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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나의 외부와의 접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오프라인 만남과 온라임 관음/방백이다.
오프라인 만남은 꽤나 애로가 많은 상황이다. 내 멘붕과 열폭, 그리고 몇 가지 사건들은 나로 하여금 만날 수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은 사람의 폭을 좁히고, 만나기 싫은 사람 혹은 만나고는 싶지만 그러자니 슬프기도 하고 막상 만나고 나면 힘이 빠지는 사람의 폭을 넓혔다.
온라인에서의 접촉은 PC가 아닌 스마트폰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스마트폰에서의 관음은 트위터와 프레시안북스, 네이버 웹툰을 습관적으로 들춰보는 것으로 이뤄진다. 방백 역시 트위터에서의 중얼거림, 아주 가끔의 멘션으로 이뤄진다. 이런 생활습관은 기존에 가지도 있던 생활습관들을 바꾼 것인데 문자메세지와 블로깅이 그것이다.
문자메세지는 뭔가 나에게나 남에게나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감정 배설을 하기에는 너무 사적이고,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정말 한 손으로도 다 셀수 없다. 그에 비해 타임라인은 농도를 분산시킬 수 있다. 1:1로 만나 서로 마주보는 뉘앙스가 아니라 여럿이 만나 옆 사람 이야기를 듣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문자 메세지는 주로 약속시간이나 장소를 잡는 용도 외에 쓰질 않는다.
블로깅은 너무 외로운 일이 되었다. 애초에 눈에 잘 안 띄길 바라며 만든 장소이지만 주변 사람들과는 공유할 있는 장소였으며 했다. 하지만 리플이 달리지 않는다. 트위터도 멘션이나 메세지가 안 오긴 하지만 가끔 훼이보릿되었다는 알람이 뜨면 "아 그래도 누가 보긴 하는구나" 정도의 느낌이 든다. 값싼 인정들이 고맙다.
2.
그래도 오랜간만에 한 긴 글 쓰기와 블로깅,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공개로 달린 리플이 잊고 있던 맛을 일깨워줬다. 트위터에서의 인정과는 다른 종류의 인정에 대한 맛이었다. 좀더 진했었다. 그 기분에 책읽기 세미나에도 나가봤지만 왠지 과거의 나 자신의 세미나 간사 시절을 떠올리게 하면서 부끄러워서 더는 나가지 못할 것 같다.
또 간만에 블로그에 즐겨찾기를 해놓은 이웃 블로그들을 한 번 순회해 보았다. 예전에는 꼭 하루 1회이상은 하던 일이었다. 무연 님의 홉스봄에 대한 잡담 http://muhanhan.tistory.com/437 에서는 멋진 저자의 멋진 책을 읽고 또다른 멋진 저자가 되고 싶다는 나 자신의 욕심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다. 진태원 선생님의 최근 포스트 담론에 관한 학회 요약문 http://blog.aladin.co.kr/balmas/5701827 에서는 선생님의 꾸준함과 내가 열전 보듯이 보고 머리속에 정리했던 인문학자들의 캐릭터들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여자 대학 선배의 수영일기 http://blog.naver.com/cherrysand 라는 포스트는 제목만 기분이 아주 조금은 괜찮아지는 경험을 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내가 평소의 성찰들을 통해 준비한 분석들이 떠올랐지만 지금 그냥 머리속에서 지우고 있다. 이 포스트를 읽을지 말지는 모르겠다.
3.
일할 때는 그리 그리워한 주말이 옆을 지나가고 있다. 열심히 번 돈도 피씨방에서 소모되고 있다. 주말에 기대되는 일이 없어진 것은 조금 되었다. 사실 주말이 뭐 그리 흥분되어야만 하는 일이겠는가. 자기 자신의 주제를 가지고 월 단위 년 단위로 생각하고 사는 착실한 인간상에게는 그리 흥분되지도 울적할 일도 없는 그런 일이다. 아직도 이러는 것을 보면 나는 여전히 대학생은 대학생이다. 나 자신의 이 대학생적인 부분들을 가지고 아마도 앞으로도 긴 시간을 쓸데없이 고민하며 뭔가 쓰고 그럴 것 같다.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써야 할까.
이렇게 지금 있다. 이 얄팍한 기록으로 무언가 남이 나를 이해해줄 참고자료라던가 나중에 내가 나를 기억할 기록을 남겼다고까지는 말하면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그냥 하릴없어서 썼다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억울하다.ㅎㅎ 별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이제 내 자리와 내 성격에 맞게 게임이나 하러 가야겠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한 플레이를 하러 ㄱㄱㄱ
얼마전 큰따옴표로 처리된 최저임금을 올리면 그 임금은 누가 주냐는 식의 트윗 인용을 봤다. 거칠게 요약하면 자본가도 살기 빠듯한 세상에 결국 그 몫은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걸 제 살 파먹기라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실제적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고 나중에 가서 다시 열을 낼 모순적인 대중에 대한 비웃음, 자신의 입장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행정, 자본, 정치 등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대중에 대한 비웃음이 담겨 있는 트윗이었다.
