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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네 번째 이야기(5/7)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네 번째 이야기(5/7)

 

10. 화청지(華清池)

아침 8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어제와는 달리 출근을 위해 기다리는 주민들과 정류장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토요일인데도 학교와 직장으로 가기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6년 전, 연길과 베이징에서는 큰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 부대를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오늘 시안에서는 자동차도로와 분리된 자전거도로로 달리는 많지 않은 자전거를 볼 뿐이다. 그나마도 전기로 움직이는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거의 대부분이다.

기차역 주변에 내려 화청지와 병마용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광장을 가로질렀다. 주말이라 관광을 나선 중국인들도 엄청나다. 담배가 떨어져 광장 매점에서 어제 핀 담배를 보여주니 어제 산 가격의 절반인 5위안을 달라고 한다. 담배를 한 대 피는데 도대체 입이 써서 필 수가 없다. 가짜 담배였다. 끊임없이 ‘삥마용’(bīngmǎyǒng 병마용)을 외치는 버스 호객꾼들을 뿌리치고 306번 버스를 탔다. 306번 버스는 시안시에서 운행하는 공영버스라 사설 관광버스보다 저렴하고 안전하다.

화청지에 먼저 도착한 버스는 수많은 관광객을 토해낸다. 중국의 관광지 요금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예전에는 외국인과 내국인간의 요금을 차등해서 받았다고 하였는데 ‘글로벌스탠다드’ 어쩌고 하는 지적에 요금은 단일화되었지만, 비싼 요금에 중국 내부의 불만은 어찌하나 싶다. 어떤 이는 중국 내의 높아지는 관광 열기에 수요 조절을 위해 관광지 요금을 고가로 유지한다고 하는데 겉으로나마 사회주의 국가가 이래도 되나하는 생각이 든다. 화청지의 입장료는 70위안(약 12,000원)이다.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찌기 서주(西周)시기, 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려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화청지 동쪽구역에는 정말약(郭沫若)이 쓴 "화청지" 금자편액이 걸려있으며, 구역 내에는 하화각, 비하각, 오간정(1936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머물던 곳) 등의 건축물이 있다. <DAUM 관광정보>

 

화청지는 지배자와 그 애인의 별장이고, 목욕탕일 뿐이다. 그럼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중국식 오페라 ‘장한가’때문이었다. 백거이의 시를 소재로 장예모 감독이 총 제작을 맡은 이 ‘대형 실경 역사 무용극’은 려산과 호수를 무대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과 역사를 멋지게 재현한다고 하였다. 공연을 보고는 싶었지만 다만, 야간에 하는 공연 특성상 대중교통이 다 끊긴다는 점과 5만원 정도의 관람료가 부담스러워 관람을 포기하였다. 혹시 시안에 가실 분들은 꼭 보시기를 바란다.

 

11. 병마용과 진시황릉

병마용은 진시황제가 자신의 사후세계를 지키기 위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70년대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처음 병마용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학교 교실이 모자라 도서실을 교실로 사용하였는데 많지 않은 장서였지만 내 생애에서는 처음으로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생활했던 첫 기억이었다. 세계지리총서에 나왔던 병마용의 모습은 그 후, 진시황제라는 이름과 같이 머리에 남아있었다.

시안을 여행하기로 결정했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병마용이었다. 이 곳을 좀 더 여유있게 보기위해 화청지는 건성으로 돌았다. 병마용 버스정류장에 내려 가방을 무료로 맡아주는 곳에 가방을 맡기고, 입장권을 샀다. 사전정보는 90위안인데 110위안(약 19,000원)이라고 적혀있다. 매표소에서 입장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기념품을 파는 상가도 병마용의 분위기에 맞추어 새로 지어 예쁘다. 기존의 낡은 상가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표소와 입장소를 분리하였나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우리는 어제 산 빵과 음료로 점심을 때우고 병마용에 들어갔다.

병마용은 총 3개의 갱과 전시실,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전시실에서 대략적인 개요를 훑고, 갱을 관람하고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보는 것이 추천할만한 코스이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진나라의 역사와 발굴과정이 360도 파노라마로 상영된다. 1호 갱으로 들어가면 앞 쪽으로는 전체의 형상을 볼 수 있고, 뒤쪽으로는 발굴과정을 볼 수 있다. 흙으로 지은 장군, 병사와 말들의 형상은 그 모습이 다 다르고, 머릿결 하나하나의 표현에도 세심한 주의가 기울어져 있었다. 갱에서 가까이 보지 못한 아쉬움은 박물관에서 달랠 수 있다. 근엄하고도 멋을 부린 각각의 토병은 살아있는 듯 나에게 눈을 맞춘다.

