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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철들지 않는 소년이 살고 있다 ” -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읽고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철들지 않는 소년이 살고 있다”

- 이근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읽고

 201 3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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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자 이근후 박사는 정신과 전문의로 한 평생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을 해왔다. 정신병동 개방, 사이코드라마 도입 등 한국 정신의학사의 굵직한 발자국을 남긴 저자는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부인과 함께 세운 가족아카데미아에서 연구하고, 네팔 의료봉사도 왕성하게 하고 있다.

저자는 그동안 직업상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한다. 저자는 특별할 것 없는 보통 할아버지의 이야기라며 노년의 삶과 나이 듦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저자의 노년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이가 들면서 조심해야 할 것을 밝혀주고, 젊은 날에 대한 아쉬움을 전해주고 있다. 그럼으로 사람과 삶의 가치에 대해 출발점에 다시 선 우리에게 아낌없이 조언을 전해주고 있다.

  

2.

저자는 여전히 ‘습관적인 하루에 지치지 않으려 애쓴다’면서도 노년의 삶에 서운함을 갖지 말라고 조언한다.

“노년이 되었다고 날마다 점잖은 얼굴로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을까?”

“이가 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 외로움이 무섭다면 외롭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은 나에게 남은 생물학적 여명이 적다는 데서 오는 하루하루의 희열감에 매일 아침이 행복하다. (…) 일본 시인 이싸의 하이쿠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에도 모기에 물리다니!’ 딱 내 심정이다.”

  

3.

저자는 나이 듦의 과정에서 스스로 용납해야 될 일들을 말한다.

“나이가 들면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너그러움에는 나의 지난 잘못과 마주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단언하건대, 나이 듦의 상징은 육체적 쇠약에 있다. …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되도록 빨리 버려라.”

“거친 바다로 새롭게 고기잡이를 나온 젊은 어부에게 늙은 어부가 들려줄 것은 생생한 바다의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습관적이고 충동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말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

 

 4.

저자가 이 책을 읽는 마흔 문턱의 독자들에게 전한다.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고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노력이 내 뜻대로 사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살아봐라. 그 후회가 닥치기 전에 한번, 내 마음대로 살아봐라. 내가 누구인지 알면 내 삶의 리더가 된다.”

“분노를 직면하고 인정하며 그 원인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나이 들어가기를 바라는가?”

“부모로부터 완전한 독립은 부모에게서 받은 마음속의 크고 작은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것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5.

일생을 사람을 연구하던 저자도 사람 관계의 중요성을 말한다.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쇠는 쇠로 단련되고, 사람은 사람으로 단련된다.’ 고2를 올라갈 무렵 갑자기 찾아간 태백의 수도원 화장실에서 본 말씀이다.

“나의 회갑 잔치 날이었다. 약속 장소에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였다. … 그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내 삶의 어느 한순간이 영화처럼 스쳐갔다. 인생의 한순간을 공유하고, 내 삶을 지켜준 그들이 고마웠다.”

“내가 지금 간절하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나에게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일까? 갖지 못한 것들 때문에 괴로울 때는 이런 의문을 던져 보라. 그 질문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한다. 그 흐름 따라 변화하는 나의 ‘쓸모’를 발견할 줄 아는 것도 나이를 잘 먹는 것 중의 하나다.”

  

6.

어느덧 마흔이 넘어가면서 내 삶의 쓸모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여전히 젊은 모습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있고, 오로지 자녀 양육을 낙으로 여기고 삶을 버티어가는 이들도 있다.

여전히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공부하고, 돌아보고, 실천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여겨지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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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 ‘어른공부’(양순자 저)을 읽고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 ‘어른공부’(양순자 저)을 읽고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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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자의 ‘인생9단’ 이후 세 번째 자전적 수필집이다.

그사이 저자는 대장암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저자는 병으로서 ‘암’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세포’로 암을 바라보고 느끼며 살고 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내 몸에 대한 대접을 잘했든, 잘못했든 암이 반가울 수는 없지 않은가?

