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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가 갼질갼질~

아이가 필요한 만큼 부모가 기다려주고 욕구를 채워주면 아이는 스스로 일어서고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 지금까지는 '나'와 충돌 없이 '희생'이라는 생각 들지 않고 대부분의 순간을 감탄하고 놀라며 감사하고 행복하게 아이를 키웠다. 내가 고되도 홍아가 채우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 마음을 이뤄주려 애를 썼다.

 

너무너무 어렵게 아이가 생겨서이기도 할 테고

홍아의 존재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고 근사하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지금이 평생 홍아의 무의식과 의식과 자존감과 등등 자신의 기둥을 세우는 중요한 때이기도 하고

전업 주부가 아니기에 휴직을 낸 시간동안 홍아에게만 충실하자는 마음도 있고

학교에서 남을 아프게 하거나 자신을 아프게 하는 아이들의 뒤에는 부모가 있음을 많이 봤고

부모의 폭력 앞에서는, 그것이 그들간의 일이고 그들에게는 사소한 것이더라도, 아이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는 걸 겪어왔기에

아이가 아파하거나 부족해하는 것을 내가 못 견뎌하기도 하기도 해서

기쁘게 노력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는 이런 나를 좀 유별나다고 한다.

특히 우리 엄마는 내가 너무 애한테만 애쓰며 산다고 못마땅해한다.

내가 더 품고 있을수록 더 못 떠날 거라며 당장이라도 어린이집에 홍아를 보내 바깥 생활에 적응시키라 한다.

(엄마랑 나 사이에는 더 복잡하고 미묘한 뭔가가 있는 것 같지만..)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걸. 만족한 홍아가 잘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행복인걸.

 

그런데 이제는 엉덩이가, 홍아 표현으로, 갼질갼질해지려고 한다.

 

젖을 먹이는 것도 몸이 힘들어 하고

밖에 나가고 싶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고

내 일도 하고 싶어진다.

직장으로 돌아가면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더 많이 하게 된다.

마음이 뭔가 답답한 것이 막 돌아다니고 티비 보고 영화도 보고 내 위주로 내 생활을 꾸리고 싶어진다.

 

홍아가 좀 컸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제 홍아는 설명을 하면 이해를 하고 수긍을 할 수 있다.

자기 생각을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밤 새 쉬를 안 하고 자기도 한다.

아플 때 보니 젖을 안 먹고 잘 수도 있었다.

혼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소꿉놀이를 하며 30분 가량을 놀 수 있다.

 

아이 낳고 본 책 중 '베이비 위스퍼'라는 책은 안 볼 걸 그랬다고 후회가 된다.

아이를 기다려 주지 않고, 기다리기 힘든 엄마를 위해, 자연스럽지 않은 방법으로 아이를 떼어놓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그 방법이 아니었어, 하고 맘 편히 말하지만

홍아 어렸을 때는 책에 나와 있는 경고들 때문에

아이가 원해도 수유 간격을 늘리기 위해 젖을 안 주어야 하는지,

재우고 나서 바로 먹이고 놀다 또 재우는 패턴을 지켜야 하는지,

3시간 패턴이 4시간이 되도록 억지로 아이를 틀에 맞추어야 하는지,

밤에 먹이는 젖을 억지로 떼고 울면 안아줬다 안 울면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아이가 안 울고 혼자 자도록 해야 하는지,

등등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지키지 않는 것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었다.

아이를 키울 수록 그 책의 내용을 따라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기다려주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궁금하다.

언제쯤이면 내가 먼저 안 떠나고 준비된 홍아가 먼저 떠날 수 있게 될까?

마냥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만큼 되었으면 준비를 시켜야 하는 것일까? 기저귀를 떼거나 젖을 떼는 일처럼 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젖을 떼고 싶은데, 주변에 아이를 키운 선배들은 거의 모두 '한 번은 울려야' 가능한 일이라 한다.)

아이가 크면 또 어떤 모양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홍아는 운다. 홍아의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런 홍아를 울보라고 하며 울지 말라고 한다. 아이가 마음에 안 들면 울지 그걸 어떻게 참느냐고 또 울고 싶으면 울어야 하는 거라고 그런 말씀 마시라고 했지만, 나도 못 참겠는 때가 있다.

 

외할아버지가 안경을 썼다고, 할머니가 모자를 썼다고, 아빠 베개가 엄마 이불 위에 있다고, 자기 이불이 판판하게 안 펴져 있다고, 자기는 업히고 싶은데 안아줄까 물어봤다고, 밤에 자다 눈을 번쩍 뜨고는 엄마가 안경을 벗었다고, 자신을 안고 일어서서 마루로 나가라고, 뉘이는 자세가 아니라 세우는 자세로 안으라고, 방금 아기띠로 업으라고 하고서는 아기띠 풀라고 울면 내 속도 부글부글해진다.

 

어제는 우는 소리를 못 듣겠어서 엄한 목소리로 '뚝!' 했더니 정말 홍아가 울음을 그쳤다.

놀랐다.

으잉, 이렇게 하면 울음을 그치네?

그런데 이렇게 울음을 그치게 해도 될까?

 

지나온 길을 말하는 것은 쉽다.

앞으로 갈 길을 가늠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일관된 기준이 필요하다.

 

떠날 때까지는 기다려 주기.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그런데 '기다려 주고, 채워주는' 것의 내용이 더 복잡해지고 섬세해지는 때가 오는 것 같다.

또 헤롱헤롱대고픈 나의 욕구도 돌봐주어야겠다.

 

다가오는 계절이 겨울이 아니라 봄이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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