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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09
    최악의 시나리오
    nameless
  2. 2006/02/06
    역시...
    nameless
  3. 2006/02/03
    인물
    nameless
  4. 2006/02/03
    컨트롤된 카오스 -수정 중-
    nameless
  5. 2006/02/02
    2월 2일에.
    nameless
  6. 2006/01/18
    0002
    nameless
  7. 2006/01/17
    1월 17일 -0001
    nameless
  8. 2006/01/17
    지하실 하나의 탈출 - 토마스 베르하르트
    nameless

최악의 시나리오

 내 나이가 이젠 어리지 않다.

 

 크리스 마스가 지났음에도

 아직 표출되지 못 한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어쩜. 표출 되더라도 인정을 받지 못 할 능력이라거나

 표출이 된다 한 들 달라지는 건 없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은 못되 먹어서

 누군가의 비위나 맞추며

 인간을 생성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위인은 못 된다.

 

 고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써 두며

 지금에 충실 할 것이다.

 

 이 시나리오는 지금에

 내가 벗어나지 못 하는 작업과 공부를 하고 나서

 원없이 한 후에

 이후 어디에도 받아 들여지지 않았을 때를 위한

 최후의 최악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하나.

 고 김영갑씨 처럼 우도에 가서 구멍가게를 한다.

 

 둘.

 베트남 하룽베이에 가서 뱃사공이 된다.

 

 셋.

 칸쵸 공장에 취직을 하여 몇년동안 돈말 벌어

 경비행기를 산다.

 

 넷.

 역시 어느 맘에 드는 동네의 맘에드는 물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돈을 벌어

 아프리카로 간다.

 몰리몰리 야생 동물 보호 구역에 침입에 성공한다.

 

 하나와 둘은 그래도 연명하며 살아 가는 것이고

 셋과 넷은 죽음에 도전해 보는 것이다.

 도전? 아니.... 내 운명을 내가 길이로 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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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역시에 학교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 거였나 보다.

 

 숙제 한답시고 펼쳐 놓은 채

 딴 짓만 하고...

 그렇다고 글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시시껄렁하게 돌아다니기나 하고.

 

 올 해 부터는 주말에도 학교에 간다.

 

 조낸 달린다.

 노흡 노흡 노흡

 

 +

 0도 오라메디랑 얘기 하며 느낀 건데

 '가지만 넣으면 뻑 가' 라고 얘기 하던 초등학생 같은 요즘의 나다.

 큰일이기도 하지만....

 뭐....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ㅛ-;;

 

 

올 해는 모드 잊고

 하나만 향해 가는 거다.

 

 

++

 

 마음이 달라 져서 일까?

 정말 이전의 나와는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많이 멀어진 느낌.

 나쁘고 좋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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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슬라보예 지젝, 노르베르트 볼츠, 움베르트 에코,

 미셸 우엘벡, 아키프 피린치, 미노루 후루야 

 힐먼 커티스, 유키 구라모토, 갈우,

 

 

 

 

 

 몽테뉴, 롤랑 바르트, 장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오스카 와일드,

 토마스 베른하르트, 글렌 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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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된 카오스 -수정 중-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은

  내게있어 2006년의 책으로 정해질 만큼

 내가 원하던 물음에 답(혹은 답변을) 주었고

 정리되지 못하던 말들을 그가 얘기 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는 잘생기기 까지....-ㅛ-;;

 

 그럼 한 번 다시금 살펴 보까나나나낭.ㅎㅎ

 

앞장. 표지엔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카오스와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휴머니즘적 인간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는 뉴미디어를 우리 실존의 유희 공간으로 파악해야 한다

 

 +

 흠.... 카오스와 . 혼란과 화해 하고 우리 실존의 유희 공간으로 뉴미디어를 파악하는 것은 알겠소 수긍이 가는데 과연 우리. 인간이 휴머니즘적 인간상으로 부터 해방 될 수 있을까?

 과연. 가능 할까?

 글쎄.... 지금의 의료의 발전, 기술을 봐서

 십수년이 지난 어느 날엔 인간의 몸 속에 기계가 어느 정도 많이들 자리 잡고 있을시에 우리가 인간인지 사이보그 인지 말 하기 애매해 지는 그 시간이라면 모를까?

 아직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선 함께 자리해 마주 보며 얘기를 해야 한다지 않는가?

 그 시간속에 함께 있으며 함께 공유하며 그 사람의 음색과 톤을 주시 하며 눈빛과 표정을 주시할때에 우리는 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 한다고 여기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인물과 대화를 할때 우리는 어느 사이에 자신의 환상(?)이라 표현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 그의 얘기를 그 얘기 그대로 듣기 보단 자신이 생각 한 것에 맞춰 받아 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 할 것이다.

 그 것은 그 만큼 그 상대에게서 바라고자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 감정이 말하지 않고 대화나 눈빛만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도 하고

 대체로 방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을 스캔 받아 놓아 올리겠지만

그의 이미지와 함께 약력이 있다.

