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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이 글은 아래의 글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승동 메디치 미디어 기획주간의 반론 "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에 대한 재반론을 겸하여 쓴 글입니다. 
 
지난 7일 <피렌체의 식탁>을 통해 번역, 공개한 에세이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가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독일어권 독자들에게 이 글을 공개한 매체인 Merkur부터가 대중적인 잡지가 아니라 소수의 인문계 지식인들을 독자로 하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글 안에서 나는 서구 엘리트들, 혹은 서구적 정신세계가 처한 딜레마에 대한 농담과 조롱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는데, 이것을 그대로 한국의 비슷한 독자층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약간의 보충만을 더해 번역하여 기고했다. 이 글이 한국에서 이 정도로 넓은 독자층에게 다가가게 될 줄 알았다면 글을 직접 번역하는 대신 새로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조롱과 농담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가 보다는 그 뒤에 다가오기를 바라면서 조금은 숨겨서 배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퍼져나간 덕분에 여러가지 반응들을 수집할 수 있었고,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계속 사유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글에 집어 넣어 둔 용어와 코드들에 대한 여러 (오해가 섞인) 반응들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한 배경을 가진 글이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했는데, 동 매체의 한승동 기획주간이 영광스럽게도 필자의 글을 직접 요약, 비평하며 서방 패권의 종식 이후를 생각해보자는 글 (<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을 기고하였기 때문에 이미 내 손을 떠난 글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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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패권 소멸 희망편 vs 절망편
우선 내 글과 한승동 주간의 글 사이에 (아마도 한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다니엘 튜더의 <동아일보> 기고글 “‘서양 우월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해 두자. 이 글에서 튜더는 판데믹에 의해 그 어느 지역보다도 크게 해를 입은 서구의 우월과 패권은 저물고 있으며, 이제 세계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한국은 서구, 특히 영국과 미국이 잃어버린 민주적 사회계약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금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의 근저에 있다고 언급한다. 
 
이 글은 그야말로 앞으로의 세계사에 대한 칸트적 전망을 담은 “서구패권소멸론”의 희망편이라 할만하다. 아니, 사실 칸트는 인류가 전지구적 공화국, 혹은 민주사회에 이를 때 까지 극한의 갈등과 전쟁 등을 통과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한 점(<세계 시민의 견지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에서 이 글은 칸트보다도 더 희망적인 시각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글은 말하자면 이 “서구패권소멸론”의 절망편인 셈이다. 내 글에서 그의 이론을 정밀하고 정확하게 소환했다고는 결코 주장할 수 없겠지만, 거기서 칸트적 희망의 대쌍으로 선택한 것은 푸코의 의심이었다. 그는 유럽의 근현대사를 이성, 민주주의 그리고 계몽의 역사로 바라보는 표준적인 역사관 아래에서 간과된 통치와 권력, 행정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재구성한 철학자다. 그에 따르면 계몽과 민주화의 역사는 동시에 훈육권력, 생명권력, 통치성의 역사였다. 내 글은 현상분석, 혹은 미래 전망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계몽이라는 틀 대신 푸코의 이 미시적 권력분석의 틀을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나마) 빌려본 것이다. 
 
 
#’성인됨’의 환상
내 글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부분은 ‘아동’과 ‘성인’의 구분인 것 같다. 한승동은 “그(김강기명)는 […] 고분고분한 한국인들에게서 ‘아동’을 발견했고, 그와는 전혀 다른 독일인들 속에서는 ‘성인’을 찾아냈다.”라고 내 입장을 요약했는데, 이것은 조금은 악의적인 요약이다. 우선 양쪽의 차이를 언급한 것은 일차적으로 시민 행위자가 아니라 “시민을 대하는 행정 및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해서다. 그리고 내가 이 글 전체에서 말하려 한 것은 유럽사회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진 ‘성인됨’의 환상이지, 실제로 한국인들이 ‘아동’처럼 행동하고, 유럽인들이 ‘성인’처럼 행동한다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오독을 수용한다 해도,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동과 성인 중 어느 쪽이 더 "까다로운" 존재일까? 물론, 표준시민이란 어디나 비슷하게 틴에이저같은 이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혹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적 소비자 주체성의 차원에서 한국 행정시스템을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지적을 하기도 했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굳이 이 문제 많은 성인됨(Mündigkeit)의 유비를 사용한 것은 바로 이것이 서구 근현대사를 계몽과 민주주의의 역사로 파악하는 환상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즉, 서구인들은 스스로를 집단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그리고 (서구의) 타자들과의 비교 안에서 성인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한편으로는 생명권력에 의한 전 사회적 통치를 거부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형태의 “성숙한”(풉!) 시민성이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이번 판데믹 대응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글의 서두와 마지막에 각각 언급한 “발코니 콘서트”는 바로 이 방역에 실패한 채 집으로 쫓겨들어간 유럽인들의 ‘정신승리’인 셈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너무 성숙한 나머지” 한국식 해법의 도입이 어렵다고 한 것이다. 
 
