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결인 채로

2009/08/08 22:55 베껴쓰기

봄에 꽤 많이 듣긴 했지만... 저녁에 휴지 사러 슈퍼 다녀오면서부터 박지윤이 간만에 듣고 싶었다. 약간 고생을 했지만, 파일을 구해 내서 포스팅까징. 노래랑은 영 엉뚱한 텍스트이긴 한데... 데리다의 환대를 들으면서 "글쓰기는 환대다" 식으로 해서 데리다의 글쓰기론에 대해 전에 잘 생각 안 해본 게 쬐끔 알듯도 싶어서...... 근데 내가 읽어 본/소장한 데리다 텍스트는 얇은 문고판 한 권. 그것도 학교 다닐 때 전에 무슨 말인 줄도 모르고, 지하철에서 글자만 읽어 갔던 책. 어쨌든 10년 만에 펼쳐서 후룩후룩 넘기다 눈에 걸린 몇 줄.  

 

여성의 유혹은 멀리서 효과를 내므로, 거리는 여성이 지닌 힘의 한 요소이다. 런데 이 노래, 이 매력에 대해서 거리를 두어야 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고 믿는 것처럼 이 거리에도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데, 이는 그 매력으로부터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매력을 느껴보기 위함이다. 거리가 필요하다.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우리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솔직한 충고와 유사하다. 유혹하기 위해, 그리고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베일들', 41~42쪽)

여성적 거리는 거세와의 관계를 유예하면서 진리를 따로 떼어 놓는다. 여기서 관계를 유예한다는 것은 하나의 돛이나 관계를 팽팽하게 당기거나 펼칠 수 있듯이 하는 것이며, 동시에 미결정상태에—미결인 채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리고 중단상태(εποχη, epoche)에 두는 것이다.('진리들', 51쪽)

_<에쁘롱, 니체의 문체들>, 자크 데리다, 김다은·황순희 옮김, 동문선 

 

박지윤, 7집 <꽃, 다시 첫 번째>, 05 '그대는 나무 같아'

그대는 나무 같아 / 그대는 나무 같아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 햇살을 머금고 노래해 내게
봄이 오고 여름 가고 가을 겨울 / 내게 말을 걸어준 그대

