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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7
    몸이 되다(4)
    고양이-1
  2. 2008/06/20
    2008/06/20
    고양이-1
  3. 2008/06/03
    돈 2만원의 기억
    고양이-1

몸이 되다

2005년 몸과 마음이 무너져 어떻게 주체하기도 어렵던 그 때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책을 한 권 봤다.

까탈이의 도보여행기...

그 책을 보기 전후로 도보여행을 계획했고 친구와 걸었었다.

그녀가 또 책을 냈단다.

아침마다 한 부씩 사서 보는 경향신문에 소개됐다.

'유럽의 걷고 싶은 길'

... 늘 그랬듯 배낭은 지구를 통째로 들어올린 무게였고,

길은 고무줄처럼 늘어만 갔다. 비까지 몹시 내렷다. 끈질기고 지독한 비였다.

시위진압용 물대포처럼 모질게 퍼붓기도 하고, 슬금슬금 흩뿌리며 속 깊이 달라붙기도 했다...

(203쪽 스코트랜드 여행기 중)

...길위에서 듣는 김광석은 위험하다...

...추억이 살아올 때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빠르다...

...걸을 때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는 좁아진다.

걷는 동안 나는 세계의 관찰자가 아니라 세상의 일부가 된다.

풍경 속으로 들어가 풍경이 된다. 걸을 때 몸은 진화한다.

걷다보면 발이 절로 걸어가는 순간이 온다.

내 의지로 몸을 끌고 가는게 아니라 몸이 나를 이끌고 간다.

땅을 딛고 앞으고 나아가는 그 모든 동작에 어떤 무리도 따르지 않는다.

몸과 마음,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다.

흐르는 물과 같다. 최고의 선이다... (75쪽)



구구절절 동감이 간다...

퇴행성 관절염 증상으로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무릎이 괴롭다.

그래도 걷고 싶다.

촛불시위에 가서 그냥 앉아 있고 잠깐 돌아 다닐 뿐인데도

몸이 너무 되다...

그래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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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0

벌써 6월의 반이 훌쩍 지나버렸다.

뭘 하고 사는 건지 심각한 회의가 드는 요즘이다.

3월 말에 무너져서

4~5월을 좀비처럼 보내고

6월 회복기에 접어드나 했는데

오락가락한다.



오락가락...

 

그래도 몸을 움직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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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2만원의 기억

아는 이가 교도소에 수감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3월 중순 '이근재 열사 투쟁' 건으로 수배 중이던 이 동지가 잡혔단다.

재판으로 실형 2년-꽤 센 거 아냐?-을 받은 뒤 지난 5월 초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단다.

 

2002년인가 2003년 소백산으로 신년산행을 갔을 때

역시 수배 중이었던 이 동지가 우리와 함께 했다.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야 하는 부담감에 제대로 된 술잔도 기울이지 못한채 잠만 자고

산행 내내 살기가 느껴질 정도의 추위 땀시 암 것도 기억에 없었던 그때 그 산행...

 

서울에 올라와서 그 동지가 다시 서울역 어디 근방에서 내렸을 때

나는 지갑에 돈이 없어 누군가에게 돈 2만원을 꿔서

그 동지 손에 쥐어 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동지는 몇 개월 간의 수배 생활을 연행과 더불어 청산했다.

한번인가 면회를 갔었다.

그 동지는 잊을만하면

그때 받은 2만원이 아니었다면 그날 밤 난감했을 뻔했다고 말하며 고맙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나는 그 말에 더 드리지 못한 것이 미안했을 뿐이라고 이제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런 동지가 다시 그때 수감됐던 안양교도소에 갇혔다.

지금이 6월 초순이니 벌써 3개월 가까이 갇혀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면회를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같이 갈 사람을 물색해 일단 꾜셔두고 인터넷 서신을 보냈다.

 

나는 '관운'이 없어서 그런지 그 흔한 경찰서 유치장에도 가본 적이 없다.

나름 열심히 거리를 뛰어다니곤 했지만서도...

결정적으로 2000년 6월 29일 36층에서 진압됐을 때도

숨 쉬기 위해 깨놓은 유리에 발이 미끄러져 손이 다치는 바람에 응급실로 가서 갈 수 없었다.

나중에 조사받으러 오라고 했지만 난 가지 않았다.

 

그래서 갇힌다는 느낌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는 동지들 중 누군가 갇히기 되면

반드시 가급적 면회를 가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내 부채의식을 청산하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2년의 긴 시간 동안 - 아니 그 전에 꼭 나오길 빌면서 -

그 동지가 건강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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