이런 류의 시각은 항상 불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 담론 반대편에 크건 작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항 담론이 때때로 우습거나 무책임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책임지지도 건들지도 못할 문제에 대한 호언장담들, 피해와 상처에 대한 무조건적인 변호, 아는 것은 없고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쉽게 담론적 우위를 점하려는 공짜 정신. 이런 시각들에 비해 지배계급, 통치자 혹은 관리자의 입장을 나름의 이유를 가진 것으로 보려는 이런 시각은 좀더 세상을 넓게 보게 해준다. 세상은 무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값싼 분노보다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현실을 대면하려는 시각은 중요한다.
하지만 그에 기반해 남에게 던지는 조소는 가볍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 "세상의 이치"가 있다는 걸 알고서도 주장해야만 해야 되는 일들과 입장도 있다. 차분히 이성적으로 생각해봐도 이 조소는 합당하지 않다. 만약 '관리자의 입장'을 세상의 일부로 인정받고 싶다면 그 역을 굳이 부정하면서 그럴 이유는 딱히 없다. 그리고 설사 '모르고서'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조소를 살 일은 아니다. 무지 역시 세상의 일부다. 정말 자신이 똑똑하고 그 똑똑함을 더 좋은 일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올바른 길은 그 무지를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며 비웃는 게 아니라 그 무지까지 포괄하며 세상을 파악한 후 그 사회적 사실을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것이다.
가슴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다. 이미 냉정한 사람들은 자신이 부정하는 입장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재단하려는 이들이 우스워 보일 것이다. 문제는 냉정의 기준으로 냉정을 볼 때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순의 이름을 쉽게 분노하는 이들의 용어로 '가슴'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해도 그건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각자가 자기 어휘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만화 [야옹이와 흰둥이]를 본 건 몇 년 전 디씨 힛갤에서이다. 흰 백지에 4B 연필로 그려진 야옹이와 흰둥이가 주인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야기였다. 지적이건 소재건 뭐건 특이함에 열광하던 때였지만 담백한 그림체에 뻔한 비정규직 노동자 이야기는 뻔하지 않고 뭔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특이함에 대한 반작용으로 평범함에 눈시울을 붉힌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만화는 사실 매우 전통적인 감정이입 회로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짐과 그에 맞서는 착해빠진 주인공들이 있다. 게다가 그 주인공은 '동물'이다. 그것도 귀여운 고양이(야옹이)와 강아지(흰둥이)다. 동물은 판타지를 투영하기 매우 쉬운 존재다. 사람들은 종이 다른 생물체에게서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모두 걷어내고 자신이 타인에게 바라는 모든 요소들을 투사한다. 현실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문화적으로도 동물은 그런 위상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과 구별되는 요소들이 있다. 우선 이 동물들은 노동을 한다. 그리고 그 노동의 현장은 바로 한국 사회이다. 저자는 초반 아이템을 한겨레의 노동 특집 기사(이후 [4천원 인생]으로 출간)에서 따왔다. 이후에 등장하는 배경들도 마찬가지다. 동네 빵집, 노점, 고급 레스토랑 알바, 호프집, 학원 마감 청소 등등. 이 작품에 등장한 공간들은 단 한 곳도 동물들의 이상적 인간상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가 아니며 이런저런 사람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장소이다. 동물들의 선함은 그 배경에 그저 놓여지며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겪을만한 일들을 겪는다.
그리고 인간 동료들이 등장한다. 인간 동료들은 주변 인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반대편에 서있는듯한 인물들(시식맨, 깡패)은 결국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결국 주인공과 같은 존재임이 드러난다. 이기적인 인간상이 동물의 선함, 그러니까 인간이 동물에 기대하는 선함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으로 드러난다. 혹은 인간이 그런 부분들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같은 얘기를 내게 익숙한 어휘들로 반복하면 동물에 인간이 투사되고, 다시 그 동물에 의해 인간이 이해되거나 말없이 도움을 받으며 동화됨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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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생각을 전개시킬 수록 나로 돌아가는 느낌이지만, 만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냥 만화를 보고 문득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얼마나 매일매일 몹쓸 일을 저지르며 살고 있는가 그런 것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착하지 않다. 하지만 다들 그런 착한 면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자신만의 의지로는 그게 잘 관리도 안 되며 세상에 나가서 관철되지도 않는다. 야옹이와 흰둥이는 모두에게 자신에게 그런 면을 환기시켜준다. 하지만 현실로 이뤄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건 네가 해야할 몫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닌 그냥 항상 옆자리를 지켜줄 뿐이다. 그렇지만 두 동물이 평면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이유는 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밖에 나가서 사람을 위로하지만 돌아와서는 서로의 고됨을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로한다. 밖에서 위로받을 때도 없지는 않다.
이렇게 착해빠졌으면서도 전혀 순진하게만은 느껴지지 않는 만화가 완성된다. 열심히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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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대학 선배 대목에서 흠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