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계급

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4/02/25
    영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혁명의 불씨를 지피자
    아방가르드

영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혁명의 불씨를 지피자

 영화속의 사회는 두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노동으로 착취당하며 빈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노동

없이 향락만 누리는 지배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다. 폭동(혁명)을 통제할 목적으로, 지배계급은 각기 12

구역에서 두명씩 24명을 추첨해서, 헝거게임을 진행한다..

 

 죽고 죽이는 치열한 싸움을 통해 단 한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지배계급의 노림수는 피착취계급이

서로 죽고 죽이는. 피 튀기는 서바이벌 속에서 단결하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

한다고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다..

 

 각기 12구역은 우리의 민족 혹은 국가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어차피 영화를 보는 시각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노동자에게 민족과 국가는 부르조아 사회를 지탱해주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단결을 저해할 뿐이다.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12구역의 선발자들은 각기 구역(종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고 (민족 혹은 국가간의)이 대리전쟁은 전 구역,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 모두에게 생중계 된다. 생중계, 그리고 개개인에 대한 후원자 모집등은 현대의 매스 미디어를 상징한다,

 

주인공은 어린 동생을 대신해서 자원했고, 다른 사람들 보다 인간적이고 반항적이다.

 

지배자들은 이 새롭고 신선한 주인공이 자신들의 게임에 흥미로움을 더해준다고 부각시키나, 한편으론 주인공 캣니스 안에 내재 되어 있는 반항적이고, 지극히 인간다운 이타심, 이런 것들이 폭동의 불씨가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 우려하던 것들은 게임이 진행되면서 현실(게임속의)이 되었다. 주인공 캣니스와 서로를 돌봐주던 어린소녀 루, 그 어린소녀가 죽어가자.11구역은 폭동이 일어난다. 지배자들은 캣니스를 제거 하려 했으나, 더 큰 폭동이 일어날까봐 두려워 한다.

 

 임의 목적은 서로간의 피 튀기는 살육, 생존을 위한 치열한 대립과 경쟁인데, 캣니스는 생존의 순간에도 인간적인 면. 이타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개념이고 자칫하면 지배자들에게 위험한 것이고 폭동을 부채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게임 룰을 바꾸었다. 같은 구역의 남녀에 한해서 공동우승을 인정 한다는 것이다. 이는 로맨스를 부각시켜 내재 되어 있는 혁명(폭동)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 살기위해 그런 것일까? 영화는 의문을 던진다. 둘 사이의 로맨스로 인해서 폭동이 어느정도 잠재워 지자(로맨스는 그래도 세상이 살만한 것 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자본은 뭐든지 상품으로 만든다. 로맨스 마저도), 지배계급은 끝까지 포기 하지않고 또 룰을 바꿔 공동우승을 인정하지 않고 둘 사이의 분열을 획책한다. 그러자, 두사람은 더 이상 지배자들의 음모에 놀아나지 않고 독이 든 산딸기를 서로 먹고 공동자살을 선택한다. 두 사람의 참혹한 결말은 또 다시 피착취 계급의 반란을 부추길 위험이 농후해진다. 지배자들은 이제 공동우승을 인정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영화보다 책이 더 재미있다는 후문이다. 영화를 다 얘기하면 재미없지만 그래도 볼만한 영화이다.

 

차라리 두 주인공이 죽었다연, 과연 반란 또는 혁명이 일어났을까?

 

 자본의 위기는 갈수록 심화된다. 언제나 반란과 폭동, 혹은 혁명의 징후는 도처에 널려있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혁명이 발발하지 못하도록 곳곳에 안전장치를 해둔다. 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상층부(민노총의 관료주의등)를 개량화 시키고, 의회주의에 대한 환상(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로 시작된 모든 의회주의는, 92년도 탄원서에서 진정추가 밝혔듯이, 진보정당의 건설은 당시의 극심한 체제혼란, 즉 혁명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의 역할을 하며 제도권 안에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자본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심지어 사랑이나 로맨스, 그리고 그나마 3류 인생이라도 자본주의가 살만한 곳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것마저도 혁명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이다.

 

 자본의 위기는 심화 되지만, 혁명은 아직도 요원하다. 자본의 위기가 심화된다고 해서 혁명적인 정세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혁명은 감처럼 하늘에서 저절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바느질처럼 한땀 한땀 일구어 나가야 한다.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개량주의, 기회주의, 의회주의의 고리를 끊어내 버리고 부르주아가 만든 모든 환상과 이데올로기를 걷어차야만 한다. 여기저기서 폭동을 부채질하고(선동!) 혁명의 불씨가 들불로 번지게끔 최선의 노력을 경주 해야만 한다.

-2012년 9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