병마용을 나오면 무료 셔틀버스가 진시황릉으로 실어준다. 병마용 입장료에 능 입장료가 포함되었던 것이다. 진시황릉은 내부에 도굴을 우려한 여러 함정이 있다며 아직도 발굴을 진행하지 않아 외형만 볼 수 있다. 능 앞에서는 시간별로 공연이 펼쳐지고 있어서 간단히 관람하고 시안으로 돌아왔다.

 

12. 혁명공원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온 우리는 시내를 걷기로 하였다. 큰 도로를 뒤로 하고, 작은 도로를 따라 걷다가 지도를 보니 혁명공원이 보인다. 시안 시내이지만 큰 빌딩 뒤로는 중국인들의 거주지와 작은 가게들이 이어지고, 그 한쪽에 널따란 공원이 펼쳐진다. 아마추어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주민들과 데이트를 나온 연인들의 모습이 정겹다.

공원을 나와 가이드북에 추천된 저렴한 맛집이 가까운 듯해서 찾아보았지만 이전되고 없었다. 다시 회족거리로 와서 저녁을 먹고, 시장 구경을 하였다. 돼지고기를 대신해서 양고기나 야채로만 만든 각종 길거리 요리는 보는 것으로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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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청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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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1호 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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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용 1호 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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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용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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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마용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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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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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공원, 회족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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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세 번째 이야기(5/6)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세 번째 이야기(5/6)

 

8. 중국 경찰서 습격(?) 사건

어제의 소란을 뒤로하고 잠을 잘 잤다. 민박집에서 아침식사를 준비해주셨는데 국과 반찬이 다 한식으로 입맛에 딱 맞았다. 민박비는 일인당 70위안(11,900원)인데 아내는 숙박개념으로 두 명이 70위안인줄 알고 너무 싸다며 깜짝 놀란다.

어제 못 뵌 민박집의 바깥주인과 인사를 하고, 지역 경찰서로 이동을 하였다. 주인장은 경찰서가서 확인서 받아 출입국관리소에 내면 된다하며 우리를 안심시켜주면서도 티베트 여행일정은 맞추기 힘들 것 같다고 천당과 지옥을 번갈아 안내한다.

주인장이 경찰서에 들어가 물어보니, 분실한 버스의 관할 파출소(공안분소)로 가야된다고 하여 다시 우리는 버스 종점에 있는 공안분소로 찾아가서 중국 경찰과 맞담배피면서 한참을 기다려 확인서를 받았다. 그것을 들고 이제는 다 끝난 양 시안시의 서남부 신개발지역에 있는 출입국관리소에 들어가니 영어로 뭐라뭐라 말한다. 영어를 듣는 귀가 짧은 나는 한참을 되물어 뜻을 새겨야만 하였고, 결론은 같은 건물 18층에 있는 사무실에 가보라는 것 같아 무작정 E/V를 올라탔다.

그 건물은 시안시 경찰본부였고, 18층에 있는 사무실은 아무 곳도 명패가 없었다. 결국 이 사무실, 저 사무실 기웃거리며 "I lost passport." "我失去了护照(Wǒ shīqùle hùzhào)"를 번갈아 외치며 다녔더니 저기로 가라며 손짓을 한다. 사무실에 들어가 공안분소에서 받은 서류와 내 여권사본을 내미니 영어로 사유서를 쓰란다. 회화에 작문까지 오늘 영어공부, 중국어공부 실껏 하고 있다. 간신히 확인서를 받으니 12시가 다 되어간다. 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드리고 이동하였다.

영사관 직원들은 최대한 편의를 봐주었으나 비자 발급시간(3박4일)이 단축될 수 있도록 출입국관리소에 요청해달라는 부탁에는 오히려 중국쪽이 ‘주권 침해’라며 여기어 역효과가 난다고 설명해주신다. 다시 출입국관리소로 오기까지는 점심시간이라 여유가 있어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몇 번을 마주쳐서 웃어줄 만도 한데, 출입국관리소의 직원은 여전히 엄한 표정으로 거주지 확인서가 빠졌다고 말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 이곳은 시경이라 영어라도 되지만 지역 경찰서는 의사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민박집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지역 경찰서로 와달라고 요청하고, 찾아가니 이곳에서는 부서끼리 서로 일을 미룬다. 외국인 숙박지역이 아니다보니 이런 일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고 민박집 주인은 설명하신다.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을 끌다가 서류 한 장을 손에 들고 출입국관리소로 다시 갈 수 있었다. 접수를 마치니 비자는 목요일에야 나올 것이라 한다. 급행은 없냐는 질문에 또 단호한 표정으로 ‘NO'라고 하면서도 화요일쯤에 18층 사무실에 찾아가보라는 Tip을 알려준다.

