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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201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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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여름내 더위는 나를 무기력으로 밀어 넣었다. 보통 8월 첫 주는 조용히 일만 하면서 생각 따위(^^)를 접어 넣곤 했지만 유난한 더위는 그 시간을 연장하게 하였다. 그동안 도서관의 시원함속에서 가벼운 책들을 읽으며 보냈지만 여름 전부터 소감문 작성이 밀린 책들은 책장을 볼 적마다 나에게 시위를 한다.

짧게나마 써야겠다며 먼저 꺼낸 책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이라는 부제가 걸린 이 책이다. 이미 눈치를 챈 이도 있겠지만 소감문 상단의 달 표시는 그 책을 읽은 달의 표시이다. 미뤘던 시간만큼 묵직하며 경쾌한 책이다.
심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이 되기 위해 데이터와 그래프, 단조로운 문체로 이루어진 심리 실험에 대해 이야기 형식으로 각 실험의 현대적 의의에 대해 조망하는 한편, 동시대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이 책을 사면서 내가 기대했던 바는 심리학에 대한 입문 수준의 이해와 심리 실험과정에 대한 이해였다. 실용서로서의 심리학 대중서보다 조금 더 흥미롭기를 기대했다. 물론 이 책은 이러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각 실험의 윤리적, 과학적 의의에 대한 저자의 사유를 그대로 전달하는 훌륭한 문체는 더 많은 고민과 호기심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훌륭한 심리 실험은 인간의 경험을 압축시켜 우아한 본질만 남도록 걸러낸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2. 실험의 풍경

<B. F. 스키너의 상자 실험>

보상과 처벌로 인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스키너의 행동주의 이론은 파블로프의 개(고전적 조건화)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관심사는 작은 침샘이 아니라 유기체 전체였다. 그는 조작적 조건화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강화하거나 소거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스키너의 실험과 이론은 자율 반응처럼 보이는 것들이 자극에 의해 유도된 것임을 증명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남기었다. 인간의 행동이 통제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그의 이론은 행동 유도를 위해서는 처벌보다는 긍정적 강화(칭찬)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처럼 통제보다 환경 형성에 주목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맹목적 존엄과 통제에 의한 폭력적 대상화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은 외줄타기 같은 길일지도 모르겠다.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충격기계 실험>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와 복종에 대한 실험이었다. 어떻게 나치의 젊은 장교들까지 대량학살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복종했는가는 오랫동안 관심사였다.

밀그램은 가짜 전기충격기계를 가지고 실험자의 명령에 따라 피실험자들이 얼마나 높은 전압까지 다른 사람(사전에 준비된 배우이다)에게 충격을 가하는가를 알아보았다. 물론 전기 충격은 가짜이고, 고통은 연기이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전압까지 충격을 가한 이들은 65%였다.

사전 설문조사를 통해 사람들은 결코 충격을 가하지 않거나 보통 수준의 충격 이상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은 이만큼 격차가 존재하였다.

물론 밀그램의 실험은 결과의 충격만큼 반론도 만만찮았다. 권위에 대한 저항 역시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35%의 거부자는 이 이론이 일반화될 수 없음을 말하기도 한다.

국가폭력의 하부 집행자들은 때로는 폭력의 정당성을, 때로는 권위에 대한 복종 의무를 말하며 자신들을 변호한다. 국정원의 댓글 요원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러한 유치한 글들을 달고 있었을까?

 

<달리와 라타네의 연기 실험>

1964년 뉴욕의 어느 주택가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35분간 세 차례에 걸친 살인을 목격한 사람은 모두 38명이었지만 아무도 신고나 도움을 주지 않았고, 언론은 이를 맹비난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동은 도덕적 불감증일까, 아니면 작동거부의 산물일까?

달리와 라타네는 72명의 대학생을 모집하여 대학생활에 대한 소집단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속이고 각각 격리된 방에서 자기 순서에 마이크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미리 말하였다. 실험자가 비운 상황에서 인터뷰 중간에 간질환자로 연기하는 실험보조자의 증상 호소를 들려주었다. 피실험자는 다른 이들과 상의할 수 없고,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뉴욕의 주택가와 같은 상황이다.

