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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에서

 

 

왜 임박함에 대하여, 긴급함과 명령에 대하여, 이것들 속에서 기다리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강조하는가? 이는 오늘 우리가 말해 보려는 것을, 오늘날 마르크스의 저작에, 곧 또한 마르크스의 명령에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우리는 이것에 대한 한 가지 이상의 징표를 가지고 있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일어날 위험이 있는 것을,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와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적 명령을, 분류된 저작에 대한 차분한 주석으로 중립화하려는 시도, 어쨌든 약화하려는 시도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우리는 문하 속에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에서 어떤 유행 내지 멋 부리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낀다. [중략] 이러한 최근의 상투적 경향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마르크스주의 문헌에 대한 참고를 근본적으로 탈정치화하는 것으로, 기껏해야 관용의 탈을 쓰고서 우선 [마르크스의-옮긴이] 저작/신체를 무력화하고, 여기에 깃든 반역성을 침묵하게 만듦으로써 잠재적인 힘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사람들은, 무엇보다 반란, 분개, 봉기, 혁명적 도약을 고취할지도 모를 반역성이 복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가운데서야 비로소 귀환을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귀환 또는 마르크스로의 회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테지만, 단 이는 단지 해독할 뿐만 아니라 행위하도록, 또는 (해석에 대한) 해독을 "세계를 변화시키는" 변혁으로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지령을 침묵으로 지나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중략] 귀를 기울이면 이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보시오, 마르크스는 어쨌든 다른 이들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였고, 그 많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제 침묵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는 너무 오랫동안 교수자격시험 목록에서 배제되어 왔는데 이제 그만한 자격을 갖춘 위대한 철학자로 이름을 올릴 때가 된 것 같소. 그는 공산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당들에 속하지 않고, 우리 서양 정치철학의 위대한 고전 속에서모습을 드러내야 하오. 마르크스로 돌아갑시다. 이제 마침내 그를 위대한 철학자로 읽어 봅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고 또 앞으로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로 향하는 또는 돌아가는 이 순간 여기서 시도해 보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오늘날 새로운 이론주의가 중립화하는 마취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르크스에 대한 철학적, 문헌학적 회귀가 군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체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라는 명령을 강조하게 될 만큼, 이는 "다른 어떤 것"이다. 

                                           자크 데리다,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77-79쪽



 이 문장을 옮겨 적고 있으려니 얼마 전 은퇴한 맑스 경제학자 김수행 교수가 생각난다. 그의 은퇴 소식이 이런저런 언론에서 보도된 것을 보면, 서울대 경제학부의 유일한 맑스 경제학자라는 타이틀이 꽤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긴 한가 보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 경제학부에선 후임 맑스 경제학자를 임용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하고 이에 경제학부 대학원생들이 임용을 촉구하는 연서를 쓰기도 했다는데, 결국 김수행 교수에 대한 조중동 같은 언론의 관심은(조선은 인터뷰도 했다) 이제 유령이 조용히 자기 무덤으로 돌아가는 것을 환영하는 자축 파티인 셈이다. 아직 맑스를 체제 내로 받아 들일 만큼 '세련'되지 못한 학계에 맞서 학문의 '다양성'이 지켜져야 한다면서 한 자리 만이라도 맑스를 위해 내어 달라고 호소해야 하는 상황에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박사 과정에서 9 명이나 공부하고 있다니 한 자리가 아니라 그 몇 배쯤 늘어나 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여담인데 석사 과정의 전공자는 3명 뿐이라고 한다. 이런 급감에 세태 변화도 한 몫 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몇해 전인가 대학원 입학 학점이 높아져서 학부 때 운동하느라 학점 관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예비 맑스 경제학자들이 그 문턱을넘기가 만만치 않아졌기 때문이란다. 대학에서 맑스를 몰아내려는 고도의 음모는 이미 몇해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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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사정이 있어서 2부 2장까지만(3장도 조금;), 그것도 헐거운 독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방대한 내용을 담은 저작인데다 지금의 나로서는 다시 정독한다고 해도 다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충실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해의 부족과는 별개로 내가 읽었던 고진의 다른 책, <<윤리21>>과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품게된 의문들을 해소할 수는 없었기에 조금은 실망스러운 글이기도 했다. 고진의 칸트론과 그 칸트론의 필연적인 결론은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실존주의에 대한 참조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지만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아 다음과 같은 소박한 의심들만을 피력하면서 넘어가야겠다.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이란 이름으로 끊임없는 시점의 이동을 말하고 있지만, 그의 글을 추동하는 진짜 모티브는 '종합'인 것이 아닐까? <<윤리21>>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괄호론'은 너무나 안일한 태도라 여겨진다. 실천적 영역과 이론적 영역의 '보편성'은 각각 다른 영역을 '괄호'쳐야지만-칸트에게서 미적 무관심성이 그러하듯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결론은 일반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정확히 '괄호'란 무엇인가, 주체는 괄호를 어떻게 닫고 열 수 있는가, 주체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등 궁금한 것이 무척 많은데도 고진이 이에 대해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대신 그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철학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라는 의심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수많은 철학자들을 자신의 문제틀 속에 마치 사례를 수집하듯이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독해를 거슬러 고진이 칸트에게서 읽어낸 '타자론' 역시 미흡하게 느껴진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그는 타자를 고려함으로써만 구성되는 보편성에 대해서, 보편성에 대한 타자의 관계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지 타자성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 타자에 대한 관점을 읽어낸 시도는 찬반 여부를 떠나서 평가할 만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가 제기한 타자론이 타자에 대한 사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예컨대 고진은 자신의 칸트론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괄호론'과 그의 '타자론'의 관계-양자 모두 '보편성'의 구성에 핵심적인 요소들인데-에 대해 이렇다 할 조명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무책임한 의심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 약간 더 많은 말을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부분은 고진의 <<자본>>해석이다. 여기서 고진 논의의 핵심은 노동이, 정확히 말하면 '추상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의 해석을 비판하고 교환에서 가치의 원천을 본다는 데 있다. 가치에 대한 전통적 맑스주의 해석의 특징은 가치를 일종의 실체-동질적이고 수량화가능한 인간의 '추상노동'-로 보는 것과 가치가 노동과 같은 것이기에 가치의 원천을 생산과정에서 찾는 것이다. 고진은 '교환'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 쟁점을 새롭게 다루고 있는데, 우선 그는 노동가치설, 즉 가치를 실체로 보는 사고에 대해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를 상품들이 교환되는 비율에 불과한 것, 따라서 가격으로 환원해 버리지도 않는다. 가치란 분명히 실체는 아니지만, 마치 실체와도 같은 가상성을 갖는 것이자 인간이 가상성을 인지한다고 해서 떨쳐버릴 수도 없는 것으로써, 고진은 이를 칸트의 '초월론적 가상'-칸트가 형이상학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그에 대해 사고하는 것을 그칠 수 없는 것이라고 설정한 신, 영혼 등의 개념들-에 비교하고 있다. 맑스주의 가치론이 철학적으로는 유명론과 실제론이라는 쟁점과 연결돼 있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 경제정책과 운동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으로 연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고진의 재해석은 분명히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진은 '소비자 운동'-그는 소비자 운동의 범주에 페미니즘이나 환경운동도 포함시키고 있다-의 중요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이는 가치의 원천이 생산 과정에 있다는 사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얻고 있으므로 자본주의의 지양은 이를 종결시키는 데 있다는 사고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운동과 소비자 운동-또는 협동조합 운동-의 관계에서 고진이 더 비중을 두는 것은 후자이다. 이는 단지 정세적 이유, 즉 고진의 글이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전통적 맑스주의 운동이 여러 방향에서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에 있어서 이를 충분히 극복해 내지 못한 시대를 향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는 고진의 논리에 따른 자연스런 결론인데, 그는 현대 사회 자체를 교환 원리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의 삼항구조인데, 이 구조는 각각 세 가지 교환 양식, 네이션은 공동체의 호혜적 교환에, 스테이트는 폭력적 수탈의 형태를 갖는 교환에, 그리고 자본은 상품 교환에 근거한다. 다시 맑스주의 전통과 비교를 하게 되는데, 여기서는 사회 구조의 근간을 자본에 두고 스테이트는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기구로, 네이션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즉 속임수로 파악했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자를 통한 자본주의의 폐기에 있었다. 하지만 맑스주의 역사에서 국가의 폐지인가, 국가 권력의 장악인가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왔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폐기되기는 커녕 오히려 통치의 도구로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자본을 중심에 둔 전통 맑스주의의 사회 구조 인식에 대한 고진의 비판은 수용할 만 하다. 현대 사회 구조는 이 세 가지 교환 양식이 얽혀 있는 구조이므로, 하나만을 어떻게 해서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키메이라적인 삼항 구조에 대한 제시가 절망적이기만은 한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세 가지 교환 원리 이외에 다른 교환 원리를 생각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의 모델이고, 따라서 고진에게서 운동의 중심은 자본주의를 침식해 들어갈 수 있는 이 외부적 교환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소비자 운동'에 놓여 있다.-물론 고진은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그는 노동자 운동이 협동 조합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그 반대의 상황, 협동 조합이 노동자 운동과 맺을 수 밖에 없는 관계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나는 위에서 자본주의의 '지양'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확히 말해 고진의 논리에서 자본주의는 지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대체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지양'인가 자본주의의 '외부'에 의한 '대체'인가는 복잡한 문제일테고, 나는 전자에 공감하는 편이지만 이런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를 근거로 고진의 주장을 물리쳐 버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자본>>의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는 의문이 드는데, 나는 자본주의 '대체'에 대한 고진의 입장이 "가치형태" 절에 대한 해석에 상당 부분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문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가치형태절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왜 고진은 처음의 단 한 부분만을 다루고 있는가? 가치형태절은 단순한 가치형태,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등가형태, 화폐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2부 2장에서- 고진은 단순한 가치형태-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될 때 전자가 후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상대적 가치형태에 놓이며 후자는 자신의 '사용가치'를 통해 전자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등가형태에 놓인다-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고진이 이끌어 내는 결론은 '가치'라는 것은 추상 노동이 응집된 실체도 아니며 단순히 하나의 상품과 다른 하나의 상품 사이의 교환을 매개하는 것도 아닌, '상품 교환'이라는 행위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가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의 타당성과 결론을 도출하기까지의 논증의 적합성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단순한 가치형태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와 화폐의 비밀을 보려 하고 있고, 단순한 가치형태가 드러내는 비밀이 그에게 너무나 명료해서 다른 가치형태를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가치형태에 대한 고진의 분석을 읽으면서 그가 맑스의 가치형태를 마치 칸트의 오성 범주처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그가 책 어딘가에서 실제로 둘 사이에 유비를 설정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책을 갖고 있질 않아서 확인해 볼 수가 없다- 그가 상품이 교환되는 '위치'를 강조하면서 이 고정된 위치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의 현상이 구성된다고, 따라서 설명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진에게 자본주의의 복잡한 현상들이 이 '고정된' 구조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말한 대로 이 구조가 여러 가지 구조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이상-그에게 교환 자체는 전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교환은 신비로운 가상을 생산하지만, 그 꺼풀을 벗겨낸 기저에 놓인 교환에 신비는 없다-, 다른 구조에 의한 '대체'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에서 가치형태를 결코 정태적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현란할 정도의 운동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을 단순히 헤겔을 본 딴 수사학적 유희로 치부하지 않으려면-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할텐데, 맑스 자신이 가치형태 절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고, 또 엥엘스에게 그 난해성을 지적 받고 쉽게 고쳐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기묘한 서술의 논리, 또는 운동의 논리에 대한 해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가치형태 절을 읽다 보면 받게 되는 기묘한 느낌 중 하나는 네 단계로 운동하는 이 형태들이 무한한 순환의 논리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고진 자신이 말하고 있듯이 화폐가 단순한 교환의 매개체가 아니라 그 성립으로 인해 시장 관계가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면, X량의 상품 A가 Y량의 상품 B와 교환되는 최초의 형태 자체가 이미 화폐의 논리를 전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맑스가 비유한 것처럼 화폐가 사자, 공, 여우 같은 여러 가지 동물들 옆에 서 있는 '동물'이라는 동물이라면, X량의 상품 '화폐'와 Y량의 상품 B의 교환은 단순한 가치 형태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데리다가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또는 사용 가치는 가치 이후에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고진이 말하듯이 가치가 교환 과정 이후에 전미래 시제로 존재했던 게 될 것이라면, 이것은 또한 교환 자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사회 원리로써 교환을 바라 보는 고진의 시점 역시 가치라는 가상에 의해 오염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을 경유해서도 같은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에서 지젝은 화폐를 주인기표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주인기표에 의해 기표 체계는 소급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모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화폐형태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단순한 가치형태는 오직 사후적으로, 상상적으로 가정된 것일 뿐 화폐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당연히 고진의 운동론에 대한 의문이 따라 나온다. 진정한 외재적 비판이란 결국 내부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텐데, 고진의 운동론은 잘해야 자본과 병존하는 자본의 외부를 창설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닐까? 