#기술이 부족했는가? 
한승동 기자는 유럽의 이번 방역실패가 그저 단순히 제대로 대처할 선진적인 기술적 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점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것(한국 방식)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인문학도로서 더 알고 싶은 것은 의학을 비롯해 과학기술적 역량에서 결코 타 지역에 비해 부족하다 할 수 없는 (아니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기술적 역량의 선두권에 있는)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이, 이 분야의 과학 기술인들이라면 누구나 표준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할 한국식 방역시스템을 왜 도입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심지어 기술적으로 쳐진 동유럽 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방역에 실패했는지 그 정신적인 배경에 대한 것이다. 
 
우선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것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한국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유럽 내의 개인정보보호 및 자유권에 관한 규제가 촘촘하고, 지역적 수준에서 유럽연합에 이르기까지 두텁게 존재하는 대의정치적 구조가 이 인권관련 규제들을 지속적으로 유지,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의정치적 구조가 두텁다는 것은 단순히 각급 의회들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의회와 각 정당들을 통해, 혹은 그 바깥에서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 기타 단위들의 역량과 영향력 역시 매우 크다는 것이다. 각 정당, 정치조직들의 이념과 정책이 서로 다르지만, 이 구조 전체는 기본적으로 행정적 합리성 혹은 시장 합리성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서유럽 각국의 공교육은 자본주의 못지 않게 바로 이 대의정치적 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는 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시민의 형상은 사실상 근대 계몽주의에 의해 주조된 것이다. 곧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성인 개인들이다. 근대 유럽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사는 바로 이 백인 남성 자산가를 모델로 한 시민의 형상이 노동계급으로, 여성으로, 타인종으로, 장애인으로 확장된 역사였다. 
 
유럽 바깥, 특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유럽 내 고등학교나 대학으로 유학을 온 이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아니 근데 답이 여기 뻔히 나와 있는데 그걸 가지고 또 토론을 하고 있더라니까? ‘1+1=2’같은 걸 대체 왜 토론에 붙여?” 같은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너무나 당연히 수긍하는 유럽인들을 찾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이것은 민주주의적 개인을 만드는 훈련일 수도 있지만, 어떤 수준에선 민주주의를 방해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끝끝내 자신은 인종차별을 해야겠다고, 아이에게 백신을 안 맞추겠다고, 이건 내 표현의 자유고 존엄이라고 버티는 유럽인들의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이다. 자신들이 성인(개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전 글 마지막에 내가 쓴 “빌어먹을 틴에이져”라는 말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이념은 다 달라도 자신들이 독립적, 주체적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재)생산하는 이 대의정치의 구조와 문화는 사생활이나 개인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정책을 도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장치의 역할을 한다. 게다가 유럽의 의회구조는 그 어마어마한 복잡성을 특징으로 하므로, 한 지역이나 한 나라 차원에서 이런 컨센서스를 깨기란 또 쉬운 게 아니다.
 
 기술적으로 무수히 많은 특허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기술을 즉각 유럽 내에 도입하기란 쉽지 않고, 아예 기술 개발 자체가 지연될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그 뒤에는 위에서 말한 더 큰 정신적, 문명사적 배경이 있다. 결국 서유럽 각국이 뒤늦게야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비상사태” 선언과 그에 준하는 여러 금지조치들이었다. 독재와 급속발전의 20세기를 지낸 동유럽 각국은 서유럽보다는 훨씬 더 기민하게 인권제한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유사-면역학적 믿음
두번째 요소는 사실 반증불가능한 가설이라 그저 재미로 들어주면 좋겠다. 나는 한참 동아시아에서 전염이 진행중이던 2월, 3월에도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들의 대응이 지나치게 여유롭고 늦었던 것에 대해 무의식적 수준에서 “우리는 괜찮을 거다”라는 일종의 유사-면역학적 믿음이 작동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이것은 스페인의 트렌스젠더남성(MTF) 철학자 폴 프레시아도 (Paul B. Preciado)가 코로나 사태를 다룬 글에서 다음 구절을 발견했을 때 세운 가설이다.
 
