 정체성을 부정하기가 더욱 어려워 지는 것이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이 비극적 피해자가 아니라 주체로써 당당히 그려진 덕분에 주인공의 고민은, 동성애 정체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폭력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란 맥락에서 다뤄진다. 동성애 배제적인 세계 속에서 살던 한 소년이 어떻게 소수자 정체성을 수용하고,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선택하는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편견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해도 막상 동성애자를 실제로 만나면 재미있는 구경거리나 패션 소품처럼 여기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이성애 정체성에 대한 의심 없는 믿음도 그러한 편견의 소산일 것이다. 이는 차별이 아니라 배제라고 표현될 수 있을텐데, 법적, 제도적 접근으로는 해결되기는 커녕 포착될 수 조차 것이지만, 분명히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수용하는데 있어 장애로 작용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조정 코치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혐오 발화를 억제하는 일이 전부일 뿐, 학생들의 고민에 어떤 식으로도 개입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여 주는데, 이와 동일한 무능함이 제도적 차원의 사고를 바탕으로 한 동성애 담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은 개별적으로 자신의 삶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그 선택의 과정은 다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의 틀로 환원할 수 없는 수많은 차별과 심리적 압박을 경험할 것이다. <<여름폭풍>>은 무능한 교사와는 대조적으로, 편견에 휘둘리던 아이들이 조금씩-결코, 유토피아적인 하나됨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미덕이다- 변화하는 모습을 살피며, 미세한 차별들이 얽혀 있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섬세하게 형상화 해 내고 있다. 이렇게 제도 담론이 그 구조적 한계로 인해 포착해 내지 못하는 사적인 경험 영역을 의미화해 내는데 성공했다는 것, 동성애를 주제로, 그리고 소재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대해 <<여름폭풍>>이 갖는 한 가지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 한국에는 <<썸머스톰>>이란 이름으로 개봉했다. 끄응, 나는 <<타인의 삶>>보다 훨씬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도 흥행에 실패했나 보다. 이런 영화가 전국 중고등학교에 배포되서 단체 관람되면 얼마나 좋을까. 성교육도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 사실 퀴어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진 않았는데, 앞으로 찾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는지 좀 살펴 보고 싶다. 난 그 유명한 <<브로크백 마운틴>>도 안 봤는데, 여전히 그다지 보고 싶단 생각은 안 들고... 괜찮은 거 추천 좀..
+ 3개월이나 전에 본 영화를 갑자기 포스팅한 이유는... 오늘 Tobi 와 꼭 닮았다고 생각되는 애를 봤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집에 와서 확인을 해 보니 역시 아니긴 했다. 그래, 어쨌든 연예인인데 그렇게 쉽게 만날리 없겠지. 하여간 내가 참 사람 보는 눈이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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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방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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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진보란 인위성과 인간 영혼 또는 육체의 순수함이라는 대립적인 테마를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진보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한 주인공들의 감정이 전개의 구심점"너무 작품의 메시지를 잘 잡아내셔서 제가 다 후련하네요.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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