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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냐? 넌

 

오늘도 어김없이 초인종이 울린다. 인터폰에 대고 물어본다.

 

“누구냐 넌?”

“자장면 갖고 왔습니다.”

“군만두는 서비스지?”

“쿠폰을 모아주시면 서비스 드립니다.”

“그냥 주면 안 되겠니? 다른 데는 다 그냥 주던데......”

 

  자장면 집과 군만두 서비스에 관한 영화, <올드보이>가 2003년 빅히트를 친 이후에 시작된 유머이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주인공은 군만두만 먹으면서 세상과 단절되고 감금되어 살아왔다. 그 올드보이는 사실상 우리들의 자화상 이었다. 386세대. 세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15년을 정신없이 뛰었다. 그러다 보면. 세월이 지나다 보면, 첫사랑 잊혀 지듯이 우리의 모든 세월도 쉽게 잊혀 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우리에게 금지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린 막연한 호기심뿐만이 아니라. 흥분되고 오히려 중독된다. 그것이 금지되지 않았다면 별로 흥미도 느끼지 못했을 것들에 대해서. 정치. 운동. 그리고 세상사에 대해서.

 

 15년 동안 철저하게 외면하고 살려고 노력했다. 정치가 밥 먹여주더냐? 인터넷이 밥 먹여주더냐? 오로지 밥 밖에 모르는 우리 집 노인네가 늘 상 하는 소리이다. 그 노인네를 싫어하면서도 나도 어느새 그 밥밖에 모르는 노인네를 닮아가고 있었다.

 

   바보상자인 TV가 망가졌다. 10년 전에 산 TV인데 전혀 전원이 켜지지 않는다. 아니 이젠 인터넷이 있기에 굳이 TV를 보지 않아도 된다. TV를 새것으로 사야지 하면서도 귀차니즘이 발동되어 계속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세상사가 궁금해서 TV대용으로 아프리카 인터넷 TV를 시청 하였다. 인터넷 방송엔 각기 방송을 진행하는 BJ가 있었다. 연예인을 지망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서 주목받고 싶어서 방송하는 이들도 있었다. 인터넷 방송은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렸다. 욕을 잘하는 사람들과의 전쟁인 욕 배틀 전도 있었고 장난전화를 좋아하는 장난전화 전문방송도 있었는데 장난전화를 좋아하던 그 BJ는 그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장난전화를 인터넷에서 어렵게 구해서 듣긴 들었는데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예뻐서 주목받는 탤런트적인 외모에 탤런트 적인 재능을 가진 여자들도 있었다. 호리라는 BJ는 아예 광란의 퍼포먼스 방송을 진행한다. 온몸과 벽에 물감을 칠하고 배추를 집어 던진다던가 광란의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어느덧 인터넷 TV를 보면서 이어폰을 꽂고 속으로 낄낄대는 것이 취미가 되어 버렸다. 어떤 여자 BJ는 염세주의라 매일 술을 마시면서 진행을 한다. 나도 젊은 시절엔 염세주의였는데 자살이 무서워서 지금껏 살고 있다. 지금 세상에도 염세주의를 생각하는 부류들도 많다. 인터넷 방송은 인터넷 세대. 대화가 단절된 세대들의 새로운 소통방식 이었다. 인터넷 방송이라도 안하면 금방이라도 우울증에 걸려버릴 사람들 같았다. 모두들 누군가와 만나고 대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방송이 재미없어 지기 시작했다. BJ들의 레퍼토리가 거의 다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BJ는 많으니까 골라서 보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지겨워졌다. 그런데.아이디 : <생선> 이라는 BJ가 방송의 상업주의와 저질방송을 비판하면서 계속 독설방송을 하면서 방송을 더욱 더 재미없게 만들었다. BJ들의 흡연이나 음주. 욕등 저질방송이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영화가 폭력적이라고 해서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객관적인 증거나 자료는 없다. 오히려.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은 대리만족을 하고 폭력범죄가 줄어들고 성범죄가 줄어든다는 자료는 많다. .우리는 모든 것이 금지 되었기에 야매로 잘못된 것을 배워왔다. 흡연도 마찬가지이다. 청소년 시절엔 금지했기 때문에 더더욱 호기심을 갖고 몰래몰래 피워왔다. 대학시절엔 또 빨갱이가 금지 되었기에 오히려 빨갱이가 되고자 안간힘을 썼다. 사람들의 심리는 이런 것이다. 금지하면 할수록 그 금지에 대한 호기심은 금단의 선악과처럼 유혹처럼 다가와, 더욱 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고 흥분시키고 급기야 중독 시킨다. 표현의 자유는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 그 누구도 표현의 자유도 사상의 자유도 간섭할 권리는 없다. 그냥 내버려 두어라. 선택은 언제나 자신들의 몫이다. 누구도 그것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

 

 아프리카는 두패로 갈라져 <생선>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생선>을 싫어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아프리카 방송도 시들해질 무렵 촛불방송이 시작 되었다.

