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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양질전화의 법칙: 2008년 6월8일의 기억들

 

 6월 8일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뒷줄에서는 술판이 벌어져 있고 시민악대의 노랫소리가 간간히 들려왔고 선두에서는 버스차벽을 사이에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전경이 먼저 상스러운 욕을 하며 심지어 여성들한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오줌이 담긴 물병을 시민들에게 집어 던졌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저항 했으며 그중에 아고라에서 유명해진 망치남이 버스 유리창을 파손 했으며 많은 시민들이 저항했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50미터쯤 조금 더 지나 경찰은 사방팔방으로 버스 차벽으로 에워쌌다. 전경은 버스 차벽위에서 소화기를 뿌리고 사람들을 자극하고 도발 시켰다. 선두에는 깃발이 많았으며 꽤나 많은 사람들 만 여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진보논객 이라고 불리는 진중권-그가 과거에 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아마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의 말대로 시위문화가 축제분위기로 바뀐다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선두는 전투상황인데 후미는 여전히 술판이 벌어진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선두대열에 동참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시위 하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시위도중에 술판은 벌이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두 대의 버스를 밧줄로 끌어냈고 선두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전경이 쏜 소화기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아 병원에 실려 갔다. 실명이라는 얘기가 있는 데 확인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다.

 

 직격탄 대신 소화기로. 최루탄 대신 물대포로 진압도구가 변화하였다. 화재를 진압하는 도구인 소화기가 언제부터 진압도구가 되었는지 소방법에는 걸리지 않는 지 의심스럽다. 물대포에 이어 나중엔 색소포도 쏘았는데 물대포의 물은 지하의 썩은 물이고 색소포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위생을 생각해서라도, 아무리 시위해산용이라고 해도 물대포와 색소포를 자주관리 해야 맞는 사람도 기분이 덜 나쁘지 않을 것인가? 지나가다가 색소포가 튀긴 적이 있었는데, 마치 똥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몇 번을 씻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고 온통 퀘퀘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언젠가 한번은 길을 가고 있었는데 인도 양쪽을 ㄷ자형으로 전경들이 샌드위치로 막고 가는 사람을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었다. 해산이 불가능하게 모든 통로를 막아 놓고서 시위해산 방송을 틀어놓는다. “지금 당신은 불법적인 시위를 하고 있으니 즉시 해산하시기 바랍니다. 해산하지 않을 시엔 체포 하겠습니다. ” 이 무슨 유머도 아니고 황당 시츄에이션도 아니고. <당신들은 지금 불법적인 감금을 하고 있으니. 시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전경들을 즉각 철수시키시기 바랍니다. 철수 하지 않을 시엔 공중파 및 언론에 이 사실을 폭로하고 민. 형사상의 법적인 책임을 묻겠습니다.> 라고 오히려 우리가 이런 말을 말해야 되지 않는가? 1시간이 지나 공중파 방송에서 기자가 출동하자. 시민들을 풀어 주었다. 인도에서 한 시간 정도 갇혀있던 생각을 하면 공권력이 법의 틈새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또 얼마나 악랄하게 남용되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잠시 얘기가 딴 데로 샜는데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누군가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전경들이 있는 차벽으로 올라가다가 전경들한테 방패로 가격 당하고. 또 한사람이 올라가서 쇠파이프를 두어 번 정도 휘두르다가 전경 수십명한테 바로 짓밟혔다. 그 사람들이 술 취한 취객인지 그건 알 수 없다. 그리고. 밑에서는 전경들이 쏜 소화기에 많은 사람들이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갔다. 어떤 아저씨는 사람들이 맞는데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뒤에서 비폭력만 외친다고 젊은 사람들을 나무랬다. 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욕설이 오가고 심각하게 싸우고 있었다. 폭력파들은 87년도도 폭력에 의해서 세상이 바뀐 것이지 사람들만 모여서 아무것도 안하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주장 하였고, 비폭력파들은 비폭력으로 시작했으니 시민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9년도에 전대협 내부에서 이러한 논쟁이 있었고 그후로도 계속 폭력과 비폭력 논쟁은 항상 있어왔다. 필자는 89년도 까지만 전대협 산하의 NL 학생조직 이었고. 그 뒤부터는 좌파로 운동의 방향을 바꾸었다. 전대협에서 비폭력을 주장하게된 계기는 계속되는 매스미디어의 용공과격시위라는 매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89년도부터 NL내부에서 득세하기 시작한 주체주의의. 그 안에서도 더 많은 대중의 지지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후진대중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강철서신의 대중추수주의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그 당시 NL학생들의 필독서였던 ‘강철서신’에서 김영환은 ‘우리는 역량이 일천한 시기에 놓여 있소.~’ 라는 말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전위정당 건설을 논할 것이라 우리의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며 산개전을 주장했다. 이 말은 운동 어디든 곳곳에 통용되어서 NL그룹의 대중추수주의의 방패막이가 되었다. 학생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뭔가 투쟁을 하자고 하면. 아직 역량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는 자생성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던 시기였고. 혁명의 전야였던 시기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운동과 투쟁을 하고 싶어 하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때를 기다리며 역량을 키우자는 말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후진대중의 꽁무니를 뒤쫓아다니며 자신들의 세포를 키우며 자신들의 영향력만을 극대화 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모든 운동을 말아먹었다. 지금은 뉴라이트에 가 있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은 처음부터 그쪽이 자신의 길 이었는지 모른다. 최루탄과 백골단의 폭력이 난무하던 89년 그 시기에도 전대협의 내부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있었다. 89년 명동성당에서 단식투쟁을 할 때의 이야기이다.

