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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9~10.11 이야기

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9~10.11 이야기

 

16. 새벽 방비엥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을 이제 막 분주해지는 아침이라 비유한다면 루앙프라방은 늦은 오후의 해가 걸쳐져 있는 오후와 저녁의 여유와 같았다. 이제 우리는 새벽과 같이 고요한 방비엥으로 떠난다.

아침부터 짐을 꾸리고 까오삐약(고기와 육수로 만든 쌀죽)을 먹으로 숙소 근처 거리식당으로 왔다. 아침에만 잠시 여는 이 가게는 어제 아침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인사를 했던 곳이다. 학교를 가는 학생들이나 직장으로 출근하는 이들이 잠시 들러 한 그릇을 뚝딱 비우거나 비닐봉지에 담아간다. 대접 한 그릇 분량에 5천킵이다. 라오스에서는 돼지갈비 부위를 삶아 죽에 담아주는데 뼈가 작은 것이 고깃살도 적당히 부드러워 아침에 먹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

맛있는 까오삐약과 진심을 다하는 ‘사바이디’ 인사에 마음은 배부르지만 약간 모자란 식사량에 ‘루앙프랑방 No.1 Mama's sandwich'에 들러 바게트 샌드위치를 두 개 준비했다. 하나는 치즈 누텔라 잼을 발랐고, 하나는 라오스식 샌드위치로 갖은 소스와 재료를 듬뿍 넣어주셨다. 인자한 미소가 멋진 마마는 역시나 나에게 라오스 사람과 똑같다며 까맣게 탄 얼굴을 당신과 비교하시며 웃으신다.

배낭을 숙소 앞에 내려놓고 미니밴을 기다린다. 먼저 온 미니밴은 북부 농키아우로 올라간다. 벌써 자리가 꽉 찼다. 우리는 어제 폭포에 가면서 본 일제 도요타 미니밴같이 좋은 차가 오기를 바랐다. 또 시내를 빙빙 돌아도 되니 우리에게 먼저 오기를 바랐는데 빙고! 두 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 최신형 밴이 우리 앞에 빈 차 상태로 나타난 것이다. 좌석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었다. 숙소에서는 우리 외에 아르헨티나 남녀 친구들이 4명 더 탑승하였다. 우리는 뒤쪽의 두 명 좌석을 선택하였다.

방비엥으로 가는 길은 미시령 길을 4시간 타는 것과 같았다. 빙빙 도는 산길을 오르내리며 끊임없이 흔들어주시는 미니밴은 시속 30㎞를 넘어서지 못했다. 미니밴이 최신형이라 아주 좁은 것은 아닌데도 키가 매우 큰 외국인은 다리를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졸다가도 흔들리는 차 안에서 책을 펴든다. 3시간쯤 지났는데 발이 뜨끈해진다. 내 발 앞의 라디에이터가 작동되었다. 차 안의 고요한 정적을 깨고 기사에게 라디에이터가 켜져서 덥다고 했다. 기사는 알았다고 하더니 뒤에 앉은 아르헨티나 남자보고 뭐라고 한다. 그런데 에어컨만 더 켰을 뿐이다. 이제 내 자리는 더운 정도가 아니라 발이 익어가고 있다.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혹시나 이동중 에어컨 추위를 대비해서 준비한 은박지 블랑켓을 펴서 라디에이터와 우리 자리 사이를 막았다. 이제 열기는 앞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이제 자기들이 더우니 기사를 부르고 난리가 났다. 이제야 기사는 차를 멈추고 아르헨티안이 건드린 난방 버튼을 직접 끈다.

곧은 도로가 나오고도 두 시간을 더 달려 방비엥에 도착하였다. 시골 어느 읍과 비슷한 방비엥은 비엔티엔과 가까워서 휴양 도시처럼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루앙프랑방에서 하루 먼저 떠난 경○씨 일행이 묵고 있는 쑥솜분G/H로 향했다. 한국인 아주머니와 아저씨께서 기분 좋은 환대를 해주셨다. 객실은 6만킵으로 저렴하였다. 그러나 루앙프라방의 방에 눈높이가 맞추어져 다소 불만족스러웠다.

짐을 부리고 마당으로 내려오니 경○씨가 지친 얼굴로 바닥에 앉아 있다. 동굴 튜빙과 카약을 하고 왔는데 혼자 1인용 카약을 몰다가 진이 빠졌다고 한다. 다른 남자 동행은 가이드와 둘이 타서 지치지 않고 재미있었다고 꼭 타보라고 권한다. 이들의 운명은 다음 날 정반대가 되었다. 지친 경○씨는 오토바이를 몰고 방비엥 외곽까지 멀리 구경하고 여유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고, 오토바이를 못타는 일행은 시골길을 자전거로 다니느라 푹 절은 얼굴로 나타났다.

한국인 G/H이다보니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았다. 울산 중공업에서 일하다가 한 달 계획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동갑내기 여행객은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볼 것을 권한다. 멀리 가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다. 떨어져 보아야 제 모습이 보이고, 마음을 놓아야 마음이 느껴질 수 있다.

 

어둑해지기 전에 방비엥을 돌아보고 싶어 걸음을 나섰다. 널빤지를 엮어 만든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갈 다리를 오토바이는 속도도 줄이지 않고 잘도 건너간다. 우기에 물에 잠기어 쇠락한 섬을 지나 모래사장에는 라오스인들이 먹을 것인지 관광객을 위한 것인지 모를 바비큐가 준비되고 있었고 불쑥 허니 튀어나온 바위산들은 겹겹이 병풍을 쳐주고 있다. 여행자 거리와 맞닿은 마을의 사원에는 라오스의 축제 기간에 열리는 보트 경주를 대비한 배를 만들고 있다. 보트 경주는 마을 대항으로 50명 또는 20명이 타는 배로 시합을 한다. 보통 매년 배를 새로 건조한다고 한다,

방비엥은 관광 도시이지만 작은 규모의 도시라 마을과 혼합되어 있었다. 덕분에 라오스 사람들의 삶을 잠깐이라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밤이 찾아오자 학교에는 축구와 세팍타크로를 하는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일을 마친 이들은 집으로 분주히 돌아가고 지역 식당에는 저녁식사를 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행자에게도, 현지인에게도 하루는 그렇게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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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쏭강, 그리고 카약

 

10월 10일, 집 떠나온 지 2주가 되었다.

목청이 채 트이지 않은 방비엥의 닭들은 꼬끼옥 소리를 내며 또 잠을 깨운다. 라오스의 닭들은 풀어놓고 키워서인지 다리가 길고 굵은 싸움닭의 자태를 취하고 있다. 닭 울음소리가 ‘꼬끼오’하고나서 ‘끼욱’하며 후렴이 하나 더 들어가는 것이 우리 닭들과 달라서 신기하다 싶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울어 되는 닭 울음소리에 짜증이 난 나는 닭 울음이 ‘꼬끼오 커억’하는 것 같다며 닭 목을 치는 모양을 취하곤 했다. 그런데 방비엥 우리 숙소 부근의 닭들은 목청이 아직 트이지 않은 것처럼 울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잠깬 마당에 숙소의 강가 테라스에 앉아 남쏭강의 고요한 아침을 촬영하였다. 삼각대가 없는 카메라를 난간에 기대어서라도 풍경을 담고 싶었지만 결국 카메라에 남은 풍경은 내 가슴에 남은 기억보다 못하다. 풍경은 경험과 결합되어야 의미가 된다. 나는 기록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기억은 내 안의 것과 내 밖의 것의 만남이다.

오늘은 튜브를 타고 동굴을 보고 남쏭강을 카약으로 타고 내려오는 프로그램을 신청하였다. 라오스에서 처음 레포츠 활동을 한 것이다. 레포츠를 좋아하지 않는 아내는 고민하다가 남편이 심심해할까 어렵게 동의하였다. 아마 그러지 않으면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고집피울까 걱정했는지 모르겠다.

