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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25
    11. 여기 사람이 있다.
    아방가르드

11. 여기 사람이 있다.

 

 그런데, 1월 초 갑자기 또 비보가 날라 들었다. 용산참사? 용산학살! 그 전날. 아프리카 방송에서 무엇인가 방송을 해주었는데 그냥 일상적인 촛불방송 이려니 생각하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게 아니었다. 네티즌들 중 일부는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하고 동영상을 찍기도 하였다.

 

 유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1층에서 용역들이 폐타이어를 태우고 경찰이 망루로 물대포와 최루탄을 뿌리고 경찰특공대가 진압 하였다고 한다. 진압하면서 경찰이 망루로 화염병을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사체가 두개골이 깨지거나 앞니가 부러지는 등의 타박상이 있다고 하였다. 왜 유가족의 말들은 법적인 증언이 되지 않는 지, 법은 역시 서민의 편이 아니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동영상을 보고 비교 분석해 보았는데, 가장 중요한 경찰이 4층 망루로 진입하는 순간 무언가 불빛이 올라가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중요한 10초가 끊겼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봐야 그 진실이 밝혀질 것 같다.  (또한. 용산의 살인에 용역들이 직. 간접 개입되었다는 것도 공공연한 사실이다. 용역들은 상가철거를 위해 계속 영업방해를 하였고. 벽에다 칼을 그려놓는 등 협박을 일삼았다. 사고당일엔 남일당 건물 1층에서 폐타이어를 태워서 주민들의 신고로 소방차가 출동 하였는데도 그들은 소방관을 돌려보내고 폐타이어 태우는 작업을 계속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카메라기자들과 시민들을 폭행 하였다. 용산의 용역은 일명 “식구파” 라는 조직폭력배로 용산참사에 개입하고 용산역 주변의 매춘에도 관계 되었다. 용산의 개발은 정경유착을 넘어 1950년대처럼 조직폭력배 까지 개입하였다. 그 깡패들이 각종 철거현장. 파업현장에 이르기 까지 재벌들의 각광을 받는다나. 조폭들이 활개치는 신 “야인시대”가 도래했다.)

 

 그날 사람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경찰들은 혼비백산이 되어서 도망가기 바빴다. 그 와중에서도 경찰은 사람들이 던진 돌을 맞받아 던져 시민 10여명이 다치기도 했다. 집회는 명동에서 용산에서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그날은 백골단 할애비가 온다 해도 사람들의 분노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쓸데없는 반항이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더 부추기게 할 뿐이었다. 집회는 매일 있었고 매주 주말엔 대규모 집회로 밀고 밀리는 전경들과의 싸움이 두 달여 동안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숫자는 예상보다 많지 않았다. 적게 모일 때는 최소 2000, 많게 모일 때는 최대 2만 여명의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세상을 뒤집어엎기엔 턱 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 와중에서 한국진보연대. 참여연대등 몇몇 시민단체들은 범국민들의 조직인 용산범대위를 박차고 나갔다. 그들의 주장은 용산투쟁이 명박심판 투쟁이 되어야 하고 명박퇴진 투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무슨 베른쉬타인주의의 부활도 아니고 독일 사민주의자들의 부활도 아니고, 폭발할지도 모르는 대중들의 자생성을 미리 한계 짓고 규정짓자? 이 말은 자신들은 되도록 이면 온건하고 비폭력적인 투쟁만을 감당하고 집회. 문화제위주의 약한 투쟁만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명박퇴진이나 독재타도를 외친다고 해서 이명박이 퇴진하고 독재가 타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구호를 외치면서 투쟁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명박퇴진이 되든 안 되든 현재의 절박한 현실을 알려내고 독재정권에 대항해 맞서 싸우겠다는 뜻이다. 말 한마디에 따라서 이렇게 편차가 큰 것이다.

 

 사람이 죽어갔는데 사람이 곧 하늘인데 여기 사람이 살고 있는데, 2010년 용산의 하늘에선 80년의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개 패듯이 두들겨 맞고 불에 타 죽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무슨 얼어 죽을 온건한 투쟁이고 심판이란 말인가? 제대로 투쟁다운 투쟁 좀 하란 말이다. 가장 낮은 수준의 대중의 후미만을 뒤쫓아 가는 ‘대중 추수주의’는 투쟁을 갉아먹고 운동을 병들게 하였다. 그들과 그들의 지지층의 숫자가 우리 운동의 절반이라고 보면 거의 맞는 수치이다. 그 절반이 부족한 상태에서 용산학살 진상규명 투쟁은 진행이 되었다.

 

 그 중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것은 청년 대학생들의 결집이었다. 시간이 다르게 무섭게 성장한 학생대오를 잡기 위해, 경찰들은 집회가 끝나면 무조건 연행 작업에 들어갔고 무차별 적으로 연행 하였다. 또한, 네티즌 촛불 강성대오  500~2000여명 에게 정부와 경찰은 질이 안 좋은 전문시위꾼의 멍에를 갖다 붙이고 계속 조사하고 소환하면서 50여명을 구속 시켰다.

 

 아직 미해결인 용산참사가 만족하지 못한 성과를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우린 이렇다 저렇다 말할 만한 자격이 못 된다. 아까 말한 것처럼 그 절반이 참여하지 않았고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인 이슈가 노무현 서거정국으로 넘어가서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의 모든 것까지 모두어 하나의 전선으로 결집하여 싸웠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 모두는 공안탄압으로 감옥에 가거나 조사받거나 아니면 매도 당하였다. 21세기에 사람이 죽어갔는데 최선을 다해서 지켜주지 못함이, 그 억울함을 해소 시켜 주지 못함이 정말로 미안하고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는 그 진상을 규명하지도 못했고 탄압이 심하여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정부는 사람을 살리는 구조작업을 했어야 했는데, 용산 열사 분들을 도심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테러범으로 간주했다. 자신들의 사과를 인정하면서도 구속되신 분들의 석방이나 사면은 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여론에 고개 숙인 것이다.

 

 용산 사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용산의 상가뿐만이 아니라 오래된 낡은 아파트들마저 재개발 대상이다. 제2. 제3의 용산참사가 또 다시 언제 일어날지 모른다. 재벌들의 배만 불리는 살인적인 개발은 멈춰져야 한다.

 

  인터뷰: 척박한 땅. 아직도 부자 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 정의와 진실은 짓밟히고 어느 누가 억울한 우리 누명 누가 벗겨줄까? 어느 누가 우리의 원통함을 알아줄까? 가난이 철천지한이 되어 비수로 가슴에 꽂히는 그 심정을.

 

 살인 컨테이너

 

 

 

 경찰은 사람이 쓰러져 있는 데도 수수방관 하였다.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기 보다는 테러범 취급해서 주변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검거와 체포에만 열을 올렸다.

 

 

 

 

 

 

 

어느새 열렬한 투사가 되어 버린 용산 참사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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