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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비운동을 규정하는 목적

  • 등록일
    2007/02/24 14:29
  • 수정일
    2007/02/24 14:29
리우스님의 [무지랭이지만] 에 관련된 글. 내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은 이런 문제였다. 그래, 내가 생각하는 그 목적도 말하지 않고서 남들에게 "이유가 뭐요?"라고 물으니,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지. 그저 신경질적인 어떤 걸로 보이겠지.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아직까지는 듣지 못했으므로, 나는 내 맘대로 글을 쓸란다. 이 글에 대해 다른 사람이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고 하면, 머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의 구조가 여전히 궁금하겠지.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함부로 추측하지는 않겠다. 추측할 능력도 없고, 내 고민을 확장하기에도 바쁘다. 물론 내 의견에 대한 반박이나, 다른 의견은 얼마든지 환영한다.


'운동/비운동'을 규정하는 것이 자기 고민의 최종적인 단계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것을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에 내가 논쟁의 목적을 두지 않는 이유다. 반자본주의를 논할 때에도 자본주의를 갈아엎는 행위가, 반자본주의운동의 목적이 될 것이고, 육식거부를 논할 때에도, 현재의 육식시스템을 갈아엎는 것이 육식거부운동의 다음 목적이 될 것이다. (여기서 이게 목적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논외로 하자.) 우리가 운동이라고 규정해온 것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운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서 다른 것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번 논쟁에서 채식에 대해서도 그 목적을 논한 것도, 무엇을 이루고 싶은 것인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주로 논해온 것은 어떤 운동의 목적이었다. 여전히 그런 논쟁은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운동/비운동'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고민의 최종적인 단계가 아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운동이라고 규정한 것들에 한해서, 실천적인 고민을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규정하지 않아도 실천적인 고민을 하겠지만, 운동인 것과 운동이 아닌 것들에는 조금은 다른 수위의 (혹은 다른 형태의) 실천을 할 지도 모른다. 아니,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조금은 다른 수위의 실천을 결정하기 위한 근거로써 운동으로의 규정을 고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문제가 아니었다면, '운동/비운동'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필요없는 일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운동/비운동'을 규정한 결과물이 실천의 수위(혹은 형태)를 결정하는 근거로 사용된다는 점에 있다. 앞과 똑같은 이야기인데, 결국은 규정의 결과물이 다른 어떤 것을 결정하는 데에 근거가 되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운동/비운동'의 규정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느냐의 논의로부터 자신의 '운동'을 고민해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운동'을 정의해야 했고, 운동을 '정의'하지 않으면, 자신의 '운동'에 대한 고민이 부재하게 되는 것이었으며, 자신과 다르게 운동을 정의한 사람들과는 끊임없이 맞서야 했다. 이런 틀 속에서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를 만들기 위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혹은 아무도 규정할 수 없는) '보편타당성'을 고민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의 진심에 악의가 없음은 알고 있다.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를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운동을 서로 다르게 정의할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맞설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맞설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내에서 존중하려는 목적이 있다. 결국은 이것 역시 의도 자체는 함께 나아가기 위한, 소통을 위한 시도였다. 여기까지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시도 자체의 긍정적인 목적과는 다르게,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를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부딪치고 만다.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타당성'을 근거로 삼으려고 하고(이건 EM님이 했고), 또 그 근거조차도 보편타당하지는 않다고 주장(이건 내가 했다)하기도 한다. 사실은 두가지 경우 모두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타당성'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뿐이었다. 결국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자의적인 영역에서 고민한 결과물을 제시해놓고, 네가 맞네, 내가 맞네... 이런 논쟁을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소통을 위한 전술(소통을 하나의 '전략'으로 본다면,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에 대한 논의가 전술이다)을 잘못 수립했다는 평가를 해야할 것이다. 아무도 자의적이지 않은 영역에서는 '보편타당성'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일관성을 가진 운동의 정의'를 만들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소통을 위한 이런 전술에 대하여, 뼈저린 반성과 평가를 해야하는 것이다. 자의적으로 '운동/비운동'을 규정하는 것 역시 자기 고민의 최종적인 단계가 아니다. 이번 논쟁에서 나는 채식을 나의 운동이라고 자의적으로 규정했다. 이것 역시 내 고민의 최종적인 단계가 아니었다고 본다. 물론 내가 채식을 나의 운동이라고 규정한 것은 운동을 규정하는 것이 결국은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이것 역시 내 고민의 최종적인 단계가 아니었음을 먼저 논했어야 했다. 내가 채식을 나의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것 역시 다른 목적이 존재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채식, 과외, 그리고 불질까지도...)중에서 채식을 다른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선언으로 내가 채식을 나의 운동이라고 규정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정합성을 가지고 있느냐는 논외로 한다. 내가 채식을 운동이라고 규정하면서, 내 머리속에서 다른 것들보다 채식을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할 대상으로 배치시켰다는 지점 자체가 중요하다. 여전히 다른 것들도 계속적으로 정합성을 따져야 하는 것이고, 고민을 해야하는 것인데도, 나는 다른 것들을 운동이 아니라고 규정하면서, 채식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집중했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채식을 운동이라고 규정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채식을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내 삶의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것들을 우선적으로 포기하겠다는 순서배치에 지나지 않는다. 