참가자들을 픽업하러 돌아다니는 썽태우에는 열 명이 꽉 찼다. 까맣게 탔지만 레포츠 강사 분위기가 나는 리더는 카약 경험이 있는지를 묻고 팀을 나누었다. 우리는 처음이라고 물을 무서워한다고 빠득빠득 우겨서 리더와 같이 3인용 카약을 탔다. 간단한 방향 지시를 한국어로 말할 수 있는 가이드 리더는 이동할 적마다 우리와 같이 걸어가면서 나의 라오스어 발음을 교정해주었다.

오전에는 코끼리 동굴 사원을 보고난 후, 튜브를 타고 동굴을 밧줄을 당기며 들어갔다. 걱정과 달리 튜브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 줄을 놓치어서 한참을 물장구를 쳐서 줄을 잡을 수 있었다. 300M 가량을 줄을 잡아당기며 이동하며 보는 동굴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튜브를 마치고 나면 점심식사 시간이다. 각 팀의 가이드들은 이미 닭고기와 야채를 사와서 꼬치구이를 하고 있었다. 볶음밥과 바게트, 꼬치 두 개의 점심은 양에 넘치지만 카약을 타기 위해서 조금 과하게 먹어두어야 한다.

오후에는 12㎞ 정도를 3시간 정도 카약을 탔다. 가이드가 동행한 카약이라 편하게 간 것이지만 다리를 펴지도 접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내뻗고 앉은 자세가 허리를 받쳐주지 못했다. 노를 저어서 팔이 아픈 것이 아니라 자세를 유지하느라 대퇴부 근육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햇빛에 피부가 익는다고 해서 입고 간 코끼리 문양 몸빼 바지가 튜브를 타고나서 물에 젖으니 몸에 붙어서 다리를 들어 올리다가 쭉 찢어졌었다. 수건으로 가렸지만 다른 카약이 옆으로 오면 혹시 보일세라 다리를 모아 앉느라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라! 모르겠다.’하며 아내의 무릎을 등받이 삼아 뒤로 벌러덩 누우면 가이드가 노를 저었고 쉬다가 내가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햇살은 뜨거워도 물은 맑은 소리를 내주고 산들은 나에게 다가온다. 좋다!

저녁식사는 블로그에서 본 식당으로 갔다. 적당한 맛과 가격이었지만 팝송과 프렌즈 류의 미국드라마로 시끄러운 식당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맥주가 고팠던 우리는 숙소 옆의 텅 빈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미 식사를 해서 배는 부르니 맥주만 먹어도 되겠냐고 묻자 착한 얼굴의 여주인은 괜찮다고 하였다. 바(BAR)를 제외한 라오스 식당의 맥주 값은 마트에서 파는 가격과 같거나 천킵 정도 차이나기 때문에 맥주만 파는 것은 그리 이문이 남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대화를 알 리 없는 듬직한 착한(?) 남편은 우리에게 메뉴판을 갖다 주었고 라오스의 마지막 술판이다 싶어 안주로 적당한 영국식 스테이크를 주문하였다. 이 집을 들어온 것은 라오비어 다크와 타이거비어를 동시에 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라오비어의 광팬이 된 우리들은 다른 맥주의 맛이 궁금하였다. 그러나 동남아의 강자 타이거비어는 라오비어에 비해 싱거웠고, 흑맥주는 너무 무거웠다.

술이 충분히 들어가니 몸이 무거워진다. 침대에 누워 아야야 소리 한번 하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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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시 돌아온 비엔티엔

 

비행기 시간은 밤늦게인데도 비엔티엔으로 아침 일찍 출발한 것은 미처 보지 못한 시사켓 사원과 호파깨우 사원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4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이지만 자기들의 미니밴은 좁은 중고차가 아니라는 말에 혹해서 5천킵을 더 주고 예매를 했다. 미니밴에 올라타니 어제 같이 카약을 한 여성이 그래도 안면이 있다고 인사를 건넨다. 조금 뒤에는 아르헨티나 친구들이 탔다. 무뚝뚝한 얼굴이었던 여성도 세 번째 마주치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숙박을 할 것이 아니니 비엔티엔에서는 가방을 맡길 곳을 찾아야 했다. 한국분이 운영하신다는 독참파 레스토랑에 들리니 라오스인 직원이 명함에 사인을 해서 가방을 맡아주었다. 달리 해드릴 것은 없으니 점심식사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편하게 오후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거리에 차들이 엄청 많다고 아내는 놀란다. 우리가 지지난주 토요일에 왔을 적에는 이리 차가 많지 않았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자동차의 수가 차이가 난다. 그래도 어디서 자동차 경적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 뒤엉키면 풀릴 때까지 기다린다. 나중에 이곳에 거주하고 계시는 한국 분에게 들으니 가끔 경적이 울리는데 한국인 아니면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몇 번 울리다가도 머쓱해져서 울리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메콩강변에는 야시장이 열리는데 다시 와보니 규모가 훨씬 커져 있었다. 축제 기간을 앞두고 강가에는 놀이공원도 만들어지고 무대도 곳곳에 설치되었다. 소비에트 깃발과 라오스 국기가 펄럭이는 중앙광장에는 신나는 댄스음악에 맞추어 저녁 에어로빅 교실이 열리고 나는 그 뒤에서 몇 동작을 따라했다. 어제 뭉친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다.

조금 일찍 공항으로 이동한 것은 공항 뷔페식당을 이용하면서 발권 시간까지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였다. 라오비어 생맥주를 곁들인 식사는 적당했지만 벌레의 출몰과 조금 이른 마감시간이 불편하였다. 내일 아침 공항에 도착하면 곧바로 출근을 해야 되니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쉬고 싶었지만 시끌벅적한 공항 대합실에 앉아 쪽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공항에서 남은 라오스 화폐를 달러로 바꾸면서 실수가 있었다. 환전하고 남은 작은 지폐 몇 장은 기념품으로 가져올 요량이었는데 은행원은 1달러가 안 되는 라오스 돈은 영수증에 표시만 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3천킵 정도였다. 잠시 셈을 잘못하기도 했고, 이미 지쳤던 나는 그냥 돌아섰다.

그 순간 야시장의 소녀 상인이 떠올랐고, 미안한 마음이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그동안 쇼핑을 즐기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 가격이면 가능한 깎지 않으려고 했다. 루앙프라방에서 코끼리 몸빼 바지도 가격을 물어볼 때 간단한 영어가 안 되서 당황하는 아저씨가 부른 값이 터무니없지 않다싶어 그냥 샀었다. 물론 다음 날, 그는 내가 입고 입는 바지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였다.

그런데 좀 전에 들른 야시장에서 간단한 열쇠고리 몇 개 사면서 자존심 대결처럼 천킵을 깎았었다. 다른 가게에서 5개 들이 묶음을 2만킵이라 했으니 6개 들이는 2만 4천킵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2만 5천킵에서 버티던 소녀는 체념하듯 깎아주었고, 나는 무엇인가 승리한 듯한 느낌으로 잔돈을 거슬러 받았었다. 이렇게 은행에 바칠 바에 소녀의 아쉬움이나 달래주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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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기억

 

토요일 아침 인천공항의 공기는 차가웠다. 그러나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분명 차가운 날씨라고 알려주지만 내 안의 피는 아직 라오스의 더운 날씨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는 지금은 여행을 다녀온 지 딱 2주가 지난 날이다. 2주간의 여행기간만큼이나 길었던 그 시간이 흘렀지만 또렷이 기억되는 것은 라오스에서 보낸 2주의 시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을 “‘다소 비일상적인 일상’으로 파악”하라고 했다. 여행에서 거창한 이유와 목적을 세우기보다는 일상과 다름없는 비일상을 즐기라는 뜻일 게다. 라오스에서 보낸 2주는 그러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 물어도 딱히 뭐라고 집어서 말하기 어렵기만 하다. 아침시장에서 상인들이 파는 야채에서 나와 골목 전체를 풍겼던 팍취(고수)의 냄새와 같이 풍경과 함께 기억되는 그 무엇들이 일상같이 때로는 비일상 같이,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라오스, 그리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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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쎄에서 루앙프라방까지 이용한 비행기이다. 이번 라오스 항공사고가 난 같은 기종이다. 저 비행기를 올라탈 적의 내 기분을 생각하면 생과 사의 갈림길이 순간이다 싶다. 삼가 항공기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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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김현경, 책읽는 오두막)

김수영의 연인(김현경, 책읽는 오두막)

 

일요일 오후, 출근에 앞서 들른 도서관 열람실은 이미 꽉 차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지하 서가의 한 자리를 맡아 앉았는데 이왕지사 서가로 온 거 가지고 간 책보다는 서가에 꽂힌 책을 읽고 싶어졌다. 문학 서고에 눈에 띈 것은 김수영이라는 세 글자. 난 그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지만 '풀'을 사랑하고, 그의 저항적 시선을 사랑하지 않던가.

