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끝났다.

2008/08/09 11:30 생활감상문

어젯밤으로 업무일 기준 5일의 여름휴가가 끝났다. 지금은 그냥 주말이다. 또 한 주의 일상을 준비해야 하는 주말. 하지만 사실은 올해 하반기 전체를 조망해야 하는 주말이기도 하다.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놀다 들어오면서... 아, 이걸로 휴가 끝이구나 했을 때도... 섭섭한 기분보다는 올해도 뭔가 큰 거 하나 넘겼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게 들었다. 휴가 기간에 어케든 나를 리셋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그랬나?

 

처음 휴가 계획을 세워놓곤... 참 발전이 없다 싶었다. 무주 갔다가 서울 와서 영화 보고, 사람 만나고, 부모님 댁 가고, 집 대청소하고. 매년 반복되는 패턴. 그래도 뭐 가고 싶었다. 아니, 가야 했다.

 

그런데 이번 휴가는 뭔가 달랐던 것 같다. 같은데 또 다른 것. 매번 동일한 형식을 반복해도 변화는 있는 법이지만, 올해는 그 이상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이 있었다. 예를 들면, 큰 방향의 계획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타임 스케줄 같은 건 없었는데... 그때그때 무언가 일어나서 잘 놀았다는 것. 어찌 생각하면 운이 좋은 거지만, 사실은 좋은 사람들과 있어서 그랬겠지?

 

내 여름 휴가의 시작은 언제나 공간 이동이다. 일단 서울을 떠나야 한다. 공간이 달라져야 행동도 달라진다. 무주에 혼자 갈 줄 알다가 임박해서 시간을 맞춘 Y군, M군 들이랑 가게 되었다. 또 처음 같이 놀러간 거라 서울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니까 신선하고, 즐거웠다. 각자 편안하니 하고 싶은 일 하면서도 2박 3일 참 잘도 가더라.

 

올라온 다음날인 수요일엔.... 날은 덥고, 몸은 골골하고, 놀겠다는 의지보단 쉬겠다는 욕구가 더 강했다. (장거리 여행으로 무리한 교통사고 부위 치료하러) 한의원 갔다 와서.... '을밀대' 냉면 먹으러 가자니까 그 사이 혼자 이사를 한 Y양이 힘들어서 운전 못하겠단다. 그런데 실망한 채 한의원 가서 눕자마자 H군이 회사 차로 홍대 쪽 나왔다며 점심 먹자고 전화를 한다. 덕분에 Y양까지 불러내서 맛나게 냉면 먹고, 집에 와 커피까지 나눠 마신 다음... 여행 빨래랑 이불 빨래나 하면서 집에서 그냥 가만히 쉬어 버렸다. 인생 뭐 있어? 땡기는 대로 하는 거지. 휴간데. 밤중에 옥상에 올라가 한낮의 열기에 바짝 마른 따뜻한 이불을 끌어앉고 냄새를 들이마시며 여름 바람을 쐬었다. 느긋하고, 따스했다. 내가 좋아하는 삶의 느낌.

 

그러나 목요일 아침... 쉰 건 좋았지만, 휴가 후반 스케줄을 하나도 안 세웠잖아?  K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니, 다시 고향 가셨단다. 아~~~ 선생님은 뵙고 싶지만, 이 더위에 삼성역까지 어케 가나 했는데... 개강해서나 올라오신다는 말씀에, 그럼 9월에 신촌에서 뵙기로 했다. 휴우~

 

그 전화를 하는 사이 S언니가 메신저에서 말을 건다. "그래서... 휴가 기간에 놀러온다더니 언제 놀러올 거냐?"고. 그리하여 곧바로 매그넘코리아 전시 갔다가 아예 분당의 언니네 새집까지 놀러갔다. 보고 싶은 전시를 만나고 싶은 사람과 함께 간 것도 좋았지만... 언니네 집에 가서 세살배기 회다메(언니 딸) 뛰어다니고, 같이 동요 씨디 듣는 와중에.... 이런저런 사람들 소식 나누고, 6년차 편집자, 7년차 번역자로... 생활인으로 꾸려가는 고단함 등 학교 다닐 때는 편하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까지 강도 높게 나누고, 휴가 기간에 한번도 먹지 못한 한식 생선구이 밥상까지 언니 친정 어머니께서 차려주셔서 맛있게 먹고 언니가 새로 번역한 소설책까지 선물 받고 정말 부족함 없는 기분으로 돌아왔다.

 

행복했다. 뭔가 자동문이 연달아 열리듯이 그렇게 앞으로 나가는 기분. 그리고 그 속에서 기분 좋은 선물이 들어 있는 상자를 하나하나 여는 기분. 그 순간 남은 휴가 잘 보내고 있냐는 M군의 문자가 왔을 때, 어이없을 만큼 신나서 자랑할 만큼. "마법처럼. 만나고 싶은 사람과 가고 싶은 곳에서"라고.

 

금요일 오전도 순조로웠다. 적당한 시간에 일어나 헬스장 가서 운동도 해주고... 아침도 맛있게 먹고, 한의원 갔다가 H양 만나서 근대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을 봤다. 전시는 나무랄 데가 하나도 없었다. 이국적이지도, 지나치게 강렬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표현적이면서도, 오히려 좀 주지主志적인 기분이 들었다. 한 번 더 보러 가고 싶을 만큼 좋았다. (뭐 추상화를 잘 몰라서, 그 섹션을 대충 본 것은 전시 탓이 아니라 내 탓이니까).

 

돌아오는 길에 약간 더위를 먹고 집에 와 쓰러져 두어 시간 쉬다가... 이른바 '정동 멤버'들 만나러 간다. 출판 선후배의 모임이지만... 업계 정보를 나눈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니라... 직장 이야기, 연애 상담, 온갓 소문과 괴담, 신앙 생활 등 편하게 나누면서 가족같이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잔소리도 듣고, 뭐 그런 자리. 만나기만 하면 12시를 넘겨서 만나기 전엔 두렵지만, 그냥저냥 만나는 사람들보단 확실히 심리적 보상(?)이 있는 모임이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아 자리가 길어지기도 하지만, 이 자리에 나가면 확실히.... 조금쯤 더 겸손해지고, 경청하는 법을 재교육받고 오게 된달까. 구체적이진 않지만, 편집자로 내가 살아가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하고, 좀더 노력해야 하는지 늘 체크하도록 하는 (청정 지역의 지표인)  "이끼" 같은 모임.

 

그렇게 휴가가 끝났다. 할 일이 잔뜩이다. 널부러진 책, 빨아야 할 옷, 빨아서 개놓지 않은 옷, 영수증들, 티켓들, 욕실의 곰팡이, 싱크대의 설겆이거리, 가스렌지의 음식 얼룩. 끓여만 놓고 먹질 않아서 쉬어버린 된장찌개. 고쳐야 할 시계. 버려야 할 쓰레기. 더워서 선풍기 바람 바깥으로 한발짝도 못 나갈 것 같건만...

 

그래도 뭐 좋다. 잘 놀았으니까. 까짓꺼, 뭐 청소 좀 해주지 뭐. 나 좋다고 하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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