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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09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운 "조직보위"
    아방가르드
  2. 2014/02/25
    고인을 두번 죽이는 기아차지부
    아방가르드
  3. 2014/02/25
    오월동주: 기아차 1사1조직 흡수통합에 대한 전면폭로 (2012년 5월작성)
    아방가르드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운 "조직보위"

 

 김상완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 백서 “하늘을 덮다” 에 대한 서평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성폭력사건에 대한 단상. - 3.8 세계 여성의날에 쓰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졌다 -

 

 민주노총 김상완 성폭력 사건으로 명명되던 “하늘을 덮다.” 를 얼마 전에야 사서 보았다. 이유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는 언어적인 성폭력(성희롱), 신체접촉, 음란야동을 통한 성희롱(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강간미수에 이르기까지, 발생되는 문제에 대한 해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책을 접하게 되었다.

 

1. 피해자 중심주의는 어떠한 경우라도 축소될 수 없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생존자들은 성폭력 피해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옥 같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폭행당한 자신이 싫고 가해자를 죽이고 싶은 마음에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아픔이 너무나도 커서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다만 간신히 피해사실을 말하더라도 그때마다 피해 생존자는 여러 번 반복해서 죽어간다. 더 끔찍한 것은 주변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믿어주지 않고 피해생존자를 정신이상자로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보낼 때다. 차가움과 비난의 따가운 시선은 피해 생존자를 강한 사슬로 옥죄고 숨 막히게 한다. 막히는 숨을 토해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숨쉬기 위해 피해생존자는 스스로 숨으려고만 한다. 분노와 고통으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숨으려고만 한다. 피해생존자들이 피해사실을 말하는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모른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증오가 동시에 따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피해생존자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그런데 피해생존자들은 늘 나와 같은 피해생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책임감을 무겁게 지며 자신들 돌보지 못한다. (책 내용 중에서)>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문제나 사건해결에 있어서도 피해자 중심주의는 절대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피해 생존자들이 이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기까지는 오랜 시간 동안 고민 끝에 자신의 치욕과 수모를 감수하면서 공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해생존자가 밝힌 것은 그 사건에 대해 차마 말 할 수 없는 얘기들은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폭력사건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 안에 또 다른 문제가 있는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 동지들이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문제를 거론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경찰서에서의 조사, 법정에서의 문제. 언론대응, 음해성 악플, 음해성 소문등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까지, 쉽지 않은 결단과 용기 속에서 신중하게 결정된 것이다. 하기에 피해자 중심주의는 확대되면 되었지 결코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던 사건조차 피해자중심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노총 가해주범은 법정에서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으며, 2차 가해자들은 다시 복직해서 활동하고 있다. 징계위원회 재심위에서 정진후는 자신들의 정파들로 구성된 징계재심의를 열어(피해생존자의 알권리 및 의사존중의 원칙 침해!) 제명을 경고로 축소하였다. 정진후는 2차 가해자들을 보호하였고, 선거과정에서 통진당 이정희나 유시민 마저도 정진후를 보호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사퇴 및 그들의 사과 또한 피해자를 위한 진정성 있는 사과가 아니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자신들을 합리화 시키거나 잠시 여론에 굴복한 형식적인 사과를 했을 뿐이다. 민주노총은 대국민사과와 사건처리에만 급급해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언론에 의한 피해자의 신원노출, 사건왜곡. 피해생존자 동지를 더욱 불편하게 했던 기자들과 가해자 부인의 행동, 조직적 은폐조장 행위를 인정하지 않은 채 형식적인 처벌과 절차를 진행했을 뿐 조직적인 점검을 통한 평가와 반성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피해생존자에 대한 조직적 지지와 치유, 복귀를 위한 후속조치도 하지 않았고 피해생존자에 대한 치유도 돌보지 않았다. 징계부터 사과문 그리고 공론화까지 피해생존자의 의중은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단적으로 출세지향적이고 관료적인 그들이 어떻게든 자신들의 조직과 조직원(정파)을 살리기 위한 조직보위에만 급급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렇게 언론에 대서특필 된 사건에서도 피해자 중심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다른 사건들은 오죽할까? 충남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일체의 사과 한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다함께 성폭력 사건의 주범의 사과 또한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시키는 내용이 있었고, 사과문에는 자신이 잘못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대학교 양성평등센터의 징계에 의해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사과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진정성이 없었기에 사과문을 받지 않았다. 시시비비부터 법정. 그리고 해결까지 성폭력문제는 모두 피해자 중심주의가 적용되어야 한다. 피해생존자들의 치유의 시작은 가해자측의 진심어린 반성과 참회와 진정성 있는 사과와 그 조직(가해자와 피해자가 속한 조직모두)의 책임 있는 문제해결로 인한 피해생존자들의 명예회복이 선행 되어야 한다. 다함께 성폭력 사건의 경우. 대학문화 교지위원회 대표는 사과를 한다고 메신저로 말하다가 나중엔 거짓말로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여권이 신장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겨우 야만적인 시대를 벗어났을 뿐이다. 몇 십 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들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사회적으로도 남성의 지위와 임금은 계속 올라가는데 비해, 여성은 남성의 절반을 받거나 간신히 같은 지위로 올라간다 하더라도 “몸을 팔아서 올라갔다.”는 각종루머에 시달려야만 했다. 운동사회도 마찬가지 이다. 리더나 수장은 거의 남성이고 여성은 주로 수동적인 대상일 뿐이다. 리더인 남성과 수장을 위해 부차적인 여성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피해자중심주의를 악용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 수 있을까? 0.1%? 아니 그 이하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여성으로써 사건을 드러내고 폭로하는 일 자체가 앞서 말했던 수치스러움을 감당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피해자 중심주의는 더욱 강화되어야 하며 수미일관되게 지켜져야만 한다.