 

9. 처음 먹어보는 중국 면 요리

어쨌든 비자 신청을 마친 우리는 “다시는 비자발급에 시간걸리는 나라에는 안온다.”며 이를 갈다가도 세상에 누가 여행와서 경찰서, 파출소, 시경까지 구경해보겠냐며 위안을 삼기로 하였다. 오후 4시가 다 된 시간에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고, 동네 식당을 기웃거렸다. 식당에 들어가보니 아마도 어머니는 주방을 보시고, 딸이 홀 서빙을 하는 듯 하였다. 물을 주더니 빠른 말로 주문을 받으려고 기다리다 외국인임을 알아채고 자리로 돌아가서 기다려준다.

여름 날, 시안에서는 량피라는 면요리를 즐긴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매운 비빔국수같은 요리이다. 길에서 사발면만한 한 그릇에 3위안이면 즐길 수 있다. 시안시가 있는 산시성은 쓰챤성과 가까워 면요리가 발달되어 있는 곳이다. 도삭면, 단단면 등 각종 방식의 반죽과 요리법이 다 모여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단단면 량피, 건면 요리를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하였고,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단단면 량피는 닭고기를 찢어 넣어 쫄깃한 면발과 함께 비벼주었고, 건면은 뽀얀 닭국물에 닭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어주었다. 아마 식사를 하는 우리를 홀낏 쳐다보시는 것이 외국인이라 더 넣어준 듯 하였다. 식대는 다해서 16위안(약 2,700원)이었다. 식대를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다고 서툰 중국어로 말하니 주방에 있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환해지셨다.

식사 후, 우리는 시안성벽의 서문으로 들어가서 도심을 걸어다녔다. 시안성벽의 외곽은 공성전의 방어를 위해 넓은 도랑(호성하)이 파여 있고, 근자에는 환성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하고 있었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노인장 한 분이 동료들과 손주에게 장도(長刀) 무술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모형같지는 않은 도를 노인은 가볍게 휘두르며 설명을 하고 계셨고, 우리는 기꺼이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었다.

시안성벽의 높이는 12m이다. 이 성벽을 올려 쳐다보다가 갑자기 우리의 흥인지문과 숭례문을 생각하니 우리의 성벽은 그냥 뛰어넘을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잘은 몰라도 아마 내란보다는 외부의 침략 방어에 중점을 둔 한반도와 끊임없는 내란에 대비해야 하는 중국의 차이였을 것이라 여기기로 하였다.

이 날은 일찍이 들어와서 맥주를 마시면서 4일에서 8일로 늘어난 시안 여행계획을 새로 상의하고, 티베트 동행자들에게 양해 전화를 드렸다. 다행히 우리가 빠져서 늘어나는 여행비용을 반반씩 부담하는 것으로 양해가 되었다. 걱정해주시는 마음이 특별히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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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안성벽 서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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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두 번째 이야기(5/5)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두 번째 이야기(5/5)

 

5. 시안으로

10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 전자티켓으로 발권해서 천천히 가도 문제없다고 주장하던 나와 달리 아내는 일찍 가서 기다리는 것이 낫다며 새벽같이 서두른다. 내 여행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잡은 전 날의 부서체련대회에서 먹은 술은 아직도 입안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서울역에서 탄 공항철도는 빠르게 인천공항역에 도착하였고, ‘거봐라. 시간이 남잖아’하던 내 앞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전자발권 전용부스로 가보니, 내 티켓은 해당사항이 없단다. 제길! 9시40분이 다되어야 출국수속을 마친 우리는 담배 면세쇼핑을 하러갔더니, 내가 피는 담배가 면세점에는 없었다. 제길X2!

3시간의 비행이 지나 시안 상공에 도착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3~40호로 구획된 농촌 마을과 새로이 길게 낸듯한 도로였다. 몇 곳은 유적발굴을 하는지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시안공항은 크지는 않아도 예전 옌지(연길)공항에서 느낀 당혹감은 없을 만큼 정비된 공항이었다. 1인당 26위안(약 4,300원)을 내고 공항버스로 시안시내로 들어섰다. 버스는 시안시내를 둘러싸고 있는 명대성벽의 서쪽으로 들어서서 북문을 지나 기차역 부근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많은 인파속에서 여행을 하는 듯 배낭을 맨 중국인과 외국인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중국 시간으로 오후 2시 반-한국 시간으로 오후 3시 반-을 넘어 가다보니 배를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흡사 롯데리아같은 프랜차이즈 식당(리선생)에서 라조기 덮밥, 동파육 백반같은 음식으로 늦은 점심을 하였다. 집사람과 처음 먹는 중국 현지 음식이었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식사였지만 54위안(약 8,900원)의 가격표는 중국물가를 너무 만만히 봤나싶어 여행비용 관리에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 당시 위안화 환율은 174원 정도 되었으나, 사설 환전소를 이용하여 165원에 바꿀 수 있었다. 환전소는 환매차도 적게 적용하여 여행후 남은 돈을 바꾸는 것에도 유리하다.)