 

 1953년 출생으로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교수를 거처 1992년부터 에센대학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소장 철학자이자 미디어 이론가이다. 독일 전통 사상과 현대 미학의 줄기 속에서 뉴미디어와 최신 트렌드를 분석하는 데 탁월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저술 분야는 독일 철학과 미학, 현대 프랑스 철학, 뉴미디어와 컴퓨터, 디자인, 사진 영상, 그리고 사회.문화적 트렌드 분석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다.

 

p22

우리 시대의 몇몇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재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카오스라는 안경을 낀다면, 우리의 세계 인식은 변화될 것이다.

 

'혼돈으로 부터의 질서'

 

p23

 우리는 항상 카오스와 컴퓨터, 창의성과 커뮤니케이션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접하게 된다.

 

p24

포스트 휴먼

 오해는 금물. 포스트 휴먼은 결코 비인간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인간의 유적 본질은 그것이 휴머니즘적 인간상의 속박을 벗어 던질 때 비로소 자유롭고 개인적이며 동시에 다채롭게 전개된다. 이러한 새로운 '포스트휴먼적' 실존의 콘텍스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뉴미디어들이다.

...

 미디어의 저편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p25

윤리에 대한 요구

세계는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가 지금보다 더 좋았던 적도 없었다.

 

+

늘 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행복과 불행 아니였을까?

 그렇담 우리가 쫓는 것은 과연 무얼까?

 애초에 쫓는 다는  것은 없나? 글쎄...

 무언가를 쫓는다는 표현보단 계속해서 욕망을 채운다는 것이 맞겠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끈어져 버리는 생명은 아니니

 그렇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안일함을 추구하겠지.

 그런데 안일함이라. 이 단어 속에 뭔가 부정적인 것이 많이 들어 있는 듯한 느낌인데.

 건 아니란 말이지... 사실 그런 누굴 보구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담 나는 전혀 그러지 않는가?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거든.

 누굴 보고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의 인간은 어디에도 없다구.

 

 흠....

-

 

변화되는 것은 유희 공간들이다. 우리는 가능성의 성취를 위해 그 유희 공간들을 인식해야 한다. 이전의 모든 과거사 ---또한 바로 직전의 과거사-- 들을 비교해볼 때, 타당한 것은 폭력적인 분쟁들과 폭력적인 상실들이라는 것이다.

 문화는 하나의 제로-섬-게임이다.

 이것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적으로 가능한 것의 유희 공간들에 접근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올바른 삶으로의 안내를 요구한다. 그 대가로 그들이 얻는 것은 ---파울 봐츨라뷔크의 놀라운 표현에 따르면--- 불항한 존재에 대한 암시들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미셸은 이미 1910년에 다음고 같이 언급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시대에는 윤리가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이다."

 

 

윤리에 대한 현재의 떠들썩한 요구는 비록 충족될 수는 없으나, 충분히 해명될 수는 있다. 윤리를 요구하는 자는 세계를 이해하는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윤리는 정치가 아니고 더욱이 인식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 고대 그리스인들의 행복했던 시절에는 윤리가 실제적으로 올바른 삶의 교훈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윤리에 대한 요구란 곧 체념이 현상들이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서 문화와 대화 그리고 정신적 섬세함의 몰락을 목도하고 있다.

 

즉 윤리적이라는 것은 진화 과정에 적합한 것, 다시 말해서 개방성, 균형으로부터의 멀어짐 그리고 카오스와의 긍정적인 과계이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하려는 것은, 미래의 세계-내-좌표설정은 윤리학으로부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미학으로 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미학은 인간을 가능한 세계 기획들의 연결지점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p27

휴머니즘이라는 사슬들

 

 점점 더 완벽하게 기능하는 기술공학적 주변환경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단지 방해요소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

도회성. 대체 뭔 뜻일까...

어버너티. 휴머니티와 좀 상반된 뜻을 지닌 듯...

-

 

p29

불안과의 담쌓기와 경고의 수사학

 

불안보다 더 인기 있는 것은 없다. 불안은 항상 피드백을 위한 기회를 노린다.

불안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리스트는 끝을 낼 수 없을 정도다. (예로 민족간 전쟁과 종파간 분쟁, 새로운 민족 대이동과 그에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는 이민족에 대한 증오 등등) 

불안은 항상 옳다. 

그리고 고유의 불안과 논쟁하는 사람은 반증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불안은 사고를 위해서는 쓸모 없는 것이다.

 

p31

삶의 '의미'

 

우리의 세계 공동체는 조직상으로 볼 때는 모험의 다발이고, 기술적으로 볼 때는 하나의 미디어 복합체이다. 특히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 점점 더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뉴미디어들에 대한 불안은 아주 본질적인 다음과 같은 상태의 징후이다: 오늘날 직접적인 세계 지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세계 지각을 대신해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의해 매개된 지각이 등장한다. 바로 이 때문에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에 입각한 지각을 척도로 현실에 대한 묘사 내용을 측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식인들에게서는 다음고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지식인들이 애용하는 유희 도구인 '비판' 이라는 것이 붕괴된다는 사실이다.

 비판을 대신해서 실행이 등장한다.

 

p32

 현실적인 세계는 사상 처음으로 모든 인간들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동시간적으로, 고통없는 방식으로 경험 가능 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매스미디어 들만이 하나의 보증된 세계 지각을 제공한다.