언제인가 ‘SELF HELPING’ 과정 중에 한의사 선생님이 강연을 하시면서 그런 말을 하셨다. ‘한의원에 말기 암 환자들이 계신데 암환자가 한의원으로 오기 전에 얼마나 많은 병원을 찾아다녔는지는 말 안해도 알 것이다. 밤마다 고통에 몸부림치게 되는데,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환자에게 암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시키고는 하는데, 나도 아픈데 너는 얼마나 아프겠니.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하며 말이다. 환자는 결국 완치되지 못하고 죽었지만 마지막 모습은 평안한 얼굴로 갈 수 있었다.’

맹자는 인간의 선함을 말하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하였다. 어려움을 겪는 이에 대해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함의 실타래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만드는 마음이다. 사회의 병듦과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나의 아픔에 대해 객관화하여 보살피는 마음이 저자가 말하는 어른이 되는 과정인 것이다.

  

2.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옛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저자는 불교 경전인 ‘보왕상매경’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세상살이의 큰 곤란을 겪지 않았다. 소소한 일들이 많이 있지만 사는 것이 힘들어 죽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도 않았다. 그리고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도 않고 있으니 가끔은 마음에 사치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에 SNS에 김치냉장고 이야기를 하나 올렸다. 아내가 김치가 쉰다고 빨리 먹어야 된다고 하기에 김치냉장고를 하나 살까 했더니 아내가 '김치냉장고까지 가지면 너무 많이 갖는 거 같아. 그리고 그 안에 또 채워놓고 싶을 것 같아서.'라고 하던 말을 올렸더니 여러 반응이 나왔다. ‘고민 너무 하면 머리칼 빠진다. 그러면 돈 더 들어간다’는 농담도 있었지만 다소 궁상맞은 고민이어도 사실, 나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더러 여행도 다니고, 사시사철 옷도 사서 입고, 가끔 주변에 술 한 잔 사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형편은 내 삶의 경계를 스스로 허무는 호미가 될 수도 있다. 저자도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져. 그래서 절대 필요한 것만 갖고 살기’로 집에 대한 철학을 정했다고 하지 않던가?

‘스스로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는 말씀은 흐트러진 내 자세를 바로 잡게 하는 죽비이다.

  

3.

죽음은 몇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떠나보내는 자들에게는 이별의 아픔으로, 떠나는 자에게는 미련 혹은 안식으로.

나는 장인과 아버지,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별하였다. 결혼한 지 4개월 만에 장인이 돌아가셔서 장인과 충분한 정을 나누지 못하였으니 내 슬픔보다는 아내의 슬픔을 같이 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성 싶다. 입관은 어느 가족에게나 마지막 이별의 고통이다. 딸 셋이 모두 흐느끼고 울고 있지만 단 한 분, 장모님은 울지 않으셨다. 수의를 다 입히고,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할 때에 장모님은 ‘여보. 그동안 같이 살아줘서 고맙소.’하며 장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셨다. 그 생의 전부를 같이 헌신하였기에 보여줄 수 있는 감동이었다.

5년이 더 지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란히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계셨다. 창문으로 바라보면서 터지는 울음을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 담당 의사가 아버지가 방금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맞닥트리니 감정이 혼란해졌다. ‘심장과 폐 기능이 동시에 멈춰서 그나마 고통없이 가셨을 겁니다.’라는 의사의 말에 억지로 위안을 삼으면서도 옆 병실에 누워계신 어머니에게 차마 알릴 수 없어서 태연한 척 연기를 해야만 했다. 다행히 아버지의 얼굴은 그 삶의 중반기처럼 쫓기는 얼굴이 아니라 평안한 모습이었다.

