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두 번째 이야기(5/5)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두 번째 이야기(5/5)

 

5. 시안으로

10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전자티켓으로 발권해서 천천히 가도 문제없다고 주장하던 나와 달리 아내는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며 새벽같이 서두른다. 내 여행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잡은 전 날의 부서체련대회에서 먹은 술은 아직도 입안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탄 공항철도는 빠르게 인천공항역에 도착하였고, ‘거봐라. 시간이 남잖아’하던 내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전자발권 전용부스로 가보니, 내 티켓은 해당사항이 없단다. 제길! 9시40분이 다되어야 출국수속을 마친 우리는 담배 면세쇼핑을 하러갔더니, 내가 피는 담배가 면세점에는 없었다. 제길X2!

3시간의 비행이 지나 시안 상공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3~40호로 구획된 농촌 마을과 새로이 길게 낸듯한 도로였다. 몇 곳은 유적발굴을 하는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시안공항은 크지는 않아도 예전 옌지(연길)공항에서 느낀 당혹감은 없을 만큼 정비된 공항이었다. 1인당 26위안(약 4,300원)을 내고 공항버스로 시안시내로 들어섰다. 버스는 시안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명대성벽의 서쪽으로 들어서서 북문을 지나 기차역 부근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많은 인파속에서 여행을 하는 듯 배낭을 맨 중국인과 외국인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중국 시간으로 오후 2시 반-한국 시간으로 오후 3시 반-을 넘어 가다보니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흡사 롯데리아같은 프랜차이즈 식당(리선생)에서 라조기 덮밥, 동파육 백반같은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하였다. 집사람과 처음 먹는 중국 현지 음식이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식사였지만 54위안(약 8,900원)의 가격표는 중국물가를 너무 만만히 봤나싶어 여행비용 관리에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 당시 위안화 환율은 174원 정도 되었으나, 사설 환전소를 이용하여 165원에 바꿀 수 있었다. 환전소는 환매차도 적게 적용하여 여행후 남은 돈을 바꾸는 것에도 유리하다.)

 

6. 여권분실 사건

서울과 달리 시안의 기후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였다. 티베트의 서늘한 날씨를 감안하여 우리는 티는 반팔로 준비하는 대신 외투는 점퍼로 준비해서 입고 출국하였다. 시안에 도착하면서 점퍼를 벗어 들고 있었는데 카메라 가방을 매면서 점퍼를 아내에게 맡기게 되었다.

민박집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 주변을 헤매다 버스 정류장을 찾고,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여덟 정거장을 가서 내리라고 민박집 홈페이지에 안내가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버스 안내방송을 못 알아듣는 우리는 버스 노선도와 버스 정류장 표지를 끊임없이 쳐다보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착해 보이는 학생을 찾아 민박집 주소를 적은 종이를 보여주면서 원하는 목적지에 내릴 수 있었다. 버스비는 1위안(165원)으로 아주 착한 가격이었다. 사실, 택시를 타도 30위안이면 갈 거리였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작정한 터라 굳이 버스를 고집하였던 것이다.

민박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시내구경을 나가기 위한 작은 배낭을 꾸리고 있는데, 아내가 내 점퍼가 안 보인다고 한다. “괜찮어. 하나 사자.” 말하자마자 그 안에 넣어 놓은 여권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낭을 싹 뒤져봐도 여권은 나오지 않았고, 여권을 잘 간수하지 못한 내 잘못은 잊은 채, 아내에게 점퍼 간수도 못한다고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기 전, 아내의 배낭 어깨 줄에 매달린 것을 보고 소매치기를 우려해서 아내 뒤편에 내가 서있었기에 버스에서 급히 내리면서 흘린 것이 분명하였다. 민박집 안주인에게 부탁해서 버스회사에 전화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수 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었고, 아내는 제가 잘못한 냥 기죽어 앉아있었다. 여권이 없으면 비행기도 못타고, 비행기를 못타면 티베트도 못가는 판국이었다. ‘히말라야여행동호회’ 운영자 카일라스님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 설명을 했더니 일단 경찰서가서 분실신고를 하고 영사관에서 임시여행허가증을 발급받아 중국 출입국관리소에서 비자를 재발급 받아야 하는데 주말이 끼어서 제 때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신다. 중국 경찰서를 가려해도 말도 안 통하니 민박집 안주인께 동행을 부탁드렸다. 안주인은 경찰서 근무시간이 지나서 어차피 내일 가야할 것 같다며 바깥주인이 저녁에 들어오니 내일 아침에 상의하자고 하신다. 영사관에 문의하니 사진 세 장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배낭을 뒤져보니 여분의 사진이 두 장뿐이었다.