 

2.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운 조직보위: 조직보위는 운동의 발전에 적대적이다.

 

 민주노총 성폭력사건 강간미수의 주범 김상완은 바로 윤주형 동지를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1사1조직 직가입으로 전투적인 비정규직 지회를 해체 시켰으며, 사후에 시신침탈로 윤주형 동지를 두 번 죽인 기아차 화성공장. 기아차지부의 위원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기아노동자회, NL 전국회의 소속) 노사화합주의(어용?)로 유명한 곳의 수장이었던 셈이다. 2009년 4월 대대에서 기아차지부는 김상완에 대한 징계를 거부하였다. 그 관료들 중엔 회사측으루부터 5,000만원의 뇌물을 받고 재판 중인데도 대법원 재판이 끝날 때 까지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적들의 음모, 공작} 이라는 소리를 계속하였다.  김상완 자신의 사과뿐만이 아니라. 그가 활동했던 민주노총과 기아차지부 에서도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만 한다. 윤주형 열사의 죽음 또한 이들의 조직보위와 결코 연관이 없지 않다.

 

 예전에도 NL민족주의자들에게서 “조직보위”라는 것은 자신들의 패권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한 주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락되지 않으며 자신들의 의견과 다르면 무조건 “조직을 와해 또는 분열시키려는 음모이며 프락치”로 모는 현상,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원칙없는 “대동단결주의”. “품성론”. “소영웅주의” (품성론과 소영웅주의에는 어떠한 기준조차 없다. 이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말 그대로 수령적 지위와 비슷한 수장의 명령을 거부하면 품성이 안 좋은 자. 혹은 소영웅주의자로 비난받는 것이다.)등 이 모든 것들이 조직보위를 위한 용어들이었다. 비판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경찰이 아닌 NL민족주의자들에게 수배를 당하고 몰매를 맞기도 하였다.(필자 또한 수배되어 끌려가서 빨랫줄로 고문당할 뻔 한 적도 있다. 올바른 비판을 한 사람에게 안기부도 아닌 동지였던 사람들이 고학번을 내세워 고문을 시도하려고 했던 행위는 지금도 용서할 수 없다.) 조직 내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모든 논의에서 그를 배제 시킨다. 안기부도 아니고 동지였던 사람들에게 당한 일은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성폭력에 관한 조직보위는 이것보다 수십 배는 더욱 고통스럽고 심각하다. 조직보위. 조직적 은폐시도, 조직적인 2.3차가해, 성폭력 피해생존자 동지들은 이것으로 인해 수시로 자살시도를 하고 식음도 전폐하고 우울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있다. 오죽하면 “피해생존자” 라는 말이 나왔을까? 피해생존자 동지들의 삶은 지금도 위태위태하다.