1년 뒤, 어머니마저 임종을 보지 못하고 보내드렸다. 형님이 오기 전까지 한 시간 여를 어머니와 누이들과 같이 있었다. 많이 야위셨지만 얼굴은 투명하게 차분한 모습이었다. 마지막 일 년을 치매로 고생하셨지만 예의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살면 안 돼’하며 스스로 더 고생하시며 가르치시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저자는 항상 이별을 생각하고 있던 자리를 잘 마무리하라고 말한다. 어른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서 성장해야 어른다운 어른이 된다며 자신에게 생긴 암도 안고 간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니 세상과 나 사이의 빗장도 열리는 경험을 말한다. 그만큼 해탈하려면 나는 아직 멀었겠지만 열심히 사랑하고, 살아간다면 마지막 가는 모습은 평안하게 가지 않을까?

  

4.

저자는 책 속에서 에피소드로 그리스 영화 ‘영원과 하루’를 이야기한다.

주인공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추앙받는 시인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던 그는 마지막 하루를 19세기 시인 솔로모스의 흩어진 ‘불멸의 시어’를 찾는 여행으로 보내고자 하였다. 우연히 알바니아 고아 소년을 만나 길을 나서는데, 이 소년을 통해 전해지는 그리스 시어 세 가지를 통해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감정을 뜻하는 ‘코폴라’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향한 아쉬움, ‘세니띠스(떠도는 사람)’는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라는 자각이야. 소년이 떠나기 전에 남기는 ‘아르가디니(너무 늦었다)’는 회한의 순간 발견하게 되는 삶의 영원함을 말해. 알렉산더가 그토록 찾아 헤맨 ‘불멸의 시어’는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있었던 거야.”

이 영화를 본 적은 없어서 글을 읽으며 떠오르는 영상은 영화 ‘길’과 ‘길소뜸’이었다. ‘길’은 꽤 오래 전에 보아서 띄엄띄엄 기억에 남아있지만 떠돌이 차력사 잠파노는 젤소미나에게 악인이었지만 그녀를 사랑했다고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최근에 우연히 본 ‘길소뜸’은 오랜 시간 찾아왔던 혈육도 다시 부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야기하였다.

세월과 역사 속에서 한낱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될망정,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부정하게 만들지언정, 너무 늦었다고 자책할망정 그 순간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는 기억은 없어지지 않는다. 잘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매우 힘들어하던 시절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쳤던 적이 있었다. 일을 도와주시던 도우미 분께서 대법관네 장례식보다 많이 오신다고 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조문을 해주셨다. 황망함과 헛헛함에 그 감사함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회사 소속장의 장례식장을 찾고 나서 깨달았다. ‘아! 내가 노동조합을 하지 않았다면 어디서 그런 사랑을 받아 봤겠나!’ 부당한 인사발령으로 다른 곳으로 간 뒤에 간혹 술자리에서 만나는 옛 동료들은 ‘내가 말은 안했지만 너 그때에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위로해준다. 나의 지난 10년 세월은 사랑받은 시간이었다.

 

5.

쉼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이나 조카들에게 간혹 이런 말로 격려하곤 한다.

“너는 굉장히 멋진 삶을 살거야.”

그런데 솔직히 삶은 굉장히 멋있지도 않고, 스스로 만족을 느끼면서 살기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다만 그리 살도록 바라는 마음과 그렇게 꿈을 그리면서 살기를 바라기에 하는 말이기에 그냥 거짓부렁은 아니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도, 방학마다 고치고 또 고치는 생활계획표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미래를 그려보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인생이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어느 정도는 닮아가지 않을까싶기도 해서 무슨 삶을 살고 싶은지를 자꾸 생각해보라는 말도 하곤 한다.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도 막내 생활을 한지 15년이 넘어서인지 내가 선배구나 하는 생각을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몸은 이제 조금씩 고장이 나지만 정신은 아직 청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간혹 더 젊은 친구들에게 질문을 받을 경우가 생긴다. ‘쌤은 이럴 때 어떠셨어요?’라는 질문에 내속의 나는 ‘어이쿠’하며 당황하기 일쑤이다.

저자는 이런 나에게 야단을 친다.