첫 날부터 여권 때문에 여행을 망쳤지만, 이 분위기를 더 끌고 가다가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아내에게 사진도 찍어야 하니 시내로 나가자고 하였다. 어차피 내일이 되어야 여행이 어찌될지 판가름 날 테니까.

 

7. 시안의 중심,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회족(回族)거리

시안이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성)이었다는 말은 전편에서 하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한나라와 수나라의 수도이기도 하였지만, 당나라에 이르러 국제도시로 장안시의 규모는 현재의 시안시에 버금갈 만큼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시안이라는 도시명은 명나라에 이르러 확립되었는데, 이때 지은 성벽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이 15m에 이르는 시안(명대)성벽은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고 그 중심에 종루가 놓여있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층, 내부 2층 정방형의 누각형태이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광제가(廣濟街)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사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고 한다.

종루에서 450미터 떨어진 곳에 고루가 있다. 종루보다 4년 먼저 건축된 명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북경의 자금성, 명 13릉 다음으로 당시 건축기술과 미학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한다. 종루가 종을 쳐 시간을 알리는 누각이라면 고루는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곳이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종을 치고, 밤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시안의 모든 교통은 종루를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지 종루로 나오는 버스가 많아 여기에서 갈아타면 민박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쨌든 시내로 나온 우리는 번화가 주변이니 사진관도 있을 것 같아 느긋이 관광을 즐기기 시작했다. 종루와 고루 통합티켓이 40위안(6,600원)이다. 중국 관광지 입장료는 너무 비싸다고 투덜대며 종루에 올라섰다. 아내에게 여기 서봐라, 저기 서봐라하며 사진을 찍지만 아내의 굳은 얼굴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종루에서 바라본 시안 시내에는 높지 않은 건물만 보였다. 고층빌딩은 성 바깥에 있었고, 성안은 빌딩 고도를 제한하는 듯 보였다. 누각의 안에는 각종 종을 전시하기도 하고, 시간대별로 공연도 하였지만 우리가 도착한 시간 이후에는 공연이 없었다.

종루를 나와 고루로 가는 길에 웨딩사진이 걸린 가게들이 몇 곳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여권용 사진을 찍으러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짧은 영어로 여권용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물으니 직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며 수군댄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이었다. 중국어 회화 책을 뒤지며 여권, 사진 등 단어를 가리키니 그제서야 여기서는 안된다고 한다. 아마 웨딩스튜디오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려준 약도를 보고 몇 건물을 허매다 사진관을 찾을 수 있었다. 30여 분만에 여권사진 10장과 CD 한 장을 건네준다. 가격은 50위안(약 8,300원)으로 착하다.

사진도 만들었고, 내친 김에 경찰서도 찾아보자고 지도를 펴니 고루 옆에 경찰서가 있다. 씩씩하게 걸어 가보니 경찰서가 없다. 회화책을 뒤져 경찰서란 말을 찾아 보여주고 말로 ‘자이나르(어디)? 자이나르?’하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쳐준다. 얼마만큼 걸어야 될 지도 모르지만 택시를 탈 수도 없어 걸을 수밖에 없었다. 20분 정도를 걸으니 경찰서가 보인다. 정문에 경계 근무를 하는 경찰들에게 서툰 중국어로 말을 하니 돌아오는 말은 “팅부동”뿐이다. ‘알아들을 수 없다’ 혹은 ‘듣고도 모른다’라는 뜻의 이 말은 중국 사람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이자, 묻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말이다.

결국 경찰서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종루 방향으로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좀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은 야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에는 흰 모자나 수건을 두른 것이 회족 거리인 듯해서 시장으로 들어섰다. 중국내 최대 소수민족이라는 회족은 약 천만명 정도로 중국 서북부에 분포되어 살고 있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래서 회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팔지 않으며 식당 간판에는 청진(淸眞)이라는 표시를 한다. 군것질도 하며 시장을 배회하다 청진사(淸眞寺)라 써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슬람사원이지만 건축양식은 불교 사원이었다. 모스크로 표현되는 이슬람 건축양식이 확립되기 전에 이슬람이 중국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란다.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회족 남성들이 사원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안에서는 코란을 외는 소리가 울렸다. 예배중이라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오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다시 고루로 돌아와서 도시의 야경을 보았다. 고루 역시도 누각 안에는 각종 북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장구를 치는 아내는 많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찍어보라고 시킨다. 표정이 누그러져서 다행이다.

돌아오는 길에 중국 마트에 들러 맥주를 사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과 6시간 전에는 다시는 비자 발급받는 나라는 안가겠다며 씩씩대었지만, 내일 출입국관리소에서 일이 잘 풀려보기를 기대할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안 기차역 주변 풍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러우와 구러우 전경, 청진사 표식>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