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Day's Work

분류없음 2016/06/02 10:11

 

* 어린이 그림동화 "하루" 와 아무 관련 없는 포스팅임

 

 

4월 28일은 세계 100여 나라에서 함께 참여하는 "국제산업재해사망노동자추모의 날"이다. 전세계가 다같이 희생당한 노동자를 기억하는 날로 이 날을 삼은 것은 채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캐나다에서는 (각각 주 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1984년부터 기념해왔다.  1914년 4월 28일 산재보상법 (Workers Compensation Act) 제정을 기념하자는 취지이다.  한국에서는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수은중독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문송면 군을 추모하는 취지로 한여름에 치렀다가 국제자유노련 (the 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 의 제안 뒤로  4월에 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꽃개가 살고 있는 온타리오에서는 4월 28일도 4월 28일 나름대로 치르지만 산재노동자의 날 (Injured Workers Day) 을 별도로 6월 1일에 더욱 의미있게 치러낸다. 오늘 주 의사당 앞에서 집회가 있었고 오후 2시엔 일터에서 희생당한 한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상영이 있었다. 함께 살고 있는 명민한 짝, 파트너의 제안으로 함께 참여하기로 하였고 낮에 같이 의사당에 도착했을 땐 너무 늦어 다시 발걸음을 영화상영 장소인 금속노동조합회관 (Steelwokers Union Hall) 으로 돌렸다.

 

 

20세 청년 로렌스 데이퀴언 "데이" 데이비스 (Lawrence Daquan "Day" Davis; "데이"는 가족들과 친구들 사이에는 불리우던 애칭이다) 는 고교를 졸업하고 갖가지 자격증을 땄지만 여전히 일자리를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용역회사에 지원서를 낸 뒤 플로리다 잭슨빌에 있는 바카디보틀링 (Bacardi Bottling) 회사에서 잡오퍼를 받아 첫 출근을 한다. 영화의 스틸 사진으로 쓰인 데이의 사진은 그가 첫출근 뒤 화장실에서 찍은 셀카 (selfie). 여자친구에게 셀카 사진을 보내 첫 근무의 설렘과 미래에 대한 벅찬 기대를 함께 나눴다. 그리고 90분 뒤, 그는 현장에서 적재화 기계 (palletizer machine) 에 깔려 죽었다. 데이는 여느 바카디보틀링 정규직들처럼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것으로 고용됐지만 그는 "정규직이 아니었다". 심지어 바카디보틀링 회사는 그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했어도 데이의 고용주 (employer) 가 아니었다.  데이의 고용주는 레미디스태핑 (Remedy Staffing) 이라는 용역회사 (Temporary agency) 였다. 사건 초기부터 과실을 인정하지 않던 바카디보틀링은 추후 데이의 어머니에게 $250,000의 정산 (settlement fund) 을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영화 제목인 "A Day's Work" 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데이는 근무 첫 날 변을 당했다. 그리고 그게 데이의 일 전부였다. "하루품" 을 뜻하는 이 말처럼 수많은 임시직노동자들 (temporary employees) 이 하루살이처럼 내일의 스케쥴도 모레의 스케쥴도 모르고 일한다. 오늘 하루 일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전부다. 데이도 그날 아침 전화를 받고 (on-call) 시프트를 받았다. 아마도 정규직노동자 한 명이 시프트를 취소했거나 그날따라 물량이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상영 뒤 토론에 참여한 영화제작자 가운데 하나인 데이브 드사리오 (Dave DeSario) 는 그 역시 임시직노동자 출신이다. 데이브는 토론자들 가운데 한 명인 산재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놓자마자 가장 큰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이 영화는 오늘 6월 1일, 캐나다에서는 처음으로 상영되었고 미국 내에서는 2015년 몇 군데 노동영화제를 비롯해 전역에서 상영됐다. 한국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을지, 상영을 할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다.

 

 

며칠 전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19살 젊은 청년 "김군"이 사고를 당해 현장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군"의 삶과 노동의 맥락은 "데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용역회사 은성메트로에 취직한 김군.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잘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월급 144만 원 가운데 백만 원을 떼어 적금을 부었다. 그 적금은 오백만 원에서 멈췄다. 밥먹을 시간조차 빠듯해 작업가방에 컵라면을 넣어다니던 한 청년. 그랬던 그가 지난 3월부터 쉬는 날마다 메트로 본사 앞 피켓 시위를 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제 산 자들의 몫이 되었다. 김군의 명복을, 데이의 명복을 빈다. 

 

2016/06/02 10:11 2016/06/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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