“나이만 먹지 말고, 하루하루 나아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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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 - ‘인생9단’(양순자 저)을 읽고

‘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 - ‘인생9단’(양순자 저)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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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표지 사진 속의 저자는 책을 피고, 안경테를 손으로 붙잡으며 무언가 한 마디를 할 준비를 하시는 듯 했다. 첫 인상이 그리 만만한 어른은 아니다. 하기는 스스로 인생9단이라고 까지 붙이셨는데, 그 무섭다는 사형수 상담을 30년간 하셨다는데 만만하시지는 않겠지. 저자인 양순자 님은 “할머니가 손수 담은 식혜 한 사발 놓고” 듣는 “때론 슬프고 때론 웃기는 옛날이야기”같은 인생의 공식을 전해준다. 간결하면서도 익숙한 그 말투 그대로.

 

저자는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어. ‘할머니, 인생 살만한 겁니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지.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젊은 사람이 맥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묻겠어. 혹시라도 누가 자신 있게 ‘살만하다.’고 말하면 그놈이 누구든 간에 혼쭐을 내주고 싶어. 누가 감히 세상을 살 만하다고 할 수 있겠어. 그럴 때 나는 그저 그 사람의 등을 토닥토닥 쳐주면서 ‘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라고 말해주는 거야.”

치료와 위안이 아니라 공감이 우선이었다.

저자는 인생과 사람, 가족 사이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감’이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 저자는 스스로의 마음에 부족함이 없이 도왔다. 스스로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 도움으로 누군가가 굉장히 바뀌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상태에 그냥 공감하는 것이었다.

“불편한 세월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잘 달래면 그게 바로 편한 세월이 되는 거야”라는 대목에 이르면 이 공감은 감정(희로애락)과 관계(나와 너, 우리)를 넘어서 내 삶 자체에 대한 공감으로 진전된다. 자칫 ‘인생사 마음먹기 나름’류의철지난 유행가 가사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으로 이루어진 공감의 울림은 더 크게 다가왔다.

  

2.

저자는 말한다.

“어정쩡하게 용서도 하지 말고, 어정쩡하게 하려면 복수할 생각도 하지 마.”

이것은 자기 삶과 삶의 아픔에 대한 진한 공감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어찌 아픈 것을 아프지 않다고 해야 하고, 어찌 화나는 것을 화나지 않는 것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 아픔과 화가 나에게 어떻게 되돌려 질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월의 한 때, 나는 좌절에 빠져 있었다.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신있어하던 일을 망치고, 내 주변의 익숙한 많은 것들을 떠나보냈던 그 한 때, 계속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하루하루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들과 술 마시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를 둘러싸는 이 진공 같은 상태를 견뎌내지 못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죽는구나.’하는 생각에 겁을 먹기도 하였다. 그것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 상태를 벗어난 것에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씩, 내가 뻔뻔해지면서 나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삶도 나쁘지는 않았어. 어디서 그런 사랑을 네가 받아보았을까?’, ‘그동안 너도 죽기 전에 네 일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잖아?’, ‘대단한 역할이 아니면 어때? 네 주변 사람들이라도 지치지 않게 격려하고 소주 한 잔 사주면 되잖아.’라며 내가 잘한 일과 잘못한 일, 그리고 내 삶에 대해 조금은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까지는 아니어도, 나에게 주어진 30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살아보고 싶어졌다.

  

3.

저자는 말한다.

“그 눈빛이 평생에 오늘 한 번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 같은 거야.”

청소년 이동쉼터에서 3년 동안 자원활동을 했었다. 거리상담을 일주일에 하루하는 것이니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1년이 지나고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잘 다가서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잠시 힘들어지기도 하였다. 마침 내가 사례관리를 하던 아이가 연락을 끊고 나타나지 않은지 6개월이 넘어서 그 아이의 친구들이 이동쉼터에 나타났다. 거리와 집의 경계가 불분명한 순환형 가출 청소년들이다.

그 사이 소년원에 갔다는 말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말도 있고 해서 많이 놀래 있었는데, 우선 밥을 챙겨 먹이면서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1년간 나와는 눈인사만 하던 아이가 말을 한다.

“선생님은 이게 직업이에요?”

