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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 - ‘인생9단’(양순자 저)을 읽고

‘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 - ‘인생9단’(양순자 저)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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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표지 사진 속의 저자는 책을 피고, 안경테를 손으로 붙잡으며 무언가 한 마디를 할 준비를 하시는 듯 했다. 첫 인상이 그리 만만한 어른은 아니다. 하기는 스스로 인생9단이라고 까지 붙이셨는데, 그 무섭다는 사형수 상담을 30년간 하셨다는데 만만하시지는 않겠지. 저자인 양순자 님은 “할머니가 손수 담은 식혜 한 사발 놓고” 듣는 “때론 슬프고 때론 웃기는 옛날이야기”같은 인생의 공식을 전해준다. 간결하면서도 익숙한 그 말투 그대로.

 

저자는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어. ‘할머니, 인생 살만한 겁니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지.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으면 젊은 사람이 맥 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묻겠어. 혹시라도 누가 자신 있게 ‘살만하다.’고 말하면 그놈이 누구든 간에 혼쭐을 내주고 싶어. 누가 감히 세상을 살 만하다고 할 수 있겠어. 그럴 때 나는 그저 그 사람의 등을 토닥토닥 쳐주면서 ‘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라고 말해주는 거야.”

치료와 위안이 아니라 공감이 우선이었다.

저자는 인생과 사람, 가족 사이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감’이었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면 저자는 스스로의 마음에 부족함이 없이 도왔다. 스스로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 도움으로 누군가가 굉장히 바뀌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상태에 그냥 공감하는 것이었다.

“불편한 세월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잘 달래면 그게 바로 편한 세월이 되는 거야”라는 대목에 이르면 이 공감은 감정(희로애락)과 관계(나와 너, 우리)를 넘어서 내 삶 자체에 대한 공감으로 진전된다. 자칫 ‘인생사 마음먹기 나름’류의철지난 유행가 가사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으로 이루어진 공감의 울림은 더 크게 다가왔다.

  

2.

저자는 말한다.

“어정쩡하게 용서도 하지 말고, 어정쩡하게 하려면 복수할 생각도 하지 마.”

이것은 자기 삶과 삶의 아픔에 대한 진한 공감이 있기에 가능한 말이다. 어찌 아픈 것을 아프지 않다고 해야 하고, 어찌 화나는 것을 화나지 않는 것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그 아픔과 화가 나에게 어떻게 되돌려 질지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월의 한 때, 나는 좌절에 빠져 있었다.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신있어하던 일을 망치고, 내 주변의 익숙한 많은 것들을 떠나보냈던 그 한 때, 계속 살아가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하루하루 일하고, 공부하고, 사람들과 술 마시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나를 둘러싸는 이 진공 같은 상태를 견뎌내지 못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죽는구나.’하는 생각에 겁을 먹기도 하였다. 그것도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나보다.

그 상태를 벗어난 것에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씩, 내가 뻔뻔해지면서 나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삶도 나쁘지는 않았어. 어디서 그런 사랑을 네가 받아보았을까?’, ‘그동안 너도 죽기 전에 네 일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잖아?’, ‘대단한 역할이 아니면 어때? 네 주변 사람들이라도 지치지 않게 격려하고 소주 한 잔 사주면 되잖아.’라며 내가 잘한 일과 잘못한 일, 그리고 내 삶에 대해 조금은 공감하게 되었다. 이제는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까지는 아니어도, 나에게 주어진 30년이 채 안 되는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살아보고 싶어졌다.

  

3.

저자는 말한다.

“그 눈빛이 평생에 오늘 한 번 행복하다고 말하는 거 같은 거야.”

청소년 이동쉼터에서 3년 동안 자원활동을 했었다. 거리상담을 일주일에 하루하는 것이니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1년이 지나고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잘 다가서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서 잠시 힘들어지기도 하였다. 마침 내가 사례관리를 하던 아이가 연락을 끊고 나타나지 않은지 6개월이 넘어서 그 아이의 친구들이 이동쉼터에 나타났다. 거리와 집의 경계가 불분명한 순환형 가출 청소년들이다.