실험 결과, 대다수의 학생들은 간질환자를 걱정하였지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단 31%만이 행동을 취했다. 실험을 달리하여 피실험자가 간질환자와 단 둘이 있게 될 경우, 그들의 85%는 신속하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집단의 크기에 따라 ‘책임감 분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살인 사건을 목격한 38의 뉴욕주민들은 서로 다른 집들의 불이 켜진 것을 보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일을 서로 다른 이가 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책임감 분산은 남에게 닥친 사회적 위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한다.

달리와 라타네는 다시 연기실험을 하였다. 미리 모의한 두 명의 배우와 한 명의 피실험자가 설문지를 채우기 위해 방안에 앉아있다. 방안에 연기를 들여보내면 피실험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의심을 하며 다른 두 명을 쳐다보며 질문도 하지만 배우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 설문지를 채워 나간다. 결국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머리와 입술에 흰 막이 생길 정도로 실험이 마칠 때까지 방안에 머무른다.

연기실험은 자신에게 닥친 위험조차 공모자들의 사회적 신호에 의해 스스로 무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인간은 대열을 무너뜨리느니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존재’라고 지적한다. 그 대상이 밀그램의 실험처럼 타인에 대한 공격인지, 자신의 목숨인지의 차이일 뿐이다.

최근의 소위 내란음모사건과 국회의 이석기 체포동의안 처리과정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 사건의 실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정보는 내게는 없다. 그러나 공식 기소도 아닌 국정원의 압수수색 하나만으로도 언론은 사회적 신호를 만들어 내고, 그 신호에 따라 수많은 동조자들이 나타났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자유주의 정당과 진보 정당에서조차 무시되고, 그들은 같은 부류로 분류될까 겁을 먹고 방관자의 대열로 물러났다. 특히, 진보정당에게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사상의 자유는 국회의원이라는 ‘인간의 대열’에 바쳐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기실험의 결과와 같을 뿐이다.

 

<해리 할로의 철사 원숭이 실험>

해리 할로의 이 실험은 애착과정을 설명하는 예로 유명한 실험이다. 갓 태어난 붉은털원숭이 새끼들을 격리된 우리 안에 두 가지 가짜 어미들과 함께 넣어두었다. 하나는 먹이가 풍부한 철사 어미였고, 다른 하나는 젖이 텅 비었지만 푹신한 천 어미였다. 진짜 어미로부터 격리된 새끼 원숭이들은 저항과 두려움의 시간을 보낸 후, 천을 두른 가짜 어미에게 매달리고 놀며 애정을 느끼었다. 새끼들은 배가 고플 때만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에게 달려가 잽싸게 허기를 채우고 다시 천 어미에게로 돌아왔다.

할로의 실험으로 지금은 당연히 여기는 스킨쉽의 효과가 먹이 공급보다 중요했다는 것이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다. 스키너조차 강화와 처벌의 기존의 육아 패턴으로 이해하던 시절에 획기적 발견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할로의 원숭이들은 또 다른 실험을 통해 철의 여인(못된 어미)에게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송곳에 찔리며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새끼들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가짜 못된 어미에게서 따뜻함을 구했다. 저자는 이를 “이러한 행동을 설명할 만한 강화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접촉의 어두운 측면, 영장류 동물들의 관계의 진실만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할로의 실험은 계속 이어져서 가짜 어미에게 자란 원숭이들의 자폐적 공격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몸을 흔드는 가짜 어미와 하루 30분간의 진짜 원숭이들과의 놀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피실험 원숭이들은 짝짓기를 할줄 몰랐다. 급기야 할로는 강간침대를 만들어 어미 없이 자란 원숭이 스무 마리를 임신시킨다. 불행하게도 그 어미들의 대다수는 새끼를 죽이거나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해리 할로의 실험은 인간과 가장 유사한 종을 통해 애착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는 의의와 함께 과학과 윤리의 논쟁을 함께 드러내었다. 저자는 동물실험을 둘러싼 논쟁점을 제기하며 책을 읽는 독자에게 고민을 넌지시 던진다. 인간의 생명은 동물보다 더 고귀한가? 그러한 희생이 없이 과학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 아동대상 약물실험은 동물에 대한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과연 그 개발과 진보가 누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들 따위 말이다.

