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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마지막 이야기(5/15)

 

2011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두 번째 이야기(5/15)

 

32. 두보와 제갈량

이제 하루 뒤면 우리는 한국에 있을 것이다. 때문에 어제는 숙소에서 아내와 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여행 중 서운하게 한 일은 잊어달라고 했다. 배낭을 다 꾸리고 숙소에 보관 요청을 하고 나오니 청두의 아침은 흩뿌리는 이슬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콴샹즈(寬巷子)거리는 묘한 매력이 있는 거리이다. 관광 거리로 조성된 길이지만 중국의 다른 전통문화거리나 인사동과 달리 느껴진다. 아마도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이기 때문이거나 내가 이 거리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스타벅스 마저 청나라 시대 건물 양식을 유지하는 모습에서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두보초당은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60위안의 입장료가 비싸보였지만 어떠냐?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을. 당나라 시대의 시인이었던 두보가 안녹산의 난을 피해 4년 여간 머물렀다는 초당은 16세기와 19세기에 증축되어 공원처럼 가꾸어져 있었다. 20평 남짓한 초당에 머물렀던 두보의 삶에 비해 너무 커져버린 느낌이지만 사람이 붐비지 않아 아침 비에 어울린 녹음을 즐길 수 있었다.

흔히 두보를 시선(詩仙) 이태백에 견주어 시성(詩聖)이라고 한다. 귀족적이고 낭만적인 이태백에 비해 두보의 시는 평민의 입장에서 현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그렸기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황금기를 누리던 당나라의 말기의 혼란과 전쟁, 그로인해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자신의 삶이 같기에 그러한 시가 나왔을 것이다.

무릇 사물과 사람을 봄에 있어 내 심지를 굳히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이 대상과 동일시되는 일이다. 그 때에 이르러서야 대상의 아픔과 슬픔, 환희가 내 속으로 전달되고, 그제야 내 말과 행동이 내 것이 아닌 대상의 것이 된다. 초당 곳곳에, 탑 안의 전시장에는 두보의 각기 다른 다양한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만큼 시인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사람들에게 읽히고 해석되어 왔다. 두보가 두보로 남았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초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무후사의 입장권을 미리 사면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두 장을 달라고 하니 매표원이 중국인이냐며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중국어 잘 한다고 웃어준다. 난 단지 무후사 두 장이라고만 했을 뿐이다.

제갈량을 모시기 위해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던 곳이 무후사였다. 원래 유비의 능이 있던 곳이지만 유비와 제갈량의 제사를 이곳에서 지낸다고 한다. 사당은 촉나라의 장수들의 동상을 배치하고, 그 중심에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의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사당 뒤편에는 도원결의를 했던 곳을 꾸며 놓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이다.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2대 황제 유선에게 바쳤다는 그 글이다. 비록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지는 못하였지만 명필 악비(송나라)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끝으로 갈수록 가늘고 날렸다는 글씨체만큼은 인상 깊었다.

흔히 어떤 선거에 나가면서 출사표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인식과 이제 어떻게 하겠노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된다. 제갈량은 홀로 남는 황제 유선에게 군주로서의 덕과 주의해야 할 점을 출사표에서 밝히고 있다. 어쩌면 자신의 역할보다 다른 이의 과제가 엄중함을 인식하고, 그를 염려하는 것이 출사표의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33. 돌아오는 길

무후사 옆 금리 거리에서 간단한 기념품과 그림책을 사고 도교사원인 청양궁으로 이동하였다. 4~5개의 사당을 거슬러 오르면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아내는 공항으로 일찍 가자고 한다. 12시 비행기라 일찍 가봐야 티케팅도 못할 텐데 여권 분실 이후, 아내는 매사에 안전 우선이다.

잠시 티격태격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섯 시간을 공항에서 무료하게 대기하면서 또 다툼이 생겼다. 어젯밤에 서운한 거 풀라고 했는데. 찌푸린 기분 상태는 출국을 앞두고 여권 문제로 공항 안에서만 중국 공안에 두 번이나 불려 경위서를 작성하면서 몸 컨디션을 망가뜨리더니 급기야 한국 입국 시에도 법무부 출장소에서 경위서를 또 작성하면서 폭발되었다. 도착한 날은 휴가를 내어 쉬려고 하였으나 괜스레 집에 있으면 다툼만 할 것 같아 배낭만 놓고 출근해버렸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다들 여행은 즐거웠냐며 반가워한다. 비슷한 시기에 터키를 다녀온 옆 부서 모 차장이 같이 밥 먹으러 가자고 한다. 어쨌든 장기간 자리를 비웠는데 같이 인사나 할 겸 우리 부서 사람들까지 다 모아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을 오고가는 길에 모 차장의 여행담(그이는 목소리가 크고, 수다스러운 여성이다)을 들으면서 스트레스가 다시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동안 옆에서 더 숨죽인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을 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여행을 가는 것!

 

34. 다시 티베트를 위하여!

늦게 고백하건데 이번 여행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삶의 계기를 얻고 싶었다. 십 년간의 결혼 생활 속에 다투기도 많이 다투고, 말도 안하고 지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래도 서로를 연결해주었던 끈은 새로운 세상을 위한 노력과 지원이었다. 아내가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양보했던 이유도 내가 아직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아내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모든 껍질이 벗겨지고 날 것인 채로 다시 세상을 마주봐야 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워졌다. 나와 사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다. 지난 20년을 함께 했던 생각은 바뀌지 않았지만 수행할 자신이 없어졌다. 그러고부터 나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아마도 따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마음의 안식과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티베트는 이 결론에 가장 근접한 곳이라 믿었다. 척박한 환경, 공존하는 삶,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 이 단어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매력에 나는 이끌렸다.

비록 마음의 본향(本鄕)에는 가지는 못했지만 나는 좋다, 그리움으로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여전히 다투고, 화해하고 또 다투지만 좋다. 그게 삶이니까.

나는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 내가 평안해지길! 일과 삶과 혁명이 하나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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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콴샹즈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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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초당 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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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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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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