김현경은 김수영 시인의 아내이다. 김현경이 고른 김수영의 시에서 그녀는 돈뿐 모르는 아내라고도 소개되기도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문학소녀를 꿈꾸었지만 그녀의 삶은 김수영과의 결혼으로, 아니 어쩌면 한국전쟁을 지나온 많은 이들의 삶처럼 호구를 먼저 생각해야만 하였다. 그녀는 양계장, 봉제일을 하다 양장점으로 꽤 돈을 모았고, 이후 미술디렉터를 하기도 하였다.

책은 김현경의 회고담과 김현경이 뽑은 시선과 아포리즘, 김현경의 글로 구성되었다. 회고담은 김수영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쩌면 개인적으로 밝히기 어려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 굴레가 어쩌면 긴 시간을 저작권과 관련된 일들을 그리 내두었지도 모르겠다. 시선은 그녀가 좋아하는 김수영의 시들을, 아포리즘의 김수영의 시작노트의 구절들을 소개하고 있다.

위대한 시인의 곁에는 세속적인 배우자가 있어야 했다. 김수영도 그걸 알면서도 그 맛을 경계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시인의 아내에게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기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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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6~10.08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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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루앙프라방을 걷다.

10월 6일, 여행도 벌써 10일째가 되었다. 이동 후에는 휴식을 충분히 취한다고 했음에도 여행의 피로가 쌓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아침부터 아내의 컨디션이 별로이다. 아침 식사로 라오스식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서 숙소로 들어왔다. 오전 나절 휴식을 취하고 루앙프라방의 여행자거리를 중심으로 한 강변과 옛 왕궁 자리에 있는 국립박물관을 다녀와서 쉬기로 하였다.

아침시간에 홀로 주위를 돌아볼 겸 산책으로 나서니 우리 G/H 주변으로 G/H가 몇 개 더 있고, 조금 더 지나가면 BAR들이 모여 있다. 숙소와 식당을 겸업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숙소에는 식당이 없는 곳이 많았고, 로컬 식당도 거의 보이지 않아 조금 의아하다. 숙소-식당 분리는 G/H가 몰려있는 여행자거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나는 이것을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다 먹지 말고, 나눠 먹자’의 정신일 것 이라고 혼자 상상해보기로 하였다. 물론 숙소와 식당을 겸업하는 곳도 있다.

우리가 머문 푸시산 뒤편은 루앙프라방의 중심지와 걸어서 8분 거리이다. 지역주민들이 자주 간다는 다라마켓(상가)을 지나면서 둘러보았다. 관심이 가는 곳은 배낭 가게였다. 우리는 45ℓ 여행용 배낭과 휴대용으로 15ℓ배낭을 가져왔다. 짐의 무게는 휴대용과 합쳐서 아내가 10㎏, 내가 15㎏ 정도 되었다. 여행에서 짐을 줄이는 것은 피로를 줄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크지 않은 배낭을 준비했지만 조금 더 큰 배낭에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은 배낭에 짐을 구겨 넣을 적마다 드는 아쉬움 때문이다. 배낭가게에는 유명 브랜드도 있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어느 중국 브랜드의 배낭이 특히 많았다. 구매에 욕심이 생기다가 중국에서 샀었던 배낭의 아픈 추억 때문에 국내에 필요하면 사는 것으로 마음을 단속하였다.

여행자 거리는 한산하였다. 메콩강변으로 이어지는 내리막의 골목마다 G/H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지만 중국인 여행객들만 간혹 눈에 띄고, 자전거를 타며 길을 누비는 서양 여행객들 외에는 자동차마저도 간혹 눈에 띌 뿐이다. 강변의 선착장에는 남부에서 볼 수 없었던 큰 배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유람선 관계자들이 일몰을 배에서 보라며 지금 예약하면 십만킵(14,000원)에 해준다고 손짓을 한다. 루앙프라방에 보는 메콩강은 한강의 폭보다 두 배 가량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부의 메콩강을 경험한 우리에게 지금 눈앞의 강은 청계천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그 장엄한 일몰의 추억은 여기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요일 루앙프라방이 한가한 이유는 개천절과 주말을 낀 한국인 단체 여행객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북부 도시인 루앙프라방에서 중국으로 바로 넘어가는 중국인들만이 고색창연한 루앙프라방을 지키고 있다. 여러 번 듣는 이야기이지만, 중국인들은 강변에서 식사를 하다가 우리 부부가 지나가면 나를 빤히 쳐다본다. 같은 중국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다. 라오스인들에게 그러 질문도 여러 번 받았고, 드물게 서너 번은 라오스인과 똑같이 생겼다는 소리도 들었다.

길모퉁이를 돌아 국립박물관으로 가려하는 참이었다. 코코넛을 가득 실어 즉석에서 잘라 주스를 내어주고 있었다. 모퉁이 작은 가게의 여주인은 이미 두 개를 사서 주전자 가득 즙을 내고, 잘라서 열매의 안쪽을 긁어 젤리와 같은 것을 긁어내었다. 잠시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도 되냐고 묻자 그러라고 하더니 테이블에 있는 체스 판에 맥주 병뚜껑을 앞뒤로 15개씩 배열한다. 그러더니 자신과 2:1로 게임을 하자고 한다. 대각 방향으로 앞으로 한 칸씩 전진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먼저 말을 움직이기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상대의 말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되자 말을 움직여 잡는 법을 알려준다. 말 하나를 잡았다. 그러자 이 아줌마 자신의 말을 움직여 내 말 두 개를 잡는다. 게임의 요령은 게임 중에 말을 뺏기면서 배웠다. 물론 물러주지도 않는다. 차분히 게임을 이어갔지만 두 수 차이로 지고 말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거 아닌가? 이 젊은 아주머니 덕분에 배낭여행을 와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게임 외에 다른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는 않았지만 이 분도 나보고 라오스 사람 같다며 아내보고는 아내가 가게를 둘러보느냐 없는 틈을 타서 중국인 닮았다고 한다. 여행을 가면 현지인처럼 생각하고 그 상황으로 몰입하는 것이 좋다. 여행가서 굳이 한국음식점을 가지 않는 것도 그 이유인 것이고, 간단하게라도 인사말과 단어를 외우거나 적어가는 것도 조금이라도 현지인들과 소통해보고 싶어서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어눌해도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건넨다면 당신은 그를 대하는 마음이 다를 것이다. 최소한 우리 언어와 문화가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간단한 라오스어지만 몇 마디라도 이야기를 나누면 그들은 엄지를 들어주며 라오스어를 배우냐고 묻는다. 발음을 교정해주는 수고도 아끼지 않고 말이다.