 
 
 
  이해를 얼마나 했느냐에 관계 없이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 사상들이 있다. 나는 고진을 <<근대 일본 문학의 기원>>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때 그를 알게 된 기쁨은 사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에서 많이 옅어 졌었다. 나는 실천하는 지식인이자 문학 평론가로써의 고진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만-여전히 <<근대 문학의 종언>>은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사 볼 책 중 하나다- 철학/운동 이론가로서의 고진과는 별로 맞지 않는 것 같다. 감히 그 이유를 "고진의 이론은 나이브하다"고 댈 수는 없을 것 같고-비록 내 글이 건방지긴 하지만, 이건 관용을 기대하는 초심자의 어리광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고-, 굳이 찾자면 지젝이 말하듯 고진이 '아나키스트'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낡은 편가르기에 더 이상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덧. <<트랜스크리틱>>에 대한 지젝의 비평이 올라와 있는 페이지를 링크해 둔다. 요약이 중심이고 마지막에 짤막하게 비판을 하고 있는데, 내게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맑스의 화폐론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일반 개념을 설명한 사상가로 참조한 바 있는 알프레트 존 레텔Alfred Sohn-Rethel을 <<트랜스크리틱>> 비판을 위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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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state와 대중mass

0. 홉스의 사회 계약론은 교과서에서 배운 로크식 사회 계약론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척 낯설다. 이기적인 개인에게서 출발하는 논의가 결국에는 군주의 절대 권력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홉스의 전제는 모든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고, 그도 이 권리 만큼은 군주의 권력 앞에 내어 줄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권을 옹호했다고는 보기 어렵다. 국민의 이 권리는,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에서 도출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갖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전제에 의존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은 이를 근대 인권 사상의 출발점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똑같은 사상에 근거해 홉스 정치론의 위험성을 공격하는 사람도 역시 많다. 고백하자면 나는 <<리바이어던>>은 일부만 읽었고, <<시민론>>은 손도 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원전에 근거해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줄 주제는 안 된다. 그런데 홉스의 정치 사상이 일견 모순적으로까지 보이는 것은, 그의 사상을 로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파악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사회 계약론에 대한 통념과 분리시켜 독립적으로 읽으면, 오히려 현대 정치 질서에 엄존하는 한 경향을 대변하는 치열한 사상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홉스는 중세를 벗어난 유럽에서 처음으로 '국가'를 '대중'의 문제와 연결시켜 생각한 사람이고, 이 문제는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화두가 되니까. 이에 대한 재밌는 논문들을 몇 편 읽어서 정리를 좀 해 보려고 한다. 



1. 고원과 진태원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을 참조하며 스피노자와 홉스를 비교하고 있는데, 특히 홉스와 스피노자가 대중을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홉스의 대중 개념에서 재밌는 것은 그가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대중은 대중mass에 대한 현대의 통념과 비슷하다. 일관성이 없고, 멍청하다. 현대에 인민 또는 민중people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자각한 대중을 가리키거나 또는 (결국엔 같은 말일 수도 있지만) 대중을 그런 정치적 자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된다. 홉스도 마찬가지로 대중multitudo/crowd과 인민populus을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개념화는 현재와는 많이 다르다.

 

   "모든 국가에서는 인민이 지배한다. 왜냐하면 군주정들에서도 인민이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민이 한 사람의 의지를 통해 의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들, 도는 신민들은 대중들이다. 민주정과 귀족정에서도 시민들은 대중들이지만, 평의회는 인민이다. 군주정에서 신민들은 대중들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왕은 인민이다. 일반 사람들 및 이를 주목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은 항상 많은 숫자의 사람들을 인민이라고, 곧 국가commonwealth라고 말한다. 그들은 국가가 왕에 대해 반역했다고(이는 불가능하다) [...]고 말한다. 그들은 인민이라는 호칭 아래 국가에 반대하는 시민들, 곧 인민에 반대하는 대중들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Hobbes, On the Citizen

 

 인용문에 홉스 자신이 적어 놓은 것처럼, 이런 관계는 역설적이다. 진태원은 이에 대해서 홉스가 대중과 인민을 구분하며,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행위자의 자격을 박탈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대중이 너무나 영향력 있는 행위자이고, 홉스가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배제가 가능한가? 이는 홉스의 의인疑人person 이론에 근거한다. 의인은, "그의 말이나 행동이 그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거나,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진실로이든 허구적으로이든 간에 그에게 귀속되는- 다른 어떤 사물의 말이나 행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감각의 작용과 반-작용의 체계일 뿐, 인간의 동일성-정체성identity은  결국 타인들이 그를 어느 시간과 공간에서건 하나의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는 것에 의해서만 보장되므로, 사회를 전제한다. 단순화시키면, 인간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 인간으로 존재하며 법적, 규범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사회 안에서 의인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의인은 자연 상태가 아니라 계약의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다. 계약을 통해 개인들은 자신의 자연권을 하나의 의인에게 양도한다. 의인은 물론 다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의인이 국가를 대표한다. 즉, 하나의 의인이 국가의 주권자이며, 따라서 그들이야말로 '인민'인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라, 왕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인민이 아닌 것이다. 개인이 의인, 즉 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간주되는 것은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국가에 참여하는 한에서인데, 국가란 권력을 양도 받은 하나의 의인으로 인해 성립가능한 것이므로, 주권자의 뜻을 받들지 않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고, 따라서 주권도 없다. 이런 논리는 나아가 대중을 정치적 행위자가 아닌 것으로 만드는 근거가 된다. 행위란 행위자를 상정한다. 행위자는 하나이지 여럿일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대중을 "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single entity"라고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의인이 아니며, 따라서 그들은 행위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있어야 행위를 하는 것인데, 그들은 행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은 정치의 주체가 아니다.  



2.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홉스에게서 국가가 국가에 포함되는 무차별적 인간 다수와 일치하는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절차를 거쳐 만들어진 권력의 구심점과 동일한 것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현대의 국가관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국가를 구성 요소는 영토, 인민, 주권이라 말해진다. 주인 없는 땅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열 사람 집어 넣는다고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란 거다. 그 열 사람이 '우리는 열 명이지만 그래도 하나야, X 란 우리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야.'라고 말하면 그들은 X 라는 국가를 만드는 거다. 그런데 대체 이 '하나'는 뭔가? 열 명을 정체불명의 '하나'로 만드는 것은 팥으로 메주를 쑤는 것 보다 힘든 일이다. 홉스는 그래서 의인이란 인공적 인간 개념을 설정하고, 열 명을 하나의 인간으로 만든 뒤 그 인간이 국가라고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필요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폴리스적 인간'이란 말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의 속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삶을 영유하는 공동체는 당연한 것이지 정체를 물어야 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국가의 개념사를 고찰하는 김기봉에 따르면 서양에서 지금의 국가를 지칭하는 state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다소간의 시기차가 있지만 근대 이후의 현상이다. 물론 state는 라틴어 status 가 어원으로 일찍부터 사용되었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국가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기까진 많은 변화를 거쳤다. 