 

<레온 페스팅거의 인지부조화 이론>

영화 ‘2012’가 있었다. 태양광 폭발로 지구는 지진과 쓰나미가 몰아치는데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국제 프로젝트에 의해 신 노아의 방주에 탑승한 이들만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종말에 관한 예언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최근 마야력에 의한 종말의 날이 아마 2012년 12월이었을 것이다.

레온 페스팅거는 미국 중서부의 종말론자 그룹에 잠입하였다. 그의 관심은 종말론자들이 주장한 12월 21일(마야력의 종말일은 12월 22일이었다)에 대홍수도, 그들을 구할 우주선도 오지 않을 경우 그들의 믿음과 반응이었다. 이미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모인 종말론자들은 자정이 넘어서자 자신들의 믿음으로 세상이 구원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부조화와 100만 가지의 합리화들’ 페스팅거는 인지부조화 이론을 위한 실험에 착수하게 된다.

그 중 한 실험은 각각 다른 사람에게 1달러와 20달러를 주고 거짓말을 시킬 때에 1달러에 거짓말을 한 사람이 20달러를 받은 이보다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작 1달러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스스로 받아드리기 어려워서라는 것이다. 페스팅거에게 인간은 스키너의 그것처럼 기계적인 조건화 반응도 아니고,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합리화하는 존재였다.’

인지부조화에 대한 실험은 사람들의 배신과 자기 기만을 설명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있어 부조화라 인식되는 상황이 그 자신에게 조화로움으로 인식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조화와 부조화 사이’의 그 평화로운 무지스러움이 때로는 편한 것일 수도 있다.

 

<데이비드 로젠한의 가짜 정신병 환자 연구>

1970년대 초, 로젠한의 그의 여덟 친구들과 함께 정신진단의 정확성에 도전하였다. 그들은 서로 다른 병원에 가서 머릿속에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하였고, 진단과정에서 직업과 이름 외에 다른 모든 사항은 솔직히 답변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정신분열 또는 조울증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의 그들의 상담과 일상은 이미 내려진 진단에 맞추어 해석되게 된다.

로젠한의 논문 발표 이후에 어느 정신병원에서는 로젠한에게 자신들이 모두 걸러낼 수 있다며 가짜 환자를 보내보라고 하였다. 석 달 뒤, 병원은 가짜 환자를 41명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로젠한은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완전한 K.O패이다.

편견은 기대감과 기회의 박탈을 만들고 심화시킨다. 로젠한의 실험들은 ‘현실을 결정하는 편견과 맥락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었다.’

얼마 전, 약사와의 대화 속에서 오진의 가능성과 오진에 대한 법적 처벌의 무용성에 대해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모든 진단적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오진을 허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로젠한의 실험이 일면 통쾌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정신진단의 기준이 발전했음은 인정되지만 불확실의 시대에 이 실험에 걸리지 않을 것은 무엇인가 궁금하다.

 

<브루스 알렉산더의 약물 연구>

약물, 특히 아편같은 환각약물의 중독성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장기간 노출이 중독을 낳고, 강화된 생리적 충동이 중독을 강화하게 된다는 결론을 말이다.