 

 카오스는 질서의 반대물이 아니다.

 

 p34

디지털 시대의 문맹인들

 

휴머니즘의 인간은 마치 이방인처럼 고도의 복잡성과 극도의 가속력 그리고 비물질성의 극단으로까지 치닫는 미세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그런 세계를 배회한다.

 

 

 

상호 의존성은 통일성을 상실한다.

 

 

1. 카오스의 화해

 

두되생리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창조적인 사고와 창의성이, 데카르트식이 정상적인 방법들의 결과물이 아니라, 두뇌의 카오스로부터 싹튼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가령 마르셀 프루스트의 유명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도 ''의도 하지 않은 기억''이라는 창조적인 카오스 이론이 자리잡고 있다.

 

 사고들은 따라서 두뇌 속에서의 우연적인 출렁거림들의 선택적 강화작용을 매개로 생성되는 상태들이다.

 즉 사고들은 놀랄 만큼 질서적이지만, 그런 사고에 깔려 있는 신경 과정들은 완전히 카오스적이다.

 뉴런들의 우연적 '점화'인 카오스는 피드백 작용을 한다. 그리고 질서의 모범이 생성된다.

 그런 현상들을 '창발적emergent' 이라고 한다.

 

 번개처럼 번득이는 사고 Gedankenblitz!

 

 서로 관련이 없는 정보의 구성요소들이 갑자기 이해 가능한 모범을 형성한다.

 

 자기를 자기 내부에서 조직하는 카오스

 

 자기조직 작용이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하는 바는, 어떤 느슨하게 결합된 미디어는 피드백들을 통해서 스스로 하나의 진화적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오스의 자기창조이다.

 생산적인 혼돈 상태를 위험한 무질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노발리스가 "단지 그와 같은 혼돈 상태만이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킬 수 있는 카오스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의미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세계-카오스는 법칙과 목적없이 인간과 인간사고가 능성의 저편에서 완성되는 필연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카오스의 유용성

비선형성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체계의 행태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고 그것의 관계들은 비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체계를 창의적으로, 저항 능력을 갖추도록 만들고 있다.

 

 우리의 생명이 창의적으로 되는 것은 성적인 종족 번식과 죽음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발생학적 다양성과 개인적 특수성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섹스는 진화 과정을 카오스적-창발적으로 만든다"고 후베르트 마르클은 언급했다.

 

 우리의 생명이 저항능력을 갖추는 과정은 선형적인 과정이 아니라 프랙털적 리듬 속에서 진행된다. 건강의 구조는 기하하적 질서보다는 카오스에 더 가깝다.왜냐하면 생물학적 균형 상태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비선형적 체계들의 프랙털적 리듬들만이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생리학적인 변화 능력을 생명에 대해 보장한다.

 카오스는 따라서 일종의 우연의 발전 장치로 기능하는데, 그것은 체계가 변화된 환경 조건들에 적응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건강하다는 것은 프랙털적 시가느이 요동하는 사이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카오스가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심장이 규칙적으로 박동한다면, 심장마비에 처할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은 생명이 비선형적인 피드백 작용들을 매개로 방해물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카오스의 잡음은 결코 질서의 방해물이 아니다.

 정반대로,

 우리 세계의 질서는 단지 실재의 무차별적 소음(random noise) 속에서 하나의 우연적 사건에 불과하다.

 

 우연과 카오스, 우연론적인 과정과 불완전한 결정론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 세계의 질서가 비합리성의 주변부에서 위험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모던의 위대한 새로운 과학들의 공통분모이다.

 

 - 기브스의 통계학

 - 루트비히 볼츠만의 확률이론

 -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분석

 - 위너의 사이버네틱

 

  근본 문제: 고도의 복잡성

 

 양자 역학의 발전 이래로 우리는 초기 투입치의 측정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역동적인 체계들의 발전은 예측될 수 없다.

 

 복잡한 체계들의 카오스적 행태는 무수한 구조들이 서로 얽혀 있음으로써 생성된다. 개별적으로는 합법칙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전체 체계의 효과들은 그러나 예측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과 카오스는 고도의 복잡성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카오스는 고도의 복잡성을 지니는 사태들을 분출해 내는 징후이다.

 

 계획된 질서는 이성의 함정이다.

 

 자유는 분기작용과 피드백으로 점유된 유희 공간이다.

 

 파국들을 통한 자기 보존,

 이것은 물론 '카오스의 자기조직 작용'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으로 들린다. 주목할 만한 수학자 르네 톰의 소위 말하는 파국 이론은 파국적인 것의 부정성을 순화하고 있고, 만델브로트의 프랙털 기하학은 카오스적인 것의 부정성을 순화시키고 있다.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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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소성의 유희

 화폐는 카오스-관리의 가장 성공적인 미디어이다.

 

 화폐는 우리에게 실제적 평등의 결코 흔치 않은 삶의 단편 중 하나이다. 즉 충분한 구매력의 평등.

 

 돈과의 교제는 희소한 자원과의 교제를 위한 최고의 교육장이기 때문이다.

 즉 화폐는 우리 사회를 증오. 폭력 그리고 보복과 같은 인간 적인 것들로부터 해방시킨다.