루앙프라방 국립박물관은 1975년까지 유지된 라오스왕국의 왕궁을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라오스는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통일 란쌍왕국을 유지하다가 17세기 내내 비엔티엔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되고 1893년까지 샴의 속령으로 지내다가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후 프랑스는 1949년 형식적인 독립을 인정하고 라오스 왕국을 세운다. 이 라오스 왕국의 수도는 비엔티엔과 루앙프라방 두 곳이었다. 박물관은 왕국의 유물과 왕족들의 생활상을 주로 전시하였다.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과거의 유산을 모두 지울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도 겨우 100년 남짓 된 역사의 실험과정이니 장구한 역사 앞에서는 스스로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영화 ‘마지막 황제’의 만주국처럼 프랑스의 괴뢰국이나 다름없는 왕조의 역사는 당시 생활상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것이다. 그들은 아뉴봉왕처럼 샴 왕조에 의해 책봉되었어도 독립을 위한 투쟁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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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루앙프라방의 만남

새벽 탁밧을 보기로 했는데 몸이 무겁다. 탁밧은 우리말로 탁발이다. 수도자들이 식량을 구하는 행위로 종교를 넘어 동서양에 널리 행해졌다. 탁밧은 수도자에게는 자신을 낮추는 수양을 하는 행위이자 시주하는 신도들에게는 수도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루앙프라방의 탁밧은 참여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여행 코스처럼 포함되어 있다.

뒤늦게 나서 우리는 탁밧에 직접 참여하기보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 느낌을 느끼기로 하였다. 카메라의 줌 기능이 망가져서 생생한 느낌을 사진으로 담을 수 없었지만 수도자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을 나는 응원한다. 아무리 승려가 존경을 받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이제 막 자본주의의 물결이 넘쳐나고, 문화의 변화를 겪고 있는 이곳에서 라오스의 정신을 지켜줄 이들은 이 젊은 수도자들이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을 찾아 잠시 따라 들어간 사원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중국인 여자 여행객을 네 번째 다시 만났다. 상당히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그녀는 내일 중국으로 다시 들어간다며 자신이 다닌 루앙프라방의 좋은 전경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기념사진을 서로의 카메라에 남기고 헤어졌다.

그리 높지 않은 푸시산은 루앙프라방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아침에 오르면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대신 산 위에서 조용한 시간을 갖고자 할 적에는 아침이 좋을 수 있겠다.

아침 식사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내 몸이 무겁다. 침대에 누워 오전 나절을 자고나니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여행 일정을 짤 때 일주일에 하루는 비워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점심나절에 숙소를 나서서 두발로 루앙프라방 돌아다니기를 이어갔다. 어제 가보지 못한 동쪽 지역을 걸어가는데 여행자거리의 메콩강변을 카페와 여행자들에게 빼앗긴 라오스 청춘들은 메콩강의 지류인 뒷강 둔치에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소박하고 정겨운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걸었지만 이내 다시 강변은 여행자를 위한 식당 테라스로 뒤덮인 채로 나타났다. 관광 수입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이들의 삶을 뒤로 밀어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루앙프라방 동쪽은 도로와 접한 곳은 예쁜 G/H가 자리 잡고, 그 뒤로 주택가가 있는 골목이 이어지고 있었다. 라오스의 집들은 지붕이 맞닿는 서까래 주변에 건축연도를 적어 놓는다.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오래된 집은 1935년에 지어졌다. 오래되고 낡은 집들이지만 집 주변을 화단으로 꾸미고 있어 허름하다는 느낌보다는 전통이 잘 보존되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다.

오늘 저녁식사는 한국인 여행자들과 같이 하기로 하였다. 여행 카페를 통해 연락처를 주고받아 루앙프라방 일정을 같이 하기로 하였으나 우리 부부의 컨디션 문제로 그러하지 못해서 아쉬움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기실 어제 늦게 연락이 되어 나 혼자 강변에서 나가서 맥주잔을 같이 기울였는데 오늘은 불고기의 변형인 신닷 요리를 같이 하기로 하였다.

같이 자리를 한 두 분의 여행자들도 여행 카페를 통해 처음 만나 10일 동안 동행하는 것이었는데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경◯씨는 삼십대 후반의 단단한 체격을 지닌 이였다. 신닷 뷔페에 들어가니 오늘 꽝씨폭포를 동행한 다른 여행자들이 있다고 해서 같이 자리를 하였다. 비엔티엔을 떠난 이후에 이렇게 많은 한국인을 만난 것이 처음이다. 중국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분과 장기 여행을 하면서 블로그에서 유명한 여행자, 휴가를 내어 5일의 아쉬운 휴가를 온 처자들까지 우리 여덟 명은 식당이 닫을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자리를 함께해서 좋았지만 식당에서 너무 소란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본다.

한국인과의 만남 중에 아쉬운 만남이 하나 더 있다. 다음 날, 루앙프라방의 마지막 밤을 커피와 함께 달래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 아가씨가 ‘한국분이세요?’라며 묻는다. 집 나온지 10개월, 6개월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4개월째 배낭여행중이란다. 엄마가 걱정하셔서 전화할 적마다 우신다면서도 이번 기회 아니면 언제 할까싶어 여행을 이어간다는 이 당찬 젊은 아가씨는 우리의 격려 몇 마디에 헤헤하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한다. 돈을 아끼기 위해 2만킵(2800원)짜리 도미토리에서 지낸다는 아가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후회했다. 내일 아침 국수라도 한 그릇 먹여서 보낼건데, 우리에게 남은 라면이라도 싸주었어야 하는데 싶었다.

어느 곳에서도 그 긍정의 힘으로 잘 여행하고 돌아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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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꽝씨폭포 가는 길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침시장을 보겠다고 나섰다. 야시장이 서던 대로의 안쪽에는 아침마다 장이 들어서는데 여행객들은 별로 없는 현지인들의 시장이다. 시장을 두어 바퀴 둘러보는데 장사를 하면서 식사를 하시는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사바이디’하며 인사를 하는데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다. ‘콘 까올리(한국사람)’이라고 하니 찹쌀밥을 녹색의 젓갈 같아 보이는 반찬에 묻혀 드시다가 나보고도 먹어보라고 내미신다.

‘이상한 냄새나면 어쩌지?’

속으로 생각하다가도 권하시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찹쌀밥을 뭉쳐 반찬을 찍어서 먹었다. 젓갈이 아니었다. 무엇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아주머니들은 대답을 해주었지만 발음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을 더 시식하고 돌아섰다. 따로 사먹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현지인처럼 먹어봤으니 체험은 한 셈이다.

오늘은 꽝씨폭포를 가기로 하였다. G/H를 통해 예약한 미니밴은 호주 출신 노부부와 이탈리아 아저씨를 태우고 우리를 맞아주었다. 다른 손님을 태우러 시내를 빙빙 도는 사이 60대의 호주 아주머니는 한국인 친구가 있다며 남편과 같이 장기 여행 중이라며 서울에도 왔었다고 하였다. 나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묻기에 ‘Subway’에 다닌다고 하였더니 지점을 운영하냐고 묻는 것이다. 샌드위치 회사로 잘못 알아 들으셨던 것이다. 아저씨가 바로 정정해주셨지만 우리는 한참을 같이 웃었다.

이 아주머니는 우리 다음에 영어를 잘하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차 안의 대화를 주도하는 덕에 입을 다물고 있는 우리를 위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요약 정리해서 간단한 영어로 설명을 해주셨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픽업차량들이 시내를 너무 빙빙 돈다는 말에 ‘중국에서도 똑같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는데 하필이면 앞자리에 중국 여성들이 타고 있었다. 그것도 영어 잘하는…….

꽝씨폭포에 이르렀다. 야생곰을 구조하여 보호하는 곳을 지나 만나 물은 처음으로 보는 옥색 물이었다. 물론 물안의 석회질로 인해 그리 보이는 것이지만 열흘넘게 황토빛 메콩강물만 보다 보니 또 다른 감흥이다. 노부부와 우리, 이슬람교도인 인도네시아 아가씨들은 옥빛의 물을 보며 감탄만 하고 있고, 브라질과 중국 아가씨들은 수영복을 갈아 입는지 벌써 보이지 않는다.