 

 조직보위는 어떠한 내부의 비판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패권주의와 등치된다. 그러하기에, 운동의 발전에 대하여 조직보위는 적대적이다. 이 조직보위가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는 그 수령(수장)의 말이 곧 절대 진리라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범죄행위도 수령이나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는 보호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처음에는 NL주사파부터 시작하더니. 통진당, 다함께. 노동당 이젠 일부 사회주의 모임까지도 확대되어 조직보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조직보위를 위해서 가해지는 2.3차 가해는 피해생존자 동지에게 치명적이며 피해자 동지를 죽음으로 내모는 살인행위와 같다.

 

 그들이 말하는 조직보위를 위한 첫 번째 음해는 피해생존자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얘기이다. “너희 같은 년들이 독립투사를 일본 놈들에게 팔아먹는 년들이야.”  "너 같은 딸 셋 낳아서 갈보년 만들 년들“ 이란 욕설(2012년 4월9일 정진후 비례후보 철회 피켓시위 중 폭언)은 진보를 떠나서 인간이 인간으로써 할 소리인지 의심스럽다. 나꼼수 비키니 시위 때는 음담패설로 도배하는 자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예를 들면 정봉주에게 육보시를 해도 시원찮을 꼴팸년들 이라는 욕들)을 하며, 아고라. 트위터등 SNS를 통해 몇 개월 동안 여성삼국 카페 회원들을 괴롭혔다. 고작 나꼼수를 통해 정치권에 입문하려는 사람을 위해 5-6년동안 헌신적으로 반 이명박 투쟁을 하던 그녀들에게 돌아왔던 것은 남성적인 가부장적인 사회의 높은 벽과 동지로써의 배신감뿐이었다. 재작년에 여성삼국은 바자회를 통해 수익금을 쌍차. 재능.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기부하였고, 이번에도 여성삼국카페는 철도파업에 1100만원과 핫팩을 기부하였다. 전화를 하라고 해도 전화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겁 많고 집회현장에는 거의 하나도 나오지 않는 찌질한 나꼼수 마초들이, 익명의 인터넷 세상에서는 최고로 가부장적인 권위를 지닌 자들처럼 행세하며 여성을 성적인 자신들의 욕구를 배설이나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두 번째 얘기는 성에 대한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얘기이다. 성에 대한 주의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성문제가 발생했다는 피해생존자에게 책임을 떠미는 가해자 측의 방어 논리이다. 이 말은 성범죄를 줄이기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지 말라는 말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우리에게 동지란 무엇인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고 때론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동지인 것이다. 그 믿음을 저버리고 성폭력범들은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이용한 것이기에 더욱 파렴치한 범죄자들이다.