 

 

 미디어로서의 화폐

 화폐의 자율적인 순환작용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부담을 덜어준다. 그것은 마치 미디어처럼 기능한다. 화폐는 특성이 없는 권력이다고 말할 수도 있다.

 

 화폐는 기억을 하지 않는다.

 화폐가 마치 미디어 처럼 기능

 

신 대신 돈

 돈은 우리가 삶의 '고유한 의미'를 찾도록 강요받는 것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방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고유한 형태로 존재하고 의미있게 사는 것보다 더 힘들고 좌절을 가져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세계의 '의미'로 부터 점점 더 소외된다.

 

 

프로그램 대신 디자인을

 하이퍼 미디어들은 프로그래밍된다기 보다는 디자인된다. 중요한 것은 컨셉트적인 것의 예술이다.  예술사학자 빌헬름 보링거는 이미 20세기 초에 이것을 '사유적 감수성'이라고 불렀다.

 

 세계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그것을 결코 '개선'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부존자원으로서의 카오스

 카오스는 따라서 더 이상 질서의 방해물이 아니라,  질서의 역동적인 전개 그 자체 이다.  

 (엔첸스베르거의 평론집'아!유럽'에서 재인용); "유럽은 하나의 프랙털적 대상이다. 카오스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부존자원이다. 우리는 차이를 자양분 삼아 살고 있다."

 

 

인간이라는 허상-

 

요나스는 무지를 포기될 수 없는 인간의 기본권으로 설정하고 있다.

 

 

즉 1800년 경 기술공학적 발전들이 급속히 가속되었다. 이것은 휴머니즘의 개념들로써는 더이상 묘사 될 수 없는, 에네르기들과 과정들을 허용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속도가 특별한 목적으로 생산된다. 세계는 하나의 영화적 도취 상태에 빠진다. 스타일은 유행으로, 예술은 광고로 대체 된다.

 오늘날 이 모든 것은 자명하다. 이제는 예술가가 아니라 디자이너들이 사회적 창조성의 고유한 추진력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발전 추세는 여전히 강화.가속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서, 완전히 새롭게 지향된 미학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운 예술들의 이론으로서의 미학이 아니라, 새로운 뉴미디어 현실의 이론으로 이해되는 미학을. p.248

 

 

 휴머니즘의 문자 의존적 문화는 진리와 역사라는 고상한 개념들로 우리를 묶어왔다. 이것은 기술 공학적 뉴미디어에 대한 냉철한 시각을 오도하고 있다.

 

 

 

 

-망각은 시간 유희 공간들을 열어 놓는다.

-망각은 정보의 과잉부하를 경감시킨다.

-망각은 인간의 데이터 처리 과정을 유동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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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뉴미디어의 세계

 

 세계의 전자화

 

 에른스트 캅은 1977년 기술의 철학에 관한 자신의 근본 원칙들을 설정 하면서 '텔레그래프 시스템과 신경 시스템의 상호 소통하는 병렬화'를 가정했다.

 

 식물성의 신경시스템이 유기체의 세계와 기술공학을 경계형식으로서 중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즉 인간과 미디어 사이에는 '주체-객체-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라디오.전화 그리고 텔레비전은 우리 자신의 바깥에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비판적으로 거리를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중앙 신경계가 유기체의 연결점들과 감각들을 조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자공학적 미디어들은 세계 사회의 자기완성을 조정하고 있다.

 좀더 강조하면, 뉴미디어들이 존재한 이래로, 비로소 '인류'라는 것이 존재했다.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소말리아나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일이 우리와도 '다소 관계된다'는 것은, 단지 전기가 세계 커뮤니케이션을 기술공학적으로 실행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전자 미디어들은 모던적 인간의 초연함[칸트의 미적 무관심성]을 극복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대해 자랑스러워했으며, 자신의 자율성을 초연함[거리 설정]의 파토스로 특징지었다. 이러한 태도는 전자화된 세계에서는 의미 없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과정들에 가장 인텐시브하게 관계되고 있을 때, 가장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때문에 우리의 현재를 '포스트 모던적'이라고 성격짓는 것이 아주 유의미하게 되었다.

 전자화된 세계에서는 표면과 심연, 가상과 진실 사이에 긴장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로 상호 의존적인 사건의 장과 관계하고 있다.

 

 

 새로운 근본 개념들

 

 매클루언은 이미 50년대에 전자미디어가 우리 세계와 세계 지각에 어떤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가를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분명하게 관찰했다.

 

 *접촉성: 우리는 매스미디어의 소음과 영상의 흐름들에 의해 결코 헤매서는 안된다. 전기는 우선 눈과 귀에만 유익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모든 세계 사물들과 '접촉'하게 하고 그것을 탐색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터치'라는 유행어는 우선 사물들과의 피부적 접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 속에서의 사물들의 생명 자체를 의미한다. 촉감은 관계를 심화시키는 실재이다. 그러나 전기 역시 전적으로 관계를 증진시키는 요소이고 그 때문에 촉각적이라고 성격지을 수 있다. 전기는 하나의 극단적인 상호 의존성과 동시다발적 사건 발생의 세계상을 창출한다. 그럼으로써 전기는 시각적인 도서 문화와 촉각적인 뉴미디어 세계의 중개자로 특징지어진다.

