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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25
    5. 제2막의 시작
    아방가르드

5. 제2막의 시작

 

 피의 일요일을 경험하고 나서도 주말마다 모이는 인파는 줄지 않았고 계속 10만 이상 모였다. 겁이 나서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실망해서 안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대학 때도 수 없이 경험했던 바이다. 예전부터 문화제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문화제만 했다. 교내행진 이라던가 삭발식. 혈서식. 결의식 등으로 평화적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잘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전경이 학내를 침탈해서 맞서 싸워 짱돌과 화염병으로 맞선다면 500명 모이던 사람들이 금새 1. 2천명을 웃돌고 87년도에는 아예 90% 이상이 참여했다. 모든 문제를 저항 없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면 사람들은 사실상 참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공권력의 탄압이 심각하거나 동지들이 위험에 처해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껴서 그런 것이다. 평화적으로 모든 행사를 진행했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밟으면 밟을수록 더욱 더 꿈틀하고 일어나는 것이 우리네 민초이다.

 

 아고라에서는 대책 없이 버스를 끌어낸 부분에 대해서 질책하며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옛날처럼 짱돌과 화염병을 다시 들어야 되는가 하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았지만. 마찰은 없었다. 사람들의 행동을 자제 시키고자 민주당의 평화실천단과 예비군들이 차벽 앞을 지켰고 사람들이 버스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았다. 광우병대책위의 문화제는 10시가 되자 바로 끝났다. 눕자를 했던 YMCA 회원들은 기브스를 하고 다시 현장에 나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긴장하고 있을 무렵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평일 집회였는데 5만명이상의 사람들이 모였다. 오랜만에 거리행진을 하고 “독재타도! 명박퇴진”을 우렁차게 외칠 수 있었다. 더 이상 시민들은 앞으로 닥칠 위험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집회는 잘못된 개입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고 하면서 경찰을 위한 비폭력을 주장했으나. 더불어 아측의 행동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비폭력 이라면 똑같이 비폭력을 해야 한다. 공권력은 방패를 갈아서 또는 무자비하게 장봉으로 가격하는데 우리만 비폭력을 할 수는 없다. 천주교의 교리대로 전체 시민을 비폭력으로 가둬둘 권리는 없다. 종교집회는 천주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불교로 까지 확대되었다. 시민들의 집회는 이제 종교집회로 바뀌었다. (7월1일) 사태는 아무것도 해결되거나 진전된 것이 없었다. 폭풍을 잠시 피해갔을 뿐이었고 네티즌들의 불만은 점차적으로 쌓여만 갔다.

 

 경찰의 80년대식 과잉진압으로 인해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광우병 대책위는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았고 수수방관만 하였다. 오히려 몸을 사리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일관하였다. 7월5일의 광우병대책위의 저녁문화제는 싱겁게 일찍 끝이 나버렸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나온 네티즌들은 허탈감을 느꼈다. 그들은 밤새 시청광장을 누비며 배회하였다. 집단적으로 시청광장을 행진하거나 차벽을 흔들기도 하였다. 광우병 대책위와 일련의 평화실천단. 예비군들의 기회주의적인 평화행동에 대항하기위해 네티즌들도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네티즌들은 개별적인 의견과 주장이다 보니 항상 단체의 의견에 밀렸다. 이러한 대응양상으로 네티즌들은 자주 밤샘 토론회를 개최 하였다. 토론의 주제는 아고라에서 진행되던 폭력과 비폭력 논쟁의 연장선상 이었다. 어디까지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어디까지를 비폭력으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의견은 적의 폭력에 대항하는 정당방위는 폭력이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또한. 우리의 행동을 제지하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일련의 평화실천단. 예비군. 광우병대책위등에 대해서도 공동대응 하기로 하였다. 아고라광장에서 서로 토론하고 아프리카 방송을 보고 집회에 참여했던 개인들은 이제 하나둘씩 서로 모이기 시작했고 조직화가 되기 시작했다. 각자 개개인이고 천차만별한 생각을 가지고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 모래알 같던 사람들이 스스로 모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역사이래 없던 놀라운 발전이었다.

 

 동아일보에서 악선동을 하는 것처럼 광화문의 아침은 아침까지 격렬하게 투쟁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아침까지 밤새토론을 했던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8.15평화행동단은 경찰차벽을 부수기 위해 만든 모임이 아니라. 8월15일 전원연행 당하는 철저한 저항을 했던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그밖에. 386. 전대협. 남녀공학. 집회같이가기. 광화문에서 만난 사람들 등등 수많은 네티즌 카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7월 중순에 네티즌들은 광우병대책위와 시민단체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차벽을 제거하기 위해 버스를 끌어내기 시작했으며 경찰은 최루액을 뿌렸다. 옛날의 최루탄 보다 더 눈이 따가와서 눈을 뜰 수 없었다. 광우병 대책위는 투쟁의 수위를 올려 정치투쟁으로 이 명박 정권 퇴진운동으로 전환한다고 발표 하였다.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원은 점차로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광우병대책위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해서 신망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날도 광우병 대책위 차량은 끝까지 쫓아왔다가 네티즌들의 행동을 만류하며 실랑이를 벌이다 철수 하였다. 저항은 이제 시청일대와 광화문뿐만이 아니라 도심 곳곳에서 밤새도록 진행되는 게릴라 가투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2막이 시작되었다. 광우병 투쟁, 아니 이젠 이명박정권 퇴진투쟁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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