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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 자크 랑시에르 (3)

폴리스, 정치, 정치적인 것


이상이 거만한 당나귀가 불러 일으키는 불쾌의 이유이다. 좋은 정책에 방해가 되는 것은, 이른바 대중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서 유래하는 요구의 과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신의 근거인 것이다. 정치적인 것은, 그것을 기초 지음과 동시에 그 기초를 철거하기도 하는, 대리보충적인 '인민의 권력'에 입각한다. 근거 짓는 권력과 파괴하는 권력 간의 이 합치는,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자기-면역auto immunity'이라는 데리다의 개념보다도 근본적인 것이다. 이 자기-면역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것은 우선,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제한 없는 자기-비판, 반-민주주의적인 프로파간다에도 권력을 줄 수 있는 수용력capacity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그것은 민주주의의 적이 민주주의와 싸우기 위해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이용할 때, 그 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통치가 민주주의적인 권리를 제한 또는 허공에 매달아 버릴 가능성을 의미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두 경우 모두에서 민주주의는 Autos 또는 자기의 검토될 수 없는 권력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타자성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도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데리다는 코라Chora(場)의 순수한 수동성으로부터 타자 또는 신참자-그들을 포함하는 것이 '도래할 민주주의'의 지평을 정한다-에게로 실을 연결하는 것으로, 자기의 원환圓環을 파괴하는 것에 착수하는 것이다.
 나의 이론異論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타자성은 외부에서 정치에게로 도래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 자신의 타자성을 가지며, 그 자신의 이질성 원리를 갖는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실로 이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의 권력이 아니다. 반대로, 민주주의는 무언가 그와 같은 권력의 붕괴이다. 민주주의는 아르케arche의 원환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정치가 어찌됐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무질서의 원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원리는 정치의 자기-근거 지음을 가로 막고, 정치를 분할의 대좌로 바꾼다. 나는 시험삼아, 폴리스police, 정치politics, 정치적인 것political이라는 세 개의 말의 이접離接관계에서 그 분할을 개념화했다.
  연장자, 더 현명한 자, 더 부유한 자 등이 있기 때문에-또는 더 정확히 하면, 그런 역할을 연기하기 때문에-타자를 지배하는 인간이 있다. 자격, 장소, 역량의 이런저런 배분에 근거하는 지배의 유형과 절차가 있다. 이것이 폴리스의 논리라고 내가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연장자의 권력은 장로제 이상의 것이어야만 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무지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람과 빈곤한 사람 또한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지한 사람들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하도록 명령하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병사는 병기를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대신 지배자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만약 그렇다면, 지배자의 권력은 자기와 피지배자에게 공통의 대리보충적인 성질에 의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권력은 정치적인 권력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폴리스의 논리는 다른 논리, 정치의 논리에 의해 횡단되어 있을 터이다. 정치는 자격 없는 자의 권력에 의해 모든 자격이 대리보충 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자가 통치하는 이유는 한 인간이 타자를 지배할 어떤 충분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배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이유의 부재에 입각해 있다. '인민의 권력'은 그것을 정통화하면서 동시에 그 정통성을 뺏기도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데모스demos란 것은, 인구, 인구의 다수파, 정치체, 하위계급low class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자격을 갖지 않는 자-그것은 일거에 모든 사람, 누구라도 의미한다-로 이루어진 잉여의 공동체이다. '인민의 권력'은 어떠한 집단 또는 제도의 권력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그것은 이접의 형식에서만 존재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국가의 제도와 지배의 실천을 정통화 하면서 그 정통성을 뻇기도 하는 내적인 차이이다. 그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인민의 권력'은 제도의 과두제적 운영에 의해 지속적으로 횡단되고, 소멸하는 차이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에서, 인민의 권력은 역할(=할당), 장소 또는 역량의 폴리스적 배분에 도전하고, 정치적인 것의 무질서한 기초를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는 정치 주체의 행동에 의해 끊임없이 재再-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이접은 아포리아가 아니라, 부동의dissensus이다.  아포리아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을 그 자신의 원리에 근거 지으려고 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기초는 찢겨진다. 민주주의는 지배의 실천이 끊임없이 덮는 균열을 계속 다시 여는 것, 부동의의 실천이다.
 민주주의는 일련의 제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조금 전에 나는 말했다. 동일한 법률, 동일한 헌법이 반대의 방식으로 시행되는 일도 있으며, 그것은 법률이나 헌법이 그 내부에서 틀 지어지는 공통성 감각에 의해 결정된다. 법률이나 헌법은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획정劃定하고, 정치적 행위성을, 적절한 자격을 부여 받은 일정한 행위자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또 법률이나 헌법은 같은 텍스트에서 새로운 정치적 장소, 쟁점, 행위자를 발명하는 민주주의적인 해석과 실천에 길을 비켜 주기도 한다.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련의 제도가 아니라, 감성적인 것의 다른 배분, 다른 무대 설정, 말과 말이 가리키는 사물의 종류 사이의, 또는 말과 말이 권력을 부여하는 실천 사이의, 그것과는 다른 관계인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획정하는 것에 있다. 하지만 이 무대의 축소는 보통 정치적인 것의 순수함, 법의 보편성, 정치적 보편성과 사회적 개별성 사이의 구별 같은 이름 아래 실천된다. 그런 정치의 '순화'는 실제로는 그 방기放棄와 같다. 반대로 민주주의의 논리는 정치적인 것의 경계를 애매하게 하고, 이동 시키는 것에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소멸하는 조건으로서의, 모든 사람의 평등을 재-제정하는 것에 의해, 정치적인 것의 한계=경계limit를 이동시키는 것-이것이야 말로, 정치가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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