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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한 번째 이야기(5/14)

2011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한 번째 이야기(5/14)

 

<지난 여행기>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첫 번째 이야기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두 번째 이야기(5/5)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세 번째 이야기(5/6)]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네 번째 이야기(5/7)]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다섯 번째 이야기(5/8)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여섯 번째 이야기(5/9)]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일곱 번째 이야기(5/10)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여덟 번째 이야기(5/11)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아홉 번째 이야기(5/12)]

바람빛님의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열 번째 이야기(5/13)]

 

30. 우공이산, 두장옌(都江堰)

청두의 날씨는 우중충했다. 쓰촨 분지의 한가운데에 있는 청두에서 맑은 날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어제도 갑자기 내리는 비에 거리를 뛰어다녔기에 점퍼를 챙겨 입고 두장옌과 칭청산 투어에 나섰다. 사실, 어제 유스호텔에서 예약한 투어프로그램이 다른 곳보다 비싸서 숙소로 돌아와서 취소하려고 했다. 다리를 다쳐서 투어에 참여할 수 없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취소하려 했지만 스텝이 알아본 결과는 50% 환불이었다. 8만원을 날릴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참여하기로 하였다.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둘러보는 콴샹즈 거리는 인적이 없어서 더 고요한 고풍을 보여주었다. 새로 조성된 거리이지만 콘크리트로 획일화된 동아시아 건축물 사이에서 그 나라의 분위기를 즐기기에 충분하였다. 30여 명이 탈 수 있는 버스는 예약된 손님을 모시러 청두 시내를 한 바퀴 돌다시피 하였다. 이미 시안에서 경험한 바라 참을 만 했지만 옆 자리에 앉은 6명의 남자들은 뚱뚱한 몸을 자랑하듯이 혼자 두 자리를 차지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거나, 코를 골며 신나게 우리의 신경을 거슬렸다. 늦게 탄 모녀는 그들 때문에 떨어져 앉아야 했고, 나는 눈을 부치지 못하고 청두 시외를 모두 봐야만 했다.

버스는 규광탑(한글로는 무광탑이라 적혀 있었다)이 있는 공원에 들러 탑과 지역 출신의 서예가의 작품을 관람시켰다. 가이드는 우리가 자기를 잘 따라오기를 주문하였고, 우리도 그녀가 걱정하지 않도록 보이는 반경에서만 머물러 있었다.

두장옌으로 가는 길은 청두가 왜 관개도시인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시내를 씨날처럼 엮은 수로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관개수로는 도시에 물을 공급하고, 홍수가 나면 물을 분산하는 역할을 하였다. 어릴 적, 내가 목욕을 했다는 개천도 그랬을 것이다.

두장옌 입구는 토요일이라 각양각색의 깃발을 따라온 중국인들의 엄청난 인파로 뒤덮였다. 두장옌은  기원전 256(진나라)에 고대 건축기술로 만들어진 수리 관개 시스템이다.  민 강 상류에 있는 이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으며, 이 지역의 5,300의 토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는 두장옌은 리빙 부자에 의해 설계, 건축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사당을 짓고 아직도 이빙을 추모하고 있다.

매년 홍수를 내던 민강의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 리빙과 백성들은 죽분인처럼 대나무를 엮어 그 안에 돌을 채워 강에 던졌고, 화약도 없던 시절, 바위를 깨기 위해 불로 데우고 물로 급냉하기를 반복하여 바위를 깨뜨렸다. 그렇게 8년의 작업은 쓰촨 평야에 관개수로를 만들어 풍요의 땅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자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자주하곤 한다. 그야말로 북산을 옮기고자 했던 우공의 뚝심만큼 우직한 리빙과 청두의 인민들이 세상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인공적으로 제어되는 방식이 아니라, 물줄기의 흐름을 관찰하여 강 한가운데에 만든 곶 하나가 물의 흐름을 바꾼 것이기에 또 다른 한국의 이씨처럼 수많은 돈을 강의 유지비로 쓸 일도 없다.

두장옌은 그렇게 인간의 역사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두려움을 보여주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걸으니 야외극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댐 모양의 수변무대는 웅장하였다. 곧이어 시작된 공연은 야외 가극(뮤지컬)이었다. 자막으로 대충 해석하며 본 공연은 고대부터 고통받던 인민들이 이빙과 두장옌을 통해 풍요로운 삶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풀어 간 것이다. 수백명이 출연하는 중국의 공연은 다른 지역처럼 전문 배우뿐만이 아니라 지역주민과 소수민족들이 짬짬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분수쇼를 능가하는 볼거리와 자임새있는 극의 구성은 감동적이었다. 이제야 투어비가 아깝지 않았다. 혼자 왔으면 이 공연을 보지 못했을 테니까.

 

31. 도교의 성지, 칭청산(青城山)

투어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 칭청산 입구에 이르렀다. 이곳은 중국에서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지정된 도교의 성지이다.

도교는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신앙으로 사상적으로 도가를 이루었고,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주축으로 하지만 노자의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다시피 노자를 옥황상제 수준으로 대접하고 있다. 주술적인 성격이 다소 강한 도교는 유교의 성리학의 배타주의, 편향주의와 달리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조화로움으로 민중들의 호응을 얻었고, 때로는 농민폭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도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부자들이 산다는 삼청동이 유교 조선에서도 인정한 도교 사당(삼청전)이 있는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칭청산은 항상 푸른 산이라 불릴만큼 빼곡한 산림과 푸르름이 있는 곳이었다. 왕복시간이 쫓겨서 정상에 있는 상청궁까지 가려면 케이블카를 타야 하지만, 우리는 그냥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기로 하였다.

경사진 계단을 계속 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에 보여주는 호젓함과 푸른 하늘은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도교 사원을 둘러보았다. 여기서도 많은 이들이 자기 수입에 비해 적지 않은 비용의 향을 피우고, 정성스레 복을 기원하였다. 종교가 합리적인 인간의 사고를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고단한 삶에 지탱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들 모두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란다.

사원 옆에는 기념품과 음료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우리의 짚신과 흡사한 짚신이 있었는데 신발 미니어쳐를 수집하는 처형에게 선물하고자 아주 작은 짚신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태극문양이 선명히 찍혀 있고, 원색의 술이 달려 있는 도교의 삼각 깃발을 뒤로 하고 칭청산을 내려왔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는 새로 조성된 민속거리로 우리는 데려갔다. 이곳은 지난 쓰촨지진 당시 무너진 마을을 새로 관광거리로 조성한 곳이었다. 사진을 찍을만한 아기자기한 곳을 만들어 놓고, 각종 기념품과 향토 음식점을 개설하였다. 민속거리 소속의 젊은 가이드들은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무리를 몰고 다녔다. 이 거리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지만, 자활과 자립을 위한 노력은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숙소에 돌아온 후, 저녁식사를 할 겸 시내로 나섰다. 25위안자리 분식집 정식을 먹고, 천천히 인민광장을 걸었다. 인민광장 주변의 화려한 호텔과 높은 빌딩, 그리고 이를 지켜보듯이 화려한 조명으로 서있는 마오저뚱의 거대한 동상을 지나면서 자연은 영원한데 혁명과 인간의 꿈은 일장춘몽인가 싶은 마음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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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묵었던 용당 유스호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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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장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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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메웠던 대나무와 돌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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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강, 가운데 보이는 것이 강물을 갈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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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장옌 공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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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창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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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창산 도교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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