 

*공감각: 전기를 통한 가속은 이제 형상적으로는 전혀 표상할 수 없는 관계들을 창출한다. 이로써 서양 문화에서 시각 우위가 끝난다. 전기는 감각들과 미디어의 공동 유희를 보증하고 있다.

 

*인스턴트성: 전자화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원인-결과-연관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나의 순간적 결단으로서 현존한다. 가령 스위치만 누르면 빛이 존재한다. 인스턴트커피는 이를 위한 하나의 멋진 메타포이다. 이제 더 이상 커피를 끓여 걸러먹지 않는다. 그냥 휘저어 마시면 된다. 전기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바이패스 장치이다.

 

*비선형성:알파벳을 습득한 계몽된 인간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유 행위의 선형적 논리로 기울어진다. 그러나 전기는 그와 같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우연적 사고방식을 대신해서 체계와 주변 환경 사이에서 어떤 대화의 모델이 등장한다. 피드백 작용은 선형성을 끝장낸다. 새로운 사고방식은 이제 '원인'들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효과들에서 설정된다.

 

*탈중심작용: 이미 말했듯이, 전자적인 미디어들은 어떤 바이패스 장치와 같은 것을 매개로 시간을 공간을 우회한다. 그럼으로써 중심과 주변부의 구별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전화. 팩스 그리고 텔레비전은 오늘날 우리가 대도시에 있든 시골에서 살든 상관 없게 만든다. 전기는 주변부를 없애나간다. 근본적으로 주변부는 공간적 질성의 유익한 다채로움을 가능케 하고 있다.

 

*내부폭발: 근세는 폭발적[외파적]으로 전개되어왔다. 그리고 이것은 근세의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까지 이른 적기적 속도는 이러한 발전 모범을 전환시키고 있다. 모든 전자화된 과정들의 인스턴트성을 매개로 세계는 서로 연결되고 있다. 그것의 극단적인 동역할이 '모자이크적' 정역학으로 역전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포스트모던적 생산은 이제 확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콤팩트함을 목표로 하고 있다. 유명하지만 종종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마셜 매클루언의 표현이 있는데, '지구촌'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매클루언에 의하면 "전자적으로 결합되니 세계는 하나의 촌락 그 이상이다."

 

 

유령들의 왕래

 

 모든 새로운 것은 일단 고통을 준다. 전기의 승리 행렬 역시 항상 재앙의 저주를 동반하고 왔다. 1923년 4월 21일 크로이츨링의 벨레뷰 궁전에서 유명한 예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가 '푸에블로-인디언 지역의 그림들'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보다 더 전자화된 세계에 대한 문명화된 불안을 그럴 듯한 논리로 비판하는 자료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근원적 체험을 축제화한 어떤 행렬 의식에 관한 그의 답사기는 '에디슨의 구리선'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 끝나고 있다. 바르부르크의 강연의 마지막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형 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 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협하는 그런 음모를 꾸민, 외계에서 밀파된 파괴자이다. 진보와 진화가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있다."

 

카프카는 결정적인 사태의 무시무시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기 때문이다: 전기의 시대에는 커뮤니케이션이 실제적인 왕래로부터 분리되고 있다.

 

 

새로운 척도로서의 센세이션

 

 총체적 케이블망의 구축, 전자적 네트워크에서의 접속은 그러나, 선입견이 없는 시각으로 보았을 때, '종교'의 세속적 변형으로 인식될 것이다. 즉 통합적 미디어망으로서의 네트워킹은 종교적 초월성의 변형인 것이다. 신적인 것은 네트워크이다.

 

 세계의 전자화는 사악하고, 이미 말했듯이, 그것의 자명성 때문에 흔히 간과되는 모던적 세계의 기술적 조건이다.

 

 데이터 과정들과 영상의 홍수들이 새로운 냉전을 완성시킨다.

 

 

 

 매스미디어의 도식

 

 전자적 소비재들의 전 세계적인 확산, 모든 것에 침투해 들어가는 팝음악의 사운드 그리고 유명 메이커에 대한 컬트적 소비 행태는 포스트모던의 진정한 에스페란토어이다.

 

 프로축구나 프로야구 경기를 관찰해 보면 모던적 세계에 대한 어떤 원칙을 배울 수 있다. 즉, 모던적 세계의 시스템들은 생활 세계가 없이도 기능할 수있고, 언어가 없이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며 이해가 없이도 조정이 가능하다.

 

 서구 세계의 문화적 사건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친숙한 시간 지평들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도처에서 스팩터클과 해프닝의 형식들이 관철되고 있다. 이것은 매스미디어들의 테크놀로지적인 속성들과 아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매스미디어들이 우리의 주변 환경을 완전히 각인 시키고 있다. 전자적 네트워크가 세계를작동시키고 있다. 즉 6억의 전화 회선 그리고 '인터넷'에 연결된 수천만 대의 컴퓨터. 친숙한 시간 지평들은 미디어로 중계되는 시간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디어의 현실로부터 간단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필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자 한다. 뉴미디어의 저편에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매스미디어들은 우리 사회를 관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보존한다. 이것은 물론 개념들이 없는 관찰이다. 매스미디어들은 모든 정치적. 사회적 관계들을 뉴스 가치를 지닌 사건들로 해체시킨다.  이러한 묘사 테크닉의 격렬성은 모든 것이 재빨리 파악되고 마찬가지로 재빨리 잊혀질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있다.