 

 당시엔. 나에게도 금지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정치였다. 정치와 담쌓고 지내기 15년, 끝내 영화 올드보이 처럼 군만두를 먹을지언정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정치판과 운동판 이었다. 다시는 그 바닥을 향하여 오줌조차 갈기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빨갱이가 금지 되었기에 대학시절 우리는 더욱 더 좌익서적에 골몰하고 사회주의에 편향되고 집착 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사회주의는 한낱 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을 말하던 사람들. 진실을 말하던 사람들 모두는 배반당하였고 나처럼 떠나갔고 잊혀졌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느덧 나는 언제나처럼 나에겐 금지된 것. 정치. 운동. 촛불방송에 점점 중독되어 갔다. 일주일 째 거의 잠을 자지 못한 것 같다. 연일 아프리카 인터넷 방송에서는 촛불시위를 생방송 해주었다. 그거 보느라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계속되는 바람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아프리카 방송을 보지 않으면 도대체 궁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무엇에 홀리고 중독된 느낌이다. 아프리카 방송에서는 한달 전 부터 광우병의 심각한 위험성을 알려 왔었고 광우병 반대를 위한 노래도 나와서 유행이 되었고, 광우병 반대를 위한 아고라 서명이 벌써 100만이 넘었다고 들었다. 청계광장과 광화문에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도 벌써 10만이 넘어간다고 들었다.

 

 어제는 처음으로 경찰측이 물대포를 발사하여 고막이 찢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시위는 연일 긴장감이 더해만 갔다. 마치 전투태세로 돌입할 것만 같았다. 도저히.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방송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현장감이 떨어져서 답답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시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친다는 현실이 믿을 수 없다. 다친 사람 중에는 여고생도 있었고 청년들도 있었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다시 기막힌 독재(반동)의 현실이 도래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다친 다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었다. 직접 눈으로 봐야 모든 상황이 이해될 것만 같았다.

 

 시청에 도착하니 꽤나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줄잡아 5만 여명은 훨씬 넘을 듯하다. 15년만에 다시 옛날 노래를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임을 위한 행진곡”도 들렸고 “불나비”도 들렸다. 정리집회를 하는 모양 이었다. 정리집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려는 데 우연치 않게 20년 만에 학교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내가 아직도 운동을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운동하고 담 쌓은 지 이미 오래전인데 말이다. 주마등처럼 옛날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1995년 나는 완전히 패배 하였다. 외부 투쟁과 내부투쟁 모두에서 졌다. 선거에서도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패배 하였다. 다시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고 내 내면의 자아는 자꾸 운동을 원하는데, 나는 끝내 패배주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91년 러시아의 붕괴가 알려진 사실 이후에 우리는 사실상 운동의 목표와 지표를 잃어 버렸다.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한 장면처럼 가장 열심히 투쟁했고 우리는 항상 진실 되었지만 우리는 패배 하였다. 불가역성의 법칙처럼. 모래시계처럼 시간은 다시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정치력이 강한 자들만 끈질기게 살아남은 셈이다. 직업혁명가가 되고 싶었던 꿈도 접었고 우리가 생각하던 꿈의 사회주의는 마치 유토피아처럼 현실에서는 요원하기만 하였고 이상에 불과 하였다. 스스로 자학하며 옛 동지들과의 인연도 모두 끊어 버리고 15년을 현실로부터 도피 하였다. 생존이라는 감옥 속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철저하게 현실을 외면해 왔다.