 우선 status 는 인간의 지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특수하게 주로 지배자로서의 위치, 지위라는 의미로 쓰였다. 이것이 나아가 지배자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는 말로 이용됨으로써, 왕의 권력이라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 다음으로 status 는 단순히 상태(condition)나 형태(form)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이 나아가 왕국이나 공화국의 상황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말로 이어진다. 여기서 status 는 공공적인 것과 좋은 것이란 뉘앙스를 갖게 된다.  status 의 근대적 의미로의 전환의 분수령은 마키아벨리인데, 그에게서  status 는 "지배를 받는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과 그 영역을 총칭하는 것"이란 의미로도, "군주가 주체적으로 행사하는 명령권력"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국민과 영토란 근대적 국가 구성 요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status는 "명령권력이면서 동시에 그 권력의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는 양면적 성격"을 갖는 것인데, 이는 국민 스스로 통치하고 통치 받는 근대 국가의 상황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 개념과 관련한 그의 큰 기여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가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 권력을 정당화시키는 도덕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처음으로 정치 권력의 문제를 도덕적 문제와 분리시켜 제시했고,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목적은 국가의 안정과 유지 그 자체였다. 이 문제가 국가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진 영주의 소유물이든, 신이 자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곳이든 뭐든 간에 상관 없이 독립적으로 가치를 갖는,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피지배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닌 비인격적인 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국가 자체를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로 인식"했다. 자율적autonomous이란 말은 스스로에 대한 통치력을 갖는다는 것이고, 이는 근대 주권 개념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김기봉은 근대 주권 개념에 대해서 "일정한 영토 내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에게 초월하여 최고의 정치적 권위를 이루는 공권력의 한 형식"이란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이는 주권의 담지자인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국가를 구성하는 인격적 실체들인 지배자와 피지배자들과 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뒤에 남겨 두는 것이다.   

 홉스는 이에 대해서 국가=계약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의인(인민)의 것, 따라서 국가 주권=의인(인민) 주권이란 대답을 내린 것이지만, 이는 당연히 이런 국가 개념 안에 시민적 권리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홉스식 사고에선 시민적 권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진태원이 지적하듯이 홉스 계약론의 특징은, 자연 상태를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병리적 상태로 생각하고, 계약에 의해 시민 사회 또는 국가가 탄생한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가 존재하려면 국가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와 시민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요즘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지."같은 일상적인 표현은 물론이고, "왜 우리가 불법체류자의 인권을 신경 써 줘야 하느냐?"라는 분노에는 인권은 천부적 가치가 아니라 국가가 법적으로 부여해 준 것이란 생각, 국가를 인간 관계를 규율하는 최고의 원리이자 가치 척도로 보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홉스 사상의 문제점은 도덕적 정당성이 취약하다는 데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자칫하면 현실적, 합리적이지만 당위가 결여된 홉스와 이상적인 로크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으며, <<정의론>>에서 롤즈의 작업처럼 정치 철학의 관건을, 합리적 계약론과 도덕적 당위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라는 협소한 지평으로 제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홉스 정치 철학의 문제점은 그것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데 있기 보다 오히려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다.



3.  홉스의 국가와 대중에 대한 생각은 논리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국가가 하나라면 국가 주권도 하나여야 하는 반면에 대중은 행위의 담지자인 하나의 실체가 아니고, 따라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즉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홉스의 생각은 극단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치적 주체의 자격을 논하고, 따라서 정치 주체를 하나의 특질 아래 묶일 수 있는 동질적인 무엇으로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거권이 돈 많은 사람들한테 주어져 있던 시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부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중세의 농민 봉기를 정치 행위가 아니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홉스 같은 이가 아무리 열외자들을 정치에서 몰아내려고 하든 말든 간에 실제 정치에서는 언제나  하나로 셈해 지지 않는, 무한한 대중이 존재한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했듯이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진태원과 고원의 논문에 따르면 스피노자는 홉스의 개념을 많이 차용하였지만 홉스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스피노자는 인민과 대중을 정치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상태와 사회/국가 상태를 단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계약에 의해 국가가 만들어졌어도 그 안에 사고와 정념의 이질성으로 인한 충돌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통치의 절대적 안정성이 보장된 홉스의 이상 국가와는 달리 스피노자의 이상 국가 속에선 사회에 적대 관계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그는 국가의 성립을 설명하기 위해 계약을 정치적 계약과 종교적 계약으로 이중화하고, 종교적 계약은 홉스에게서처럼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통해 국가 설립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와 역량을 양도할 수 있게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설정된다. 이런 스피노자식 설정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억압적 국가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구분하고, 이데올로기의 호명呼名을 종교적 모티프로 설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현대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어리석고, 이해할 수 없는, 그렇기에 조롱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인 '대중'을 정치적 주체성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주기 때문이다. 







덧. 사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독어로 원전들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만... 그러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 한국 글은 3월까지만 보겠다고 다짐하고-_-;; 여전히 찔끔찔끔 논문들을 찾아서 보고 있다. 외국어 공부를 멀리하는 나를 늘 다그치던 선배는, 내 근황을 묻는 동기에게 걔는 독일까지 가서도 한국 글만 본다며 흉을 봤다고 한다-_- 어쨌든 놀기만 하는 건 아니잖슈ㅠ 하여간 정리한베낀 논문은 아래와 같다. 

고원, <대중이란 무엇인가>, <<영국 연구>> 16호,
김기봉, <국가란 무엇인가 : 개념사적 고찰>, <<서양사론>> 82호,
진태원, <신학정치론에서 홉스 사회계약론의 수용과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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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권론against human rights>, 슬라보예 지젝


 라캉 관련 논문들을 찾다가, New left review 에 기고되었고, <<창작과 비평>> 2006년 여름호에 번역 수록된 지젝의 <반인권론>을 찾아 읽었다. 민주주의와 이를 논할 때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인권은 내가 철학 텍스트의 언저리를 배회하는 것을 추동하고, 한 편으로는 (정치의 공간의 모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일전에 포스팅했던, 맑스와 프랑스 혁명기의 시민권 개념의 관계에 대해 논한 발리바르의 글(요즘들어, 내가 이 글을 굉장히 오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당장은 글이 없으니 확인해 볼 수도 없고..)이나 민주주의와 인권을  '정치적인 것'으로 읽으려는 랑시에르의 글이 반가웠던 것은, 이 글들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그렇다고 다문화주의, 환원할 수 없는 개인의 내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같은 자유주의적인 관념에 자신을 내맡길 수도 없는 내게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논의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나 인권처럼, 그 동안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기능해 왔던 것을 좌파적 관점으로 재전유하려 한다는 것과 이를 통해 다시금 (거대) 정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젝 역시 <반인권론>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글의 말미에는 랑시에르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며, 인권의 참조를 통해 정치의 영역이 가능해짐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결말은 랑시에르를 거의 그대로 옮기다 시피 하고 있는데, 지젝이 '행위', '공제의 정치' 등과 같은 자신의 중심 개념과 랑시에르나 발리바르의 정치론을 어떻게 연결시켜 나갈지 무척 궁금해진다.  이하는 또 내맘대로 요점 정리. 기탄 없는 지적 부탁드린다.

 덧. 사실 난 지젝의 외모도, 말하는 스타일도, 심지어 글 쓰는 스타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글을 찾아 읽게 되지만... 하여간 보라, 최대한 부드럽게 나온 사진을 골라 본 것인데도, 여전히 음험해 보이지 않는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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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 자본주의 사회의 인권에 대한 호소가 전제하는 세 가지 가설.

(1) 인권은, 역사적으로 결정된 우연적 특질들을 자연 내지 본질로 여기는 다양한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기능을 한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악(惡)은, 악을 지각하는 시선 속에 자리한다. 근본주의는, 서구인들의 재귀적 규정(또는 자기-지시적 규정reflexive determination)인 바, 다문화적 합리성으로 표상되는 서구 문화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발칸'의 타자성이라는 위장된 형태로 유럽은 '자기 속의 이방인', 자신의 억압된 부분을 인지하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던 발칸 반도에 근본주의적 갈등이 싹튼 것은 정확히 서구식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시작했던 때라는 역사적 경험 역시, 이를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우연적 특질의 '근본주의적' 본질화는 어떤 점에서 자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징인가? 공공 매체가 발달하고, 개인의 사생활이 이에 전시되는 사회가 오면서, 내밀한 개인적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불평은 문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진짜로 사라지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속성과 특이성의 덩어리, 즉 사적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징적 행위자가 되게 하는 공공 생활, 공공 영역이다. 정치의 공간이 갈 수록 전문가의 사회행정으로 대치되는 '탈정치'의 시대에서, 정치적 문제는 '개인적'이고, '자연적'인 특이성의 조율에 대한 태도로 번역된다. 탈자연화의 시대라는 통념과는 달리,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은 유례없는 재(再) 자연화이며, 이런 까닭에 전 세계적으로, 준(準)자연화된, 종족적, 종교적 갈등이 지구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2) 선택의 자유와 (이념적 대의를 위해 인생을 희생하기보다) 즐거움의 추구에 인생을 바칠 권리가 가장 기본적인 권리이다. 
 
1) 선택의 자유 

 자유주의가 말하는 선택이란 실은 사이비 선택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지지만, 선택을 하는 정황 때문에 선택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베일을 착용하는 무슬림 여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를 예로 들어 보자. 자유주의는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면 베일도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슬림 여성은 베일을 벗고 쓸 지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선택의 양식 그 자체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이 여성이 남편이나 가족의 강요, 즉 사회적 관습에 복종하여 베일을 쓰기로 결정한다면 이는 참된 선택이 아니다. 참된 선택이란 개인적인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슬림 여성은 패션을 위해서 베일을 걸치던가, 베일을 걸치지 않던가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무슬림 공동체 소속의 표지로써 베일을 착용하는 선택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관용적'인 다문화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주체'란 자신의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되는 지극히 폭력적인 과정의 결과로만 출현할 수 있다."