 

 오늘날 매스미디어라는 조건 아래서 존재하는 것은 정보의 순전히 '시각적인'구별이다. 즉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밀려왔다'거나 '사라졌다'는 식이다.

 데이터의 흐름으로부터 정보를 선택할 때 표준으로 삼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어떤 정보의 선택 작용은 오늘날 대개는 그 정보의 오락성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

 매스미디어들은 따라서 그것이 자극하고 있는 정도보다 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매스미디어들은 아무 방향도 설정하지 않은 채 정보를 제공한다. 인간학자 아널드 겔렌은 이것을 '풍부하게 정보가 제공되었으나 세상은 낯설게 여기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지식은 수 세대를 관통해서 전수되었다. 오늘날 그것은 아주 다른 발전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지식은 '인스턴트적' 그리고 '수평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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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지각은 따라서 점점 더 육체적인 현전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뉴스들의 수용은 영양분의 섭취만큼 익명적이고 역할에 특화되지  않는 것이 된다.

 

 우리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그 경험들이 점점 더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는 인간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가 점점 카오스로 전락하는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매스미디어들이 일종의 도식틀로서 작동하고 있다. 미디어들은 우리를 위해 그 본질이 사건인 것의 사전 석택을 지정한다.

 우리 모두는 범세계적으로 하나의 공통의 실재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래로 텔레비전 시청자의 독특한 수동성이 사회적 행태의 근본 형식이 되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선택의 생산물들이다. 현실은 공개성에 자신의 척도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사건들은 그것의 공개를 통해서 '더 현실적'인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건의 공개성은 자신의 커뮤니케이션적 성질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개별 사건은 매스미디어들 속에서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위가 항상 이미 그 자신의 보도에 대한 관찰 속에서 수행된다는 결과로 귀결된다. 그 때문에 그날의 뉴스들은 그 전날의 뉴스들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사건들을 포기할 수 있다. 매스미디어들은 따라서 공개성을 매개로 리얼리티를 상승시킨다.

 

독특한 메시지

 

 디지털 혁명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완전히 통제 가능하고 조작 가능하게 만들었다. 걸프전에 대한 보도를 상기해 보자.

 

 현실적인 사건과 방송된 영상이 구분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전자적 매스미디어가 존재한 이후로 이러한 구별은 그 의미를 상실해버렸다.

 

 사건은 순전히 그림 속에만 있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생성되는 것이 일종의 합성적 역사[이야기], 즉 '포스트역사'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매스미디어에 대한 진실한 보도을 기대한다고하면, 너무 과중한 요구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텔레비젼이 보도하는 현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의 살아있는 비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미 100년 전에 정확히 현실을 가상성들의 한 계단이라고 묘사했다.

 방송 프로그램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즉 뉴미디어들의 의미 전달은 단지 그것들 자체의 자기 재생산의 쓰레기이다. 커뮤니케이션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전달된 의미보다 더 중요한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확실한 것은, 커뮤니케이션들은 비록 아무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어떤 미디어의 효과들은 따라서 프로그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어떤 미디어의 내용은 항상 다른 미디어이다.

-미디어는 그 자체 자기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이다.

 

"전자적 테크놀러지는 직접 우리의 중앙 신경계와 연결되어 있고, 그 때문에 모던적인 매스미디어와의 관계에서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뉴미디어들은 직접인간의 신경망들을 향해 전파를 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원적 인간과 탈프로그램

 

논증들은 다시 말해서 사려깊음과 사고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돌아가는 카메라 아펭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논증 대신에 등장하는 것은 하나의 테마를 특징짓는 여러가지 표현들의 혼합이다.

 

 뉴미디어들은 인간의 유한성.창조성.오류 가능성에 대해 침묵한다. 휴머니즘적 인간은 낡은 골동품과 같다. 그러나 그의 육체와 '영혼'은 미디어의 환경 속에서 적나라한 시대착오적 유산이다. 시대착오라는 것은 시대를 거스른다는 뜻이다.

 

멀티미디어로의 진입

 

기술공학적 미디어들은, 비록 우리의 감각들과 능력들의 연장물로서 생성되었지만, 최근에는 미디어의 세계가 더 이상 인간이라는 척도에 맞춰서는 측정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었고 세분화되었다.  우리의 현실을 규정하는 멀티미디어는 단순히 또 다른 수단으로 인간의 데이터 처리 과정을 지속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뉴미디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인간적 감수성의 조직화는 진화의 우연적 생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지닌 감각들의 가짓수는 우연적이다. 다섯 개의 감각 기관들이 인간과 세계 사이에서 뉴미디어의 형태로 설정된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새로운 미디어들은 단지 필터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미학적 생산력들로서도 작용하고 있다.

