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사나이

분류없음 2014/12/05 14:07

지난밤 오버나이트 시프트. 오늘밤도 연달아 할지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침에 근무 교대 준비를 하는데 한 클라이언트가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안녕 / 너 오늘밤에도 일하니? / 아마도 / 그동안 너랑 함께 있는 동안 고마웠어. / 그래, 고마워. 행운을 빌어.

 

악수를 했다. 이 남자는 내일 낮에 프로그램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오프였다. 스코틀란드 엑센트가 강한 오십대의 이 백인 남자는 약간 크리피하고 무뚝뚝하고 사회성이 많이 떨어진 듯 보이지만 나름대로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스탭들은 이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주 내내 저녁식사가 충분하지 않다고 불평을 했다.

 

음식이 부족하면 네가 요리를 해서 먹어 / 왜 미리 많이 안 만들어? / 많이 만들면 낭비야. 어차피 다 버려야 해. 규칙이 그래. 식중독이라도 걸리면 안되잖아. 음식안전 때문에 그래. / 조금 더 만들어서 컨테이너에 표시를 하면 되잖아. / 그래, 그건 좋은 생각이야. 음식이 남으면 그렇게 할께. 하지만 미리 많이 만들 순 없어. 부족하면 네가 해 먹어 / 난 요리를 못해 / 내가 도와줄께 / 태어나서 한 번도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어 / 별로 안 어려워. 네가 원하면 내가 도와줄께. 언제든 얘기해.

 

입이 왕십리까지 나온 채로 공동공간을 떠났다. 속으로 별 생각을 다 했다. 여기가 니 개인 식당이냐, 우리가 니 식모냐... 사실 우울증, 조현증, 조울증 등에 처방하는 약물 몇 가지의 부작용으로 식탐, 과식 등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렇게 집요하다시피 음식에 집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게다가 오십이 넘도록 한 번도 자기 밥상을 마련해본 적이 없는 '남자'라면 --- 말 다 했지. 게임 끝.

지난 밤, 근무교대 시간에 맞춰 공동공간에 내려갔더니 그 큰 부엌 테이블과 아일랜드를 다 독점하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너 요리하고 있네? 멋지다 / 응 / 언제 끝날 것 같아? / 곧.

 

이브닝 시프트에게 물어보니 장장 여섯 시간째 저러고 있단다. 게다가 부엌칼을 쓰고 있기 때문에 별도로 관찰을 해야 한다. 공동공간을 닫을 시간 - 새벽 한 시가 다가왔길래 이제 다 끝난 거지? 하고 물었다.

 

응, 이제 정말 끝났어. 나는 모레 여기서 퇴소해.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요리를 배워야 할 것 같아서 연습 했어. 오늘 만든 음식은 여기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줬으면 해.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남자, 나름대로 애쓰고 있었구나. creepy man 이란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노력하고 있었구나.

 

아, 그랬구나. 정말 고마워. 사람들이 참 좋아할 거야. 너 정말 멋지구나. 컨테이너에 표시하는 건 내일 아침에 하는 게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해 / 그래 그래, 나 지금 너무 피곤해. 

 

아침 여섯 시. 공동공간을 오픈하자마자 득달같이 내려와 포스트잇, 스카치테이프, 펜을 달란다. 한 시간동안 끙끙 네 개의 김치통같은 컨테이너에 각각 레이블링을 마쳤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것이다. 이 남자와 악수를 하는데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는 잘 모르지만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순 없지만 아버지에게도 어딘가 따뜻함과 노력하는 모습이 있었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볼 여유로운 눈을 지니지 못했다. 남자가 자기 방으로 떠난 뒤 냉장고를 열어 컨테이너와 레이블링을 살펴봤다. 흔들리는, 하지만 단호한 필체로 베지터블파스타샐러드, 튜나샐러드, 에그샐러드 등의 음식 이름과 식재료, 만든 날짜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이 남자는 아마도 우리들에게 무언가 가르쳐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렇게라도 대화하고 싶었는가보다. 잘 모르겠다. 이 남자의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하고 내 모습이 이 남자이기도 하다. 드문드문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침에 그렇게 퇴근했다. Take care Ian.

 

 

2014/12/05 14:07 2014/12/05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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