 

6. 여권분실 사건

서울과 달리 시안의 기후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였다. 티베트의 서늘한 날씨를 감안하여 우리는 티는 반팔로 준비하는 대신 외투는 점퍼로 준비해서 입고 출국하였다. 시안에 도착하면서 점퍼를 벗어 들고 있었는데 카메라 가방을 매면서 점퍼를 아내에게 맡기게 되었다.

민박집으로 가기 위해 기차역 주변을 헤매다 버스 정류장을 찾고,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여덟 정거장을 가서 내리라고 민박집 홈페이지에 안내가 되어 있었지만 어차피 버스 안내방송을 못 알아듣는 우리는 버스 노선도와 버스 정류장 표지를 끊임없이 쳐다보기도 하고, 버스 안에서 착해 보이는 학생을 찾아 민박집 주소를 적은 종이를 보여주면서 원하는 목적지에 내릴 수 있었다. 버스비는 1위안(165원)으로 아주 착한 가격이었다. 사실, 택시를 타도 30위안이면 갈 거리였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작정한 터라 굳이 버스를 고집하였던 것이다.

민박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시내구경을 나가기 위한 작은 배낭을 꾸리고 있는데, 아내가 내 점퍼가 안 보인다고 한다. “괜찮어. 하나 사자.” 말하자마자 그 안에 넣어 놓은 여권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낭을 싹 뒤져봐도 여권은 나오지 않았고, 여권을 잘 간수하지 못한 내 잘못은 잊은 채, 아내에게 점퍼 간수도 못한다고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기 전, 아내의 배낭 어깨 줄에 매달린 것을 보고 소매치기를 우려해서 아내 뒤편에 내가 서있었기에 버스에서 급히 내리면서 흘린 것이 분명하였다. 민박집 안주인에게 부탁해서 버스회사에 전화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수 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었고, 아내는 제가 잘못한 냥 기죽어 앉아있었다. 여권이 없으면 비행기도 못타고, 비행기를 못타면 티베트도 못가는 판국이었다. ‘히말라야여행동호회’ 운영자 카일라스님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 설명을 했더니 일단 경찰서가서 분실신고를 하고 영사관에서 임시여행허가증을 발급받아 중국 출입국관리소에서 비자를 재발급 받아야 하는데 주말이 끼어서 제 때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하신다. 중국 경찰서를 가려해도 말도 안 통하니 민박집 안주인께 동행을 부탁드렸다. 안주인은 경찰서 근무시간이 지나서 어차피 내일 가야할 것 같다며 바깥주인이 저녁에 들어오니 내일 아침에 상의하자고 하신다. 영사관에 문의하니 사진 세 장을 준비해야 한다는데 배낭을 뒤져보니 여분의 사진이 두 장뿐이었다.

첫 날부터 여권 때문에 여행을 망쳤지만, 이 분위기를 더 끌고 가다가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아내에게 사진도 찍어야 하니 시내로 나가자고 하였다. 어차피 내일이 되어야 여행이 어찌될지 판가름 날 테니까.

 

7. 시안의 중심,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회족(回族)거리

시안이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성)이었다는 말은 전편에서 하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한나라와 수나라의 수도이기도 하였지만, 당나라에 이르러 국제도시로 장안시의 규모는 현재의 시안시에 버금갈 만큼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시안이라는 도시명은 명나라에 이르러 확립되었는데, 이때 지은 성벽이 아직도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이 15m에 이르는 시안(명대)성벽은 동서남북 네 개의 문이 있고 그 중심에 종루가 놓여있다.

종루는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층, 내부 2층 정방형의 누각형태이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광제가(廣濟街)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사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고 한다.