곧 다른 것들보다 채식에 우선적으로 권력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라고 규정한 순간부터, 내가 채식을 지속하는 이유는 그것이 운동이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채식은 어떤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고, 채식이 가지는 변혁적인 의미들을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미 채식은 운동이니까. 나에게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 내가 채식을 실천하는 근거가 되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게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채식을 하는 근거는 저기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그 근거들이 채식을 실천하는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야 하지, '운동/비운동'의 틀을 거쳐서 채식을 실천하는데에 영향을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구조를 판단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결국 내가 채식을 운동이라고 규정한 것은 현재 내 삶을 구성하는 다른 일들과 채식 사이의 상대적인 권력을 조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자의적으로 채식을 운동이라고 규정한 것조차도, 내가 채식에 대해 고민한 최종적인 단계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일단 '운동'이라는 권력을 부여했는데, 그 권력이 이 시점에서 왜 필요한 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여태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느끼고 있다. 그 권력은 그저 자기가 만족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여기까지 오니까, 나 역시 '운동'이라는 말로 현재 하고 있는 채식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가 자의적으로 운동을 규정한 것 역시, 누구도 자의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보편타당성'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의적인 영역에서만 '보편타당성'을 규정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나의 운동을 규정한 것이었다. 자의적인 영역에서만 '보편타당성'을 규정한다는 이야기는 '당파성'을 구성하는 것 중에 하나(자신이 어떤 주장에 동의하느냐, 아니냐의 수준)로 봐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한 운동의 정의는 철저하게 개인적일 수 밖에 없으며, 나와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운동에 대해서는 그 주장에 대한 동의를 떠나서 긍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보편타당성'이라는 개념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의 연결지점을 분석하려고 했던 시도는, '보편타당성'과 '운동'의 상관관계가 없음을 설명하고 있지만, 어쨌든 '보편타당성'을 내가 맘대로 규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운동/비운동'을 '보편타당성'을 기준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대적인 권력을 규정하는 것의 일종이다. 여기서 논하고 싶은 지점은 '보편타당성'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보편타당성'을 규정하는 것이 가지는 의미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타당성'을 누군가(나를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이다)가 규정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었으며, '보편타당성'을 규정할 때, 그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왜 보편타당한가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아니,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보편성은 두루 통해야 하는 성질을 의미하는데, 두루 통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검증할 길이 없고, 검증한다고 해도, 결국 두루 통하느냐, 두루 통하지는 않느냐의 모호한 부분에 대한 결정은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마다 다른 판단이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보편타당성'을 아무도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증명할 방법은 없는데, 보편타당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것이 상품화가 되는 것이 보편타당하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이 보편타당하다고 할 수도 있다. 누구든지 무슨 주장일지라도 보편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물론 아무도 보편타당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어떤 주장에 대하여 보편타당하다고 했더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짠짠 나타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람과 소통할 의지가 있는 이상, 보편타당성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일이 된다. 이런 단계에 오면, 누군가의 생각은 보편타당하고, 누군가의 생각은 보편타당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바로 배제의 논리이다. 곧, 보편타당하다고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보편타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기서 권력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은 논외로 하자.) 그렇다면, '운동/비운동'을 '보편타당성'을 기준으로 규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결국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자신과는 다른 일을 하는 사람과의 소통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자의적인 영역에서 '운동/비운동'을 '보편타당성'을 기준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도, 내가 운동이 아니라고 규정한 것들에 대하여 소통의 의지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소통의 의지가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우리가 '운동'을 고민한 이유가 아니었음에도(혹시라도 맞다면 어쩔 수 없지만...), 결국은 일이 이상하게 꼬여버린 게 되었다. '운동/비운동'의 규정, 그 속의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운동/비운동'의 규정은 '보편타당성'을 무기로 한 상대적인 권력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권력은 어떤 경우에 긍정될 수 있는지는 나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나는 다만, 이런 식으로 구성된 권력은 자신의 고민의 영역 밖에서 고민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것이 '운동'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의적으로 선언할 때에는 내가 크게 고민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에게도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다른 고민보다 위에 서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또 어떤 것에 대해서 '운동'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을 '운동'보다 아래에 배치하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규정은 오직 상대적인 권력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대적인 권력을 만들게 되는 일을 할 것인가, 상대적인 권력을 해체하는 일을 할 것인가의 선택의 순간이 또다시 내 앞에 왔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은 당신 앞에도 이미 와 있음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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