호주 아저씨는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다양하게 사진을 찍으며 나에게도 보여주며 자랑을 하신다. 나도 무거워도 삼각대 가져올 걸 후회해보다가 아저씨가 찍는 구도로 따라 사진을 찍어본다. 아저씨는 정상을 올라가보자고 하신다. 우리가 쫒아갔지만 호주 야생 사나이같은 아저씨는 재빨리 산을 올라가버리셨다.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신경쓰지 않고 사진을 찍고, 아주머니는 그런 아저씨를 두고 나 혼자 본다며 웃으면서 따로 노신다. 참 보기 좋은 관계이다.

돌아오는 길에 운전기사는 우리를 몽족 마을에 내려주었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란다. 아이들은 공터에서 놀다가 ‘우리를 위해 이것을 사주세요’라며 높낮이도 없는 영어를 반복해서 읊조린다. 잠시 마을 어귀까지 들어갔다가 어른들은 뒤로 물러나있고 아이들이 관광객을 따라 이동하면서 파는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져서 도로 나와 버렸다. 아이들은 미니밴까지 따라와서 작은 목소리로 돈을 달라고 한다. 아! 몽족의 슬픈 역사를 고산지대의 오지를 가지 않고도 마주 해버렸다.

묘족이라고도 불리는 몽족은 중국 남부부터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베트콩이 미국의 폭격을 피해 물자를 나르던 호치민루트가 라오스를 넘나들며 형성되자 미국은 몽족을 부추키어 용병으로 삼아 내전을 일으키게 하였다. 비밀 전쟁 또는 조용한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라오스인들이 죽었고, 아직도 불발탄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있다.

인도네시아 아가씨가 초콜릿 하나를 나누어주려고 빼들었다가 몰려오는 아이들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다가 그냥 친구 입에 넣어버린다. 나는 아이들을 말없이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아이들아. 오늘의 슬픈 기억을 잃지 마라. 그래서 더 단단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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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어가는 이야기 – 숙소

라오스에서 머문 숙소는 주로 게스트하우스(G/H) 급이다. 비싼 호텔은 한국과 같은 시설에 어울리는 값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숙소는 잠을 자는 공간이므로 숙소에 비싼 돈을 지불할 의향이 없었다.

첫날 묵은 숙소는 미싸이파라다이스이다. 수도 비엔티엔의 숙소들은 요금이 전반적으로 비싸다. 늦은밤 도착하기에 20달러로 사전 예약하였다.

다음은 땃로마을의 팀스이다. 2박을 한 방갈로는 5만킵이었고, 화장실은 유일하게 외부에 있었다.

돈뎃에서는 달몬에 하루 있다가 더위에 지쳐 리틀에덴으로 옮겼다. 6만킵인 달몬은 겉보기와 달리 방충망과 모기장이 다 엉망이었다. 리틀에덴은 돈뎃 최고의 시설로 우리 돈으로 3만4천 정도이지만 우리를 편하게 쉬게 해주었다.

참파삭의 옹빠슷은 그야말로 싼 맛에 가는 숙소이다. 4만킵.

루앙프라방의 숙티웡은 가격대비 최고의 숙소였다. 냉장고만 없어 살짝 아쉽지만 7만킵에 이런 숙소는 없을 것이다.

방비엥의 쑥솜분은 한국에서 이주하신 분들이 운영한다. 6만킵에 싸게 머물렸지만 숙티웡에 머물다가 가서 그런지 살짝 아쉬움이 남는 숙소였다. 그래도 한국인이 그리운 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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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4~10.05 이야기

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04~10.05 이야기

 

10. 참파삭, 왓푸

10월 4일, 여행 8일차의 아침이다. 이제 돈뎃을 떠나 팍세 근처의 작은 마을 왓푸로 가야한다. 배를 두 번 타고, 차로 이동하는 3시간 거리이다. 11시에 출발하는 작은 배는 돈뎃을 떠나 캄보디아나 태국으로 가려는 서양 아이들로 가득 찼다. 반나카상 마을에서 갈아탄 미니밴은 잠시 돈콩 건너 선착장인 핫사이쿤을 들러 다른 여행객을 태운다.

반가운 얼굴이 밴을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비엔티엔에서 슬리핑버스를 타고 팍세로 내려올 때에 같은 버스를 탔던 중국인 여성이다.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데 돈콘에서도 마주쳤고,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다. 인연은 다시 루앙프라방에서 이어져 네 번째 만났을 때에 이 여성은 자신의 여행 경로와 사진을 보여주며 루앙프라방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게 해주었다. 여행지에서 서로 마주치는 일은 흔한 일 일수 있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또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일인가?

이처럼 좋은 인연과 달리 나쁜듯한 인연도 있게 마련이다. 돈뎃에서 나가는 배는 둘이 나란히 앉으면 꽉 차는 작은 배라 큰 가방은 앞쪽에 놓고 앉아야 한다. 우리는 제일 안쪽에 탔는데 다음으로 타는 스페니쉬 여성은 가방을 앞에 놔두라는 말을 무시하고 굳이 부여잡고 있어 그 앞 사람은 짧은 시간이지만 불편한 자세로 배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이들이 왓푸로 가는 유일한 동행객이 된 것이다.

무뚝뚝한 표정에 줄담배를 피는 이 여성과 달리 친구는 예의바른 모습이었다. 나는 왓푸로 들어가는 모래밭 선착장에서 왓푸까지 툭툭이를 같이 빌려서 비용을 나누자는 제안을 하였다. 당연히 비용을 아끼는 일이니 이들도 좋다고 하였다.

라오스는 통일되기 이전에는 세 개의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참파삭 왕국이었고, 일주일째 머물고 있는 남부 라오스가 참파삭주이다. 왓푸는 힌두교 사원이 있던 곳으로 건축양식은 왕코르왓의 사원의 양식과 같다. 강을 건너기 전부터 왓푸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신령한 기운을 감싸고 있는 듯이 낮고 평평한 제단마냥 둘러쳐져 있었다.

건너편에서는 뚱뚱한 아저씨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게스트하우스로 가면 툭툭이로 공짜로 모신다며 호객을 한다. G/H 이름을 물으니 옹빠슷라고 한다. 한국에서 미리 확인한 G/H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허름한 편인데 개중에 괜찮다고 소문난 곳이다. 1박에 4만킵(6천원)이니 스페니쉬들도 좋다고 한다. 짐을 풀고 바로 왓푸로 이동하였다. 툭툭이 비용은 8만킵으로 4만킵씩 나누었다.

왓푸에 이르니 태국인들이 단체로 관광을 와서 시끌벅적하다. 많은 이웃나라끼리 그러듯이 동남아의 강자였던 태국과 라오스는 경제적으로는 밀접하면서도 정서적으로는 거리감이 있다고 한다. 툭툭이 기사의 몇 마디에서도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왓푸의 입장료는 사원 입구의 3만킵과는 달리 3만 5천킵으로 올랐다. 그렇고 잠시 타는 관람차 값이 포함된 5만킵 티켓을 먼저 내밀다가 다른 것으로 달라고 해야만 내어준다.