종루에서 450미터 떨어진 곳에 고루가 있다. 종루보다 4년 먼저 건축된 명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북경의 자금성, 명 13릉 다음으로 당시 건축기술과 미학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한다. 종루가 종을 쳐 시간을 알리는 누각이라면 고루는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곳이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종을 치고, 밤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시안의 모든 교통은 종루를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를 가든지 종루로 나오는 버스가 많아 여기에서 갈아타면 민박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쨌든 시내로 나온 우리는 번화가 주변이니 사진관도 있을 것 같아 느긋이 관광을 즐기기 시작했다. 종루와 고루 통합티켓이 40위안(6,600원)이다. 중국 관광지 입장료는 너무 비싸다고 투덜대며 종루에 올라섰다. 아내에게 여기 서봐라, 저기 서봐라하며 사진을 찍지만 아내의 굳은 얼굴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종루에서 바라본 시안 시내에는 높지 않은 건물만 보였다. 고층빌딩은 성 바깥에 있었고, 성안은 빌딩 고도를 제한하는 듯 보였다. 누각의 안에는 각종 종을 전시하기도 하고, 시간대별로 공연도 하였지만 우리가 도착한 시간 이후에는 공연이 없었다.

종루를 나와 고루로 가는 길에 웨딩사진이 걸린 가게들이 몇 곳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여권용 사진을 찍으러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짧은 영어로 여권용 사진을 찍을 수 있냐고 물으니 직원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쳐다보며 수군댄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이었다. 중국어 회화 책을 뒤지며 여권, 사진 등 단어를 가리키니 그제서야 여기서는 안된다고 한다. 아마 웨딩스튜디오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려준 약도를 보고 몇 건물을 허매다 사진관을 찾을 수 있었다. 30여 분만에 여권사진 10장과 CD 한 장을 건네준다. 가격은 50위안(약 8,300원)으로 착하다.

사진도 만들었고, 내친 김에 경찰서도 찾아보자고 지도를 펴니 고루 옆에 경찰서가 있다. 씩씩하게 걸어 가보니 경찰서가 없다. 회화책을 뒤져 경찰서란 말을 찾아 보여주고 말로 ‘자이나르(어디)? 자이나르?’하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르쳐준다. 얼마만큼 걸어야 될 지도 모르지만 택시를 탈 수도 없어 걸을 수밖에 없었다. 20분 정도를 걸으니 경찰서가 보인다. 정문에 경계 근무를 하는 경찰들에게 서툰 중국어로 말을 하니 돌아오는 말은 “팅부동”뿐이다. ‘알아들을 수 없다’ 혹은 ‘듣고도 모른다’라는 뜻의 이 말은 중국 사람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이자, 묻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말이다.

결국 경찰서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종루 방향으로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좀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은 야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머리에는 흰 모자나 수건을 두른 것이 회족 거리인 듯해서 시장으로 들어섰다. 중국내 최대 소수민족이라는 회족은 약 천만명 정도로 중국 서북부에 분포되어 살고 있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그래서 회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돼지고기와 술을 팔지 않으며 식당 간판에는 청진(淸眞)이라는 표시를 한다. 군것질도 하며 시장을 배회하다 청진사(淸眞寺)라 써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슬람사원이지만 건축양식은 불교 사원이었다. 모스크로 표현되는 이슬람 건축양식이 확립되기 전에 이슬람이 중국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란다. 예배를 알리는 종이 울리자 회족 남성들이 사원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고, 안에서는 코란을 외는 소리가 울렸다. 예배중이라 가까이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종교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오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다시 고루로 돌아와서 도시의 야경을 보았다. 고루 역시도 누각 안에는 각종 북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장구를 치는 아내는 많은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찍어보라고 시킨다. 표정이 누그러져서 다행이다.

돌아오는 길에 중국 마트에 들러 맥주를 사고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과 6시간 전에는 다시는 비자 발급받는 나라는 안가겠다며 씩씩대었지만, 내일 출입국관리소에서 일이 잘 풀려보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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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 기차역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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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러우와 구러우 전경, 청진사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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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첫번째 이야기

2011년 5월 중국 여행(가보지 못한 티베트) /첫 번째 이야기

 