“직업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 지금은 자원활동으로 나오는 거야.”

“그럼 왜 자원활동을 해요?”

“너 만나고 싶어서 나오지.”

“나도 다음에는 직업도 갖고, 선생님들처럼 이런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순간, 가슴에는 벅찬 감정과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잘 나가는 소위 일진이고, 그동안 진지한 이야기는 다 싫어하던 그 아이의 그 진지한 눈빛은 오늘,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을 들게 해주었다.

  

4.

저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이 다 사형수라는 거야. 사형수란 게 집행 날짜가 정해진 게 아니거든. 언제 죽을지 몰라. 우리도 그렇잖아. 오늘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지. … 그런데 다 남의 일이야. 무사태평이야. 영원히 살 것처럼. 사형수들은 안 그래. 그들은 매순간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죽음을 의식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이게 감옥 안의 사형수와 감옥 밖의 사형수가 다른 점이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슬픈 일이다. 다시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고, 아쉬워할 사람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은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오늘 마저 끝내지 못한 일을 남겨둔 것처럼 삶에서 내가 할 도리를 미처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언제인가 그리 멀지 않은 해에 아내와 노년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나름 아끼고 저축하는 일이 온전히 우리 삶을 위한 것만은 아니지만, 노년의 삶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쉰 살이 넘기 전에 직장이 아닌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갖기 원하는 우리들은 노년에 대한 계획을 간혹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그랬다. 무엇을 하던 간에 60세 혹은 많이 너그러이 65세가 넘으면 현직으로 일한다는 것이 힘들지 않겠냐고. 아내는 욕심도 많다고 핀잔하였다.

‘일을 그만두면 무슨 낙으로 살지?’하고 물으니 솔직히 갑갑하였다. 금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도전과 탄력을 받지 못하게 되면 무슨 낙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뒷방 늙은이’처럼 후배들 일에 참견하고 싶지도 않고, 살기 위해 사는 모습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결심한 일 중 하나가 살을 빼는 것이다. 좀 더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하게 죽을 수 있게 나부터 준비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결심(?)한 일이 70세까지만 살기로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불행한 일이 닥칠 수는 있겠지만 건강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야할 나이를 미리 예정하고 준비하는 일이 내 마지막을 잘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어쩌다 간혹 이 말을 친구들에게 하게 되면 ‘미친 놈’ 소리를 듣곤 하지만, 한 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기 전 3년은 온전히 정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정리하고 서운한 일과 서운했던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 하루를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성실히 살지도 못해도 최대한 나에게 남은 시간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에 낭비할 인생은 없을 테니까!

  

5.

저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써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마. 그 순간순간 네 인생에서 감동을 느끼고, 그만큼만 더 행하고, 그만큼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

나는 내가 냉철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한다고 믿었다. 아니 그래야 된다고 믿으며 살았다. 또 한동안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지만 기왕지사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내 마음이 감동받는 일을 하고 싶다. 간혹 주위의 진심어린 제안이 미안해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채워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나만 감동받고, 나만 행복한 게 아니라 ‘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하며 같이 손잡아 줄 동료로 남는 것으로 내 미안한 마음을 대신할 수 있어도 좋겠다.

 

책 표지의 깐깐한 어르신이 ‘쓰윽’하며 웃어주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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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마지막 이야기(5/15)

 

2011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두 번째 이야기(5/15)

 

32. 두보와 제갈량

이제 하루 뒤면 우리는 한국에 있을 것이다. 때문에 어제는 숙소에서 아내와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여행 중 서운하게 한 일은 잊어달라고 했다. 배낭을 다 꾸리고 숙소에 보관 요청을 하고 나오니 청두의 아침은 흩뿌리는 이슬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콴샹즈(寬巷子)거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거리이다. 관광 거리로 조성된 길이지만 중국의 다른 전통문화거리나 인사동과 달리 느껴진다. 아마도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이기 때문이거나 내가 이 거리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스타벅스 마저 청나라 시대 건물 양식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두보초당은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60위안의 입장료가 비싸보였지만 어떠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을. 당나라 시대의 시인이었던 두보가 안녹산의 난을 피해 4년 여간 머물렀다는 초당은 16세기와 19세기에 증축되어 공원처럼 가꾸어져 있었다. 20평 남짓한 초당에 머물렀던 두보의 삶에 비해 너무 커져버린 느낌이지만 사람이 붐비지 않아 아침 비에 어울린 녹음을 즐길 수 있었다.

