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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

박노해, 20년, 정태춘에서 싸이와 N.EX.T 그리고 ‘Stop crackdown’까지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 헌정 음반-


발표되기 전부터 관심을 끌었던 음반이 있다.

박노해 시인의 대표적인 시집 ‘노동의 새벽’ 20주년을 맞이한 헌정 음반이다.

그 유명했던 ‘빨갱이 불순분자’ 박노해 시인의 시와 소위 ‘운동권’들이나 불렀던 ‘민중가요’를 신해철이라는 대중가수가 ‘헌정’을 하겠다고 프로듀싱 해서 싸이니, ‘언니네 이발관’이니 ‘Ynot'이니 하는 어르신들은 알지도 못하는 가수들과 정태춘, 장사익, 소리여울에 이주 노동자 밴드 ’Stop crackdown', 거기다가 황병기, 전순옥(전태일 열사의 동생)까지 같이 모여 만든 음반이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이냐! 이게 웬 사건이란 말이냐 말이다!

뭐, 그래서 그 조합만으로도 앞으로 여기저기서 말이 많을 음반이기에 굳이 그 ‘감상문’을 올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입이 근질거려서 아무래도 참을 수가 없다.

그 몇 가지 키워드를 여기 주절거려 본다.


박노해, 20년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이러다가 끝내 못 가지


-‘노동의 새벽’ 중-


1958년 전남 함평 출생

1983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1991년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한 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안기부에 검거, '반국가단체 수괴'로 무기징역을 선고

1998년 8월 15일 정부수립 50주년 경축 대통령 특별사면 석방


어느 검색 사이트에 나온 박노해 씨의 약력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한 ‘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중앙위원’이라니!

이런 무시무시한 사람이 쓴 시를 ‘헌정’ 한다니!

조갑제 씨가 보면 땅을 치고 분노하며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고 박홍 씨가 보면 ‘어둠의 세력들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썩 물럿거라!’고 외칠 일이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아직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분들께서 이 사태의 중차대함을 모르심일까?

어찌된고로, 이런 국가의 위기 상황을 경계하기는 커녕 여기저기서 소개를 하는 지경에 왔느냔 말이다. 심지어 조선일보까지도!

잡설이 길었다. 본론을 말하자면 ‘박노해’가 가지는 상징성의 변화를 말하고자 함이다.

마치, ‘인간 체 게바라’처럼 말이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미싱 기계 앞에서 꽃이 피는 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낙엽 지는 가을과 흰 눈 소복소복 쌓이는 겨울에도 공장에서 일만 하는 노동자의 노래 ‘사계’가 힙합 가수의 노래가 되어 젊은이들의 춤 속에 묻혀지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노래방에서 구애의 노래가 되어 불리우고, 투쟁 속에 서로의 힘을 북돋우고 동지애를 확인하는 노래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가 동요처럼 불리우는 지금이다. 그러니, 사형을 구형받고 선 법정의 최후 진술에서 “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던 그 박노해가 이제 체 게바라처럼 ‘대중적 위인’이 된 것이다.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20년의 세월은 도리어 열악해져 가는 노동 현실에는 무력하면서도 체게바라나 전태일, 박노해의 삶에는 감성적 동경을 지니게 만든, 바로 그런 세월인 것이다. 

그래서 이 음반이 나온 지금,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언니네 이발관’과 ‘Stop crackdown' 사이


이번 앨범에서 ‘언니네 이발관’은 ‘가리봉 시장’을 감성적 모던락으로 노래하고, ‘Ynot’은 민중가요를 부르던 이들이 ‘사람들아 너무 걱정 말라/나는 신세 조진 적 없네’하며 절절하게 부르던 ‘아름다운 고백’을 가벼운 펑크 스타일로 바꾸어냈다.

그래, 민중가요라고 해서 꼭 애절하고, 소리치고, 전투적기만 할 필요야 있겠는가.