1. 10주년 여행의 시작

2011년은 결혼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 부부는 아홉 번째 결혼기념일부터 외국여행을 가자고 작정했었다. 아니 신혼여행을 계획하던 때부터 예정되었던 일이다. 결혼을 결심하고 3개월 만에 식을 올린 우리들은 혼수나 예단에는 관심이 없었다. 최대한 간단히 하는 것이 목표였고, 준비한 가전 중 제일 값난 것이 전자레인지였으니 말이다. 이것저것 다 생략하고, 하다못해 웨딩드레스도 친구의 도움으로 거저하다시피 했지만 신혼여행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뜨거웠다. 나는 20대부터 베트남에 가보고 싶었다. 항전의 역사, 천연의 자원은 나에게 미지의 아득한 매력을 뿜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이탈리아를 가보고 싶어 했다. 음악에 교양이 없는 나와 다르게 아내는 피아노도 장구도 잘 치는 사람이었다. 마침 지인이 이탈리아에 살고 있어 생각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도 매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지는 제주도로 결정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돈이 거의 없어서였다. 아내의 흑자와 나의 적자를 합치니 0(제로)이 우리의 출발점이라는 냉혹한 현실은 우리의 이상과 기대를 무참히 밟았고, 정신을 차린 우리는 대한민국 남녀의 불변의 신혼여행 1번지 제주도를 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 떠난 신혼여행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10주년 여행이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베트남은 내가 2009년에 배낭메고 호치민 밑으로 대엿새 정도 갔다 왔고, 이탈리아는 아직 비싸고, 항공권은 카드 마일리지로 구입해야 하고, 당연히 저렴해야 하는 등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다보니 갈 곳이 많지 않았다. 라오스에 가서 느린 삶을 체험하고도 싶고, 러시아 극동에서 떠난 기차를 타고 열흘 동안 기차여행을 하고 싶기도 하였다. 제길, 왜 이리 가고 싶은 곳은 많은 거야?

 

2. 10년 전, 제주도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없을 듯해서 여기서 잠시 쓰자면 우리의 제주도 여행 또한 파란만장하였다. 운전을 못하는 나를 대신해 데려간 전모(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군과 제주도 출신이라고 가이드나 하라고 데려간 김모양. 이렇게 넷이 떠난 제주도는 고스톱과 술판으로 이어졌고, 그들이 떠난 삼 일째에야 첫날 밤 아닌 첫날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맺어줄라고 노력한 전모군과 김모양의 사진은 본인들의 수령 거부로 아직도 우리 집 책장에 모셔져 있지만 나의 심통으로 흥이 중간중간 깨진 것을 빼고는 너무 즐거운 여행이었다.

신혼여행이라고 렌트카로 스포츠카를 빌렸더니 기사와 가이드는 앞자리 좋은데 앉고, 주인공들은 불편한 뒷자리에 쳐박는 전모군, 가이드하라고 데려갔더니 대학올 때 떠나서 데모한다고 10년 만에 온 거라고 인터넷으로 뒤져본 나보다도 모르는, 방이 하나뿐인 회사 콘도에서 여성들이 편히 자라고 거실로 나와 자던 나에게 안방으로 가서 자라며 술먹고 꼬장하던 김모양. 그럼 넌 누구하고 자려고?

여행은 좋은 곳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해서 좋은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3. 여행일정 잡기

아내는 교대근무를 한다. 나는 통상근무를 한다. 쉬는 날이 서로 맞지 않다. 나야 사무실에서 단독업무를 하다보니, 장기간 휴가를 내도 미리 혹은 나중에 업무처리가 가능하지만, 아내는 휴뮤 일정 등 동료들의 양해가 있어야 장기간 휴가가 가능하다. 때문에 일정을 미리 확정해야만 하였다. 물론 항공권을 보너스 마일리지로 구입하려면 조기 예매는 필수이다. 약 석달 전에 5월 초에 휴가를 가는 것으로 정하고, 일정에 맞는 보너스 항공권을 찾는 것이 여행지 선정의 첫 과정이 되었다. 동남아와 중국 노선을 검색해보니 벌써 표가 없는 곳도 많았다. 상대적으로 중국이 사정이 나은데,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30,000마일리지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뭐, 대도시에 가고싶은 마음도 없지만.

그래서 중국 변방으로 가자는 마음에 여행정보를 찾다보니 티베트 라싸까지 칭짱열차가 뚫려 한결 쉽게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9주년 식사를 한 곳이 명동에 있는 티벳 식당 ‘포탈라’였지 싶어 아내에게 물어보니 나보다 더 좋아한다. 티베트로 가는 직항로는 없으니 우리는 경유지로 시안(Xian,西安)으로 입국해서 티베트를 갔다가 청두(cheong-tu,成都)로 나오기로 결정하였다.

 

4. 시안, 티베트, 청두

시안은 우리가 역사드라마에서 자주 들어보는 중국 장안성이었다. 진시황제의 무덤과 소름끼칠 정도로 정교한 호위병 토기로 유명한 병마용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만화책 때문이었다. 일본만화 중에 ‘시마과장’이라는 책이 있다. 전공투 세대인 시마가 가전회사에 입사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만화인데, 대략 15년 전부터 가끔 단행본으로 보아왔는데, 2010년 발행본부터 ‘시마사장’이 된 만화이다. 주인공 시마가 인간적이면서도 파벌도 사심도 없는 캐릭터로 나오기에 몰입도가 높았다. 시마가 이사가 되어서 중국지사장으로 나가는 장면에서 시안의 명대(명나라)성벽에 올라 서안 시내를 바라보며 중국의 서부개발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화에서 내가 본 시안은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느낌이었고, 연안으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시장경제와 성장이 이제는 중국 전체로 확산되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실크로드의 시작과 끝, 당나라 시대의 국제 도시, 서부대개발의 중심 도시 등이 시안을 수식하는 말이었다.