 

 20년만에 만난 그 선배는, 참 재수가 없으려니 하필이면 그것도 가장 싫어하는 NL선배를 만났다. 별명이 사람을 하도 짜증나게 해서 '짜증이' 다. 뭘 물어봐도 맨날 동문서답만 하고 같이 술을 먹어도 술값을 제대로 낸 걸 본적이 없다. 그 선배는 내가 어디 무슨당이나 아님 좌파쪽에 활동이라도 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지금은 어디서 활동 하느냐고 묻는다.  이미 오래전에 운동을 접었다는 얘기는 자존심상 하지 못했다. 그냥 대충 무슨 당에 있다고 둘러댔다.  나를 가르치던 선배는 뭐하느냐고 물어본다. 택시운전 한다고 하니 짜증이 답게 또 짜증나게 물어댄다. 어느 노조에 있냐고?? 노조는 아니고 그냥 택시운전하면서 살아간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무슨연합이라는 시민단체에 있다고 말했다. 관심도 없는데 자기 후배라고 소개시켜준다. 순간 짜증이 급 밀려와서 연락처를 주고받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선배 말에 의하면 집회는 끝났지만 광화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 투쟁하고  있다고 했다.

 

 방송과는 다르게 여기저기서 술판이 벌어졌다. 긴장감 이라곤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시위문화는 자유로운 축제문화로 바뀌었다고 언급 하였다. 이 무슨 황당한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런 얘기를 한 듯하다. 전투 상황 속에서 이 무슨 술판인가? 예전부터 투쟁보다는 문화제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술판을 벌이고 시위문화를 바꾸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기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도 있었고 여기저기 시민악대의 아침이슬 노랫소리도 들렸고 대학 동창이나 선후배 모임인 듯 여기저기 술판이 벌어졌다. 다들 과거의 무용담을 추억 했으리라. 87년엔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자신들의 영웅담을 자랑스럽게 자식들에게 후배들에게 말했으리라. 그러나. 저 중에 진짜 세상을 바꾸고자 치열하게 노력한 사람은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이 간다.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빈익빈 부익부는 여전히 그대로 이고. 그 다음에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그동안 세상을 방관해 왔던 우리의 업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5년 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세상은 그다지 변한 게 없는 듯하다. 무심한 세월만 흘려버린 거 같다. 80년대를 같이 했던 옛 동지들이 무척 보고 싶어졌다. 모두들 늦깍이라 현실에 잘 적응하고 사는 지 모르겠다.

 

 시위현장에 술판만 벌어졌다면 나는 그길로 발길을 돌리고 두 번 다시 광화문을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대열의 맨 선두에서는 치열하게 5천여명 이상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긴장감이 감돌았고 열정과 살아있는 눈빛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마치 예전의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과는 다르게 생생한 긴장감과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오다 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고 술 생각이 간절해져서 맥주 한 캔을 사서 마셨다. 예전엔 투사였지만 이젠 관전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다본다. 방송보다는 현장의 직접체험이 훨씬 더 생생했다. 지금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쉽게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은 아직도 과거의 패배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니. 전경들이 막 밀고 들어 올 태세인데도 전혀 도망가는 사람이 없다. 물론. 예전처럼 악명 높았던 백골단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전경을 그리 무서워하지는 않는 듯하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법에 대해서 누구하나 코치해 주는 사람도 없었고 전경의 공격을 알려주는 안테나(정찰)도 없었다. 갑자기 장기 훈수 두는 노인네처럼 여기저기 참견이 하고 싶어졌다. 미리미리 경찰의 동태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들이 언제 진압할 것인가를 예측할 수 있다. 경찰의 무전소리를 자세히 엿듣거나 아니면 갑자기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 등을 관찰하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전경은 장비를 착용하고 뛰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시위대 보다 늦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은 진압을 위해 갈수록 장비가 가벼워진다고 한다.)

 

 그 옛날 전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들 시위 처음 해보는 순진한 사람들 같았다. 누구 하나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도망가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위험을 불사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그들이 옳고 내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비겁하게 물러서고 도망가는 것이 나쁜 습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80년대 수없이 쫓겨 다니면서 이미 패배를 습관처럼 배웠는지도 모른다. 2008년 촛불은 시위 처음해 보는 순진한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과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인터뷰;: 2008년의 체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8년 촛불의 시작은 민주노총도 시민단체도 정치조직도 아니었다. 한낱 이름모를 사람들의 순수한 저항과 열정으로 시작되었다. 시간표도 깃발도 없이 2008년의 항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눈빛과 열정이 살아있는 5,000여명의 대오

 

물대포 45도 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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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붙는 시위대에 기름을 부은 여대생 군홧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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