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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2/25
    3. 명박산성 -폭풍전야-
    아방가르드

3. 명박산성 -폭풍전야-

 

 촛불집회는 5월부터 매일같이 열렸고 그 시작은 시민단체가 아닌 여고생들이었다. 시청일대는 경찰과 항상 밤늦게 혹은 밤새도록 밀리고 밀면서 대치중 이었다. 물대포는 심심치 않게 계속 뿌려졌다.

 

 6월10일 정말로 70여만 이상의 시민이 서울에 모였고 전국적으로 200만이 모였다고 한다. 광화문 거리는 앞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87년 6.10 이후 이렇게 인파가 많이 모이긴 처음이라고 한다. 이 한열 열사의 어머님도 오셨고. 백기완 선생님도 오셨다. 백기완 선생님은 20년 전에도 명동성당 에서 철거민들과 같이 단식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늘상 함께 하셨다. 몇 번인가 담소를 나눈 적도 있었는데 나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콘테이너 박스와 경찰로 중무장한 명박산성이 우리를 가로 막았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넘어가면 위험할까봐 예비군들과 어린여학생들이 명박산성 앞을 에워쌌다. 6월8일과 같은 행동을 막기 위해 예비군이 나섰는지도 모른다. 비폭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단체나 정당에 속한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의 말로는 촛불정국을 비폭력으로 되도록 길게 가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부처님 손바닥 안에 손오공처럼 명박산성에 낙서 하거나 스티커를 붙이는 게 전부였다. 명박산성을 올라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스티커 붙이고 예비군과 기념촬영이나 하려고 아까운 시간을 쪼개서 여기까지 나온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시 6.10을 기대했지만 명박산성에 가로막혀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아프리카 방송을 보니 명박산성 앞에서 누군가 스티로폼을 깔고 올라가느니 마느니 토론을 하자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컨테이너 박스 위까지만 올라가고 넘어가지는 않는다고 하였는데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올라갔던 사람들이 다시 내려왔다. 광우병대책위 및 시민단체등의 비폭력 평화주의자들과 예비군들의 이러한 행동이 사람들한테 상당히 불쾌감을 주는 여론이 아고라에서 들끓었다. 그래서. 광우병대책위에서는 모래주머니를 운반해서 모래성 쌓기를 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고, 구리스를 칠해 놓은 명박산성 컨테이너 박스위에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명박산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나중에 얘기한다. 그때 명박산성을 넘어서야 했다고 절실히 후회하였다. 실제로 명박산성을 세 번씩이나 넘어서 연행되어서 세 번을 유치장에 간 사람도 있다. 후에 강정투쟁에서 구속된 소금사탕 정연길 목사이다. 몇몇의 사람들이 명박산성을 넘다가 개별적으로 연행되기도 하였다.

 

6월15일 경에는 일명 <시청회군>이 있었다.

 

 5월경에는 광우병대책위 다함께 소속에서 확성기를 잡고 시위대를 인솔했던 아고라에서 일명 ‘확성기녀’ 가 경찰이 오면 먼저 도망가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토끼몰이 당해서 연행당하는 위험에 자주 빠져서 지탄을 받았다 그런 비판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그날은 인간 띠잇기를 하고 새벽까지 방송차가 방송을 했다. 전경들과 대치중이었는데 시청에서 정리집회를 하자며 기차놀이를 하면서 사람들을 끌고 갔다. 그 와중에 몇 명이 경찰에 연행 되었다. 선두의 상황을 보고 선두가 안전하게 피하고 빠진 연후에 정리 집회를 하는 것이 맞다. 아고라에서 처음엔 무조건 광우병 대책위의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성토하는 사람을 프락치나 알바로 몰고 있었다. 자신이 말한 답변 속에 해답은 이미 드러나 있었다. “자신들이 주동자로 몰려서 구속되면 당신들이 책임질거냐?” 는 그 한마디에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해답이 보인다. 처음에 여고생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나중에 숟가락을 얹은 민노당. 진보연대. 참여연대등 시민단체가 모인 광우병 대책위는 이렇게 인파가 많아지고 시위가 거세질 줄은 미처 예측을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집행부를 자임했다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만 한다. 마땅히 언제 어디서든 구속이나 위험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중을 혼란과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 있다. 쉽게 모든 것이 바뀌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것은 마치 전쟁과 같다. 위험을 두려워하는 장수 앞에 병사들은 모이지 않는다. 어차피 구속이 되고 수배가 되는 건 마찬가지이다.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였던 광우병 대책위는 6~7월 내내 시민들의 비판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때부터 광우병대책위와 네티즌들간의 갈등과 앙금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대학 때도 이런 경우는 숱하게 보아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80년대로 돌아온 느낌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없다. 교내 학자투 라고 해서 약하게 투쟁하란 법은 없다. 정치와 경제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경제투쟁이 탄압이 심해지면 정치투쟁으로 바뀔 수도 있다. 오히려 등록금 투쟁이나 재단비리투쟁 일수록 학우들이 체감하는 바이기에 더욱 거세게 싸워야 목적을 쟁취할 수 있다. 우리가 결의만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거나 학교측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하다. 쌓여만 가는 머리카락. 총학생회 단대학생회 전간부들은 모두 삭발을 하였고 운동권 모든 학생들이 삭발을 하고 조금 있으면 전교학생이 삭발을 할 태세이다. 매 집회 때마다 삭발식이 거행 되었다. 학교가 무슨 이발소도 아니고. 혈서식도 매집회 때마다 해서 열 손가락 모두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있다. 결의를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다. 투쟁의 파고를 높이기 위해서 결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결의만 하다가 모든 걸 끝내버리니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삭발식이나 혈서식만 하고 평화대행진 하다가 끝이 난다. 집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실망해서 점점 줄어만 갔다.

 

 아고라나 여론에서는 MB가 시민들과 소통을 거부한다는 비난이 들끓었고 6월말경에 결국 명박산성은 없어지고 다시 차벽이 세워졌다.

 

 차벽이 세워지자 다시 대치는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밧줄로 버스를 두어 대 끌어내서 수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아고라 일부의 비폭력주의자들은 이것을 두고도 폭력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물대포는 계속 쏟아졌고 경찰들은 방패로 사람들을 가격하는등 진압은 더욱 거세졌다. 아직 사수대라 하기엔 미약하지만 어느 카페에서 사수조를 만들었고 안테나(정찰)등이 몇 명씩 생겨서 경찰의 상황을 미리 파악하는등 시위는 점차 조직적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고라에서는 80년대를 향수하는 사람들의 녹두대. 오월대등의 얘기가 쏟아져 나왔고, 경찰은 6월27일부터 장봉을 준비하는 등 일촉즉발의 폭풍전야가 되었다.

 

 

 

 

 

올라가지 못하도록 컨테이너 박스위에 구리스를 칠해놓은 명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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