 선택의 자유에 대한 자유주의 논리는, "사람은 각기 특정한 성향을 지니며 그것을 실현하려 애쓰는 '심리학적' 주체라는(386)' 이데올로기에 의존해 있는데,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는 복지 사회의 해체를 국가로부터 국민의 자유의 증대로 포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열락(悅樂)의 정치 
 
 "자유주의적이고 관용적인 서구와 근본주의적 이슬람의 대립은 대개, 자기 몸을 전시하거나 드러내고 남성을 자극하거나 교란할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로운 성에 대한 여성의 권리와 다른 한편으로 이런 위협을 억누르거나 통제하려는 필사적인 남성적 시도 사이의 대립으로 압축된다......상반되는 두 입장은 엄격한 기율적 접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서로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근본주의자'는 성적 도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성의 자기 표현을 통제하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식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형태의 침해(harassment)를 막는다는 목적에서 이들 못지않게 엄격한 행위규제를 가한다."

 타자에 대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타자가 자신을 침해하고, 성가시게 하지 않는 한, "즉, 진짜로 타자가 아닌 한, 타자는 환영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관용은 그 대립물, 타자에 대한 철저한 불관용과 일치한다. 이런 태도는 갈 수록 선진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인권으로 떠오르고 있다. 비슷한 역전이 이른바, 인도주의적 혹은 평화주의적 군사주의 논리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를테면, "평화나 민주주의, 혹은 인도적 원조를 베풀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괜찮고.....고문과 영구 비상국가를 포함하도록 '재고'된다면 인권도 괜찮고......민주주의를 제대로 행할 만큼 성숙한 사람들에 국한한다면 민주주의도 괜찮다는 식이다."

 근본주의적 태도는 열락의 추구에 대한 '자연적인' 대립물로, 향락을 몰아 내려는 극단적인 몸짓이지만, 이런 노력은 잘못된 것이다. 향락을 몰아내려는 이런 몸짓 자체가 잉여적 향락을 낳기 때문이다. 정념을 배제한 채 의무만을 따르려는 행위는 의무 자체를 따르는 데서 오는 열락을 낳는다. 이는 즐거움의 추구라는 서구식 정언명령에도 적용된다. 즐거움의 추구는 즐거움의 추구에의 의무로 변화한다. 이 두 극단적 태도는 서로를 떠받치는 악순환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둘 모두 외설적이고 음란한 초자아와 연결되어 있다.


2. 권력의 과잉에 저항하는 방어 기제로서의 인권? 

 지젝은 맑스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의 계급투쟁>>을 독해를 통해, 속성상 언제나 과잉인 권력에 작동 양상에 대해서 논한다. 법의 차원에서 국가 권력은 그 신민의 이해를 대변하고, 여기에 책임을 지며 통제를 받지만, 그 초자아적 이면(裏面)의 차원에서, 이 공적 메씨지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대립물, 즉 무조건적이고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이 외설적 과잉이 주권 개념의 필수 구성 성분이다. "신민들이 법에서 권력의 외설적이며 무조건적인 자기주장의 메아리를 들을 때에만 법은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권력과 (전-정치적이고 비-정치적인)폭력이 언제나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인권 역시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따라서 폭력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응해야 하는데, 우선 "폭력을 어떤 정치 행위자도 도구화할 수 없는 것, 행위자 자체를 자기파괴적인 악순환에 말려들게 하는 위험을 지닌 것"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개진하는 한 편, "혁명 과정 자체를 어떻게 문명화의 힘으로 전환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동시에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외견상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폭력이나 인권과 같은 관계들의 중립성을 깨고 그 안에서 윤리적, 정치적 투쟁의 과정을 식별해 내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정치는 포괄적인 조직화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지젝을 20세기 거대 정치가 낳은 폭력을 성찰했던 몇몇 사상과들과 구분한다. 계몽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 잠재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하버마스적인 태도는 폭력과 권력의 구조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으며, <<계몽의 변증법>>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오늘날의 아감벤으로 연결되는 "계몽의 전체주의적 성향은 내재적, 결정적이며...집단수용소와 종족학살은 전체 서구역사의 일종의 부정적, 목적론적 종점"이라는 견해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사유할 수 없게 한다. 지젝이 옹호하는 것은, 발리바르와 같은 이들이 표명하는 견해로, "근대성이 새로운 자유의 영역을 열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영역도 열며, 그 귀결은 목적론적 보장 없이, 양자의 결합은 미결이며 미정"이라는 것이다. 


3. 인권과 정치의 관계 

 인권이라는 비 정치적 의제와 정치의 맞물림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인도적' 위기라고 칭해졌던 사라예보 사태이다. "군사적, 정치적 갈등을 인도주의적 용어로 바꿔 부르는 것의 배경에는 정치적 선택이 있다....이런 담화는 정치 담론을 밀어내고, 모든 논란을 미연에 무력화시킨다." 표면상 탈 정치화된 인권 정치란 특정 경제, 정치 목표에 봉사하는 군사 개입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런 개입은,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안겨줄 자유민주제 자본주의, 지구시장경제와 같은 조건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깔고 있는데, 이는 적극적, 집단적 사회 정치적 변혁 기획의 모색을 은영 중에 금지하는 것이며, 희생된 타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인권과 정치의 맞물림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보편적인(전-정치적인) 인권과 시민 내지 특정 정치 공동체의 성원이 갖는 특정한 정치적 권리 사이의 대립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발리바르는 시민 신분이 인간을 만든다는 것을 설명하며, '인간'과 '시민' 사이의 역사적, 이론적 관계의 역전을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아감벤의 호모 싸케르(homo sacer)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어떤 사람이, 시민권, 종교, 민족 정체성 등 인간에게 비 본질적인 각종 정체성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권의 이상적인 담지자인, 진짜 인간,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으로 환원되는 순간, 역설적으로 인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시민에 우선하여 그 존재 근거가 된다고 여겨져 왔던 인권은 '호모 싸케르'의 권리, 아무 권리도 없고, 비인간으로 취급당하는 사람들의 권리이며 따라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쓸모없는 권리는, 서구 사회에 의해 의약품이나 옷가지와 함께 해외로,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건네 진다. 하지만 "정치적 이름과 정치적 장소는 결코 단순히 빈껍데기가 되지는 않는 법"이라, 서구 사회는 자신들의 인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는 이 희생자들을 대신해,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나선다. 즉, 서구 사회가 말하는 제3세계 희생자들의 인권이란, 사실 인권옹호를 명분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으로 개입할 서구 열강 자신의 권리인 것이다.  

 이렇듯 인권이 탈정치화되어 사고되는 순간 인권을 다루는 담론도 바뀌어서, 선악의 전 정치적 대립이 새롭게 동원된다. 그리고 이런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와 푸코나 아감벤 식의 논의는 정치의 공간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이들의 '생체정치(biopolitics)' 개념은, "집단수용소가 존재론적 숙명처럼 되는 일종의 '존재론적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표준적인 반 본질주의', 이를테면 성(sex)이란 무수한 성애(sexuality) 실천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의 정치적 번안에 다다른다. 인권은 거짓된 보편성, 서구 제국주의나 군새개입, 신식민주의의 구체적 정치를 은폐,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고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4. 보편성의 귀환 

 맑스주의적인 징후적 읽기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형식 아래, 실은 백인 부르주아 남성이 시장에서 착취할 권리라는 특수한 내용을 식별해 낼 수 있다. 또한 권력과 관련하여 지적한 것처럼, 보편성은 애초의 유기적 평형을 깨뜨리는 초석적 폭력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무결한 보편성의 외관이란 기만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떻게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효능을 가지며 기능하느냐를 파악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벗어나는 생활 세계의 진정한 표현들에 대한 추구는 곧 권력자들에게 재전유될 따름이다. 페미니즘이나 노조운동의 정치적 요구를 추동한 것도, 부르주아적인 '형식적 자유'였던 것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피지배자들이 이 이데올로기들을 자신들의 불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지젝은 랑시에르를 경유하여, 인권의 보편성과 시민의 정치적 권리 사이의 간극을, "공동체 전체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하는" 간극이라 설명한다. "인권이 결국 뜻하는 바는 보편성 자체에 대한 권리"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사회가 자신에게 할당한 자리가 자신이 근원적으로 불일치함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사회에서 고유한 자리를 할당 받지 못한 열외자(supernumerary)의 권리로, 새로운 사회 정치적 보편성의 수립과 관련된 정치적 공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보편적인 '메타정치'적 인권을 거론하지 않으면, 정치란 특수한 이해들의 협상인 '포스트정치'적인 놀이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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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2)

2부. 변증법과 그 불만들

 


 1부에서 지젝은, 보편성이란 자기 자신과의 모순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밝히고 이러한 보편성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세계(상징적 측면과 상상적 측면을 갖는)로부터 도출되는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2부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을 경유한 보충적 설명을 통해 반복된다. 하지만, 1부가 여럿으로부터 하나를 도출시키는 이야기라면, 2부에서는 강조점이 하나에서 여럿으로 옮겨 간다. 1부를 정리하며 적었듯이 지젝의 라캉과 헤겔 독해는 보편성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세계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으로서의 보편과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자에서 세계로의 이런 무게중심의 이동은 보편에서 특수로의, 즉 타자로의 이동으로 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지젝의 타자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타자의 개념(보편에 외재하는 특수, 그를 위한 발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주체, 성소주자들과 슬럼의 주민들 등)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4장의 제목은 <타자에 대해서>인데, 여기서 그는 라캉의 상징계 만을 다룬다. 상징계의 외부가 타자가 아니라 상징계 그 자체가 (대)타자인 것이다. 이렇게 지젝은 일반적인 타자 개념을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타자라는 통속적인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보편에 대립하는 것은 보편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1부 기표의 논리에서 등장한, 기표들의 장을 가능하게 하는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기표, 즉 주인기표에 대립하는 것은 다른 여러 기표들이 아니라 주인기표 그 자신이다. 순수차이라는 공백無이 어떤 형식으로 표지된다는 이 모순이 보편(일자)에 대립하는 것이며, 타자의 타자는 다른 타자일 뿐이다. 이것이 라캉주의자들의 근본적인 논리적 에토스이며, 들뢰즈주의자들과 그토록 불화를 빚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의, 지젝의 타자란 무엇인가?