“루이 파스퇴르나 로버트 코흐같은 세균학자들의 발견을 통해 “immunity(면역, 면책)” 개념은 19세기부터 법적 영역을 넘어서 의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신체로 여겨진 근대적 개인은 단지 자유주의 경제의 낙원일 뿐만 아니라 생명정치적 면역의 표준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적이고 가부장적-식민주의적 유럽 국가들은 근대적 개인의 이상을 만들었는데, 그는 단지 자유로운(남성, 백인, 이성애자) 경제적 행위자로서만 아니라 면역/면책된 존재로서, 공동체에 대해 빚진 것이 없는 분리된 신체로 이해되었다. 
[…]
우리가 지난 몇년간 사회에 대한 바이러스와 같은 위협이라고 간주한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대항해 취했던 국경봉쇄 정책이나 엄격한 수용 정책, 이동의 자유의 제한 등은 이제 우리 국내의 영토 안에서 재생산되고, 모든 인구로 뻗어나가고, 모든 개인의 신체에 새겨지고 있다. 몇 해간 우리는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시민권을 박탈한 채 수용소에, 무권리의 연옥 속에, 영원한 대기실에 가둬두었다. 이제는 우리가 수용소에 살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집이 바로 그 수용소가 된 것이다.” 
 
프레시아도는 이 글에서 Immunity와 community가 같은 어근 munus에서 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Munus는 “빚, 의무, 호의, 줌(선물 등)”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인데, immunity는 이 단어에 부정의 뜻을 가진 어두가, community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어두가 붙어있다. 즉 면역 혹은 면책(immunity)이란 빚진 것이 없는, 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설명하는 개념이고, 공동체(community)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그리고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을 일컫는다. 
 
프레시아도는 유럽의 근대적 개인의 형상 속에 이 면역/면책(immune)된 주체에 대한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의 이 환상속에서 전염병은 공동체(community)에 대해 빚진 것이 없는, 공동체에 해를 입히지 않는 “내 몸”과는 상관이 없는, “저들의 몸”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상 속에서 전염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은 “저들을 차단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미 3월에 많은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한 이탈리아나, 지금 그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내며 심각한 단계로 진행중인 미국이 이미 1월에 경고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취한 조치는 그저 “중국인 입국금지”였다. 지역사회 감염에 대한 대비는 너무나도 늦었다. 
 
어쩌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엘리트들은 자신의 몸이 곧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과학적 사실을 (적어도 무의식적 수준에서) “깨끗하고 건강한 이몸이, 이몸과 동류인 이들이,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리는 없지 않은가”라는 유사-면역학적 믿음으로 대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이런 (앞서 말했든 반증 불가능한) 가설까지 들이대는 이유는 아직도 도무지 유독 서유럽과 북미에서 과학적, 기술적 대처가 늦었는지, 그리고 영국이나 스웨덴에서는 심지어 집단감염(herd immunity)과 같은 비과학적인 대처방법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책으로 고려되었었는지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하고 건강한 개인이라는 유럽 시민성에 대한 미신(!)이야말로 그들의 신체를 그 어느 지역과 인종집단의 신체보다도 더 취약하게(verletzlich) 만든 원인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앞선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새로운, 민주적인 삶-의-형태가 무엇인지 토론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라고 제안을 한 바 있다. 실제로 비상사태 선언과 록다운으로 한국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권의 침해를 겪은 유럽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판데믹 이후 그저 유럽인들도 한국식 해법을 이후 다시 나타날 전염병 대처의 교본으로 받아들이면 끝나는 문제일까? 앞서 말했듯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독일인 독자들에게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한국식 해법이 기본적으로 (행)정부와 시민사이의 극도로 가까운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묘사하기 위해 문제 많은 ‘모성’ 개념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한다.) 이 글이 나간 뒤 받은 비판 중 내가 가장 수긍할 수 있었던 비판은 “바로 그 시민 가까이의 행정서비스가 민주화의 결과물중 하나인데, 왜 민주주의가 아니란 말인가?”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나도 이전 글에서 시민들이 정부의 경찰국가적 조치를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한국적 생명정치가 가진 민주주의적 ‘외양’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을 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서술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글은 ‘절망편’이었다!) 
 