이러한 통설에 The Mouse Park를 통한 실험을 통해 중독이 생물적 현상이 아닌 환경적, 심리적 현상임을 밝힌 연구자가 있다. 캐나다의 알렉산더 박사이다. 그는 어떠한 약물도 역사적으로 1% 이상의 중독자를 만들지 않아왔다고 생각했다. 나아가서 그는 행복한 환경에서도 중독이 발생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의 실험은 다른 연구자들과 같은 우리 환경과 안락한 공간을 제공하는 쥐공원 환경을 배경으로 실시되었다. 쥐에게 치명적인 유혹이라는 단물을 섞은 모르핀과 맹물을 제공하였을 때, 우리 안의 쥐는 쥐공원의 쥐보다 모르핀을 16배나 더 섭취하였다. 더욱이 모든 쥐들을 중독상태로 만든 뒤에 재실험을 하여도 쥐공원의 쥐들은 중독상태에서 벗어났었다.

알렉산더의 실험은 약물의 의존에 대해 의존상태 자체보다 의존으로 가게 만드는 환경적 변화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그는 수많은 마약퇴치기금을 빈민가의 환경개선에 쏟아 부을 것을 제안한다. 그의 연구는 중독을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구조의 문제로 확장하여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3S정책, 3E정책(eat, entertainment, employ)으로 쥐 우리를 유지하는 세상을 어찌 쥐공원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가짜 이식 실험>

로프터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기억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밝혀내는 도전을 하였다. 그녀의 도전은 아동 시절, 성폭력을 당했다는 자녀들의 고소로부터 그(녀)들의 부모를 돕는 일이어서 그녀는 수많은 비난을 당해야만 하였지만 기억에 대한 허구성을 밝혀낸 것으로 충분히 빛나는 성과이다.

로프터스는 피실험자들에게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들은 어린 시절 기억에 쇼핑몰에서 길을 잃었다는 단 한가지의 거짓 기억이 담긴 보고서를 읽게 하고 그 반응을 확인하였다. 그들의 25%는 쇼핑몰에서 길을 잃은 것을 사실로 기억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묘사하기까지 하였다. 이후 가짜 기억 실험은 50%까지 통계치가 높아지게 된다.

로프터스의 연구는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학의 억압 기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로프터스에게 억압이란 ‘거짓 기억이 주관적 진실에 스며들어 혼돈의 세상에서 허구가 진실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에릭 칸델의 해삼 연구>

저자는 1950년대까지 두뇌 생물학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인간의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가 간질 치료를 위해 제거되는 등 잘못된 시험적 수술의 희생자들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에 영감을 받은 연구자들은 절차적 기억과, 의미론적 기억, 서술적 기억의 영역이 뇌의 서로 다른 부위에 넓게 퍼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에릭 칸델은 생물학자이며 신경 과학과 정신분석의 결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억압에 대한 신경 메커니즘이 없다고 주장한 로프터스와 반대로 기억의 생물학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칸델은 학습 메커니즘을 찾기 위하여 해삼의 뉴런을 분석하였다.

칸델은 해삼에게 조건화된 자극을 가하게 되면 두 개의 뉴런이 더욱 큰 자극을 받고, 그 연결망인 시냅스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또한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바뀌는 기제로써의 크렙 분자와 또 기억을 잊게 만드는 분자를 발견하였다. 칸델은 기억을 강화하거나 억제하는 약을 만들고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망각의 필요성과 정치적 오용의 가능성이 그 이유이다.

더욱 발전하는 과학의 성과들은 이제 보다 많은 윤리적, 사회적 논쟁을 요구하고 있다.

 

<모니즈의 두뇌 실험>

뇌엽 절제술로 노벨상을 받은 안토니오 모니즈 역시 논쟁적 인물이다. 그의 연구는 정신의학의 새로운 발전과 함께 두뇌의 알려지지 않은 기능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낳았다.

모니즈는 뇌의 구조를 알기 위하여 환자의 목에 브룸화물을 주입할 정도로 대담한 인물이다. 1935년 학회에서 발표된 침팬지의 전두엽과 대뇌변엽계의 수술에 대한 연구 보고를 듣고 그는 인간의 불안과 우울을 해결하기 위하여 뇌엽 절세술을 시행하였다. 그의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인간을 실험용 쥐처럼 이용하였다.