 지젝은 칸트적 사유에서 헤겔적 사유로의 이행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오성이 구성해 낸 것 외부에, 우리의 오성이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실체인 ‘물자체’를 상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헤겔로의 이행은 아주 단순한 절차, 즉 이 ‘물자체’에 대한 믿음을 빼 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자체의 초월적 외관, 주체가 자신과 물자체를 가르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은 주체의 시각적 환영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환영은 그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 주체의 응시(행위)가 반영되어 있음을 망각한 데서 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왕이 왕인 것은 신하들이 그들을 왕으로 대해 주고 있기 때문이지, 왕 자신의 카리스마 때문이 아니다. 신비하고 카리스마적인 왕의 모습은 이러한 관계를 망각할 때 발생한다.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필연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프롤레타리아가 이렇게 보이는 것은 오직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의 편에 서서 투쟁하고 있을 때뿐이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 주는 것은 객관적인 외적 대상은 필연적으로 어떤 환영 속에서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주체에게 그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사회 속에서 그의 위치를 결정짓는 것처럼 보이는 상징계, 대타자 역시 이러한 환영을 통해 가능해진다.

 이러한 환영은 근본적으로 1부에서 전개된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회피에 복무한다. 대타자의 진실은 이 보편자의 근본적인 모순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실의 경험을 회피하기 위해 초월적 실체(의미의 보증자인 대타자)의 외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캉 정신분석학에는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논리가 있다. 상징계에 의해 거세된 인간은 거세당하기 전 자신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었다고 상정된 대상을 찾아 헤매지만, 사실은 거세 자체가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 낸 것이며, 이러한 상실의 경험은 상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 위한 환영일 뿐이다. 내적 불가능성을 외적 한계로 전치하는 것을 통해 보편자의 내적 모순, 욕망의 불가능성을 은폐한다. 주인기표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주인기표가 기표의 불가능성을 떠맡음으로써, 다른 모든 기표들이 안정적으로 의미를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환영은 소급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공백, 불가능성은 환영이 성립하는 순간, 소급적으로 사라진다(즉, 일관된 의미로 누벼진다). 이를테면, 러시아 혁명에 참여하는 주체들에게 혁명의 과정은 그때그때 주체들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우연성의 소용돌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에는 모든 사건들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일관된 의미 속에서 정립된다.

 

 이와 같은 논리는 타자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전도를 포함하고 있다. 데리다적인 타자는 보편성의 (불)가능성의 조건, 그 구성적 외부를 의미한다. 하지만 지젝에게는 보편성에 외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특수자는 보편성 내부의 자기모순을 감추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자는 “실재적”이다. [...] 특수자가 자기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을 가로 막는 한계로서 말이다.”(287)

 이러한 전도는 지젝의 정치적 지평을 특징 짓는다. 보편성의 자기 모순에 대한 이와 같은 치열한 강조는, 보편성에 대한 끝없는 해체의 몸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보편성의 수립을 향한 행위에의 요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말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는 3부에서 다루어진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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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1)

1부. 여럿으로부터 나온 하나

 

 1장(하나에 대해)을 일관되게 꿰뚫고 있는 주제는 기표의 논리에 대한 해명이다. 보통 라캉의 기표의 논리는, 언어는 의미와 관련 없이 기표라는 질료 그 자체의 끝없는 차이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기표 망이 보지하는 의미의 체계는 결코 일관되게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지젝은 기표의 논리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통해 이와 같은 기본적인 서술에 수정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기표의 논리란 하나의 기표와 다른 기표 사이의 변별적 차이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의 논리를 특징짓는 근본적 차이는 기표와 그 자신 간의 차이, 기표와 그것이 기입되는 공백 사이의 차이이다. 지젝이 인용하는 자크 알랭 밀레는 세미나에서 기표의 장이 구성되려면, 우선 하나의 기표가 그 자신과 변별되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즉, 기표의 결여가 표현되어야 한다. 이 결여가 바로 순수차이이다. 이것은 차이가 모든 것에, 즉 일체의 실체나 동일성에 선행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기표의 장은 이 순수차이가 표현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순수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기의 없는 기표, 기표의 결여의 기표인 주인 기표이다. 그러나 순수 차이와 주인 기표 간의 궁극적 일치는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기표의 환유적 미끄러짐이 완결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양자 사이에는 해소되지 않는 모순이 존재한다. 지젝은 이 상황을 “어떤 것의 형식을 가진 無(214)"라고 표현한다. 이는 내용과 형식 간의 순수한 불일치를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긴장과 진동은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지젝은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 논리를 해명한다. ‘신은 신이다’라는 동어반복, 따라서 동일성을 표상하는 이 명제는, 동일성이 사실은 근본적 차이, 절대적 모순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이런 공백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적은 것처럼, 이 공백은 그 자신의 공백을 표현하는 불가능한 기표와 함께 존재한다. 공백은 섬광처럼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공백의 자리에는 공백을 메우는 기표가 남고, 이로써 기표의 계열이 존재하게 된다. 이를 보편자와 특수자의 관계를 통해 설명해 볼 수 있다. 보편자는 어떻게 그 규정 속에 온갖 특수자를 포함한 완결된 것으로 구성되는가? ‘신은 신이다’라는 명제에서처럼, 보편자의 동일성이란 궁극적으로 모순이며, 규정성의 결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모순, 공백은 모순과 공백 그 자체를 표지하는 기표에 의해서 메워진다. ‘왕정주의자는 공화주의자다’라는 명제처럼, 보편은 자신의 규정들 속에 전도된 형태의 그 자신-즉, 아무런 규정도 갖지 않는 그 반대물로서의 그 자신-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개념적으로 완성된다(헤겔식으로, 대자 존재가 된다). ‘신은 신이다’를 분석해 보자. 첫 항의 신은 그 온갖 규정성으로 충만한 신이다. 두 번째 항은, 이 신에 속하는 여러 가지 규정성들을 위한 자리로 마련되어 있다. 첫 항과 두 항의 관계는 유와 종의 자리, 보편과 특수의 자리의 관계이다. 이 두 번째 항에 온 신은 순수한 동어반복, 첫 항의 신에 대해 아무런 추가적 규정도 지니지 않는 대립물이다. 이처럼 보편적 개념은 언제나 자신의 대립물을 공제하고, 또 공제는 바로 예외로의 정립이라는 의미에서, 예외로 삼음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라캉의 성차 공식에서 남성 논리에도 적용된다. 남성이라는 전체는 남근 기능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예외-프로이트에 의하면, 아들들에 의해 살해된 시원적 아버지-를 통해서만 구성가능하다. 이 예외적 존재가 개념적 규정이 전체가 아님을, 따라서 일관되게 구성될 수 없음을 메우는 것이다. 
 
 주인기표의 탄생과정은 <<자본론>>의 가치형식절에 대한 독해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이 설명을 통해 내려야 하는 결론은, 지젝에게 있어 차이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정성이 아니란 것이다. 차이는 이미 주인 기표에 의해 점유되어 있으며, 차이는 공백을 내용으로 하는 형식이라는 주인 기표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하는 상징계의 균열, 결여의 형태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기표의 장에 대한 분석은 차이와 주인 기표의 모순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일반적인 기표들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해서 차이를 대리 표상함으로써 기표의 장을 성립시키는 주인 기표로 진행된다. 차이와 모순은 결코 그 자체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의 부재는, 부재 자체가 상징적 가치를 갖는 변별적 질서에서만 그 자체로 인식될 수 있다."(338)고 지젝은 쓰고 있다. 즉, 순수차이를 표지하는 주인기표를 상징계의 근원(일관된 의미의 장으로 봉합한다는 의미에서)으로 유추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상징계 내적 질서 안에서, 그 모순의 형상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가치형식에 대한 분석이 이미 가치를 전제하고 시작되는, 맑스의 가치형식절의 자기 모순과도 일치한다. 이는 <<자본론>>이라는 체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자본주의는 자기 안에서 그 전화를 위한 조건을 산출한다는 맑스주의의 상식은, 다른 말로 하면 체제 외부의 관점에서의 비판은 불가능하다는 것, "이데올로기에 외부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의 사용 가치와 가치의 구분은 각각 기표와 그것이 기입되는 공백에 대응한다. 하나의 상품(상대적 가치 형태)이 다른 상품(등가 형태)의 사용 가치를 통해서 그 가치를 표현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의 현존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공백을 표현한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치가, 그리고 공백 그 자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가치 형식의 끝에서 다른 모든 상품들은 화폐 속에 포함된, 즉 화폐가 표현하는 가치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주인 기표를 대신해서 다른 모든 기표들이 공백을 표현한다. 즉, 다른 모든 기표들은 주인 기표의 존재를 통해서 서로의 변별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지젝에게 있어 주인 기표의 공백 표현은 모순, 즉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기표들은 주인 기표를 대신해서 공백을 표현하지만, 주인 기표는 다른 모든 기표들을 대신해서 공백을 표현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관계는 그대로 화폐에도 적용될 수 있다. 화폐는 다른 모든 상품들을 대신해서 가치 표현의 불가능성을 표현한다. 이러한 관계는 라캉에게서 은유와 환유의 관계와 일치한다. 궁극적으로 은유란 이처럼 공백, 무를 하나로 세는 행위이며, 환유는 이로써 실체적 대상이 발생하고, 하나와 관계 맺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백,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화폐를 통해서 세어지고, 즉 정립되며, 화폐는 따라서 가치 그 자체를 대표한다. 이처럼 화폐를 통해 가치가 정립된 한에서, 상품들 간의 관계가 정립되는 것이다.