청두는 ‘삼국지’에서 유비의 촉나라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윈난(운남)성이나 티벳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윈난성의 쿤밍시 다음으로 제일 먼 한국 항공의 기항지이다. 티베트로 자유로이 들어갈 수 없을 때에 가장 티베트를 느낄 수 있는 야딩 등 동티베트로 갈 수 있는 도시이다. 청두를 출국도시로 잡은 이유는 이같은 교통의 편리함으로 다양한 코스 설계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시안에서 청두는 기차로 15시간을 달려야 하는 거리이지만, 중간 경유지로 티벳과 구채구 풍경지를 고려하던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곳이었다.

구채구를 고려한 사정은 중국 당국의 통제로 티베트 여행허가가 유동적이기 때문이었다. 티베트 개별로 입경할 수도 없고, 여행사를 통해서 여행허가서를 받아야만 하는데, 티베트 저항운동 기념일 등 저항운동이 벌어지면 외국인의 여행이 전면 통제된다. 그래서 여행 허가를 받더라도 못 들어가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고 한다. 어쨌든 우리는 티베트를 갈 수 있다면 시안에서 3박, 티베트에서 4박, 청두행 칭짱열차 1박, 청두 2박을 하기로 하였고, 구채구로 이동한다면 구채구와 쑹판에서 말트레킹을 하면서 3박을 보내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티베트 여행 준비는 DAUM카페인 ‘히말라야여행 동호회’의 운영자를 통해 현지 결합하기로 하고 퍼밋 신청을 하였다. 다행히 여행 제한조치가 4월에 풀려서 우리 부부를 포함하여 5명이 티벳여행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다른 분들은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을 통해 귀국하고 우리는 청두로 넘어오는 일정이었다.

티베트팀이 결정되면서 일정 변경이 필요했다. 티벳팀은 5/7(토) 베이징에서 칭짱열차로 출발하여 월요일 오후에 라싸에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다. 시안에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고, 기차로 이동하면 청두의 일정이 너무 빡빡해질 판이었다. 결국 열차를 포기하고, 항공으로 티베트를 오고가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항공비는 ‘중국여행동호회’를 통해 할인항공권을 일찍 예매하여 생각보다 저렴하였지만, 가능한 피하고 싶은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일정을 잡았다. 청두를 제외한 숙방지도 정했고, 교통편도 준비했다. 마음은 벌써 붕 떠서 기다리는 한 달을 어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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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지리산 둘레길-일본 여행이야기 7/ 9.2~3

드디어 장모님이 내주신 숙제를 마쳤습니다.

지난 여행을 늦게 정리하다보니 여행하면서 그때 그때 메모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글을 쓰면서 '문장을 짧게 쓰자' '현재시제로 쓰자'고 생각했지만 마음같지 않게 글이 오락가락입니다. 마눌님의 요청으로 얼굴을 모자이크하다보니 친구들에게게 달걀 귀신하고 사느냐는 농담도 듣습니다.

부끄럽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년 8월 지리산 둘레길-일본 여행이야기 7/ 9.2~3

1/ 개요

오전에 벳부의 가마토 지옥(온천)과 면세점 쇼핑을 한 후 다자이후로 이동하여 태재부천만궁을 구경하고, 후쿠오카로 이동하여 인공해변인 씨사이드 모모비치, 하카타타워를 보고 예정보다 일찍 광양훼리에 승선하였다.

 

2/ 가마토지옥

역시 여행은 먹는 이야기부터! 아침 식사는 세미 뷔페로 나왔다. 낫또와 그 외 일본식 요리를 푸짐히 먹고 짐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출발할 때 마다 호텔직원들은 버스가 완전히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어다.

벳부에는 3,000여개가 넘는 온천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순례라는 이름으로 온천 순례코스를 만들고, 가는 곳마다 스탬프를 찍어준다고 한다. 예전에 본 여행 프로그램에서 사찰 순례, 기차역 순례, 열차 도시락 순례 등을 본 적 있다. 무언가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기는 나도 요새 ‘걸어서 서울  한바퀴’를 하고 있으니.

가마토지옥은 돌사이에서 나오는 증기로 물을 데운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석회석 물질로 인해 옥빛으로 빛나는 온천물에 잠시 족욕을 하였다.