흔히 두보를 시선(詩仙) 이태백에 견주어 시성(詩聖)이라고 한다. 귀족적이고 낭만적인 이태백에 비해 두보의 시는 평민의 입장에서 현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렸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황금기를 누리던 당나라의 말기의 혼란과 전쟁, 그로인해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자신의 삶이 같기에 그러한 시가 나왔을 것이다.

무릇 사물과 사람을 봄에 있어 내 심지를 굳히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대상과 동일시되는 일이다. 그 때에 이르러서야 대상의 아픔과 슬픔, 환희가 내 속으로 전달되고, 그제야 내 말과 행동이 내 것이 아닌 대상의 것이 된다. 초당 곳곳에, 탑 안의 전시장에는 두보의 각기 다른 다양한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만큼 시인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사람들에게 읽히고 해석되어 왔다. 두보가 두보로 남았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초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무후사의 입장권을 미리 사면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두 장을 달라고 하니 매표원이 중국인이냐며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중국어 잘 한다고 웃어준다. 난 단지 무후사 두 장이라고만 했을 뿐이다.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던 곳이 무후사였다. 원래 유비의 능이 있던 곳이지만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이곳에서 지낸다고 한다. 사당은 촉나라의 장수들의 동상을 배치하고, 그 중심에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사당 뒤편에는 도원결의를 했던 곳을 꾸며 놓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이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2대 황제 유선에게 바쳤다는 그 글이다. 비록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지는 못하였지만 명필 악비(송나라)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끝으로 갈수록 가늘고 날렸다는 글씨체만큼은 인상 깊었다.

흔히 어떤 선거에 나가면서 출사표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이제 어떻게 하겠노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제갈량은 홀로 남는 황제 유선에게 군주로서의 덕과 주의해야 할 점을 출사표에서 밝히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역할보다 다른 이의 과제가 엄중함을 인식하고, 그를 염려하는 것이 출사표의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33. 돌아오는 길

무후사 옆 금리 거리에서 간단한 기념품과 그림책을 사고 도교사원인 청양궁으로 이동하였다. 4~5개의 사당을 거슬러 오르면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아내는 공항으로 일찍 가자고 한다. 12시 비행기라 일찍 가봐야 티케팅도 못할 텐데 여권 분실 이후, 아내는 매사에 안전 우선이다.

잠시 티격태격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섯 시간을 공항에서 무료하게 대기하면서 또 다툼이 생겼다. 어젯밤에 서운한 거 풀라고 했는데. 찌푸린 기분 상태는 출국을 앞두고 여권 문제로 공항 안에서만 중국 공안에 두 번이나 불려 경위서를 작성하면서 몸 컨디션을 망가뜨리더니 급기야 한국 입국 시에도 법무부 출장소에서 경위서를 또 작성하면서 폭발되었다. 도착한 날은 휴가를 내어 쉬려고 하였으나 괜스레 집에 있으면 다툼만 할 것 같아 배낭만 놓고 출근해버렸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다들 여행은 즐거웠냐며 반가워한다. 비슷한 시기에 터키를 다녀온 옆 부서 모 차장이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 어쨌든 장기간 자리를 비웠는데 같이 인사나 할 겸 우리 부서 사람들까지 다 모아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을 오고가는 길에 모 차장의 여행담(그이는 목소리가 크고, 수다스러운 여성이다)을 들으면서 스트레스가 다시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동안 옆에서 더 숨죽인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을 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여행을 가는 것!

 

34. 다시 티베트를 위하여!