 

 2장(방탕한 동일성)에서 지젝은 이 논리를 헤겔의 변증법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는 헤겔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 즉 변증법적 과정은 그 전개를 통해 온갖 차이를 지양하고, 동일성에 다다른다는 생각은 완전한 오해라고 말한다. 반대로, 변증법적 과정의 마지막 순간, 즉 차이의 지양은, 어떻게 그 차이들이 ‘언제나 이미’ 지양되었는지에 대한, 즉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의 경험이다. 변증법적 지양은 소급적 철회의 형태를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성립하는 동일성의 위상은, 헤겔에게 있어 그 실정적 내용은 無일 따름인 순수한 형식이며 따라서 절대적 모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변증법적 소급 철회란, 차이에 대한 동일성의 궁극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자와 그 특수한 부정들인 차이와의 관계는 보편자 자신이 이미 극단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성격이 변화한다. 이를테면, 법과 그 부정인 범죄와의 외재적 대립 관계는 법은 그 자체 범죄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을 통해, 존재론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변화한다. 특수한 범죄들이 자각되는 것은 오직 법을 모순 없는 보편적 개념으로 인식할 때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부르주아 독재 사회로 인식하는 맑스주의자들이 범죄와 맺는 애매한 관계와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사회의 많은 범죄는 부르주아의 폭력적 지배 체제, 즉 법의 탈을 뒤집어 쓴 그들의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사실은 범죄가 아니다 또는 그렇게 단정적으로 도덕적 비난을 가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법은 범죄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바탕 삼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나아가 이런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서의 동일성으로 뒤집는다. 범죄가 지양되는 것은 순수한 관점의 전도만을 수반한다. 범죄의 구체적 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이 상징적 장에 기입되는 양태가 변화할 따름이다. 이는 누빔의 효과, 주인 기표가 일관된 상징적 장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헤겔의 동일성은 라캉의 주인 기표와 동일한 것이다. 한 편에서 그것은 순수한 모순이며, 순수 차이를 표지하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편과 차이(특수)라는 관계가 성립하는 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데리다가 보편의 (불)가능성인 이러한 잉여가 작동하는 논리에 대한 면밀한 파악에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문제는 보편의 해체가 아니라, 어떻게 모순이 보편으로 ‘필연적’으로 기능하는지에 대해 밝혀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차원에서 동일성의 근본적 불가능성은, 개념과 내용, 그리고 개념과 대상 간에는 근본적인 불일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즉, 개념은 필연적으로 대상과의 어긋남 속에서만 작동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의 역설(240)은 이런 논리에서 해석된다. 아름다운 영혼은 그 상상적 자기 인식 차원에서, 즉 내용의 차원에서는 가혹한 세상의 조건들에 대한 희생자이다. 하지만 그의 상징적 진실에서, 즉 개념의 차원에서 세상을 향한 그의 절망의 몸짓은, 자신의 (상상적) 존재론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몸짓일 뿐이다. 아름다운 영혼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여기서 또한 변증법적 소급 철회의 논리가 작동하는 데, 그의 이전까지의 저항의 몸짓은 완전히 무의미했던 것으로 변화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 자신의 개념에 도달하는 순간, 이미 개념 자체가 변화해 있다는 것이다. "예술의 형식이 예술의 개념과 일치할 때-관념이 감각을 매개로 하여 절단되지 않은 것처럼 나타날 때-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 종교이다."(237) 자신의 진실에 도달한 아름다운 영혼은 더 이상 아름다운 영혼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다. 그는 또 다른 상상적 자기 인식을 필요로 할 테고, 마찬가지로 그의 상징적 진실 또한 변화한다. 



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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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끝)

타자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나는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해 결론을 이야기하고 싶다. 거기서의 물음은, 민주주의를 그 자신에 대립시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이해할까란 것이었다. 이름의 불확심함과 현실의 모순에 대한 계속해서 반복되는 언명으로부터 민주주의의 자기-차이에 대한 더 근본적인 해석으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자신만만한 자기-만족의 토대에 다시 균열을 여는 것을 목표로, 자유 민주주의의 역사적 성취에 대한 후쿠야마의 테제에 주석을 가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자유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의 이름으로 새로운 복음을 설파하려 하고 있을 때-그들은, 자유 민주주의는 인간 역사의 이상으로서의 그 자신을 드디어 실현했다고 주장한다-, 외치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 불평등, 배제, 기아, 따라서 경제적 압박이 세계사와 인류사 속에서 이 정도로 많은 인간 존재에 피해를 끼친 적은 없다고(주1).' 다시 균열을 열기 위해서, 데리다는 그 자신에 도달했던 또는 그 자기에 도달했던 민주주의에, 도래할 민주주의 대립시킨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장래 도착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상이한 시간 내부에서 구상된 민주주의이다. '도래할 민주주의'의 시간은, 결코 완수될 수 없지만-그리고 완수될 수 없기 때문에-지켜지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속의 시간인 것이다. 도래할 민주주의는, 도래할 것에의 무한한 열림-그리고 '타자' 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포함하기 때문에, 결코 '그 자신에 도달'하는 것, 그 자신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한 민주주의이다.
 데리다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를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와 대립시켜, 두 개의 시간성을 같은 시간 속에 놓고, 두 개의 공간을 같은 공간 속에 놓는다-나는 이 원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두 개의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이라고 불리는 것 속에 문제가 있다. 데리다는 한 편에는 통치형식으로서의 자유 민주주의를, 다른 편에는 신참자에의 무한의 열림을, 또 온갖 기대를 벗어나는 사건에의 무한한 기대를 놓는다. 내가 보기에 제도와 초월론적 지평 사이의 이 대립 속에서 소멸하는 것은, 실천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이 실천은 '타자' 또는 헤테론의 정치적 발명에 다다른다. '신참자'-누구의 것이든 평등한 권력을 제정하고, 소여所與의 공동세계 속에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구축하는 새로운 주체-를 계속해서 창조하는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이다. 헤테롤로지heterology(타자성, 이타적 논리)의 정치적인 권력을 무시하는 것은, 한 편에 '자유 민주주의'-이것은 실제로는, 자기의 법을 구현하는 과두제를 의미한다-, 다른 편에 '도래할 민주주의'-사건과 타자성에의 무조건적 열림의 시간과 공간이라 보여진다-라는 단순한 대립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정치의 방기와 타자성의 실체화 형식과 같다.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리는 자기의 실체화의 거부가, 대칭적인 방식으로 '타자'의 실체화-이것은 현대의 윤리적 풍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상징이다-에 이르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자율과 대비되는, 사건과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의 참조는 현재의 윤리적 풍조에 있어서 빈번히 사용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 참조는 상이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굉장히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암네스티 인터네셔널Amnesty International의 인권에 관한 강연(주2)에서 장=프랑소와 리오타르가 제시한 '타자'의 권리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리오타르에게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이란 인간존재가 그 인질 또는 노예가 되는 '타자'-프로이트적인 사물 또는 유대의 율법으로서의-의 권력에의 복종을 의미한다. 계몽과 해방의 꿈은, 타율의 법을 부정하려 하는 유해한 의지, 전체주의와 나치에 의한 대량학살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의지가 된다. 따라서, '타자'의 권리는, 궁극적으로는, 악의 축에 대한 군사작전의 정당화에 이른다. 윤리, 타자성, 타자성의 무한한 존중은 일종의 '새로운 복음'이 되어,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과 이데올로기를 정통화한다.
 확실히 데리다는 레비나스적인 '타자'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으로부터, 윤리적 풍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리오타르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형태로 데리다는 윤리적인 명령을 해방의 지평과 결합시킨다. 그는 명백히 메시아적인 약속을 '법'에의 복종에 대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사건, 타자 또는 무한자에 관한 어떠한 선-취적인 동정同定도 피하려 하는 시도 속에서 그는, 탈구축, 말소선抹消線, 아포파시스apophasis의 끝없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타자성에 관한 이 윤리적 과대언명은 두 가지 문제의 어느 해석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탈구축은 궁극적으로 신의 병사에 의한 군사작전을 지탱하는 근저적인 타율의 법을 주장하던가, '타자'의 모든 선-취적 동정同定을 말소하는 무한의 임무를 강조하던가, 그 어느 것인가이다.
 데리다에 의한 개념화는 민주주의에 충분한 것을 부여하지 않음과 동시에, 너무나 많은 것을 부여하고 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은, 민주주의는 국가에 의한 '자유 민주주의'의 실천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것은, 민주주의는 '타자'에의 무한한 열림 이하의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성에의 한 가지 무한한 열림 같은 것은 없으며, 타자의 분할(=열할)parts을 기재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실천을 어떠한 분할도 갖지 않는 자-이것은 '배제된 자'가 아니라, 누군가 또는 누구라도를 의미한다-의 분할을 기재記載하는 것으로 개념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런 기재는 '신참자'인 주체에 의해, 즉, 새로운 객체가 나타나 공통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고,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나고 받아 들여질 수 있도록 하는 주체에 의해 행해진다. 이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타자성을 다루는 많은 방식의 하나이다. 민주주의에 의한 주체와 객체의 발명은 부서진 시간이자 해방의 단속적斷續的인 계수繼受인 특수한 시간을 창조한다. 내가 보기에 우리들은 메시아적인 시간에 호소하는 대신, 이 부서진 시간 속에서 계속 사고하고 행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우리의 입장의 이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데리다는 '파괴'의 본성 그 자체가 내기에 걸리고, 다음과 같은 물음이 싹 트는 시기에, 또 그런 시대를 위해 말하고 있다. 즉, 국민국가의 내부에서 오래도록 연기되어 온 데모스의 형상은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국민국가의 '소멸'은 논쟁의 대상일 수 있지만, 오늘 민주주의가 코스모폴리탄적 질서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데리다의 대답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형식은 분명하지 않다. 주요한 물음은, 그것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 '윤리적인' 관점에서 개념화할 것인가이다. 그것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타자에 대한 무한한 존중'은, '사건' 또는 메시아에의 무한한 기대라는 형식 대신에 타자성을 기재하는 다수의 형식, 변경 또는 부동의不同意의 형식이라는 민주주의적인 외형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주(1) Jacques derrida, Specters of Marx (New York: Routledge, 1994), p. 85
 

(주2) Jean-Francois Lyotard, 'The Other's Rights', in Stephen Shute and Susan Hurley (eds.), On Human Rights (New York: Basic Books,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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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끝났다. 쉽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혼자서 대충 보는 것과 남에게 보여 줄 만한 글로 옮기는 것은 정말 다른 일이란 걸 알았다. 일본식 문장과 단어가 가득해서 한국에서 읽는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도 잘 모르겠다. 이런 게 중역의 폐해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재밌는 글이었고, 또 마지막의 데리다 비판을 포함해서 맥락과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가기도 해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코멘트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옮겼는데, 조회수와 댓글수로 반영되지는 않는 듯 하다ㅎ 
 
