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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편지

  • 분류
    이야기
  • 등록일
    2009/04/02 11:11
  • 수정일
    2009/04/02 11:11
  • 글쓴이
    파란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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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아가 세상에 오고

엄마, 아빠가 3주 동안 산후조리를 도와 주셨다.

같이 살면서

많이 부딪쳤다.

엄마에 대해서는 새삼 감동한 점이 많았지만

엄마는 엄마 딸을 과하게 챙기느라 오히려 딸과 충돌했고,

아빠는 참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딸과 충돌했다.

사는 방식이 달라서도 많이 부딪치고

아이를 키우는 방식도 달라서 또 부딪쳤다.

부모에게 받는 상처 운운하며 나도 성질부리고 살 거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오히려 대전에 가시고 나니

뒤늦게 죄송한 맘과 감사한 맘이 든다.

 

대전에 간 아빠가 편지를 보내왔다.

나도 이제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한 철학을 좀 정리했기 때문에

맘 편히 아빠의 글을 읽는다.

 

그런데 맘 한 구석엔

'맞는 말씀이야. 하지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잔소리 듣는 것은 싫어.'하는 생각도 좀 든다.

아직 내 안엔 독립하지 못한 아이가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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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글과 애기 사진 반가웠다.

사진과 메일 홍아 생각날 때마다 보니까 하루에 열 번도 넘겨보는 것 같다.

메일 속의 사진을 바라볼 때  화면에 반사되는 나의 얼굴도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행복하고 흐믓한 표정인 것 같다.

이렇게 예쁜 홍아를 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그동안 고생한 네게 새삼 감사.

그런데 수안 엄마야, 애기가 우는 것이 꼭 젖 달라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

이른바 '손 탄다'는 말대로 손으로 얼러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아예 얼러주지 않았으면 그런 욕구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손타는 것  무서워서 쓰다듬고 주므르고 흔드는 손 동작을 멈춘다면

말귀도 못 알아듣는 아이와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

내 말은 엄마가 시간을 충분하게 확보해 두었으니 싫컷 어루만지라는 것이고

아이도 엄마의 따뜻한 손길이  평생 항상 함께 있음을 느끼게 하여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관심에 굶주리지 않고  항상 당당하게 인간과 세상을 대하게 하라는 거야.  

너는 수안이가 억압자의 인정( 선택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 비굴해 보이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을 거다.

나도 그래. 사랑받을 만하고  받고 있는 스스로의 존재의 무게, 자존심을 갖게 했으면 좋겠다. 

 

너는 아이가 너무 손타면 네가 버릇 없을 것을 걱정했지.

나는 아이에게 원칙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면 된다고 말했다.

일관성, 동일성을 요구하면 스스로를 다스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 때가 있다. 지금은 충분한 손길로 리비도를 만족시킬 때다.

왜냐하면 지금은 자아도 초자아도 없고 리비도에 가득찬 이드의 시대니까.

손타는 만큼 자아가 형성된다. 욕망은 채워주는 만큼 자극을 받아 커진다.

나는 사랑에 대한 욕망이 한없이 커지고 커진만큼 다 채워지길 바란다.

비록 그 욕망은 이기심이나 그 이기심이 커지는 만큼 존재의 깊이와 넓이고 자랄 것이다.

욕망이 식거나 없는 아이는 생기를 잃어버린 아이다. 생기를 잃은 아이의 눈동자는 멍하다.

초점이 없는 거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으며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지 막연하며

그걸 어렴풋이 알더라도 얻거나 이루려는 간절함이 의지가 박약하다. 생기가 없는 거다.

일깨워진 리비도 그것을 에고라 자아라 하자. 그래서 에고 또는 자아는 욕망의 주체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너는 욕망하게 하여 자아를 형성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채워줘서 욕망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 수안이가 요구하는 모든 욕망은 수안이가 자라는데 다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욕구가 결국은 지적 호기심까지 가게 만들어야 인간의 생명력을 다 발휘할 수가 있겠다. 인간적 가능성을 발휘하게 할려면 지적 호기심이 충만해야 생기있다고 말할 수 있겟다.

 

그러나 수안이도 타자의 욕망을 인정할 수 있을 때가 온다. 그 때가 되면 나와 네가 함께 인정해야하는 그러니까 서로 침범할 수 없는 욕망의 경계가 있음을 알게 될 게다. 서로가 내맘대로만 하면 서로를 못살게 하는 것 밖네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리고 그 경계를 내면화해서 규범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될 게다. 바로 그때 입장 바꾸어 생각하기를 요구하고 남에게 요구하는 원칙을 자신도 지켜야 함을 요구할 수 있다. 이때 지켜야할 규범 원칙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이미 있던 사회적 약속에 동의하는 과정이고 동의되고 내면화된 원칙들이 바로 초자아가될 게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그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그 중요한 정보는 그의 성격이며, 성격은 행동의 원칙들의 묶음이다. 너는 수안이와 약속을 하면서 바람직한 원칙들의 묶음이 되도록 성격 형성에 도움 줄 수 있다.   

 

얘야 나도 수안이 기르는데 도움 주고 싶었단다. 이제 수안이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게다. 그레서 자꾸 조언 하고 싶다. 지금은 수안이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 주자꾸나. 더 많이 요구하게 하자꾸나.

2009. 3. 30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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