논쟁은 윤리적 범주만은 아니다. 절제술과 이에 대한 반발의 결과물인 항우울제에 대한 의학적 논쟁이고, 인간의 고통과 창의성의 근원인 두뇌에 대한 약물, 수술 등 생리학적 접근에 대한 효능과 정당성의 범주이기도 하다.

 

3. 나오며

심리 실험의 10장면은 스키너의 보상과 처벌에 따른 조작적 조건화에서 모니즈의 두뇌 절제술에 관한 이야기로 끝난다. 이 책은 심리학은 마음과 행동, 생리학을 넘나드는 공부임을 보여주었다. 더욱 좋은 저자는 것은 실험연구의 성과만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고, 스스로의 통찰력을 가질 것을 나에게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저술가 다치바나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한 권의 책으로 알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그는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하니 의심의 길을 일러주는 저자 슬레이터가 어찌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서 심리학 관련 책을 읽어가고 있지만 방대한 대양에 쪽배 하나 타고 나아가는 모양이다. 그저 한 번씩 노를 저어갈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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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EBS 제작팀 지음)

‘이야기의 힘!’ (EBS 제작팀 지음)

201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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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가 다큐프라임으로 방영되었던 내용을 책으로 내었다.

최근 10여 년간 스토리텔링의 열풍은 ‘감성’이라는 말과 함께 방송, 광고, 정치 등 광범위한 영역에 불고 있었다. 제품을 알리는 광고는 소비자의 사연을 엮어서 내는 광고로 바뀌었고, 방송국은 매일 아침 각종 사연과 이야기들로 방송을 눌러 채운다. 더욱이 경제를 살리겠다던 어느 대통령 후보의 국밥집 선거광고는 이제 시쳇말로 ‘흔한 광고’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는 이미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매체이다. 어릴 적, 어머니 무릎을 베고 듣던 시골집 이야기, 서울에 올라와 고생한 이야기처럼 생동감 있고 가슴을 아리게 하던 이야기가 또 있었을까? ‘여성시대’와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오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또 얼마나 웃고, 울었는가?

이처럼 이야기란 경계 너머 허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세상에 대한 것이다. 이야기하기란 세상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해석하여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인 것이다.

 

EBS 제작팀은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기억을 잡아두고,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고,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야기는 지식 전달의 훌륭한 매개체이면서 진실의 올바른 전달자이며 공동체의 가치에 대한 계승자인 것이다. 또한 그 이야기는 ‘인생의 균형이 깨진 인간이 그 균형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자기 몫의 이야기를 써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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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도서관’(존 우드 지음)

‘히말라야 도서관’(존 우드 지음)

201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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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집은 것은 책 제목 탓이었다. 히말라야는 재작년, 여행에서 미처 가지 못한 티베트 너머 아득함의 느낌을 주었고, 도서관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즈음, 몽블랑 길을 걷고 있을 고교 후배 사진작가는 작년에 제주 올레길을 함께 걸으면서 올해 초에 히말라야를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하였다. 보름간의 휴가를 쉽게 뺄 수 없기도 하지만 사진 작업을 위해 떠나는 후배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서 잘 다녀오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에는 아쉬움만 가득하였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다닌 학교는 학생 수가 6,000명이 넘는 과밀학교였다. 당연히 4학년까지는 2부제 수업이었고, 5학년이 되어서는 교실이 모자라 도서관이라 이름붙인 곳을 교실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도서관이라 이름붙이기에 너무 작은 공간이었지만 나에게는 그처럼 많은 책들을 볼 수 있었던 첫 번째의 경험이었다. 그 책들 중에 내 관심사의 으뜸은 지리와 세계사였었다.

 

 2.

책을 지은 존 우드는 룸투리드(Room To Read)라고 하는 비영리기관을 1999년부터 이끌어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마케팅이사로 일하던 그는 오랜만의 휴가를 위해 히말라야에 도착하였다. 존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네팔의 많은 마을 학교에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한 통의 E-Mail을 띄우게 된다. 책을 수집하여 보내고, 그 일을 도와줄 현지 사람들을 접촉하고, 네팔 학교를 다시 방문하면서 존은 이제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있음을 느끼지만 안락한 지위를 포기하는 것에 망설인다.