늦게 고백하건데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의 계기를 얻고 싶었다. 십 년간의 결혼 생활 속에 다투기도 많이 다투고, 말도 안하고 지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래도 서로를 연결해주었던 끈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노력과 지원이었다. 아내가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양보했던 이유도 내가 아직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아내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모든 껍질이 벗겨지고 날 것인 채로 다시 세상을 마주봐야 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워졌다. 나와 사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지난 20년을 함께 했던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만 수행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고부터 나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아마도 따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마음의 안식과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티베트는 이 결론에 가장 근접한 곳이라 믿었다. 척박한 환경, 공존하는 삶,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 이 단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매력에 나는 이끌렸다.

비록 마음의 본향(本鄕)에는 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좋다, 그리움으로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여전히 다투고, 화해하고 또 다투지만 좋다. 그게 삶이니까.

나는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 내가 평안해지길! 일과 삶과 혁명이 하나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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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콴샹즈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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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초당 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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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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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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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한 번째 이야기(5/14)

2011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한 번째 이야기(5/14)

 

<지난 여행기>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첫 번째 이야기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두 번째 이야기(5/5)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세 번째 이야기(5/6)]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네 번째 이야기(5/7)]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다섯 번째 이야기(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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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일곱 번째 이야기(5/10)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여덟 번째 이야기(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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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 번째 이야기(5/13)]

 

30. 우공이산, 두장옌(都江堰)

청두의 날씨는 우중충했다. 쓰촨 분지의 한가운데에 있는 청두에서 맑은 날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어제도 갑자기 내리는 비에 거리를 뛰어다녔기에 점퍼를 챙겨 입고 두장옌과 칭청산 투어에 나섰다. 사실, 어제 유스호텔에서 예약한 투어프로그램이 다른 곳보다 비싸서 숙소로 돌아와서 취소하려고 했다. 다리를 다쳐서 투어에 참여할 수 없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취소하려 했지만 스텝이 알아본 결과는 50% 환불이었다. 8만원을 날릴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참여하기로 하였다.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둘러보는 콴샹즈 거리는 인적이 없어서 더 고요한 고풍을 보여주었다. 새로 조성된 거리이지만 콘크리트로 획일화된 동아시아 건축물 사이에서 그 나라의 분위기를 즐기기에 충분하였다. 30여 명이 탈 수 있는 버스는 예약된 손님을 모시러 청두 시내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하였다. 이미 시안에서 경험한 바라 참을 만 했지만 옆 자리에 앉은 6명의 남자들은 뚱뚱한 몸을 자랑하듯이 혼자 두 자리를 차지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거나, 코를 골며 신나게 우리의 신경을 거슬렸다. 늦게 탄 모녀는 그들 때문에 떨어져 앉아야 했고, 나는 눈을 부치지 못하고 청두 시외를 모두 봐야만 했다.

버스는 규광탑(한글로는 무광탑이라 적혀 있었다)이 있는 공원에 들러 탑과 지역 출신의 서예가의 작품을 관람시켰다. 가이드는 우리가 자기를 잘 따라오기를 주문하였고, 우리도 그녀가 걱정하지 않도록 보이는 반경에서만 머물러 있었다.

두장옌으로 가는 길은 청두가 왜 관개도시인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시내를 씨날처럼 엮은 수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관개수로는 도시에 물을 공급하고, 홍수가 나면 물을 분산하는 역할을 하였다. 어릴 적, 내가 목욕을 했다는 개천도 그랬을 것이다.

두장옌 입구는 토요일이라 각양각색의 깃발을 따라온 중국인들의 엄청난 인파로 뒤덮였다. 두장옌은  기원전 256(진나라)에 고대 건축기술로 만들어진 수리 관개 시스템이다.  민 강 상류에 있는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이 지역의 5,300의 토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두장옌은 리빙 부자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사당을 짓고 아직도 이빙을 추모하고 있다.