 

 정보들을 저장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그러한 미디어의 기본 기능이다. 저장은 정보에 대한 접근을 확실히 한다. 그래서 미디어들은 인공적인 지각들로써 우리를 보살피고 있다. 각각의 미디어는, 경험들을 변형시킴으로써 인간의 행동을 형성한다. 미디어는 따라서 마치 메타포처럼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세계는 미디어에 의해 사전에 구조화되어 있다.

 일단 모던의 미디어는 우리 지각 시스템의 연잘물로서 발전해 왔다. 즉 라디오. 신문 그리고 영화는 듣기. 읽기 그리고 보기를 장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분화된 노동 분업적인 지각 구조는 그러나 더 이상 탈산업사회의 복잡성에 필적할 수 없다. 최근의 테크놀로지들을 작통시키는 데 필요한 요구 조건들에 대해 감각들의 노동분업으로는 더 이상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총체적인 주의집중 속에서의 감각들의 공동 유희는 개별 미디어에서 멀티미디어로의 네트워킹에 상응한다.

 

 오늘날 모든 기술공학적 미디어들은 디지털화가 가능하다. 세계의 모든 데이터들은 따라서 똑같은 저장 장치에 저장될 수 있다. 미디어 복합체는 따라서 컴퓨터에 의해서 조정되는 알고리듬 시스템으로 기능한다. 이것은 문화의 작동 비밀이며, 오늘날 우리 문화는 마치 뱀 껍질처럼 자신의 낡은 휴머니즘적 아이텐티티를 벗겨낼 준비가 되어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인간들은 자신의 외부 세꼐를 본능에 유인되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으로 경험한다. 진화 과정은 정보의 번식 과정이다. 그리고 중앙 신경계를 모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이래로, 우리는 삶을 정보의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감각들은 따라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항상적인 의미전달 형식들을 형성하는 뉴스 테크닉으로서 기능한다. 의식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구조들에 항상 새롭게 적응해야만 한다. 인공지능학가 마빈 민스키는 의식이 우리 생활 프로그램들의 디버킹에서 탐색 루트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커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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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로지 '편력' 이란 단어에 매혹되어 보게 되었는데

 정말 도대체가 잘 읽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몽테뉴'에 관한 부분은 놓칠 수가 없었고

 

 

 '수상록'에 없는 몇 얘기를 옮겨 놓아 본다.

 

 p150

 프랑스의 교양인이란 아니 반듯한 프랑스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모두가 몽테뉴 학교의 출신이다. 프랑스가 이데올로기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성의 나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니체의 아름다운 구절을 빌려 그에 대한 나의 송사를 바친다.

 

 사실 몽테뉴 같은 분이 글을 써준 덕택으로 이 세상에 사는 즐거움이 더 많아졌다. 적어도 나는 비할 데 없이 자유롭고 힘찬 그 정신을 알고부터는 살맛이 하나 더 많아졌으며, 만약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산다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와 맺어져 해결에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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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에.

 집으로 오는 길에 어김없이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이 있었는데

 오늘에야 발견 한 걸까?

 2층에 위치한 그 곳에 led가 있었던가?

 

 서서 가만 봤다.

 무슨 글인가...

 

 '강한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은.....여유.'

 풋

 

 강한자라. 강한자라는게 있었던가? 싶었지만

 필시 저 글은 저 곳의 원장이라해야 하나? 관장이 쓴 걸 테지?

 ㅎㅎㅎ

 올해 무리를 해서라도 시작할까 싶다가도

 아직은.

 아니...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다 싶어 나중으로 미룬다.

 

 그런데 킥복싱도 무에타이에서 나왔단 말야?

 

 공수도인가? 화랑도인가?

 여튼.... 그런 것 하나 배워 보고 싶단 말야.

 

 내 몇 소원 중 하나가 팔과 등에 근육 만드는 거 아니던가.ㅎㅎㅎ

 

 그러나

 올해는 정말 내 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 할때!

 그렇지 않으면

 어쩜 올해로 인해 난 '경비행기' 못 살지도 몰랏!

 

 경비행기를 소유하고픈건 너무 지나친

 허황된 꿈인걸까??

 

 그래도...

 사자똥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대비하여 경비행기를 소유할 정도의 화폐는 모아야 하고

 

 우선은... 독립고 해야 하고.

 

 음....

 지난 한 주.

 좀 심각하게 올해의 내 나이를 실감하고

 인생 계획을 짰다.

 하하...;;

 계획이라곤 고작 한달 일년이 전부였는데....

 나름 장기간의 계획을 짰으니

 이제 실천하며 계획에 맞춰 살 수 있도록 부단히 애를 써야 할때.

 그러나 그 계획에 맞춰 보낸다는 것 조차 실천적인 성질이 결여된 계획이라 하더라도

 그뤟더라도

 지금. 난 그 계획조차  없음 살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지. ㅎㅎㅎ

 

 현실파악을 했다 하면서도 여전히 사태파악 못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잘 해낼 테다!!!!!!!

 

 2월.