 

 당시 비폭력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얘기는 “자신의 가족들을 설득 시킬 수 있는가? ” 이런 화두를 던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비폭력으로 전술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나는 “ 집안에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목숨이 위태로운데 과연 구경만 할 것인가?” 라고 응수 했었다. 그때만 해도 백골단과 전경들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던 시절이었다. TV에 나왔던 녹두대의 과격행동은 대규모 집회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전경과 백골단은 수시로 캠퍼스 안까지 쳐들어 와서 최루탄과 사과탄을 던지고 폭력을 휘둘렀다. 전경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조직력이 갖춰진 87~89년(학교마다 편차가 있어서) 이후에나 가능 하였다. 그 이전엔 대학생들이 얼마나 말 못할 고초를 겪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족을 설득 시키기란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가족은 무엇보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안위를 먼저 걱정한다. 그러하기에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란 무척 어렵다. 무엇보다 나처럼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우파이고 태생이 박정희를 신이라 믿던 경상도일 경우엔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자칭 ‘구국의 강철대오’라 불리던 전대협은 군부독재로 인해 자생성이 폭발하던 시기에도 대중추수주의에 의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시위는 점차적으로 비폭력 문화제 위주로 바뀌어 갔다. 학우들이 민감해 하는 학자투 혹은 학원민주화 투쟁에서는 학교측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평화시위. 삭발. 혈서식을 하면서 학교측으로부터 장학금(규정된 장학금 이외에 학자투를 눈감아주는 댓가로 별도로)을 받았다. 한 학기에 딱 한 번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행사처럼 치렀던 화염병시위에는 우리측의 물량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전경들이 먼저 철수 해버렸다. 전경이 철수하자 뒤늦게 “이로써 1학기 투쟁을 정리하겠습니다.” 라며 투쟁을 정리했다. 그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전대협은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학우들로부터 점차적으로 유리되어갔다. (근데. 이것이 비단 학생운동에서만 그친 것은 아니다. 학운에서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하던 자들이 노동운동 에서도 사측과 타협을 보는 어용행동을 하거나 노사협조주의로 노동운동을 망쳐버렸다.)

 

 매스미디어에서 전대협과 한총련이 과격해서 망했다고 많이들 생각하는데.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너무 온건해서 다수 학우들의 대중적인 지지도와 신망을 잃었기 때문에 하향세를 걸었던 것이다. 그들도 1년에 딱 한 두 번 격력하게 시위하던 때가 있기는 했는데 그것이 8.15 조국통일 투쟁이었다. 그때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다. 구국의 강철대오의 이면은 이러했다.

 

 NL을 제외한 좌파학생그룹들 CA, ND, PD들도 89년도부터 급성장을 하기 시작하여 91년도에는 서울 총학생회의 50%까지 장악하였고. 조직적인 전투력이나 선동력이나 모든 면에서 소수였지만 NL그룹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공안탄압과 91년도 소련붕괴 이후에 하향세를 걷기 시작했다. 면학분위기 라는 이름으로 대학의 자유와 진리의 상아탑은 사라져갔고. 취업을 위한 전문기관으로 변모해갔다.

 

 그때 몇 년동안 치열하게 진행되어왔던 논쟁이 아고라에서 한 순간에 진행되었다. 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프락치로 몰렸다. 자신의 주장보다 과격한 주장을 프락치로 모는 것 또한. 오래전부터 NL에서 반대파를 제압하기 위해 만든 논리였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논쟁이 격화되면서 폭력과 비폭력의 구체적인 선까지 정하게 되면서 폭력파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즉. 방어를 위한 폭력은 폭력이 아니며. 경찰차벽 자체가 시위를 방해하는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것에 최대한 저항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 비폭력 이라는 양자를 절충한 논리에 대부분 수긍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투현장에서의 양상은 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장에 잘 나오지 않거나 전투대열의 후미에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싸우는 사람들은 비폭력을 주장하지 않았다. 경찰의 물대포와 소화기가 워낙에 거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깃대로 경찰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몇 년 동안 숱하게 논쟁을 하던 것이 단박에 정리가 된 것이다. 적어도 전투대열 안에서는 말이다.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거까지 왜곡하려 들었다. 87년 386 세대라는 사람이 인터뷰를 하고 아고라에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87년 6.10 항쟁은 비폭력 시위였다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좋은 데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지 말기 바란다. 당시에는 짱돌과 화염병이 없었다면 일분일초도 제대로 된 집회를 열 수 없었다. 종로. 대학로 에서 동대문 까지 쫓겨서 도망 가다가 매일같이 수세에 몰렸던 대학생과 시민들은 87년 6월에는 변두리부터 도심까지의 모든 보도블럭이 파헤쳐질 정도로 막강한 저항을 하였고 전경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540만명의 시위대가 참가했다고 하니 살인마 전두환 이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시민들이 이루어 낸 성과였다.

 

 촛불은 이렇게 맑스가 말한 양질전화의 법칙아래 스스로 진화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터넷시대라 더욱 빠르게 진화되고 있었다.

 

 

 

 

경찰이 뿌린 분말소화기

 

 

한 사람을 향햐여 수십명의 경찰이 달려들어 날선 방패로 내려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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