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킬링필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캄보디아는 우리에게 생소하고, 과거 크메르왕국의 유산인 앙코르와트라는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역사에 좀 더 관심 있는 사람은 1970년대 후반 약 200만 명의 국민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킬링필드'를 언급하기도 한다.

 

나 역시 캄보디아를 여행하던 중, 킬링필드 박물관에 들르게 되었는데 문득 어떻게 1/3에 달하는 국민들이 희생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흔히 정치적 탄압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상식적으로 일반 국민들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는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걸 감안하면 (인종이나 종교도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200만 명씩이나 살해되었다는 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킬링필드를 알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건 1984년작 영화 '킬링필드'이며, 근래의 여행객들은 현지의 유명한 박물관인 툴슬렝 박물관에서 그 역사의 잔혹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어디에도 왜 200만 명 씩이나 죽었는가에 대해 자세한 답을 얘기해주는 곳은 없다. 역사적으로 내막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대량학살이 어디 한 두 건이겠냐마는 캄보디아는 생소하기 때문에 호기심이 더 발동했는지 모르겠다.

 

친구에게 이 얘길 했더니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유재현, 그린비)란 책을 추천해주었다. 이 책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에 드리운 아픈 역사를 기록한 여행 에세이다. 식민지 지배와 내전의 역사를 겪은 건 우리를 포함하여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숙명이었다. 그래서인지 동아시아의 현대사를 보는 것은 낯설지 않다.이 책에 킬링필드에 대한 내용이 있어 정리해보았다. 

 

 

(질문1) 원리공산주의자라고 알려진 폴포트가 집권한 1975~1978년까지 사망한 캄보디아인 : 약 200만 명 추정. 그 수치의 진실은?

 

(답) 이 수치는 영국 학자 키너가 당시 난민촌 1,5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조사에서 나온 수치이다. 그런데 이 수치에는 문제가 있다. 1998년 인구조사 결과 캄보디아 인구는 1142만명인데, 1979년 학살이 지난 후 인구를 560만 명으로 추산하면(75년에는 710~780만으로 추정. 3년간 약 150만~200만명 사망) 약 20년간 인구증가율은 100%에 가깝고, 79년 인구를 610만명으로 추산할 경우 증가율은 87%에 가깝다. 이는 남한의 베이비붐시대 1955~1974년까지의 유례가 없던 인구 증가율 61.3%과 비교했을 때, 1979~1991년까지 전쟁 상태에 있던 캄보디아에서 이런 인구 증가율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말해, 사망자 수를 과장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질문2) 그렇다면 사망자들은 어떻게 죽었는가?

 

(답) 결론부터 얘기하면 식량난으로 인한 아사자가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인구를 750만명으로 추정한다면, 1인당 하루 150그램의 쌀을 기준으로 필요한 식량은 41만 톤인데, 당시 자급률이 20%선에 불과하였고, 해외에서의 지원도 턱없이 모자랐다. 때문에 대규모의 아사자가 발생할 가능성은 예견된 것이었다. 

 

(질문3) 식량난이 발생한 원인은 무엇인가?

 

(답) 2차 인도차이나전쟁(1960~1975년 베트남전쟁) 때 북베트남에 보급로를 지원한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미군의 비밀스러운 폭격에 시달렸는데 국제사회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미국이 캄보디아를 대상으로 1960년대 말 실시한 비밀폭격은 무려 23만 회 출격에 폭격지는 113,716곳에 이르고 투하된 폭탄의 양은 275.6만톤이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되었던 양과 맞먹는 양이다. 곡창지대를 중심으로 투하된 폭탄으로 인해 식량 수출국이었던 캄보디아는 오히려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과 유실된 농토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캄보디아의 식량 자급률은 20%대로 떨어졌고, 캄보디아에 세워진 미국의 괴뢰정권이 물러간 1975년 이후 미국의 식량 지원이 끊겨 대량 아사자가 발생할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질문4) 그렇다면 우리가 보는 킬링필드의 진실은 무엇인가?

