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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 대한 단상들

1. 이회창이 대선에 출마한단다. 한 동안 정신을 빼 놓고 살다가, 정신 좀 차려야겠다 싶어 들여다 본 뉴스에서는 이회창이 좌파 정권에게 잃어버린 십년 운운하고 있었다. 진짜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이번 대선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을까를 생각해 봤다. 이명박이 승승장구하는 꼴에 베알이 꼴려서라도 투표는 하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회창의 출마 소식을 듣고나니, 선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의 출마는 대선을 챔피언 벨트를 앞에 두고 벌이는 타이틀 매치로 바꿔 버렸다. 나름의 위치에서 이명박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는 모든 정당들을 우습게 만들며, 이회창은 경쟁이라는 선거의 원초적 속성을 스펙터클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경기의 결과는 당사자들과 그들 각각에게 베팅한 사람들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유권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흥을 돋궈 주는 들러리일 뿐이다.  

2. 이명박 독주 체제를 가능하게 한 대립구도는 경제 대 이데올로기였다. 이명박은 경제를 살리고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람인 반면, 그 외의 모든 집단들은 공허한 소리만 되뇌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는 널리 퍼진 인식이 이명박의 독주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각종 추문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와중에도 그의 지지율이 떨어질 줄을 몰랐던 것은, 사람들이 가치 판단에 냉소를 보내며 경제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본 표현처럼 "섭생하는 존재가 밥하고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언제나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관점 아래서 작동한다. 알튀세르가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의 외부가 있다는 저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에 맞서 진보 정당들(물론 범여권은 제외)은 성장 대 분배를 내세우며, 경제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하였지만 조금도 먹혀 들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위 범여권의 영향이 지대한데, 그들은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이명박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면서 경제 영역 바깥에서의 차이를 통해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을 설정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경제와 이데올로기를 외적인 관계에 맺는 것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실제로 이명박 지지자들과 똑같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이명박이나 이회창에 대한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민노당이나 사회당 같이,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강고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하나의 경제에 다른 경제를 대립시키려는 노력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김규향은 강준만 같은 사람이 조갑제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도 내심 이번에 범여권 일당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에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20년 동안 민주화 운동을 우려 먹으며, 518 기념 묘역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다고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도 짜증났는데, 이제는 한술 더떠 이명박과 이회창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굳건한 믿음 속에서 꿈쩍도 않던 이명박의 지지율이 이회창의 등장 이후에야 요동을 치고 있다. 이회창은 도덕성과 대북 정책을 내세우며 이명박과 선을 가른다. 이것이 대선의 명분을 얻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유권자를 가르는 지표로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경제 대 이데올로기라는 구도 속에서 이명박에 대한 지지가 경제를 불가침의 대상으로 설정한 후 일종의 판단 없는 판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이회창의 등장으로 지지자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자의식에 의거해 누가 진짜 보수인지를 판단할 것을 요구받는다. 둘의 지지율이 6할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글프게도 이 분열은 공히 한국 사회 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어디가 다른지, 실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차이와 분열은 작동한다. 그래서 끔찍한 미래를 상상하게 됐다. 이회창과 이명박의 싸움이, 엘리트를 위한 엘리트 사이의 각축일 뿐인 그들 정치의 진실을 은폐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 구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구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난 십여년 동안 작동했던 보수 대 진보라는 구도는 비록 허울 뿐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규제적 성격은 있었다. 하지만 이회창과 이명박이 만들어 낼 그 무엇에도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4. 뉴스에서 이회창의 사진을 보면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5년 전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 보여 마치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 여행을 온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진을 볼 때 졸려서 비몽사몽이었던 탓이었겠지만, 마치 다른 시공간에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 기묘한 느낌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회창이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채 무덤에서 걸어 나온 유령이기 때문이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그가 이미 죽었음을 알려 주기만 하면 되도록. 물론 이회창에 맞서 이명박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가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낳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한 번은 희극으로. 이회창은 보수 대 진보의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등장한 희극 배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그의 손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손에서 시작되기를.
 
5. 찾아 보니 해외 거주자는 부재자 투표가 안 되는 것 같다. 순식간에 쑈가 되어 버린 대선을 바라 보며, 무엇을 해야 하나 착잡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아무 고민도 할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지 싶다. 대선을 맞이하여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니까 스포츠 중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맛있는 맥주와 주전부리를 사다 놓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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