 글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뭔가 그럴 듯한 평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만한 깜냥은 없고, 요즘 그의 <<불화>>를 영어와 독어로 찔끔찔끔 읽기 시작했으니 도래할 완독의 순간을 기약하며 미뤄 둬야 겠다. 랑시에르가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고 있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내가 한국을 떠나 온 직후 진태원 선생의 번역으로 재출간 되었다. 데리다의 민주주의론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질테니, 언젠가 랑시에르와 관련한 비판적 해석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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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4)

두 가지 정체성의 간극에서


 말할 것도 없이 이 실천은 도시나 국가의 통치가 단일하고 다의적일 수 없는 공동체 원리를 근거로 할 것을 원하는 자에게는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민주주의의 이중 구속dobule bind, 이중성, 또는 허위에 대한 끝 없는 지탄, 플라톤에서 사무엘 헌팅턴에 이르는, 민주주의의 현실이 그 이름과 모순됨을 증명하려고 하는 지속적인 시도가 행해져 왔던 것이다. 이 지탄의 가장 잘 알려진 정식은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에서 보여진다. 이 대립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강조되었지만, 훨씬 오랜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것은 쓰여진 법의 지배로서의 민주주의와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인 생활 형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플라톤의 구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차이도 있다. 플라톤의 모델에서는 민주주의자의 개인주의적 생활은 법의 엄격함에 겉보기로 참가commitment하는 것의 진짜 내용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이면, 즉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생활'을 은폐하는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대립한다. 그러나 결론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논의의 구조는 동일하다. 형식적 민주주의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립하는 평등의 외관이다. 이 '현실'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쾌고快苦의 계산에 종속되는 민주주의적 개인의 전적인 쾌락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것은 사적소유와 사적이해의 현실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한 것처럼, 정치적인 나타남의 영역의 반짝임, 빛남, 을 '단순한 소여성의 어두운 배경'에 대치하는 것에 의해 그 관계를 역으로 하는 것조차 가능하다.
 이상의 어느 경우에서든, 민주주의는 나타남(=외견)과 현실 사이의 대립이라는 필터를 통해 접근된다. 이 대립을 통해 민주주의는 묘사되고, 위장 당하고, 궁극적으로는 밀쳐내진다. 겉보기에는 대립적인 해석이 등가라는 사실의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혁명적인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비판 속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그런 권리는 '인권'으로 발전했다. 우리들이 인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2세기 이상에 걸쳐, 버크, 마르크스, 아렌트 처럼 다양한 저자들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는 무언가 그릇된 것, 즉 이중성이 있음을 가리켜 왔기 때문이다. 독립한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이며, 거기에는 무언가 착오가 숨어 들었을 것이다. 이런 논의가 이들 저자들에 의해 행해져 왔던 것이며, 최근에도 <<호모 사케르>>(주1) 속에서 죠르지오 아감벤에 의해 거론되고 있다. 마르크스가 기술한 것처럼, 시민의 권리라는 것은 실제로는 재산 소유자인 '인간'의 권리이다. 버크와 아렌트에 의하면 그런 권리는 우리들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그런 권리는, 시민의 권리이거나 인간의 권리이거나, 그 어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는 비정치적인 개인의 권리이다. 이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권리는 어떠한 권리도 갖지 않는 자의 권리인 것이 되며, 이것은 무와 같다. 또는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 즉 시민이 기존의 입헌국가에 귀속하기 때문에 소유하는 권리이다. 그런 권리는 권리를 갖는 자의 권리이며, 이것은 동어반복이다.
 이런 언설이 우리들에게 두개의 주체를 제시한다면, 그 하나는 위장용 껍데기일 것이다-이 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정치 주체는 하나이며 또한 동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것이다. '인간'과 '시민' 중 어느 것이 '진짜' 주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치가 신기루이던가, 정치 주체가 헌법의 텍스트가 정의하는 것과 같은 것이던가, 그 어느 것인가인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하나의 주체 따위는 없다, 라는 것이다. 정치 주체는 상이한 아이덴티티 사이, 특별히 인간과 시민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주체화의 과정은, 인간의 권력도 시민의 권력도 고정하지 않고, 인간과 시민 사이의 결합과 분리의 형식을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과 시민은 정치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되는 것이며, 이 이름의 법적인 기재가 정치적인 과정의 소산인 것이다. 인간과 시민은 또, 분쟁적인 이름, 그 외연과 내포가 경합적이며, 시험 또는 검증의 공간을 여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시민이라는 정치적인 이름은 민주주의의 투쟁에 있어서 사용되어 왔던 것이며, 사용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시민성citizenhip이란 인간으로서-즉, 소유주와 사회적 지배층의 권력에 종속하는 사적인 개인으로서-열등하거나 우수하거나 한 사람들 사이의 평등의 지배를 의미한다. 다른 한편에서, '인간'이란 누구라도 갖는 평등한 수용력의 긍정을 의미하고, 이것은 시민성의 제한, 즉 인민의 많은 범주를 시민성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또는 다양한 문제를 시민의 범위 밖에 두는 제한과 대립한다. 인간과 시민은 함께 배제원리에 대한 포함원리의 역할, 개별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인 것의 역할을 연기한다. 민주주의가 이해의 개별성에 대한 법의 보편적인 권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폴리스의 논리 그 자체가 보편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개인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것은 항상 상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것은 새롭게 분할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시험 삼아, 프랑스 혁명기의 페미니즘의 저항운동의 형식에 주석을 다는 것을 통해 이를 지적했다(주2). 여성의 활동은 가정생활의 개별성에 귀속하지만 시민성은 보편성의 영역이다, 라는 이른바 공화제 원리에 따라, 여성들은 시민의 권리를 부정당해 왔다. 개별적인 것의 영역에 있었던 결과, 여성은 보편적인 것에는 포함될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여성은 여성 자신의 어떠한 의지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정치 주체일 수 없었다, 라는 것이다. 이 '자-명'한 언명에 대해, 올랭 드 구즈는 여성들은 단두대에 올라갈 자격을 부여 받았기 때문에, '집회'의 연단에 올라갈 자격도 똑같이 부여 받은 것이다, 라는 잘 알려진 이론異論을 제기했다. 그녀의 논증은 이른바 벌거벗은(裸形) 생의 개별성에 수반되는 보편성을 제기하는 것에 의해, 영역의 분할을 애매하게 한 것이다. 여성들은 혁명의 적으로써 죽음을 선고당해 왔으니까, 여성의 벌거벗은 생은 정치적이었다. 단두대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했다. 죽음의 선고의 보편성은 정치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의 '자-명한' 구별을 던져 버렸다. 따라서, 여성은 스스로의 권리를 '시민으로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에 의한 권리의 긍정은, 버크 또는 아렌트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스스로가 갖는 권리를 갖지 않으며, 스스로가 갖지 않았던 권리를 갖고 있었음을 증명했다. 한편에서, 여성들은 모든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에 귀속하는-권리(인권) 선언에 따르면- 권리를 빼앗겼었던 것이며, 그녀들에게 부정당했던 권리를 요구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스스로의 항의 운동에 의해 그 정치 능력을 증명했다. 여성들은 스스로 그런 권리를 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두 개의 아이덴티티 사이의 간극에서 주체화 형식을 창조하는 것,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사이의 이중의 관계에 변화를 가함으로써 보편성의 사례를 창조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 과정이 동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단순히 법의 보편성에 기초하는 것일 수만은 없는 것은, 법의 보편성은 통치행동의 논리에 의해 부단히 개인화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공적생활의 끊임없는 개인화에 저항하는 주체화의 형식과 검증의 사례에 의해 대리보충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화는 두 가지 형식을 갖는다. 그 명료한 형식은 성적, 사회적 또는 민족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인구의 어느 부분에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다. 그 암묵적 형식은, 일련의 일정한 제도, 문제, 행위자, 절차에 시민성의 영역을 제한한다. 전자가 서양에서는 시대 착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반대로, 후자는 현대의 중요한 문제이다. 근대화라는 부드러운 이름 또는 신-보수주의 혁명이라는 솔직한 이름이, 30년 이상에 걸쳐 노동이나 건강이나 연금과 같은 '사적 생활'의 문제를 평등한 시민성과 관련한 공공의 관심사로 바꾸는 것을 통해 공공역역을 넓혀 온 민주주의의 과정을 역전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왔다. '사회' 국가 또는 '복지' 국가 개혁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린 것은, 국가가 개인에게 공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나 효용과 개인이 사적으로 손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균충均衝보다도 훨씬 큰 문제이다. 노동과 건강의 조정의 배후에서 내기에 걸려 있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성common'에 관한 이해이다. 시민성의 정치적 영역과 사적인 약속이 지배하는 사회적 영역을 나누는 선은, 누가 공적인 일에 참가할 수 있으며 누가 할 수 없는가를 결정한다.
 1995년 겨울 프랑스에서 공공운송기관의 노동자들이 행한 상당히 긴 파업 동안, 사적이고 재정적인 이해와, 공통선共通善의 정치적인 추구와 장래 세대를 배려하는 능력을 대비하는, 많은 아렌트적이고 슈트라우스적인 논의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업이 진행되는 사이에 점점 분명해진 것은, 파업의 주요한 목적은 특정한 인간집단과 제도가 공동체의 장래를 결정하는 배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규범적인 구별은 실제로는 공통의 문제와 장래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자와, 사적이고 직접적인 관심사를 넘을 수 없다고 간주된 자 사이의 구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과정 전체는 이 경계선의 이동을 둘러싼 것이다.