 

(답) 킬링필드 학살에 관한 이미지는 베트남이 심어놓은 것이다. 베트남은 통일 이후 캄보디아를 침공하였는데 당시 국제사회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그 때 베트남이 펼친 전술은 킬링필드의 학살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자신들의 침공을 정당화할 명분을 세우는 것이었는데, 학살과 고문의 대표적인 박물관인 툴슬렝 박물관 역시도 당시 베트남이 설립한 것이다.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건물은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글이 없이 사진이나 고문기구, 해골과 같은 이미지로 채워져있고, 이는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성에 앞선 놀라움과 증오를 안겨주는 장치로 베트남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결론)

 

물론 당시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만행은 사실이고,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정확한 역사적 관계를 알지 못하면 원인 분석에 오류가 발생한다. 원인 분석의 오류는 끔찍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방해하고, 다시 그런 역사가 반복될 여지를 남긴다. 즉,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잘못된 원인으로 잘못된 결과를 끌어내는 악순환의 고리를 처음부터 제거하는 것이기에 무척 중요하다.

 

킬링필드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대량학살, 정치적 탄압만이 진실은 아니며, 그것은 일면일 뿐이다. 이런 결론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세력을 경계하고, 생각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3/29 23:54 2010/03/29 23:54
Tag //

우리나라에서 불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산 중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는 절, 그 입구에 서있는 무서운 형상의 조형물, 각종 불상들과 산신령을 모셔놓은 법당부터 시작하여 죽으면 지은 복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사상, 가족의 번영과 안녕을 비는 할머니들의 신심깊은 오체투지까지 기복신앙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게다가 욕심을 버리라는 교리는 마치 경쟁을 회피하고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600여 년전, 인도의 한 수행자-붓다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정립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져가면서 때로는 국교로 인정받아 위세를 떨치고 때로는 박해를 받아 명맥만을 유지한 채 갖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지금의 모습에 이른 것이 불교의 변천사라 한다면 과연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무엇이고 그 가르침이 탄생한 배경이 어떠한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불교가 새로운 문명을 열어가는 대안이라는 시각이 늘어가는 요즘, 기복신앙이 아니라 원리이자 과학으로서의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그 시작을 확인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정신이 살아있다면 형식이 바뀜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지만, 지금의 불교의 모습은 정신을 잃고 형식을 강조하는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 정신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년에 정토회에서 진행하는 불교대학을 들으면서 얻게 된 불교에 대한 이해는 불교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을 바꾸게 만들었는데, 한 마디로 금으로 치장된 부처님상에 쏠려 있던 시선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법,法)'으로 옮겨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음의 작용하는 원리를 알고,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은 자연스레 부처님의 생애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는데, 부처님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호기심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인간 붓다 -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이다. 산뜻한 느낌의 노란 표지와 만만찮은 두께는 묘한 대비를 이루며 마치 붓다의 가르침이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적용가능한 살아있는 것이란 느낌과 함께 하지만 그 내공만큼은 책의 두께처럼 깊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책의 내용은 책 모양처럼 쉽고 명쾌하며 현실과 밀착되어 있었다.

 

<인간붓다를 읽고 있는 흠겸>

 

감명깊게 읽었던 한 구절이 있다. 왕자로 태어난 붓다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는 과정이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우리가 보통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일 때, 바뀐 가치관에 따른 삶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기존 가치관에 회의를 갖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새로운 가치관은 '심정적 동조 혹은 논리적 정리에 의한 가치관'으로 하나의 이론에 불과합니다. 

 

둘째, 새 가치관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당위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고자 노력하지만 아직까지 과거에 형성된 욕망 중심의 가치관으로 갈등하고 괴로워하는 상태입니다. 만약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당위적 삶으로서의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욕망 중심적인 삶의 가치관을 극복해 갈등이 완전히 제거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남을 위해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그 사람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면서부터 비로소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같은 삶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가치관이야 말로 '삶이라는 현실에서 진정으로 행복을 주는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가치관의 변혁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옮고 그름'에 대한 잣대로 바라보던 세상을 '욕망과 그에 따른 결과'로 바라보게 된 인식의 전환이었다. 책에서도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 마왕의 공격을 받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왕이 상징하는 것은 욕망의 세계이며, 자신이 쌓아온 욕망을 완전히 극복함으로서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이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흔히 하는 오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이 책은 단순히 붓다의 삶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 붓다가 출가한 이후 겪었던 갈등과 모순에 대한 이야기이자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과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이고, 붓다가 그것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은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 괴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일종의 고도의 자기계발서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면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도 탁월한 효과를 준다는 지인의 말씀은 공감가는 말이다.

