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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실험

까만 저녁. 집에 오니 죽집 봉투가 문고리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고, 그 안에 만 원이 한 장 보인다.

'우와, 이게 여직 있구나!'

 

1. 그제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농활 갔을 때 만난 농민회 오빠(아들 딸 모두 스무살을 훌쩍 넘긴 아저씨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오빠, 형이다.)가 내 주소를 물으셨다고.

대학 다닐 때 김천으로 농활을 갔는데, 함께 농활을 갔던 선배 몇과 나는 졸업 후에도 오빠와 언니를 만나러 김천에 갔다. 오빠는 몇 년 전, 서울에서 농민회 집회가 있을 때 묵을 곳이 마땅치 않다 해서 울 집에 오셔서 주무시고도 갔다. 요즘에도 종종 보일러가 너무 뜨거웠다고, 푹 쉬게 해 주어 고맙다고 그 때 일을 떠올리신다. 전화를 걸었더니 감자를 보내주신단다. 조마 감자! 캘 때는 허리 빠지고 뙤약볕에 눈물나지만, 푹 찌면 폴폴 김 나는 그 맛난 감자. 죄송하지만 감사히 받기로 했다. 택배비는 착불로 받기로 했다.

 

2. 어제 언니가 택배를 부쳤으니 맛나게 먹으라는 연락을 주셨다.

 

3. 오늘 감자를 받기로 한 날이다. 그런데 쭌도 학교에 가야 하고, 나도 학교에 가야 한다. 더 일찍 나가는 나는 경비 아저씨께 드릴 음료수와 사탕을 싸 주며, 아저씨게 택배비를 부탁드리라고 쭌에게 부탁하고 나왔다. 오전에 우체국 택배에서 오늘 배달하마고 문자가 왔길래, 집에 사람이 없으니 경비실에서 택배비를 받아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퇴근길에 동료 신혼집에 들러 떡볶이와 순대를 먹고 놀았다. 택배는 생각도 안 했다. 집에 올 때가 되니 '아차, 택배!'. 쭌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쭌도 아직 밖이란다. 그러고 하는 말. '경비 아저씨께 택배비 안 맡겼어.' 으잉? 그럼 어쩌란 말인가.

 

낯가림이 심하여 남에게 부탁을 못 하는 쭌의 성격이 51% 이상, 실험을 해 보고 싶은 호기심이 49%쯤 원인이 되어, 쭌은 문고리에 봉투를 걸고 거기에 만 원을 넣어 두었다. 그러고 이런 편지를 문에 붙여 놓았다.

 

"택배 배달하신 분께

언제 오실지 몰라 잠시 외출합니다.

아래 문고리에 걸린 봉투에 1만 원을 두고 갑니다.

상자는 문 앞에 두시면 되고

거스름돈은 봉투에 넣어 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운 날 건강하십시오."

 

물건은 왔지만 거스름돈이 없거나, 물건도 없고 만 원도 없었다면 무척 속상했을 것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이 미워졌겠지. 아 누군지 확실히 아는 사람 하나도 잔소리를 제법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이 고스란히 봉투 안에 있었다. 집 앞을 지나갔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사람을 믿을 수 있구나. 함께 살 만 하구나.

 

학교는 갈수록 흉흉하고, 나라꼴은 더 흉흉한데, 이렇게 감자를 보내주는 인연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는 손이 있어 힘을 얻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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