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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땅과자유'

‘우리는, 처음, 눈이, 맞았다’라고 말을 하면 이상한가. 그것도 동성과. 어떤 사람과 우연히 눈길이 마주쳤을 때 그 사람의 내력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너무나 우연히, 너무나 먼 곳에서 그런 사람을 만났다. 서울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5시간을 달려간 곳에서 우리는 기홍(28세) 씨를 만났다. 경남 밀양의 삼랑진역에서 ‘간이역 시노래 콘서트’가 있는 날이었다. 콘서트 후에는 천태산 산자락에서 박영희 시인의 시집 『즐거운 세탁』과 르뽀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밀양(密陽)은 말 그대로 ‘비밀스런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소도시의 정경에는 권태로움이 스멀스멀 고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그런 숨막히는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아케이드화된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몇 안 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이어서일까. 우리는 처음 눈이 맞았다. “한잔 하시겠어요?” 하고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잔을 내밀며 “삶이 보이는 창에서 왔지요?” 하고 되물었다. 자신은 대구에서 <땅과 자유>라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땅과 자유’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했더니 다름 아닌 내가 가입한 몇 안 되는 포털사이트 카페 중 하나였다. 대구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단체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신이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삶이 보이는 창』에서 나온 『말해요, 찬드라』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의 눈길이 하나의 길에서 충돌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시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박영희 시인 출판기념회 자리가 저한테는 일석이조인 셈이 됐어요. 밀양에서 한참 방황할 때 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이응인 선생님하고 근 3년 만에 만나 소주를 한잔 했고,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었던 고증식 선생님한테 드디어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같은 자리에 있던 고등학교 선생님인 고증식 시인이 기억하는 그는 특별히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학생도 아니었다. 어느 날은 기홍 씨가 찾아와 『창작과 비평』을 정기구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고등학생이 읽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지만, 기홍 씨는 그때 『말』이나 『리뷰』 같은 잡지를 읽고 있었고 그것이 입시 문제집보다 읽기 편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제자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그는 대학에 떨어지고 문학교실에서 1년가량 공부하게 된다. 거기에서 그는 이응인 선생님과 시보다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금까지 운동의 언저리에서 활동하게 되는 바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막 제대를 했을 때 이란주의 『말해요, 찬드라』를 읽었어요. 그 책을 읽고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작정 안산의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찾아갔어요.”

그러나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찾아간 곳에서 만난 상근자는 이주노동자들과의 끊임없는 상담으로 바빴고, 그는 사무실에 뻘줌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를 찾아가 가입한다. 그러나 타향에서 계속 백수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일차적으로 이주노동자와 함께할 수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한다. 그때 고향 선배에게 대구에서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고는 다시 짐을 싼다. 그리고 그는 대구의 ‘땅과 자유’라는 모임에 처음 나가게 되고, 거기서 여러 가지 고민들을 듣게 된다.

“처음 만난 날 필이 꽂혔어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났죠. 2004년 3월 문정현 신부님하고 함께한 ‘평화유랑단’이 대구에 방문하는 일정에 맞춰서 지역에서 평화 주간을 만들어서 한 달을 집중했죠. 비록 한 달밖에 안 된 사이였지만 굉장히 가까워졌어요. 제가 원래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전혀 그런 게 없었죠.”

‘땅과 자유’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게 특징이라고 기홍 씨는 말한다. ‘땅과 자유’라는 이름은 켄 로치 감독이 1995년에 만든 스페인 내전을 그린 영화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과 멕시코혁명(1910~1940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20세기 초 멕시코에서는 옥수수 농장주로부터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농장주들은 노예노동에 항의하던 농민들을 말에 매단 채 옥수수밭을 달리게 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과 멕시코혁명의 영웅 사파타는 옥수숫대를 자르던 낫을 들고 일어나 봉기한다. 그때 내걸었던 구호가 바로 “땅과 자유”였다. 그리고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던 날, 치아파스 원주민들은 빼앗긴 땅과 자유를 찾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기홍 씨는 이것이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여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농사를 지어야 할 땅과 그 땀으로 일궈진 인간의 존엄성이 깡그리 사라질 위기가 바로 한미FTA예요. 이런 마음을 ‘땅과 자유’의 모든 회원들이 가지고 있고, 그 문제를 온몸으로 안아 싸우고 있지요.”