 

  세 번째는 조중동의 먹잇감이니, 조직을 와해시키려는 누군가의 음모이며 분열책동 이라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이러한 논리에 의해서 NL민족주의의 패권주의는 어떠한 비판도 차단하였다. 우리의 운동은 진보를 표방하지만, 우리 운동사회내부 또한 부르주아사회. 아니면 그 보다 더 낡은 남성권위적인 가부장적인 사회를 반영한다. 즉,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조직보위는 그 조직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며 조직의 발전에 적대적이다. 최소한 진보를 표방하는 조직이라면 부르주아 일반사회 보다는 컬리티가 높아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진보 혹은 새로운 미래는 우리 운동 내부부터 변화되면서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제각각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병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운동의 의미이다. 그러하기에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투쟁은 우리운동 내부의 발전을 향한 또 하나의 투쟁이며 간과될 수 없는 중요하고 소중한 운동이다.

 

  이에 반해, 성폭력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간판을 내려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오히려, 성폭력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생존자 동지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징계. 교육이수를 받고 그 조직 내부에서 공론화되어 또 다른 사건을 미연에 방지 하는 것이, 피해생존자 동지들의 치유가 시작되고 피해자 동지의 명예가 진정으로 회복되고 그 조직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 아니던가? 당신이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신의 조직이라고 해서  가해자들을 두둔하는 것은 피해생존자를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 치명적인 살인행위 라는 걸 똑똑히 명심하기 바란다.

 

 최근의 다함께 성폭력 사건과 충남성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생존자 동지나 대책위 동지들을 명예훼손죄로 역고소하거나, 다함께 성폭력사건에서는 오히려 남성이 성폭행 당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법정에서 하고 있다. (다함께는 문제해결은 커녕,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며 오로지 고소. 고발에만 집중하고 있다. 수차례의 공문에도 다함께의 답변은 동일했다.)

 

3. 가해자에 대한 징계와 처벌은 강화되어야 하며, 운동내부. 혹은 사회전체에서 공론화 되어야 한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서도 그렇고. 충남성폭력 사건에서도, 다함께의 성폭력 사건에서도 우리는 조직보위의 벽이 높고 운동사회 내부에도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의 벽이 높다는 것을 체감하였다. <징계뿐만이 아니라 가해자측은 ‘실명공개나 접근금지’도 징계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 운동사회의 경우 실명은 명예와 관련 있어 더욱 그렇게, 어떤 경우에는 징계보다 더 과도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히려 영향력 있는 사람일수록 실명공개는 더욱 필요하다.> (책 내용 중에서)

 

 충남 성폭력 공개 토론회에서 어떤 참석자가 2차 가해자의 실명까지 공개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2차가해자에 대한 방어를 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성폭력 문제로 인해 피해생존자동지들은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고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삶의 기로에 놓여 있는데, 피해생존자 동지들에게 살인적인 2차 가해를 한 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또한 조직보위에서 나온 논리이며, 피해생존자 동지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가해주범과 2차가해자에 대한 실명공개와 징계. 처벌은 당연한 것이다.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생존자 동지들은 계속 조직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이 문제가 언론에 회자되는 것과 부르주아 법정에서 다뤄지는 것 자체를 모두 싫어하였다. 오직 조직내부의 공동체가 변하는 것을 원했다. 다함께 에서는 우리 동지들의 순수한 태도를 악용하여 고소.고발을 남용하면서. 오히려. 여성이 남성을 성폭행 했다는 허위진술을 하면서 법정에서도 2차.3차 가해를 하였다. (이는 충남성폭력 대책위에 대한 코리아 연대의 명예훼손 고소. 고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성폭력 문제를 악용하는 자들이 있기에, 가해주범 및 2차 가해자들의 실명공개는 중요하며 그것이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운동내부의 조직뿐만이 아니라 우리사회 전체가 변해야만 한다. 조중동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말도 되지 않는 얘기이다. 조중동은 우리가 잘하건 못하건 간에 우리를 매도한다. 우리 운동내부에서 스스로 자정작용을 거쳐 우리 운동내부가 스스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미 운동내부의 성폭력 문제는 도를 넘어도 한참이나 넘어섰다. 가해자들이 운동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필자의 생각은 적어도 운동을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며 그런 일을 저지른 자들은 운동을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3.8 세계 여성의 날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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