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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없다?

1. 진보넷에 들르는 사람 중 많은 이는 삐삐를 써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시로는 최첨단 기계였는데

지금은 고풍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기계.

나는 삐삐 인삿말에 시도 녹음하고, 음악도 녹음하며

삐삐 가꾸기에 공을 들였다.

 

녹음된 소리에는 소식도 정도 담겨 있었다.

뜨거운 연애도.

 

핸드폰을 사고서는 통화보다는 문자가 그 역할을 더 담당한 듯 하다.

통화는 주로 바로 전해야 할 소식을 전했으나

감성이나 감정을 전하기로는 문자가 더 제격이다.

그래서 나는 '띠룽'하는 문자 오는 소리를 좋아했다.

 

2. 그런데 새 직업을 갖고 문자 메시지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문자는 아이들과의 훌륭한 의사 소통 수단이다. 부모님의 불화나 책을 읽고 든 느낌, 늦은 밤 길을 걷다 문득 든 생각, 보고 싶은 마음... 그런 것들을 나누어 행복했다.

 

하지만 새로 오는 문자는 너무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이기적인 내용도 많았다.

 

"내일 교복 입고 가나요?"

"수행평가 어디에 올려요?"

"내일 시간표가 어떻게 돼요?"

"누구 전화번호 좀 알려 주세요."

"시험 범위가 어디에요?"

 

게다가 이건 늦은 밤이라는 자각도 없이 아무 때나 울렸다.

학원이 자정이 되어야 끝나는 곳이 많아, 문자도 자정 넘어 때도 없이 울렸다.

 

새벽 두 시에

"고전소설은 한글로 썼나요?"(시험 전 날 밤)
"선생님, 지금 뭐하세요?"

 

지금 뭐하냐는 질문은 혹 아이가 뭔 혼란을 겪고 있어 도움을 바라는 건가 싶어 응답을 했지만, 분명히 학교에서 말을 했고, 그것도 여러 번 말을 했고, 주의를 준 것까지, 자기가 필요할 때 묻는 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이었다.

 

주의력 없이 행동하고 자신이 필요할 때 내게 묻는 것은

내게 너무 예의없는 일이라고, 나는 화가 난다고, 답하지 않겠노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건만 그 말마저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3. 아이들의 연락보다 더 성이 나는 것은 부모(거의 어머니)의 배려심 없는 전화다.

지금 막 전화 한 통을 끊었다.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꽤 오랜시간 통화를 했다.

학부모는 아이의 반을 바꿀 수 없느냐고 묻는다.

낼모레면 개학인 이 시점에.

이유를 물으니 여학생 간 알력 다툼이 있었나 보다.

 

최대한 친절하게(아이나 부모의 속상한 마음을 이해했으므로)

시간 문제나 행정적인 문제나 원칙의 문제로도

반은 바꿀 수 없다고 설명을 하였다.

아이가 사회 생활을 하려면 이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고 강하게 키워달라고 되려 부탁을 했다.

 

이미 드러난 문제이고 심각하다면 당연히 반배정에 참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2월 29일에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4. 아이들의 이기적이거나 새침한 모습, 안하무인인 태도.

그 아이들의 부모를 만나면 답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크기 전에는 죄없다 여겨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부모는 죄 있다.

 

5. 이런 경우를 여러 번 접하니 부모 되기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정하거나 상상력이 있고, 홀라당 깨는 기발함이 있고, 친화력이 좋고,

자기가 하고픈 일을 찾아 몰두하는 아이들을 보면

새삼 그들의 부모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웠을지 궁금해진다.

 

6. 낮에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어른인 어른은 없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했다.

어렸을 때 생각했던 어른의 상.

그것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어렸을 적 아이를 안고 아이처럼 행동을 한다.

때로는 아이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철없음'에 들어 있는 '어리석음, 타인을 해침'과 '어림'은 구분해야 한다.

나이값을 못한다는 말과 예의가 없다는 말은 공통분모는 있지만 같은 말은 아니다.

 

그런 어른은 되지 말되, 이런 어른은 되어야겠다.

그것이 크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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