회사를 떠나겠다는 존의 결심에 대해 존의 아버지는 ‘그건 단지 너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일 뿐’이라고 해주고, 친구는 ‘반창고를 제거하는 방법은 천천히 고통스럽게 혹은 빠르게 고통스럽게 단 두 가지’라고 말해준다. 이 이상의 믿음과 신뢰를 줄 가족과 친구가 있을 수 있을까?

존은 드디어 비영리기관을 설립하고, 지인들의 도움을 통해 2곳의 학교와 12곳의 도서관을 지었지만 그의 꿈은 단지 몇 개의 학교와 도서관을 짓는 것이 아닌 지원국의 지역공동체와 함께하는 지속적인 교육구조의 변화였다. 존은 기부재단의 재정지원을 확보하고, 시민네트워크를 조직하고, 훌륭한 자원활동가를 발굴하며 조직을 성장시켜 왔다.

책이 발간된 2007년, 룸투리드는 2,300곳의 도서관, 200곳의 학교, 50곳의 컴퓨터 교실, 1,700여명의 여성 교육지원, 백 만권의 책 기부라는 성과를 내었다. 지금 그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해보니 15,119곳의 도서관, 1,677곳의 학교, 21,582명의 여성 교육지원, 13,387,051권의 책 기부, 780만 명의 아동 혜택의 성과를 보고하고 있다. 와우! 놀라운 수치이다.

 

 3.

이 책을 통해 놀라운 것은 존의 선한 의지도, 그들이 만들어 낸 성과의 숫자도 아니다. 진정 놀라운 것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용기와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인내의 노력이었다. 하나 덧붙이면 대상과 기부자, 자신에 대한 책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현실을 벗어난 새로운 일을 찾고 싶어 하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혜택이나 그 삶의 무게를 벗어 던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취미와 종교, 자원 활동을 통한 참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보충하는 것 역시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이상의 사명을 느끼게 된다면? 그래서 그 길을 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면? 나의 부족한 생각은 그 길을 가야된다고 일러주고 있다. 비록 세상을 바꾸겠다는 근본적인 목표와 굳은 의지가 아니라도 세계와 나, 그리고 지역이 하나의 순환구조로 인식될 때에 개인의 삶의 방향과 의지는 분명해지고 강건해진다. 존은 그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두려웠지만 행복했다.”

그는 그 스스로 ‘글로벌 몽상가’라 말하고 있지만 실은 분석가였고, 조직자였으며 훌륭한 마케터였다. 때로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왜 주변에서 이런 나를 돕지 않지?’하는 의문 혹은 불평을 하게 된다. 그야말로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하나하나씩 스스로 그 조건들을 채워간다. 고통스런 시간들을 지내고, 계획과 목표를 수정하면서 하나의 고지와 그 다음 고지를 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해야 된다는 당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의 즐거움을 스스로 느끼면서 그 기쁨과 꿈을 주위와 함께 가져간다.

존은 후원자들을 만나면서 몇 가지 원칙을 가졌다. ‘베푸는 즐거움을 알려준다.’, ‘결과를 후원자에게 보여준다.’, ‘최소한의 경비를 쓴다.’, ‘열정을 판다.’,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을 좋아한다.’ 그는 죄책감에 기반을 둔 마케팅이 아니라 열정과 희망의 마케팅을 하였다. 아이들의 불쌍한 모습을 보여주며 후원을 모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때로는 돌파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희망을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작은 비전이든 큰 것이든 현재의 삶보다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빛이 없다면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희망의 빛을 품을 것인지가 나의 화두이자 책임인 것이다.

 

4.

오랜만에 책을 잡자마자 끝까지 읽은 책이었다. 소감문을 위해 다시 읽어도 책의 감동은 그대로였다.