매년 홍수를 내던 민강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 리빙과 백성들은 죽분인처럼 대나무를 엮어 그 안에 돌을 채워 강에 던졌고, 화약도 없던 시절, 바위를 깨기 위해 불로 데우고 물로 급냉하기를 반복하여 바위를 깨뜨렸다. 그렇게 8년의 작업은 쓰촨 평야에 관개수로를 만들어 풍요의 땅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그야말로 북산을 옮기고자 했던 우공의 뚝심만큼 우직한 리빙과 청두의 인민들이 세상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인공적으로 제어되는 방식이 아니라, 물줄기의 흐름을 관찰하여 강 한가운데에 만든 곶 하나가 물의 흐름을 바꾼 것이기에 또 다른 한국의 이씨처럼 수많은 돈을 강의 유지비로 쓸 일도 없다.

두장옌은 그렇게 인간의 역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걸으니 야외극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댐 모양의 수변무대는 웅장하였다. 곧이어 시작된 공연은 야외 가극(뮤지컬)이었다. 자막으로 대충 해석하며 본 공연은 고대부터 고통받던 인민들이 이빙과 두장옌을 통해 풍요로운 삶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풀어 간 것이다. 수백명이 출연하는 중국의 공연은 다른 지역처럼 전문 배우뿐만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소수민족들이 짬짬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분수쇼를 능가하는 볼거리와 자임새있는 극의 구성은 감동적이었다. 이제야 투어비가 아깝지 않았다. 혼자 왔으면 이 공연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31. 도교의 성지, 칭청산(青城山)

투어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칭청산 입구에 이르렀다. 이곳은 중국에서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지정된 도교의 성지이다.

도교는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신앙으로 사상적으로 도가를 이루었고,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주축으로 하지만 노자의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다시피 노자를 옥황상제 수준으로 대접하고 있다. 주술적인 성격이 다소 강한 도교는 유교의 성리학의 배타주의, 편향주의와 달리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로움으로 민중들의 호응을 얻었고, 때로는 농민폭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도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부자들이 산다는 삼청동이 유교 조선에서도 인정한 도교 사당(삼청전)이 있는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칭청산은 항상 푸른 산이라 불릴만큼 빼곡한 산림과 푸르름이 있는 곳이었다. 왕복시간이 쫓겨서 정상에 있는 상청궁까지 가려면 케이블카를 타야 하지만, 우리는 그냥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기로 하였다.

경사진 계단을 계속 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보여주는 호젓함과 푸른 하늘은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도교 사원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도 많은 이들이 자기 수입에 비해 적지 않은 비용의 향을 피우고, 정성스레 복을 기원하였다. 종교가 합리적인 인간의 사고를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고단한 삶에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들 모두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란다.

사원 옆에는 기념품과 음료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우리의 짚신과 흡사한 짚신이 있었는데 신발 미니어쳐를 수집하는 처형에게 선물하고자 아주 작은 짚신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태극문양이 선명히 찍혀 있고, 원색의 술이 달려 있는 도교의 삼각 깃발을 뒤로 하고 칭청산을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는 새로 조성된 민속거리로 우리는 데려갔다. 이곳은 지난 쓰촨지진 당시 무너진 마을을 새로 관광거리로 조성한 곳이었다. 사진을 찍을만한 아기자기한 곳을 만들어 놓고, 각종 기념품과 향토 음식점을 개설하였다. 민속거리 소속의 젊은 가이드들은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무리를 몰고 다녔다. 이 거리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지만, 자활과 자립을 위한 노력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숙소에 돌아온 후, 저녁식사를 할 겸 시내로 나섰다. 25위안자리 분식집 정식을 먹고, 천천히 인민광장을 걸었다. 인민광장 주변의 화려한 호텔과 높은 빌딩, 그리고 이를 지켜보듯이 화려한 조명으로 서있는 마오저뚱의 거대한 동상을 지나면서 자연은 영원한데 혁명과 인간의 꿈은 일장춘몽인가 싶은 마음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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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었던 용당 유스호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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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장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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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메웠던 대나무와 돌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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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강, 가운데 보이는 것이 강물을 갈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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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장옌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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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창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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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창산 도교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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