이제는 단체 관광상품의 필수코스, 쇼핑몰을 갈 차례이다. 좁은 가게 안에 면세라고 선전하는 상품들은 별 볼게 없었다. 살 일도 없지만^^. 예정된 시간이 지나도 승객 두명이 안와서 차가 출발하지 못한다. 가이드까지 늦게와서 카드 문제로 결제가 안되서 원하는 물건을 다 못샀다고 변명해준다. 그들이 오기전에 버스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한 분이 말씀하신다.

“저런 분들 덕에 싸게 여행하는 거예요”

버스 안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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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자이후 태재천만궁

태재천만궁으로 가는 길은 예전 관청이 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잘 정돈된 길과 구획 등이 버스 안에서도 확인되었다.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는 유명했던 시인이자 학자이며, 철학자였던 菅原道眞(스가와라노 미치자네, 845~903) 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곳으로, 다자이후에 905년에 건립되었다. 스가와라노미치자네는 왕의 친애를 받아 일찍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사서 규슈의 다자이후에 귀양을 오게 된다. 그가 죽는 날 매화 가지가 교토에서 규슈로 날아와 하룻밤 새에 6천 그루나 꽃을 피웠다는 전설이 있다. 바로 본전 앞에 있는 매화(도비우메, 飛梅)라고 불리는 꽃나무가 바로 이 전설을 가진 나무이다. 이곳의 매화는 해마다 다른 지역의 꽃보다 먼저 봉우리를 떠뜨리는것이 유명하다. 그래서 이곳 다자이후로 들어서는 길에 '우메가에 모치'라고 하는 떡이 유명한데, 이 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도 맑아지며, 시험에 딱 하고 붙는다는 이야기도 있다.(다음 여행정보 인용)

태재천만궁은 학문의 신을 모시는 곳이라 공부와 합격과 관련된 기념품점과 내가 사랑하는 모찌(찹쌀떡)가게가 상당히 많았다. 신궁의 한편에서는 부설 유치원의 원생들이 단체 놀이를 하고 있었고, 신전에서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작은 사당은 세월의 이끼가 아름답게 더해있었고, 곳곳에 합격을 기원하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오늘 점심은 각자 해결해야 되어 모밀 정식과 덮밥으로 해결했다. 역시 물가가 비싸다. 버스는 이제 후쿠오카로 향하는데 비는 오지 않지만, 바다와 연결된 강이 심상치 않다. 바람도 상당히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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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후쿠오카

역시 단체관광의 단점이지만 일정 중에 전혀 시간을 낼 수 없었다. 후쿠오카에 가면 하고 싶은 군것질이 있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 가이드는 태풍 때문에 배가 좀 일찍 출항할 것이라고 한다.

후쿠오카는 규슈지방의 가장 큰 도시이다. 항구도시인 이곳에 왜 인공해변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씨사이드 모모비치는 유럽풍의 해변이었다. 잠시 사진을 찍고, 하카타 타워로 이동하여 후쿠오카 전경을 구경하였다.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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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롤러코스터 훼리

일본을 오면서 엔화는 10만원치만 준비했다. 쇼핑은 아이쇼핑으로, 음식은 군것질거리만 하는 우리는 이것도 남을 줄 알았는데, 일본 물가 장난아니다. 배낭여행 올 곳은 못되는 듯 하다. 장모님이 손녀들 줄 과자를 사고자 해도 잔고가 부족해서 간단한 것으로 준비하고 배에 올랐다. 배는 출발부터 출렁출렁거린다. 누워 있어도 이리저리 굴러간다. 그렇게 열시간 넘는 롤러코스터를 공짜로 타고 왔다.

배가 광양에 들어올 때쯤, 장모님께 작은 동서의 아버님이 삼일 전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드렸다. 여행 전부터 안 좋은 터이라, 장모님은 여행을 걱정하셨다. 일본에서 문자로 가족들에게 인사드리니 우리가 일본으로 떠나는 날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작은 형님께서 어머님께 말씀드리지 말라 당부해서 안알렸다고 하신다.

광양 시티투어 계획을 포기하고, 급히 춘천으로 이동해서 늦은 인사를 드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12시간 빠지는 일주일의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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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후기

장모님과 같이 한 이번 여행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엄마의 고향, 하동 지리산 자락을 밟으면서 엄마와 같이 여행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엄마도 ‘잘했어!라고’해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항상 자식들을 걱정하시면서도 존중해주시고, 함께 소통하기를 원하시는 분!

어머님! 더 건강하시고, 내년에도 지리산 밟으러 가시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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