 2006년을 재 다짐하며

 열심히 살아 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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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하나의 탈출 - 토마스 베르하르트

p 42,43,44

 

나는 세르츠하우스 주택단지에서 살아있는 인간의 육신이 썩는 냄새를 맡았다. 나를 연옥(지옥)으로 이끌고 간 것은 우연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옥(지옥)을 알지 못하는 자는 예감 능력이 전혀 없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진실은 오직 진실과 관계가 있는 자만이 알 수 있다고 나는 생각 한다. 만일 그가 진실을 말하려고 하면 그는 자동적으로 거짓말쟁이가 된다. 말로 전해지는 것은 모두 가짜요 위조된 것일 수 있다. 말하자면 진실이 아니거나 날조된 것만이 전달되어 왔다.

...

진실이란 절대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상을 기록하고 그것을 진실에 충실하게 기록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명확히 밝히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실이었던 것을 전달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평생 포기한 적은 없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하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p68

 

외할아버지는 나에게 지나칠 정도로 고독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고독과 격리속에서 살 수는 없다. 고독과 격리 속에서 인간은 파멸할 뿐이다. 파멸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사회를 치사적인 환경으로 확인하는 것, 나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파멸하지 않으려면 나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과도 격리되어야 했다. 나는 매 순간 모든 사람들과 격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를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한 격리는 성취되어야했다. 나는 여전히 여러 해 동안 학교에 더 다니면서 매일 이른 아침 이 광기와 어리석음, 그리고 진실로 치명적인 병과 뒤엉켜 견딜 수 없는 치사적인 증오 상태를 오랫동안 견딜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것은 격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p80

 

우울증과 권태는 인간 존재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다.

 

p83

 

인간은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 밖의 다른 말은 다 거짓말이다.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 한다.

 

p93

 

외할아버지는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를 저주했다. 그는 자신의 일에 즉 글 쓰기라는 자신의 평생의 작업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러면서 혼자만의 존재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예속시키는 자유를 택했다. 그 예속 밑에서 외할아버지의 주변 사람들은 평생을 고통받아야 했다.

..

그분들은 외할아버지에게 제공한 모든 것에 대한 대가를 자신들의 삶으로 지불했다. 최고로 값비싼 대가였다.

 

p140, 141, 142

 

나는 모든것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것에도 따르지 않았다. 나는 지금 또다시 내 모습 그대로의 고독한 외톨이에 현혹되어 오늘도 실험을 계속한다.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 한 채. 나는 이미 오래전에 어휘의 의미에 대해 묻는 것을 단념했다. 모든 것을 더 애매모호하게 만들 뿐인 어휘들의 의미에 대해서. 생명 그 자체니, 존재 그 자체니 하는 것은 모두 진부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이 지금의 나처럼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면 모든 것은 제 스스로 하나씩 하나씩 해결되어 간다. 평생을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손톱 만큼도 모르면서 우리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 자신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평생을 우리 자신에 대한 탐구로 보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정신적 한계를 발견하고는 포기했다. 우리들의 노력은 철저한 무의식 상태와 그리고 치명적이고 언제나 치사적인 의기소침 가운데서 끝났다.

...

우리 모두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내팽개쳐진 사람이며 매일 새롭게 재발견되고 짜맞추어지고 구성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엄격한 판결을 내리며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반대 방향으로 이중의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인간 관계에서 미숙함이 지배하고 그 미숙함은 자연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무관심을 낳게 된다.

...

인생은 오늘날 우리 자신이 사용하는 보다 짧고 보다 허무적인 언어로 이야기 한다.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운운할 만큼 더 이상 감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절망은 우리에게 인간, 사물, 인간관계, 과거, 미래 따위에 대해 분명한 것을 알려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부딪쳐 온 모든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 증거가 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p144

 

그러나 나는 걸어야 할 길이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다분히 무한하고 무희미한 길을 걸어가는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늘 말해왔다. 그렇지만 나는 그길을 가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그렇다. 변화도 있었다. 나는 나이들었고, 그대로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길을 걷지 않았다. 나는 나 혼자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아 듣지 못한다. 모든 이가 다만 자기 자신의 말만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것이라고 빋는 것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다. 나한테는 진실이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이해가 잘 안 되고 모든 경우에 항상 오해받곤 한다.

...

곧 자기 자신만 의존하는 악몽으로 되돌아온다.

다른 것이 여기에서 문제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존재

하지 않았다. 내 앞에 다가와 현실이 되는 매일의 나날이 그에 대한 증거이다.

 

p148

우리는 언제나 남들보다 앞서가며, 우리가 찬사를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 상태는 예상할 수 없다. 우리는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기도 한다. 우리는 정확히 한가운데에서 틀림없이 조만간 파멸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의 어리석은 주장이다. 진실할 의미에서 우리의 뿌리는 극장이다. 자연은 극장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인간은 극장 그 자체로서의 이 자연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는 배우들이다.

 

p154

 

오늘에 이르러 나의 특별한 표지는 무관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때 존재했었고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동등가치의 의식이다. 그것보다 높은 더 높은 그리고 최고도의 가치는 없다. 그것으로 모든 것은 끝났다.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이며, 인간이 만들었고 지금 만들고 있으며 앞으로 만들게 될 대상들처럼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다. 자연은 가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어도 거기에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모든 약점을 갖고 있는 인간, 육체적, 정신적 오점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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