해발이 높은 지역도 아닌데 구름은 산허리를 꿰고 있고, 짙은 녹음은 왓푸의 신령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공원처럼 잘 꾸며 놓은 호수를 지나 돌로 만든 나가 상과 남근 모양의 기둥들은 앙코르왓의 그것과 똑 같다. 과거 참파삭 왕국의 종교가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무너진 돌들의 사원을 보면서 내가 밟고 있는 돌 하나하나가 다 유적임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 진다. 돌들마다 새겨진 섬세한 조각과 믿음의 표상들은 영원한 것에 대한 인간의 소망과 함께 그것의 덧없음을 함께 보여준다. 어찌 보면 앙코르왓과 마찬가지로 왓푸 역시도 완벽한 복원이 아닌 지금의 상태가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가쁘게 올라가면 불교 사원이 나온다. 다른 나라 관광지의 장사치들과 달리 라오스 상인들은 조용히 기념품과 제물을 권할 뿐, 큰 소리를 내어 장사하지 않는다. 이 나라를 다시 오게 될 때에도 저 모습이 변치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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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척 더웠던 팍세, 그리고 딩딩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팍세로 나가는 7시 차가 2만킵이고, 그 이후에는 5만킵이라고 하였다. 1톤 트럭만한 성태우에는 이미 많은 라오스인들이 타고 있었고, 우리를 포함한 외국인 6명이 타니 자리는 이미 만석이었다. 그러나 시내로 나가겠다는 사람들을 안태울 수 없으니 나중에는 무려 35명이나 올라탔다. 라오스인들은 큰 소리 한번 없이 자리를 좁혀주면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였다.

시장에 내린 우리는 툭툭이 기사들의 호객을 뚫고, 시장 노점에서 식사를 하고 시장구경을 넉넉히 했다. 특별히 볼거리 없는 팍세 시내에서 유일하게 눈에 띈 박물관이 열려면 1시간 이상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커피의 본고장 팍세의 아이스 모카커피를 비닐봉지에 담아 마시면서 박물관까지 한참을 걸어갔으나 박물관은 굳게 닫혀있었다. 박물관을 보고 나면 여행사에 가방을 맡기려했는데 여행사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지?

도로에는 공사 중이라 먼지가 폴폴 나고 있었다. 잠시 앉을 곳을 찾아 샛길로 들어섰다. 테이블 두 개가 놓인 노점식당의 젊은 주인이 와서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그는 우리에게 보리차 같은 차를 권하면서 얼음이 필요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손님이 없는 아침나절이라 라오스 단어와 몸짓으로 우리는 대화를 하였다. 서른다섯 살인 그는 시장에서 5년간 장사를 하였고, 식당을 연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내 이름을 그냥 ‘손’이라고만 소개하듯이 그도 이름을 외국인이 발음하기 좋게 ‘딩딩’이라고 소개하였다. 딩딩은 가게에 잠시 들른 아내를 소개해주었고, 어제 머문 왓푸가 자신의 고향이라며 팍세의 날씨가 무척 덥다며 한국은 시원할거라고 몸짓을 한다.

가방을 맡길 곳이 필요한 우리는 가게 뒤의 G/H에 가방을 맡길 수 있겠냐고 물었다. 딩딩은 그냥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우리는 잠시 망설였다. 현지인들의 호의를 그냥 호의로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딩딩의 쇠사슬이 난간에 걸려 있어 내 자물쇠로 가방 두 개를 엮어 묶고, 보관료를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1만킵을 보관료로 주고 사진을 찍어두었다. 우리는 이제 팍세 시내를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잠시 사원에 들렀다. 라오스에서는 사원마다 사진이 붙은 탑들이 있다. 아마 화장을 하여 모시는 봉안탑인 듯하다. 사원에는 아직 10대의 스님들이 작업을 하다가 쉬고 있었다. 팍세나 남부 라오스에 한국 관광객은 거의 없지만 커피 농장을 하는 한국인들이 제법 있어서인지 한 스님이 중국어로 인사를 하다가 내가 ‘커이 뺀 까올리(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하니 한국어로 ‘안녕하세요’하며 웃어준다.

팍세 시내에는 특별한 관광지는 없었다. 일부러 골목길을 걸으며 사는 모습 구경하다 눈 마주치면 ‘사바이디’하며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모두들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받아준다. 화장실을 핑계로 팍세에 제일 큰 병원에도 들어가 보고, 현지인들의 시장에 들러 옷 구경, 쌀 구경, 반찬 구경하며 돌아다녔다. 더운 날씨에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다들 오토바이나 자전거로 이동하고, 그늘에서 쉴 뿐이었다.

우리는 두 시간 만에 딩딩의 노점으로 돌아왔다. 더 볼게 없다는 핑계였지만 솔직히 마음에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방은 무사했고, 딩딩도 그 자리에 있었다. 무안한 마음이 얼굴을 화끈하게 만든다. 딩딩에게 점심을 달라고 했다. 딩딩은 땀막홍에 자신 있다며 꼬치구이와 밥을 내왔다. 비어라오를 시키니 옆 가게에 가서 두 병을 사온다.

딩딩은 비어라오가 최고하고 엄지를 치켜세운다. 라오스에는 남콩이라는 맥주가 새로 생기기도 했지만 비어라오만 하지 않다. 나중에 유명한 태국 타이거비어를 비교해서 먹어보아도 비어라오를 따라오지 못한다. 땃로에서 만난 독일 청년은 비어라오는 동독 공산당이 전수해 준 것으로 안다고 조심스레 이야기하였다. 나도 그 말을 들었다며 동독 공산당이 한 유일한 잘한 일이 그것 아닐까 싶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또한 좋은 점은 라오스에서 맥주 값은 미니마트나 식당이나 거의 같다는 점이다. 대개의 음식점이 가게에서 사는 가격에 그냥 내어준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딩딩에게 5만킵을 주면서 1만킵 정도 남는 잔액을 그냥 두라고 하였다. 딩딩은 ‘컵 짜이’하며 고맙다며 우리가 말리는데도 비어라오를 더 사오는 것이다. 박지성과 축구를 좋아한다는 딩딩, 그가 없었으면 덥고 먼지 나는 팍세를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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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내부 이동 경로 : 버스로 1,500Km, 항공으로 850Km를 이동하였다.>

 

 

12. 그 자체가 문화유산, 루앙프라방

우리는 팍세에서 루앙프라방까지 라오항공을 이용하여 이동하였다. 비행시간 1시간 30분, 99달러의 프로모션 가격이다. 항공 이동을 가능한 피하고 싶었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너무 멀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동거리가 1,150㎞이었는데 팍세에서 루앙프라방을 버스로 가기 위해서는 이틀 밤에 슬리핑버스를 갈아타고 970㎞를 가야만 했다. 비용도 대략 40달러가 드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비행기를 선택했다. 참고로 라오스에서 버스를 이용한 도시간 이동 거리는 총 1,500㎞ 정도로 추산된다.

라오항공의 프로펠러 경비행기는 대략 100여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승객은 총 7명으로 승무원 4명과 함께 전세기의 느낌으로 올 수 있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낮이라 라오스를 한 시간 반 동안 눈에 넣을 수 있어 좋았다. 남부의 평원과 달리 북부는 산악지형으로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과거 란쌍왕국의 수도였던 루앙프라방은 도시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이다. 공항의 외관부터 그러한 자부심은 넘쳐났고 일주일 만에 도시다운 도시로 온 우리는 도시에 온 촌놈처럼 처음에는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숙소는 숙티웡G/H로 골랐다. 골목에 있는 숙티웡G/H는 찬사왕G/H에서 접객업무를 맡아서 진행한다. 넓은 트윈베드의 방이 7만킵(1만원)이다. 우리가 묵은 라오스의 모든 숙소에서 가격 대비 제일 훌륭한 방이었고, 정원 역시도 훌륭했다.

루앙프랑방에 왔으니 만킵 뷔페를 가봐야 한다. 야시장의 풍경을 옆으로 하고 들어간 골목은 야채요리를 단돈 만킵(1천4백원)에 한 접시 가득 담을 수 있다. 몇 군데 가게가 있지만 다 비슷하다. 그러나 음식은 너무 기름졌다. 채식 뷔페라는 말이 무색하다.

루앙프라방의 야시장은 시내 중심 거리를 야간에 차량 통제를 하며 상인들에게 내어준다. 다음날 가보니 자리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따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은 듯 하다. 이날, 나는 몸빼 바지라고 불리는 월남 바지-요새 인터넷에서 에어컨 바지로 불티나는- 하나를 샀다. 한국에서 아내가 입기로 하고, 잠시 입었는데 놀랍게도 편하다. 바지의 코끼리 문양도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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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어가는 이야기 - 사람들

여행을 가면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그러나 단지 말이 안통한다는 이유로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사진기를 들이밀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래는 사진기를 들어보여 찍어도 되냐는 동의를 구한 사진들이다.