그래서 이 모임은 ‘땅과 자유 학교’를 열어 공부하고, 그 고민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있다. 『녹색평론』을 기본으로 하여 매달 열리는 이 학교는 ‘세계화에서 지역화’라는 주제로 반년 동안 공부하기도 했으며 이주노동자, 한미FTA, 자치·자율·자급, 이반일리치, 삼성과 싸우는 김성환 위원장 등 다양한 주제로 고민하고 있다. 이들은 ‘공부 없이 투쟁 없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배우고, 또 실천한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은 지역의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며 이주노동자 집회,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집회, 한미FTA 집회 등에 참여했다.

그리고 ‘땅과 자유’는 2005년 11월부터 2006년 6월까지 200일 동안의 투쟁을 전개했다. 그 첫걸음은 2005년 11월 23일, 국회에서는 쌀협상 동의안 비준을 강행했던 날이었다. 그날 ‘땅과 자유’ 회원들은 긴급하게 모여 논의한 끝에 이는 “땅과 소농, 풀뿌리 민중에 대한 폭거”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4일 7시 대구백화점 민주광장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만든 피켓과 촛불을 들고 모였다. 그들은 ‘우리 쌀’을 지키는 것이 농민들만의 고립된 투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농민들이 짓는 양식에 기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명붙이들로서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는 일에 함께하는 것은 땅과 농촌, 농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우리의 주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길이라는 것이 ‘땅과 자유’의 생각이었다. 마이크와 앰프도 없이 “쌀 포기, 농업 포기 국회비준 규탄한다”며 목청껏 외쳤다. ‘땅과 자유’ 회원들끼리 시작된 작은 함성은 지역의 모든 단체들과 함께하는 연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월의 칼바람, 연말연시의 소란함, 거기다 설 연휴까지 거치면서, 그리고 이후 대구백화점 앞 광장의 느티나무들이 겨울을 이기고 새싹을 틔우고 그 잎이 무성해지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하면서, 그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 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1만 7천 명 가까운 시민들로부터 지지 서명도 받았다. 기홍 씨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애먼 헤나시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는 냉소적인 질문에 했던 대답을 자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오,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나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200일 투쟁’ 기간 동안 평택 황새울과 새만금, 천성산과 함께했다. 그리고 비정규직 법안 날치기 처리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 그리고 철도 상업화에 저항하여 파업을 벌인 철도노동자들의 호소를 이 촛불집회에서 공유했다. 또 39일째를 맞던 2006년 1월 1일에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농민군 봉기 12주년을 기리는 특별한 행사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2006년 6월 11일, ‘우리쌀과 농업을 지키기 위한 촛불문화제’는 장장 200일의 투쟁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기홍 씨는 이렇게 말한다.

“200일 동안 이어져왔던 그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어요. 이제 촛불이 새로운 투쟁의 불씨로 옮겨 가기 시작한 거죠.”

이제 ‘땅과 자유’는 땅으로 돌아가 뿌리를 내리려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뿌리가 도시로 뻗어나가 서로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소비적인 삶에서 벗어나, 생활이 곧 운동이고 운동이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고민하고 있다. 다시 말해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 그 과정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기홍 씨는 숨막히는 도시가 아닌 흙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준비를 하도록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권정생 선생님의 말처럼 가난한 삶을 우리 스스로 선택해야 해요. 승용차를 버리고 30평 아파트를 반으로 줄이는 거죠. 그래야만 석유 전쟁에 파병을 안 해도 떳떳할 수 있잖아요.”

 

*격월간 '삶이보이는 창'  57호에 실린 글이다. 술자리에서 얼떨결에 인터뷰에 응했는데, '땡' 잡았다고 해야하나^^;; 함께 만들었고, 함께 하고 있는 "땅과자유"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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