존은 몇 개의 도서관과 학교를 짓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책과 교육을 통한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는 변화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비록 도서관을 세우는 일이 아닐지라도 나는 내 마음과 주위에 얼마만한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

“Get Shit D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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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김두식 씀)

'욕망해도 괜찮아'(김두식 씀)

2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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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탕웨이, 양가휘 주연의 영화 '색,계'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욕망의 세상(색)과 규범의 세상(계).

스스로 색의 세상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보다 계의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계를 벗어나지 않은 이들이 있을까?

저자는 감춰진 욕망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이 신정아 스캔들같은 사건을 관음증처럼 즐기고 비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 역시 다른 욕망의 덫에 빠진 일을 수없이 우리는 보고있다.

저자는 애정과 학벌, 권위와 신념, 신앙에 있어 스스로 계의 세계에 묶어두지 말라고 조언한다. 적절한 분출이 오히려 삶을 건강히 한다는 것이다.

가끔 다른 이들의 거치없는 언사들이 불쾌한 경험이 있다. 직접적인 불편과 피해를 나에게 주는 것도 아닌데 머리에 깊게 되는 것이 있다. 자세히 마음을 살피면 그것은 내 욕망이었던, 그러나 나는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영인 경우도 있다. 스스로 계의 세상에 머물렀다 해도 나는 색을 꿈꾸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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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식당'(무레 요코 지음)

'카모메식당'(무레 요코 지음)

201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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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생식과 현미식을 하며 다이어트를 한참 할 때였다. 점심시간을 바로 앞두고 블로그의 맛집 사진을 보고난 후 밥을 먹으러 가곤 했다. 현미밥과 1,500원짜리 구내식당의 반찬이지만 식욕을 한참 자극하고 난 후 먹는 밥은 꿀맛이었다.

가끔 구내식당의 누님들은 나에게 정량배식을 어기고 맛난 반찬을 하나씩 더 얹어주곤 하였다.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였고, 체련대회를 같이 가면 항상 웃겨준다며 주는 선물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것을 뻔뻔히 즐겼다. 맛난 반찬에 대한 욕심이기도 했지만 줄 서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떠주는 그 한 국자에 담긴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음식에 대한 기억은 음식의 맛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음식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과 그 시절이 주는 정서와 같이 기억된다.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식당을 다시 찾아가서 먹을 때에 그 맛이 달랐던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

 

 카모메식당(갈매기식당)은 핀란드 헬싱키에 새로 연 일본 식당을 배경으로 여성 세 명의 이야기이다. 30대 후반의 식당 주인 사치에는 오니기리(일본식 주먹밥, 삼각 김밥)가 진정한 일본인의 소울푸드라고 여기며 화려하지 않아도 한 끼 식사를 소중히 할 수 있는 식당을 열고 싶어 핀란드로 왔다. 40대의 미도리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인생을 살아오다 늙은 부모의 요양원행과 직장의 파산을 계기로 내키는 대로 핀란드로 왔다. 50대의 마사코는 모시던 부모의 죽음 이후, 핀란드의 ‘아내업고 달리기 경주’에 이끌려 왔다.

그들은 막상 핀란드로 왔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거나, 여행 가방을 잃어버린 낯선 여행자였다. 그들은 사치에와 같이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가족이 되어간다.

 카모메식당의 미덕은 음식의 맛에 있지 않다. 들고 남에 있어 편한 분위기와 따뜻한 한 끼의 밥이 그 미덕이다.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못 가본 식당이 있다. 희망식당이다. 쌍용차 해고자와 투쟁사업장 지원을 위한 희망식당은 다른 식당을 빌려 일주일에 하루만 열었다. 돈을 모으기 위한 일이라면 그냥 모금을 하면 될 터이지만 희망식당은 한 끼 밥상을 통해 연대의 온기를 만들었다.

같이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리운 시간이다.

 

※ ‘카모메식당’은 영화로 먼저 보았습니다. 소설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 배경 이야기도 있어 좋습니다. 둘 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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