라오스 사람들이 모두 선하거나, 순박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민의 말처럼 여행자들에게 돈뜯으려고 덤비지 않는 곳은  라오스뿐이다.

나는 이들이 무표정한 것은 보았지만 단 한번도 화를 내는 것은 보지 못했다. 큰 소리로 싸우는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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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1~10.3 이야기

입으로 쓰는 라오스 여행기(2013.09.27.~10.11) / 10.1~10.3 이야기

 

7. 남쪽으로 튀어라!

2013101, 여행 5일차의 아침이 밝았다. 볼라벤 고원의 밤은 가을 날씨처럼 서늘하다. 이불을 끌어안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였다. 아침 7,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Tim의 차를 타고 나왔다. 버스 시간까지 30분이 남았으니 시장을 둘러보며 아침 요기를 할 참이다. 어제 타고 온 시골버스에서 아주머니들이 고기 BBQ와 찰밥을 싸서 먹는 것을 본 아내는 우리도 버스에서 그렇게 먹자고 한다. 우리는 닭 BBQ와 찰밥, 닭똥집 꼬치구이를 몇 개 샀다. 시골버스가 오기 전에 미니밴 한 대가 팍세로 나간다며 인당 5만 킵을 달라하기에 4만 킵으로 흥정하고 올라탔다. 시골버스가 3만 킵이니 조금 빨리 갈 요량으로 탔지만 미니밴 기사는 자기 볼 일 다보면서 달려서 걸린 시간은 똑같았다.

팍세 남부터미널에서 돈뎃과 돈콘 섬을 갈 수 있는 반나까상으로 가는 차편은 썽태우(트럭 개조 버스)뿐이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으니 행선지가 유일하게 영어가 병기되어 있는 차이다. 서로 더듬거리며 라오스어와 영어를 섞어 물어보니 4만 킵에 열시에 출발하고,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썽태우에는 우리 외에 라오스인 열 명과 아기들 셋이 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주 앉아 가는 좌석이다 보니 얼굴을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운동복을 잘 빼입은 저 친구는 내 친구 화이를 닮았고, 눈매 진한 저 친구는 내 사촌 진이를 닮았다. 낡은 농구화와 잠바를 걸쳤지만 얼굴 잘 생긴 어느 아저씨는 탄광촌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의 박중훈과 같이 멋있다. 피부색 진한 거야 우리 시골에 가면 내 할매, 삼촌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무엇 있을까?

시골길 가다 잠시 서는 정류장마다 닭 BBQ, 과일이며 파는 이들은 썽태우를 에워싸고, 혹시 오래된 것은 아닐까 사길 망설이는 우리와 달리 이들은 작은 거라도 팔아준다. 판매로 생계를 잇는 이들과 함께하는 경제의 선순환구조이다. 수수하게 입었지만 선한 눈매를 지닌 아기 엄마는 가난한 부부와 두 아이를 위해 닭 BBQ를 반 마리 건네준다. 큰 아이는 망설이며 안 받지만, 뭔가 고픈 눈총을 지닌 작은 아이는 재빨리 받는다. 불편한 자리와 먼지와 매연을 마시며 달리는 트럭 버스였지만 이를 안탔으면 어찌 이 선한 이들과 눈 마주치며 긴 시간을 갈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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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춘 성태우 안에 먹을 것을 팔고 있다.>

 

8. 돈뎃, 벼 익는 섬마을

라오스어로 (Don)’은 섬이라는 뜻이다. 내륙 국가인 라오스에 웬 섬인가 하면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서 중국 윈난성과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 호치민의 메콩 델타(삼각주)로 흐르는 메콩강이 너무나 커서 형성된 섬들이다. 4,000개의 섬들이라는 의미의 시판돈지역에서 여행객들이 주로 찾는 섬들은 돈뎃과 돈콘, 돈콩이다.

우리는 돈콩은 너무 넓고 다른 섬과 거리가 있어 포기하고, 다리로 연결된 돈뎃과 돈콘 중에 그나마 여행자가 적다고 하는 돈콘으로 가려 했었다. 그러나 선착장에서 돈콘으로 가는 배삵을 돈뎃보다 3배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돈콘은 걸어서 가겠다는 심정으로 돈뎃으로 향했다.

돈뎃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술집들과 서양 아이들은 땃로의 고요함과 달라 당황스러웠다. 보이는 주민들 역시 여행 관련 종사자들이다보니 눈빛부터 다르다. 6시간의 이동으로 지쳐서 빨리 방을 구하고 싶었다. 위치가 나쁘지 않은 곳의 방갈로는 4만 킵(5,700)부터였지만 우리는 좀 깨끗한 건물인 DALMON G/H6만 킵에 머물기로 하였다. 주인집 딸은 에어컨을 사용하려면 4만 킵을 더 내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볼라벤의 밤처럼 시원할 줄 알고, 선풍기만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그건 착각이었다.

샤워를 하고, 정보를 찾기 위해 와이파이가 되는 식당에 나갔다 돌아왔다. 방 안이 찜통이다. 창문을 열려고 하니 창문에 방충망이 없다. 침대 위의 모기장을 펴보니 구멍이 송송 뜷려 있다. 겉보기와 달리 내부는 엉망이었다. 에어컨 비용을 더 낼까 하다가 하룻밤만 버티고 숙소를 옮기기로 하였다.

돈뎃은 일출을 볼 수 있는 선라이즈 지역과 일몰을 볼 수 있는 선셋 지역으로 구분된다. 선라이즈 지역은 과거 선착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저렴한 방갈로만 남아있다. 늦잠을 자는 우리는 선셋 지역을 둘러보았다. 마음에 드는 방갈로는 이미 꽉 차 있었다. 돈뎃에서 제일 좋은 숙소라고 하는 리틀 에덴을 들렀다. 식당에서 보는 메콩강의 풍경은 거칠 것이 없이 뚫려 있었다. 깨끗하고 널찍한 방과 화장실이 있는 객실은 25만 킵이었다. 미리 산정한 예산의 4배였지만 돈뎃의 더위에 지친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체크인해도 되겠냐고 말해버렸다.

해가 지는 돈뎃을 여행자 거리를 벗어나서 걸었다. 뜨거운 햇살과 풍부한 물은 이 섬들에 벼농사 다모작을 선물해주었다. 들녘에는 이제 심겨진 벼와 껑충하게 자란 벼가 한편에 있고 반대편에는 또 추수가 한창 진행 중이다. 대나무로 엮은 동남아식 모자를 쓴 아낙들은 여행객들이 지겨운지 눈길도 주지 않고 벼를 낫으로 한 뭉큼 베어내어 논바닥 물에 젖지 않도록 벼 밑둥이 위에 받쳐둔다. 하릴없는 물소들은 베어진 벼 밭에 들어가 마음껏 만찬을 즐기고 있다. 해는 논들 가운데 신령한 나무 위에 걸려있다.

누렁이, 깜둥이, 휜둥이. 물소의 색은 제각각이고, 커다란 덩치는 위협적이지만 사람의 소리가 들리면 길 가운데 있다가도 풀밭으로 숨어들어간다. 사람이 제일 무서운 짐승인가보다.

잠시 찾아본 정보에서 괜찮다는 식당 정보가 있었다. Oi’s Sunset이란다. 식당을 찾아 선셋 거리를 끝까지 가보않지만 보이지 않았다. 되돌아오는 길에 보니 아까 지나가는 우리에게 큰 소리로 사바이디인사하던 처자였다. 간판도 없이 벽에 쓰인 가게명이 전부인 테이블 세 개짜리 식당이다. 여기가 그 유명한 Mama noodle을 파는 곳이냐고 물으니 맞다며 격하게 환영해준다.

