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

사는얘기 2008/02/09 12:30
 

이번 설은 남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맞는 첫 명절이었다.

 

지난 연말에 혹시라도 부모님집에 안 올 수 없을까 하는 심산으로 부모님을 슬쩍 떠봤다. 겉으로는 조용히 이야기하시지만, ‘설에 집에 안 오고 서울에 있음 어떨까요?’라는 나의 질문에 부모님의 속은 요동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득이나 심란하실텐데, 그래도 옆에서 해 주시는 거 따박따박 받아먹고, 잘 쉬고, 잘 자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효도겠다 싶어서 부모님집에서 설을 보내기로 했다.


우리 아버지는 차례를 두 개를 지내셔야 한다. 울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한테는 큰 아버지, 나에게는 큰 할아버지 아들로 호적상 되어 있다. 그래서 나에게 큰 할아버지인 할아버지의 차례를 우리집에서 모셔야 한다. 그리고는 대구 큰 (사촌)오빠네에 가서 진짜 할아버지의 차례를 지내야 한다.


아버지 연세가 70을 넘기시고는 대구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어쩌다 한번은 대구를 가지 않으셨다. 그런 게 사촌오빠들한테 마음이 걸렸는지, 설 당일날 둘째오빠가 부모님을 모시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 당일날 아침에 아버지가 나에게 ‘둘째 오빠 오면 언니 방에 들어가서 조용히 있거라.’라고 하셨다. 감기때문에 계속 기침을 하는 것을 엄마는 걱정하셨다. 그러면서 ‘기침도 하면 안되..’라고 하셨다.


새벽부터 일어나 큰 할아버지의 차례를 지내고, 미쳐 다 치우기도 전에 둘째 오빠가 도착하였다. 나는 언니 방에 들어가서 이불을 덮고 조용히 누워 있었다. 부모님은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셨다. 나와 남편이 경주에서 오는 중이고, 그래서 언니는 대구를 갈 수 없고 우리를 기다려야 한다고...


그러나 더 큰 일은 저녁 때 일어났다.

둘째 오빠가 대구에서 부모님을 다시 울산으로 모셔다 드리면서, 나와 남편을 보고 가야 한다고 한 것... 그래서 이번에는 집 밖으로 피신을 했어야 했다. 이번에는 언니도 같이.. 내가 좋아하는 대나무숲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랬다.


맨날 밤에 침대에 누워서 떠올려보던 대나무숲의 소리와 초록빛과 대 숲 사이로 들어오는 저녁 햇살을 보았지만, 기분이 왠지 씁쓸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 늘 부모님께 죄만 짓고 산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는 다시 죄인이 되어 집으로 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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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12:30 2008/02/0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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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비 2008/02/11 0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동지는 죄인이 되어 있고, 또 한 동지는 연휴 내내 책만 읽으면서 지낸 듯하고... 오랜만에 와 보곤 맘이 참 아릿하네요. 늦은 새해 인사 드립니다. 힘 내시고, 새해 뜻한 바대로 다 이루며 살기를~!

  2. 슈아 2008/02/11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은 지날꺼야. 우린 알고 있지 그 사실을.
    새해는 따뜻하고 좋은 일만 그득그득할꺼야.

  3. 까치 2008/02/14 21: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비.. 감사.. 오랜만에 뵙네요 ^^
    슈아.. 이미 시간은 많이 지났어요.. 시간의 힘은 무서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