그 사이 소년원에 갔다는 말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말도 있고 해서 많이 놀래 있었는데, 우선 밥을 챙겨 먹이면서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1년간 나와는 눈인사만 하던 아이가 말을 한다.

“선생님은 이게 직업이에요?”

“직업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 지금은 자원활동으로 나오는 거야.”

“그럼 왜 자원활동을 해요?”

“너 만나고 싶어서 나오지.”

“나도 다음에는 직업도 갖고, 선생님들처럼 이런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순간, 가슴에는 벅찬 감정과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잘 나가는 소위 일진이고, 그동안 진지한 이야기는 다 싫어하던 그 아이의 그 진지한 눈빛은 오늘, 내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마음을 들게 해주었다.

  

4.

저자는 말한다.

“모든 사람이 다 사형수라는 거야. 사형수란 게 집행 날짜가 정해진 게 아니거든. 언제 죽을지 몰라. 우리도 그렇잖아. 오늘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지. … 그런데 다 남의 일이야. 무사태평이야. 영원히 살 것처럼. 사형수들은 안 그래. 그들은 매순간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죽음을 의식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이게 감옥 안의 사형수와 감옥 밖의 사형수가 다른 점이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슬픈 일이다. 다시 하고 싶은 일도 많아졌고, 아쉬워할 사람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은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오늘 마저 끝내지 못한 일을 남겨둔 것처럼 삶에서 내가 할 도리를 미처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언제인가 그리 멀지 않은 해에 아내와 노년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나름 아끼고 저축하는 일이 온전히 우리 삶을 위한 것만은 아니지만, 노년의 삶에 대한 걱정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쉰 살이 넘기 전에 직장이 아닌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갖기 원하는 우리들은 노년에 대한 계획을 간혹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그랬다. 무엇을 하던 간에 60세 혹은 많이 너그러이 65세가 넘으면 현직으로 일한다는 것이 힘들지 않겠냐고. 아내는 욕심도 많다고 핀잔하였다.

‘일을 그만두면 무슨 낙으로 살지?’하고 물으니 솔직히 갑갑하였다. 금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도전과 탄력을 받지 못하게 되면 무슨 낙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뒷방 늙은이’처럼 후배들 일에 참견하고 싶지도 않고, 살기 위해 사는 모습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결심한 일 중 하나가 살을 빼는 것이다. 좀 더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하게 죽을 수 있게 나부터 준비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결심(?)한 일이 70세까지만 살기로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불행한 일이 닥칠 수는 있겠지만 건강하게 지낸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야할 나이를 미리 예정하고 준비하는 일이 내 마지막을 잘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어쩌다 간혹 이 말을 친구들에게 하게 되면 ‘미친 놈’ 소리를 듣곤 하지만, 한 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죽기 전 3년은 온전히 정리하는 삶을 살고 싶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정리하고 서운한 일과 서운했던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 하루를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성실히 살지도 못해도 최대한 나에게 남은 시간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삶에 낭비할 인생은 없을 테니까!

  

5.

저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애써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마. 그 순간순간 네 인생에서 감동을 느끼고, 그만큼만 더 행하고, 그만큼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

나는 내가 냉철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한다고 믿었다. 아니 그래야 된다고 믿으며 살았다. 또 한동안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지만 기왕지사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낫겠지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내 마음이 감동받는 일을 하고 싶다. 간혹 주위의 진심어린 제안이 미안해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역할을 채워줄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나만 감동받고, 나만 행복한 게 아니라 ‘그래, 세상 살기 참 힘들지?’하며 같이 손잡아 줄 동료로 남는 것으로 내 미안한 마음을 대신할 수 있어도 좋겠다.

 

책 표지의 깐깐한 어르신이 ‘쓰윽’하며 웃어주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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