주1 : Giorgio Agamben, Homo Sac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

주2 : Cf. Jacques Ranciere, 'Who is the Subject of rhe Rights of Man', 103/2 South Atlantic Quarterly, spring/summer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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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론에 대해 소개한 글을 찾았다. 진태원 선생이 아감벤, 호네트, 랑시에르를 현대 유럽 정치철학 3인방으로 묶어 소개한 글인데, 랑시에르의 police, politics, the political 의 구분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진태원 선생은 police 를 '치안/통치'로 옮겼는데, 원어를 그대로 쓰는 것보다 의미를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진태원,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읽어보기: http://blog.aladdin.co.kr/balmas/111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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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중에서..



 성차공식의 또 다른 측면, 즉 "여성적"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의 개념이 어떻게 역사적 유물론 속에 작동하는지 상기하기만 하면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의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딱 맞는) 구좌파의 슬로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모든 것(총체로서의 사회)은 정치적이다"는 보편 판단이 아니라 전부는-아닌 집합의 "여성적" 논리의 차원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정확히 사회적 장은 불가피하게 정치적 분열에 의해 표지되어 있음을, 즉 사회를 단일한 전체로 인식할 수 있는 중립적 "제로-지점"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달리 말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정치적 장에서 "메타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를 뜻한다. 즉, 어떤 종류의 사회적 기술이나 이해라도 당파적인 언표행위의 위치를 함축하고 있다. 극단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이미 "정치적"이며, 우리는 언제나 이미 어떤 "편에 서 있다." 계급투쟁이란 객관화될 수 없는, 즉 사회적 총체 안에 자리매김될 수 없는 이 불가해한 한계, 또는 분열에 붙여진 이름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사회 일반을 단일한 총체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사회를 단일한 총체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이라는 술어를 통해 이 총체를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고 규정하더라도 말이다. 
                                                                          
                             슬라보예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 2004, 314쪽


 (그리고 위 문장에 대한 지젝의 주석) :
 
 오늘날 우파와 좌파의 차이는 진부한 문제틀이라는 얘기가 많다. 이런 이야기에 속지 않기 위해서는 이 두 개념의 비대칭성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좌파는 "나는 좌익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즉 좌와 우의 구분과 분열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 우파는 그 변덕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서 "극단주의"를 "한물 간 것"으로 비난한다. 달리 말해 좌/우의 구분은 오직 좌파적 관점에서만 그 자체로 인지(헤겔식으로, 정립)된다. 이에 반해, 우파는 스스로를 "중심"에 있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들은 "전체"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들은 분열을 거부한다. 그래서 정치적 공간의 분절은 성차sexuation에서처럼 역설적이다. 그것은 단순히 전체가 두 편으로 분절되는 것이 아니라 한쪽 편(좌파)이 분열 그 자체를 대리표상한다. 그리고 다른 편(우파)은 그런 분열을 부정한다. 그래서 좌우의 정치적 분열은 필연적으로 "좌파"와 "중심"의 대립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거기서 "우파"의 자리는 비어 있다. 우파는 자기 자신을 일인칭 화법으로 "나는 우익이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에 의해 정의된다. 그들은 오직 좌파의 관점에 의해서만 그 자체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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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만 다 읽고 나가서 과일 먹으면서 담배나 피자고, 이미 온 몸에 퍼져 버린 지겨움과 끙끙거리며 싸우고 있을 때, 저 구절이 눈에 말 그대로 번쩍하고 들어 왔다. 자본론의 가치형식절에 대한 재독해에 이어, 마르크스주의와 라캉을 연결시키려는 지젝의 또 다른 시도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저 설명의 예리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맛에 지젝을 읽는다(그리고 견딘다-.-)

 


 요컨대, 좌파가 보기에 우파는 우파지만, 우파가 보기에 좌파는 그냥 미쳤다는 거다. 그리고 좀 지나친 해석인지도 모르겠지만, 지젝은 좌파란 본래 사회 내부에서 '광기'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급진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사회적 인식으로는 소화할 수 없는 의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광기일 수 밖에 없다. 사육되는 동물들에 대한 끔찍한(즉, 비인간적인) 조치에 대한 거부감으로 채식을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고용이나 임금 등에서의 산술적 양성 평등의 달성만을 목표로 삼지 않고, 그런 통계에서 결코 잡히지 않을 문제들을 고민하는 사람들처럼. 그러니까 진보적 정치를 일련의 합리적 정책으로 환원시키는 이른바 '합리적 진보'나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며 훈계조로 말하는 절충주의자들은, 완전히 틀렸다. 정책은 오직 좌파를 배제했을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고, 좌파는 잘 날고 있는 새에 달라 붙어 간지럽히는 벼룩과 같은 것이다. 좌파라는 말은, 그 역사 때문에 역으로 다양한 급진적 정치를 포함하지 못하는 개념으로 배척당하기도 하지만, 지젝의 해석을 통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간 이제 정말로 담배 한 대 태우러 나가야 겠다. 낮에 마트에서 처음 보는 과일을 하나 사 왔는데, 담배와 맛이 꽤 잘 어울릴 것 같다.  평소 요리랍시고 해 먹는게 워낙 시원찮아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독일 과일은 한국보다 대체로 맛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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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3)

폴리스, 정치, 정치적인 것


이상이 거만한 당나귀가 불러 일으키는 불쾌의 이유이다. 좋은 정책에 방해가 되는 것은, 이른바 대중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유래하는 요구의 과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신의 근거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그것을 기초 지음과 동시에 그 기초를 철거하기도 하는, 대리보충적인 '인민의 권력'에 입각한다. 근거 짓는 권력과 파괴하는 권력 간의 이 합치는,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자기-면역auto immunity'이라는 데리다의 개념보다도 근본적인 것이다. 이 자기-면역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것은 우선,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제한 없는 자기-비판, 반-민주주의적인 프로파간다에도 권력을 줄 수 있는 수용력capacity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그것은 민주주의의 적이 민주주의와 싸우기 위해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이용할 때, 그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통치가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제한 또는 허공에 매달아 버릴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두 경우 모두에서 민주주의는 Autos 또는 자기의 검토될 수 없는 권력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타자성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도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데리다는 코라Chora(場)의 순수한 수동성으로부터 타자 또는 신참자-그들을 포함하는 것이 '도래할 민주주의'의 지평을 정한다-에게로 실을 연결하는 것으로, 자기의 원환圓環을 파괴하는 것에 착수하는 것이다.
 나의 이론異論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타자성은 외부에서 정치에게로 도래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 자신의 타자성을 가지며, 그 자신의 이질성 원리를 갖는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실로 이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의 권력이 아니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무언가 그와 같은 권력의 붕괴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arche의 원환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정치가 어찌됐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무질서의 원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리는 정치의 자기-근거 지음을 가로 막고, 정치를 분할의 대좌로 바꾼다. 나는 시험삼아, 폴리스police, 정치politics, 정치적인 것political이라는 세 개의 말의 이접離接관계에서 그 분할을 개념화했다.
  연장자, 더 현명한 자, 더 부유한 자 등이 있기 때문에-또는 더 정확히 하면, 그런 역할을 연기하기 때문에-타자를 지배하는 인간이 있다. 자격, 장소, 역량의 이런저런 배분에 근거하는 지배의 유형과 절차가 있다. 이것이 폴리스의 논리라고 내가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연장자의 권력은 장로제 이상의 것이어야만 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 또한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지한 사람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병사는 병기를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대신 지배자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만약 그렇다면, 지배자의 권력은 자기와 피지배자에게 공통의 대리보충적인 성질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은 정치적인 권력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폴리스의 논리는 다른 논리, 정치의 논리에 의해 횡단되어 있을 터이다. 정치는 자격 없는 자의 권력에 의해 모든 자격이 대리보충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자가 통치하는 이유는 한 인간이 타자를 지배할 어떤 충분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배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이유의 부재에 입각해 있다. '인민의 권력'은 그것을 정통화하면서 동시에 그 정통성을 뺏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데모스demos란 것은, 인구, 인구의 다수파, 정치체, 하위계급low class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자격을 갖지 않는 자-그것은 일거에 모든 사람, 누구라도 의미한다-로 이루어진 잉여의 공동체이다. '인민의 권력'은 어떠한 집단 또는 제도의 권력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그것은 이접의 형식에서만 존재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가의 제도와 지배의 실천을 정통화 하면서 그 정통성을 뻇기도 하는 내적인 차이이다. 그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민의 권력'은 제도의 과두제적 운영에 의해 지속적으로 횡단되고, 소멸하는 차이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에서, 인민의 권력은 역할(=할당), 장소 또는 역량의 폴리스적 배분에 도전하고, 정치적인 것의 무질서한 기초를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는 정치 주체의 행동에 의해 끊임없이 재再-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접은 아포리아가 아니라, 부동의dissensus이다.  아포리아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그 자신의 원리에 근거 지으려고 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기초는 찢겨진다. 민주주의는 지배의 실천이 끊임없이 덮는 균열을 계속 다시 여는 것, 부동의의 실천이다.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조금 전에 나는 말했다. 동일한 법률, 동일한 헌법이 반대의 방식으로 시행되는 일도 있으며, 그것은 법률이나 헌법이 그 내부에서 틀 지어지는 공통성 감각에 의해 결정된다. 법률이나 헌법은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획정劃定하고, 정치적 행위성을, 적절한 자격을 부여 받은 일정한 행위자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또 법률이나 헌법은 같은 텍스트에서 새로운 정치적 장소, 쟁점, 행위자를 발명하는 민주주의적인 해석과 실천에 길을 비켜 주기도 한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련의 제도가 아니라, 감성적인 것의 다른 배분, 다른 무대 설정, 말과 말이 가리키는 사물의 종류 사이의, 또는 말과 말이 권력을 부여하는 실천 사이의, 그것과는 다른 관계인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획정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 무대의 축소는 보통 정치적인 것의 순수함, 법의 보편성, 정치적 보편성과 사회적 개별성 사이의 구별 같은 이름 아래 실천된다. 그런 정치의 '순화'는 실제로는 그 방기放棄와 같다. 반대로 민주주의의 논리는 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애매하게 하고, 이동 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소멸하는 조건으로서의, 모든 사람의 평등을 재-제정하는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의 한계=경계limit를 이동시키는 것-이것이야 말로, 정치가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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