시대가 바뀌는 만큼 표현의 방식도, 도구도 달라질 수 있고 그로 인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이 그 가사가 의미하는 바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이 역시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들의 노래에서는 아무래도 ‘음악적 감성’외에 ‘노동자의 심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박노해가 시에 담았던 ‘이데올로기’나 ‘노동해방’ 보다는 ‘휴머니즘’과 ‘음악적 표현’ 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주 노동자 밴드 ‘Stop crackdown’이 부르는 ‘손무덤’은 비록 발음은 정확하지 않더라도 ‘기계 사이에 끼어 팔딱이는 손을 비닐봉지에 싸서 넣고서 화사한 봄빛이 흐르는 행복한 거리를 미친놈처럼 헤맨 후에 노동자들의 피땀을 위해 잘려진 손들이 기쁨의 손으로 살아날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손을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고 눈물을 흘리는’ 노동자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다. 이들에게는 그 가사가 그대로 자신들의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씨가 부르는 ‘시다의 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간간이 들리는 미싱 소리에 오래 전 음반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전순옥 씨의 노래소리는 힙합과 춤으로 나이트클럽에서 소비되는 ‘사계’의 주인공, 비좁은 공장에서 하루 종일 섬유 찌꺼기와 먼지를 마시며 폐렴으로 쓰러져가던 시다의 아픔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이 앨범에는 20년의 세월만큼이나 다른, 그런 정서와 시대적 현실이 이렇게 담겨 있다.


‘노동의 새벽’은 아직 현실이다.

 

한 달 생계비 50만원도 안 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사측의 손배 청구로 몇 년치 월급을 차압당한 채 살아가던 노동자가 결국 목숨을 끊어야 하는 나라. 아이가 굶어죽고, 돈이 없어 온 가족이 동반 자살을 하고, 남의 집 대문을 훔쳐서라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그래도 어느 한 쪽에서는 수백만 원씩 들여 아이의 생일 파티를 차려주는 나라, 아직 우리는 이런 나라, 이런 현실에 살고 있다.

‘노동의 새벽’은 ‘헌정’될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이 절망 벽 깨뜨려 솟구칠 억센 땀방울 피눈물 속에서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투쟁, 희망과 단결을 위해’ ‘쟁취’해야 할 ‘아직 오르지 않은’, ‘노동자의 햇 새벽’인 것이다.


거대한 안기부의 지하밀실을

이 시대의 막장이라 부른다.


소리쳐도 절규해도 흡혈귀처럼

남김없이 빨아먹는 저 방음벽의 절망

24시간 눈 부릅뜬 저 새하얀 백열등

불어 불엇! 끝없이 이어지는 폭행과

온 신경이 끊어 터질 듯한 고문의 행진


이대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무너질 수는 없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아 그것은

우리들 희망의 파괴

우리 민중의 해방 출구의 붕괴

차라리 목숨을 주자

앙상한 이 육신을 내던져

불패의 기둥으로 세워두자


서러운 운명

서러운 기름밥의 세월

뼛골시게 노동하고도 짓밟혀 살아온 시간들

면도날처럼 곤두선 긴장의 나날 속에

매순간 결단이 필요했던 암흑한 비밀활동

그 거칠은 혁명투쟁의 고비마다

가슴치며 피눈물로 다져온 맹세

천만 노동자와 역사 앞에 깊이 깊이 아로새긴

목숨 건 우리들의 약속 우리들의 결의

지금이 그때라면 여기서 죽자

내 생명을 기꺼이 바쳐주자.


사랑하는 동지들

내 모든 것인 살붙이 노동자 동지들

내가 못다 한 엄중한 과제

체포로 이어진 크나큰 나의 오류도

그대들 믿기에 승리를 믿으며

나는 간다. 죽음을 향해 허청허청

나는 떠나간다.


이제 그 순간

결행의 순간이다.

서른다섯의 상처투성이 내 인생

떨림으로 피어나는 한줄기 미소

한 노동자의 최후의 사랑과 적개심으로 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

마지막 생의 외침

아 끝끝내 이 땅 위에 들꽃으로 피어나고야 말

내 온 목숨 바친 사랑의 슬로건


"가라 자본가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마지막 시’ -

 

** 참고로 이 음반의 수익금은 전액 이주노동자 후원에 쓰여진다고 한다. 열심히 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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