 

마치 기술자가 기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잘 알게 되면 고장을 수리하는 것을 넘어서 응용이 가능하듯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것도 마음의 작용원리를 잘 알아 감정이나 욕구에 휘둘리지 않게 되면 자신을 더 크게 쓸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아주 현실적이고 삶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 깨달음이란 것이 자신을 위함이 남을 위함임을 알게 되어 자연스레 평화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니 긴장감이 높아지는 현 정세에 꼭 필요한 배움이 아닐 수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3/19 13:13 2010/03/19 13:13
Tag //

습(習)

from 잡기장 2010/02/02 16:09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에 깊은 굴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그 굴에는 '습(習)'이라 하는 벌레가 산다.

지금껏 아무도 '습'의 실체를 확인한 바는 없으나
욕망을 먹고 산다고 알려져 있다.

'습'이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것'으로 인식되며,
'습'이 원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하기 싫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습'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될 경우
'습'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는데,
'습'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합리화'이다.

그렇게 '습'은 평생을 사람의 몸을 숙주삼아

 기생하며 살아간다.


'습'을 몰아내는 방법이 있다.
바로 '습'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습'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하더라도
묵묵히 해나가게 되면
'습'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의 굴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사람들은 '습'을 '자신'이라고 믿기 때문에
'습'의 존재도 인식하지 못하며, '습'을 보낼 생각도 못하지만
'습'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2/02 16:09 2010/02/02 16:09
Tag //

넛지

from 잡기장 2009/11/14 09:18

인트로 : 넛지가 당신의 모든 행동을 결정한다

 - 메뉴에 변화를 주지 않고 음식을 재배열 하는 것만으로도 특정 음식의 소비량을 무려 25%나 올리거나 내릴 수 있다. 사람들은 정황 또는 맥락의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의 변기에 파리를 그려 넣기. 밖으로 튀는 소변의 양을 80%나 감소

 

 

 

 2)

 

제1부. 인간과 이콘 - 우리는 천재인 동시에 바보다

 

1. 인간이 체결적으로 틀리는 방식

 1)

 

 2)

2. 유혹에 저항하는 법

 1)

 

 2)

3. 인간은 떼지어 몰려 다닌다

 1)

 

 2)

4. 넛지가 필요한 순간

 1)

 

 2)

5. 선택 설계의 시대

 1)

 

 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1/14 09:18 2009/11/14 09:18
Tag //

가치관,고정관념,선입견 등은 사물을 판단하는데 복잡한 요소를 제거해주어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우리사회의 대표적 고정관념인 빨갱이 컴플렉스를 통해 이걸 살펴보자.

 

한 사람이 어떠한 경험들을 통해 어떤 진보주의자를 빨갱이로 생각했다고 하자. (고정관념 형성)

 

이 사람의 고정관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진보주의자의 행동들은 빨갱이의 행동으로 해석이 될 것이다. 진보주의자가 진짜 빨갱이인지 아닌지는 관계없다. 믿음이 강할수록 확인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결과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경우 가치관은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믿기 때문에 가치관의 혼란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맞고 틀리고와 상관없이 가치관을 사수하려 든다.

 

만약 이 사람의 고정관념이 좀 물렁물렁하다면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개혁적 모습이 진보주의자에게 여러번 보이게 되면 이 사람의 고정관념은 허물어지고, 좀 더 객관적으로 진보주의자를 평가하게 된다. 이 사람은 그 댓가로 그 과정에서 혼란스러워지고 머리가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으며(가치관의 혼란), 향후 비슷한 케이스에서 여러번 검증을 하느라 피곤해진다.

 

고정관념이 강한 사람은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줄어들지만 사실을 왜곡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인생에서 선택의 폭이 줄어드는 반면,

반대의 경우는 열린 사람이란 평가를 듣고 선택의 폭도 다양해지지만 새로운 정보에 대해 여러 분석을 거쳐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선택에 대한 확신도 없어 행동력이 약하다.

