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의 독재

2009/09/09 00:22 베껴쓰기

필딩이 소설의 형식에 대하여 전적인 자유를 주장한다고 할 때, 그는 우선 소설의 의미와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되는 행동, 몸짓, 말의 인과 관계, 즉 영국인들의 용어로 말하자면 '스토리'(story)로 소설이 환원되기를 거부하고자 한 것이다. '스토리'의 절대주의적 권력에 항거하여 필딩은 특히 "그가 원하는 곳에서, 그가 원할 때" 자신의 주석과 성찰의 개입에 의하여, 달리 말하자면 여담(digressions)에 의하여, 서술을 방해할 권리를 내세운다. (......) 그[로렌스 스턴]의 소설을 무의미하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올바른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필딩이 말한 바를 되새겨 보자. "여기에서 우리가 독자에게 제시하는 양식(糧食)은 인간 본성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극적 행위들이 진실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열쇠일까?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가리는 장벽이 아닐까?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 하나가 무의미 아닌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 행운일까? 불운일까? 우리의 굴욕일까, 혹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위안, 탈출구, 이상향, 피난처일까?

_밀란 쿤데라, <커튼>, 박성창 옮김, "'스토리'의 독재".

 

문학을 회피하면서도, 문학적 삶을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 진실을 말하지 않음 혹은 대면하지 않음, 말하지 않는 가운데 끊임없이 말함. 공간의 확보. 부지불식 간에 진실을 말해 버리기. 잊어버리기. 늘 말하되 영원히 말하지 않은 채로 두기. 한 발자국도 절대로 먼저 움직이지 않기. 하지만 늘 먼저 말하기. 견디되 다가서지 않기. 열어 두되 끌어당기지 않기. 그리하여 종국에 도달하려 함이 무의미인 걸까? 그것으로 된 걸까?

이러다 또 갑자기 면을 뒤집어 버리면 안 될 텐데. 스토리를 강요하는 건, 바깥일까? 아니면 안일까? 여하간 몸 아픈데 마음을 다치니 뒤숭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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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9 00:22 2009/09/0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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