그대는 나무 같아 / 그대는 나무 같아
사랑도 나뭇잎처럼 / 언젠간 떨어져 버리네
스르르르륵 스륵 스륵 / 스르륵 스륵 스르르륵 스르륵
봄이 오고 여름 가고 가을 겨울 / 내게 말을 걸어준
봄이 오고 여름 가고 가을 겨울 / 내게 말을 걸어준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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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22:55 2009/08/08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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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강  2009/08/10 21: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박지윤 이번 앨범 참 좋죠^^; 듣다보면 "박진영 이 나쁜 색히! 이런 가수를!"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능... 그분이 우리집 가계에 꽤나 기여하고 계시지만 말입니다.ㅋ(동생이 JYP신입사원..ㅡㅡ;)
    • 강이  2009/08/10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김강님.. 오랜만여요. 논문 끝내고 잘 지내고 계시는지(이제 인쇄본도 넘기셨겠네요)? 봄엔 듣기에 좋아서 들었는데... 이번에 듣다 보니... 자기 얘기로 만든 노래라서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동생분이 JYP 신입사원이라면... 가계 말고 김강님 문화 생활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 ^
  2. 포포  2009/08/11 03: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이님이 인용하신 글을 읽으면 데리다가 여성주의자인 듯한 느낌을 주지만 데리다는 조종에서 말하길 원시적인 일부다처제에서 남자들은 모든 여자를 원했고, 그래서 여자는 일종의 창녀(une sorte de putain)였다고 하고, '문화의 상태'에서는 "여자는 모든 남자를 욕망하므로 그 행위에 있어서나 또는 의도에 있어서나 창녀가 된다"(146쪽)고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일부다처제에서건 일부일처제에서건 항상 창녀라는 겁니다. 이런 논리라면 남자도 창남 아닌가요. 세상에 한 사람만 욕망하는 인간이 어디 있나요. 말도 안되는 소리. 그리고 조종에서 데리다는 무수히 칸트의 인간학을 인용하는데 칸트는 말하길 "가장 애호되는 여성은, 그의 감옥(하렘이라고 불리는)에서 남성을 지배하여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안다."고 하는데 데리다는 "하렘은 하나의 감옥, 폐쇄된 울타리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여성은 자신의 지배를 확립한다."고 합니다. 하렘이 가정이라는 건 아시겠죠. 둘 다 미친 놈 아닙니까. 남자들이나 집에서 지배를 확립하라고 하세요. 우리는 밖에 나가서 일할테니.
    • 강이  2009/08/11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음.. 제가 <조종>을 읽지 않아서... 뭔가 진지한 답을 하려면 읽어 봐야겠네요. 근데... <에쁘롱>에서는 여성혐오자인 니체의 글에서 "여성적인 것"에 관한 것들을 추출하면서, 니체가 자기 스스로 반여성주의자라는 동일성을 해체하고 있다는 요소들을 끄집어 내고 있으니까 말이죠. 두 글이 서로 어떻게 연관 맺고 있는지는... 봐야 알겠네요. 읽어 본 다음에 제가 포포님께 동의할 수도, 조금쯤 다르게 해석할 수도.
      이 포스팅 적으면서... 인용된 글에 나오는 "여성"이 실제 여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의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는 주석을 달까 말까 했는데... 역시 달 필요가 있었던 걸까요? 데리다가 여성주의자이건 말건 저한테 별 상관은 없기도 하고, 사실은 저의 아주 개인적인 맥락에서 음악과 글을 콜라주한 포스트여서... 각주까지 달면 너무 진지한 포스팅이 되는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안 달긴 했습니다만.
    • 포포  2009/08/11 11: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답변 고맙습니다. 사실은 저도 안 읽어봤어요. 죄송해요. 그건요 새물결에서 나온 <성적지배와 그 양식들>이란 책에 부록으로 성적 차이에 대한 데리다의 편집증 - [조종]에서의 헤겔 비판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발췌한 거에요. 275쪽부터 352쪽까지의 분량이니까 그렇게 짧은 글은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칸트가 인간학에서 당시의 여성들에 대한 놀라운 분석을 시도하고 데리다는 헤겔을 공격하기 위해 칸트의 글을 곡해하는 방법까지 썼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어요. 물론 제가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헤겔과 칸트와 데리다를 읽을 정도로 성실하지는 못해요. 하지만 제가 인용한 말들이 여성을 분노 혹은 실소하게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님이 말씀하신 "여성"이 실제 여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라는 말의 뜻을 이해가 잘 안되요. 그걸 뭐 더 토론하자는 얘기는 아니고.. 어쨌든 고맙습니다.
  3. 포포  2009/08/11 04: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시 생각해보니 위의 마지막 문장 취소에요. 남자들은 집에서도 지배를 확립하고 있잖아요. 이 거짓말쟁이들.
    • 강이  2009/08/11 10: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남자들이 지배를 확보하고 있다는 현상은 부정할 수 없지만... 하지만 한 남자가 저를 지배할 수 있을지는... 글쎄요... 지배당하는 만큼은 지배해 온 것 같아요. 그 상호지배를 제가 감당해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들만큼 우리, 아니... 저도 거짓말을 해온 것 같네요.
    • 포포  2009/08/11 11: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지배를 타자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한다면, 강이님이 성적지배의 주체인 남성을 만나게 된다면 아마 지배당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지 않을까요. 물리적 힘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을 압도하지 못해요. 물론 모든 남성이 여성이 복종하길 원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길 원하는 건 아니겠죠. 현대의 부부는 이행기에 있기 때문에 동등한 관계일 수도 있고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상호지배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자본가와 노동자가 투쟁할 때 전투력이 누가 더 강하죠. 서로의 지배하려는 욕망이 충돌하면 과연 둘 중 누가 이길까요. 우리는 자본을 그토록 연구하는데 왜 여성은 남성에 대해 알지 않으려 하나요.
    • 강이  2009/08/11 11: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리적 힘이나 사회적 권력 면에서 남성의 지배[가능]력을 절대로 무시하지도 않고, 저 또한 그러한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지배와 폭력으로부터 "생존"했다고도 말하고 싶지만, 완전히 그렇다고 자신할 수는 없네요.
      다만... 인용한 글의 맥락 안에서의 "지배" 개념을 가지고 댓글을 단 것이고, 두번째는 제가 "[무엇의] 지배에 관해 말할수록 그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주의에 가까운 철학적 훈련에 노출된 사람이라서... 드러내기보다는 은폐의 전략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인용한 글도 사실 딱 그 맥락이지 않습니까? ^ ^ [좀 어설프게 회피하는 댓글이네요. 포포님에겐 아주 불만족스러울 수 있는...]
    • 포포  2009/08/11 11: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서로 다르게 태어나고 살아온 삶이 다르고 읽은 책들이 다른 경우에는 쉽게 소통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아요. 대화는 다음에 또 나누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음악은 살짝 제 취향이 아니어서..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