앞선 글에서 내가 강조한 것은 남한이 급속한 근대화 및 민주화의 경로 안에서 서구를 모델로 하면서도, 서구와는 다른 ‘초서구적’(hyper-westlich) 형태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남한은 비슷한 독재 체제의 북조선과 경쟁하면서 권위주의적인 후기식민지형 근대화를 이뤘고, 이후 시민들은 한편으론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한편으론 독재시절의 유산을 변형, 재구성해가며 대통령 주도의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지금의 삶-의-형태를 만들었다. 
 
강경화 장관이 BBC인터뷰에서 분석한 것처럼 좋은 면만 보자면 지금 한국의 사회모델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이후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정부를 시민들이 더 앞서서 요구하는 민주주의적 경찰국가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구적 시선에서 보자면 이것은 일종의 키메라와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Demokratie)란 한자로나 유럽어로나 인민의 지배를 뜻하지만 그 인민의 지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서구인들과는 사뭇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반독재”이다. 즉 억압적인 권위적 정부 대신 시민의 목소리와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정부를 갖는 것이다. 
 
서유럽인들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묻는다면 많은 경우 인민의 지배라는 기본적 정의 이후 자유로운 개인들이 회의체를 통해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이어서 나올 것이다. 군대나 경찰, 행정조직과 같은 권력조직에 대한 대의기구의 통제를 민주주의적 행정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서구인들에게 (각급 의회를 항상 불신하고) 행정과 시민의 가까운 거리를 민주주의의 성과로 이해하는 한국모델을 이해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코로나 판데믹은 서구사회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한국은 그렇게 20세기와 21세기 초반의 역사를 겪으면서 서구와는 다른 방향으로, 혹은 초서구적 방향으로 발전한 민주주의 체제의 한 예일 뿐이다. 이번 판데믹은 단지 서구사회의 갱신이 지체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서구 현대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들과 서구인의 주체성 자체가 의심과 회의 앞에 놓이게 만들었다. 서구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권위적인 체제들만이 아니다. 지금 서구인들에게 일종의 ‘위로’를 주고 있는 한국식 연성 경찰국가 모델조차도 서구의 가치적 배경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 모델이다. 
 
모두가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란 ‘유럽’이나 ‘한국’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구의 패권이 없어지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나는 종종 사석에서 한국으로 따지면 386, 미국이나 유럽으로 따지면 베이비부머 세대의 남자 지식인(그러니까 아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문명”, “패권”, “경쟁” 이런 단어라고 놀리듯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건 보통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문명, 패권자, 혹은 경쟁자와 동일시하는 심리가 보여서 어처구니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성별, 다른 세대에게선 좀처럼 찾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그런 문명사와의 동일시에 쏟을 에너지를 좀 더 아래에다 쏟는 것은 어떨까. 그 서구패권의 종식 이후 세계는 그래서, 누구를 위한 세계인가?
 
민주주의는 그 말 그대로 demos의 것, 인민의 것이다. 유럽의 인민들은 이 정의에 다시 도달하기 위해서 “자율적이고 독립된, 면역/면책(immune)된 개인”이라는 유럽중심주의적 환상을 넘어 거기에 선행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공동의 것(the common)을 재발견해야 할 과제 앞에 섰다면, 한국인들은 이에 더해 정부의 통치와 위임을 넘어서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 가야 할 민주주의적 성인됨이 무엇인지 정치적 실천 속에서 발견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문명이 어떻고, 패권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지우고 나면 나, 그리고 지구 전체의 동료시민들이 겪는 다종 다양한 삶과 민주주의의 위기가 보인다. 
 
농담을 설명해야 하는 사태는 희극인들에겐 가장 치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희극인이 아니라 글솜씨가 부족한 대학원생일 뿐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몇 마디 해명의 말을 더 보태본다. 진지한 반론을 제기해 주신 한승동 주간과 지면을 제공해 주셨던 <피렌체의 식탁>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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