할머니는 비수기에는 팍세에서 지내신다며 동생과 둘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딱 한 번 구름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선셋 뷰를 본다고 다른 집에서 맛없는 식사를 한 것을 빼곤 삼일 동안 주구장창 이 집에서만 식사를 하였다. 식사도 식사이지만 시끄러운 서양 애들 없는 곳에서 주인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먹는 자리가 마음이 편하다.

우리는 둘째 날 아침에 파파야를 무채 썰 듯이 해서 생선 젓갈(빠덱)과 고추, 레몬, 방울토마토, 땅콩으로 버무려 내놓는 땀막홍을 주문하였다. 식당의 주인 Oi는 이날에는 빠덱의 냄새가 안 나게 외국인용 땀막홍을 내놓더니 다음날 저녁에는 생선구이에 어울리는 빠덱 내음 진한 땀막홍을 준비하였다. 우리가 라오스 음식에 완전히 적응했다고 보았나보다. 언제 또 돈뎃에 올 수 있을까 싶지만 다음에 오면 Oi의 가족들이 새로 짓는 방갈로에 머물면서 밥값 미리 내고 알아서 밥 차려달라고 해보고 싶다.

My sister, Oi.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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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뎃의 벼는 껑충히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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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논에서는 벼를 추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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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메콩강의 노을>

 

9. 돈뎃, 돈콘 둘레길

사실 섬은 튜빙이나 낚시 같은 활동적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쉬는 것과 기껏해야 걷는 것에 익숙하지만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숙소를 옮긴 우리는 오늘은 돈뎃을 돌아다니고 다음 날은 돈콘섬을 오토바이를 타고 가자는 것에 합의했다. 오늘은 어제 밤에 내린 비로 길이 진흙창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숙소에서 쉬면서 여행 일기를 쓰며 보냈고, 점심을 먹고 돈콘과 연결되는 다리를 향해 걸었다. Oi는 다리 통행료 25,000킵을 내지 말고 그냥 쭉 지나가라고 일러준다. 한번 그래 볼까?

어제와는 다른 길로 섬의 반을 돌아서 걸어간다. 여행자들의 숙소가 길게 늘어져 있어도 섬은 벼와 물소와 주민들의 것이다. 지나가는 곳의 아이들이 수줍게 인사하거나 웃으며 도망간다. 숯을 만드는지 진흙으로 작은 가마를 만들고 있는 어른은 와서 자세히 보라며 불러주신다.

50여 분을 걸어 돈콘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나왔다. 섬과 섬을 둘러싸는 것은 황토빛 메콩강의 넓은 강물이다. 난간도 없는 50M 길이의 다리를 건너는데 Oi의 말처럼 그냥 쭈욱 지나가면 다리 아래에 있는 매표소 직원이 못 볼 것 같다. 삥땅의 즐거움을 맛보려는 찰나, 매표소 앞에서 있던 두 프랑스 여자가 아는 척을 한다. 땃로에서 같은 숙소 옆방에 묵었던 아가씨들이다. 반갑다며 인사하는 통에 매표소의 직원이 우리를 보고야 말았다. 프랑스 아가씨는 통행료가 너무 비싸다며 나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나는 그 좋은 인사성 때문에 머쓱한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통행료가 있는 것을 몰랐던 듯 연기를 하고, 내일 다시 오겠노라고 하고 뒤돌아섰다. 궂은 날씨는 계속 빗방울을 내리친다.

다음날 아내는 나에게 아침밥 먹기 전에 오토바이 연습을 하고 오란다. 수동 조작 오토바이를 타본 적은 없기에 걱정된다는 것이다. 아침밥을 먹으러 들르니 Oi는 돈콘의 길은 돈뎃보다 안 좋다며 오토바이를 타지 말라고 말린다. 결국 아내는 그냥 걷자고 나를 꼬신다.

돈뎃의 논 한가운데를 걸어가다 논을 매고 오시는 노인이 리어카를 끌고 오시기에 길 한편으로 비켜섰다. 노인은 갑자기 길을 멈추더니 나에게 ‘How old?’라고 묻는다. 그러더니 주저앉아 칼로 ‘62’를 땅바닥에 새기더니 당신을 가리키고는 나에게 손짓을 한다. ‘42’라 적어드리니 태양을 그리고는 다시 12지간으로 구분해서 나의 운세를 봐주기 시작한다. 말은 못 알아들으니 손짓을 섞어가며 설명하시는데 2010년이 제일 안 좋았고, 내년에는 운수대통할 것이라고 한다. 2017년에는 비행기를 타지 말라고도 하신다. 아내의 운수까지 설명해주는 것이 그것의 맞고 틀림보다 길을 걷다 만나는 인연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준다. 예상처럼 노인은 다 끝나고는 ‘10,000Kip’을 바닥에 적으셨다. 나는 챙겨온 간식 몇 가지와 2,000Kip을 드렸고, 우리는 기분 좋게 헤어졌다.

돈뎃의 길은 해안을 따르는 길과 가운데 길이 있다. 가운데 길은 비가와도 물이 고이지 않고, 길이 반듯하게 나있다. 나는 이 길을 신작로인가보다 하였는데 돈콘으로 넘어와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돈콘의 입구에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건설된 협궤 열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섬을 가로지르는 길이 울창한 삼림을 뚫고 일직선에 가깝게 놓여 있었다. 그 길은 섬의 남단, 메콩 강의 깊은 물과 닿는 곳으로 나있었고, 그 끝에도 열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일직선의 그 신작로는 식민지의 유산이었고, 라오스 민중 수탈의 철로이거나 도로였다. 섬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큰 배에 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길의 목적이었다.

섬 밖의 콘파팽 폭포보다 작다하여 라오스 가이드들이 작은 폭포라고 부르는 리피 폭포에 다다랐다. 돈콘 통행권에 폭포 입장권이 포함된 줄도 모르고 구매한 입장권은 각 25,000Kip(3,500)이었다. 어제 삥땅치려 마음먹다 벌 받았다. 작은 폭포라는 리피(솜파밋) 폭포는 낙차는 낮지만 그 너비가 어림잡아 200M는 넘어 보였다. 이제까지 본 폭포는 더 이상 폭포가 아니었다. 그 맹렬한 물살을 넋 놓고 바라보다 돌고래를 볼 수 있다는 이리와디 섬을 가기 위해 돈콘의 남단 마을, 항쿤으로 걸어갔다.

항쿤에 도착한 우리는 배를 타는 문제로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배타기를 무서워하는 아내는 배가 사람 하나 앉을 너비로 좁다며 못 타겠다고 버틴다. 서울대공원 돌고래 본지도 30년이 다 되가는 나는 바다의 꿈, 고래를 보고 싶었지만 아내가 버티는데 혼자 갔다 올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비킴의 고래의 꿈을 혼자 속으로 부르다가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흑흑,

내려갔던 식민의 길, 신작로와 달리 올라가는 길은 정글에 낸 길이었다. 간혹 오토바이도 다니기는 하였지만 사람 하나 지나갈만한 길이었다. 점심도 건너뛰고 7시간을 걸은 이 날, 어림잡아 22Km정도 걸은 것 같다. 라오스를 오면서 오지 트레킹을 하고 싶었는데 그 대신에 우리는 돈뎃-돈콩 둘레길을 걸은 셈이다. 막바지에 이르러 배가 고프면서 기력이 딸렸지만 메콩강을 바라보며 마신 천 원의 아이스커피는 너무나 달콤쌉쌀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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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점(?)을 봐주시는 아저씨(마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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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 수탈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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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폭포의 한 장면, 이 사진 6장은 족히 붙혀야 폭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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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는 길, 길이 직선인 것으로 미루어 아마 철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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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항쿤에서 보는 메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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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오른편 길. 철로를 피해 라오스인들은 이 길로 다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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