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밤은 못 샌다.

2008/07/03 02:26 생활감상문

한두 번 호기심과 술기운에 손 댄 경우를 제외하면...

담배를 안 피니까 하는 소리였지만... 10년 전쯤...

글 쓴다고 물 마시듯 커피를 들이켜고, 줄담배를 태워대는 사람에게

지나가는 듯이 수줍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커피가 의식을 연명하고, 담배가 글을 쓰는 거지.

그게 내가 하는 게 아니잖아.

무엇이든 중독될 지경으로는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역시 밤은 못샌다.

중고등학교 때도 좋아하는 과목은 12시 조금 넘겨서 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시험 전날이 제일 일찍 자는 날이다.

공부 아무리 많이 해봐야 몸 아프면...

정신이 몸이 싫다고 가출한다. 멍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명박이가 저리 머리가 나쁜 것도 잠을 제대로 안 자서다. 분명하다.)

 

방금 전에... 초고만 잡아놓고.. 한참 고쳐야 할 보도자료 파일을 닫았다.

동일한 글이 될 수 있는 파일을 세 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완전히 자유 연상법으로 쓴 문장들만 난무하고, 제대로 된 문단 하나 없는 파일.

하나는 "근대"를 중심으로 창의적으로 재구성해 볼까 하고 개요를 잡아둔 파일.

하나는 저자 서문을 기반으로, 책 소개만 기존 도서들과 차별화해서 무난하게 가려는 글.

 

선택은 세번째. 저자한테 묻어간다 해도 하는 수 없다.

두번째 파일을 가지고 "근대"와 "혁명"은 짝꿍이란 소리나 좀 늘어놓을까 하기는 했으나..

(그러면 지금 시국하고도 연결되겠다는.... 블로그에 쓸 글을 보도자료에 쓸 뻔한 것이다.)

과도한 해석만 담긴 글보다는,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소개하는 거나 제대로 하자 싶어서다.

 

이럴 것을 하루 종일 왜 끙끙거리며 파일을 세 개나 만들었냐고?

비디오를 빌리러 가서도, 옷을 살 때도...

꼭 두 개 이상 골라놓고 하나를 골라야 젤 좋은 걸 골랐다 싶은 걸 어쩌겠어.

 

이 시간에 자면.. .이미... 내일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마무리하기는 글렀다.

그럼 또 나의 필살기, 벼락치기밖에 답이 없겠지.

시간은 어찌어찌 대겠지만... 퀄리티가 부족한 것은 나도 알고, 남도 알고.

깊이에 대한 강박은 늘 있는데.... 컴플렉스가 생길 지경으로... 나도 고민은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방법은 꾸준함과 성실함밖에 없는 건 나도 아는데...

"명검도 갈지 않으면 녹슬 뿐"이라고 표어까지 만들었는데...

(뭐 꼭, 내가 명검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알고 보면 일 찬찬히 하는 걸 더 좋아하는데. 진빠지게 일하고 혼자 흐뭇해할 때도 많은데...

이번엔 또 무슨 욕심이 나를 조급하게 했는가.

 

커피 대신, 담배 대신, 무슨 욕심이 나를 움직였든...

그것은 내 안에 있지, 내 바깥에서 온 것은 아니다.

 

역시 나는 밤을 못 샌다는 이 부실한 신체의 능력도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듯.

그러니 이만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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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3 02:26 2008/07/03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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