 

이 두 경우는 모순된 가치관이 문제의 근원이다. 어떠어떠하면 빨갱이다 란 고정관념은 다른 여러 사례들에 의해 흔들리게 된다. 모순이 없는 가치관을 갖게 되면 가치관 때문에 흔들일 일이 없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모든 괴로움은 내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는 모순이 없는 가치관을 갖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가치관에 어긋나는 케이스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확신을 갖게 되고 가치관이 흔들일 일이 없다. 그렇게 되면 이걸 활용하여 내 마음을 돌아보는 걸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되고, 괴로움을 없애는 과정에 더욱 쉽게 진입하게 된다.

 

한 발 더 나아가 가치관을 넘어 믿음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면 효과는 더 크다. 가치관보다 몰입정도가 높은 믿음은 모순된 입장에서 믿을 경우 그 타격도 그만큼 크지만, 모순 없는 진리에 대한 믿음 일 경우 돌아오는 것도 크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래서 믿음이 무서운 것이다.

 

이것이 모순된 고정관념과 모순되지 않은 가치관의 관계이다.

 

끝으로 앞서 얘기한 빨갱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논리적으로로 접근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당신의 고정관념은 모순이 많소~ 라는 걸 확인시켜 준다면 그 사람은 오랫동안 쌓아놓은 믿음의 성이 무너지는 충격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그걸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효과적인 방법은 저 사람은 빨갱이가 맞지만 빨갱이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란 인식을 심어주거나, 빨갱이란 원래 없다는 인식의 전환을 시켜주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을 이루는 가치관을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충돌지점을 그대로 놔두고 논리적으로 이기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목숨걸고 자신의 주장을 사수하려 들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7/11 01:59 2009/07/11 01:59
Tag //

인순이

from 잡기장 2009/06/29 17:44

예병일의 경제노트 중에서

 

그녀는 아직 '전성기'가 안왔다고 말했습니다.

 

“더 올라가고 싶기 때문이에요. 할머니 돼도 여성적인 매력을 가진 가수로 남고 싶어요. 또 후배 가수 전체가 제 경쟁상대죠. 제가 가지지 못한 걸 그 친구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후배들도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기관리에 대한 이 말도 인상적입니다.
 

 

"매일 뒷산을 오르죠. 틈날 때 운동하면 실패해요. 일단 운동부터 하고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다고 생각해야죠."
 
그런 인순이의 꿈은 '자신이 100% 만족할 수 있는 공연'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6/29 17:44 2009/06/29 17:44
Tag //

블로그학교 정리

from 잡기장 2009/06/11 17:13

090610, 블로그학교 2강 내용 요약

 

(블로그질의 핵심 포인트)

 

[관심]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포스팅!

 

(예) 닭가슴살 양배추찜 (양배추 드시고 제주농가 도와주세요 : )http://v.daum.net/link/2645804/http://vibary.tistory.com/430

 

제주도 양배추 농가를 살리기 위해 양배추를 이용한 음식 정보를 올리고 마지막에 공동구매 등을 통해 목적을 달성

 

[공감]  제목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예) "비정규직, 부당한 차별 받아" => 공감도 낮음

        "'성모'없는 성모병원, 식권까지 차별" => 먹는 걸로 차별한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 형성

 

[참여]  쉽게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아이디어!

 

(예) '미아찾기에 참여해주세요' => 참여율 거의 제로

        '블로그에 실종자찾기 배너를 달아주세요' => 클릭 몇번으로 할 수 있고, 배너를 달 경우 개념블로거라는 평판까지 얻을 수 있어 참여율 급상승

 

        '우토로 마을 살리기에 서명해주세요' => 쉽게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끔

 

[정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직접 해봄으로써 정보의 신뢰도를 높임!

 

(예)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분당에서 과천청사까지 자전거와 버스의 속도 대결을 포스팅 하면서 인증샷을 올려 신뢰도를 높임.

 

[현장]  정보의 현장성, 접근성을 높임!

 

(예1) 마트 점원의 의자보급이 이슈화 된 이후 실제로 점원들이 의자를 이용하는지를 직접 확인하고 인터뷰까지 함으로써 현장성을 확보하고 신뢰도를 높임 

 

(예2) 일제고사 거부로 해직된 김윤주 교사의 졸업식 참여 포스팅에서 사진과 음악을 넣어 독자가 현장에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함.

 

해직교사와 아이들의 마지막 합창 : http://blog.ohmynews.com/dogs1000/157779

 

[소통]  독자들에게 경과보고를 통해 신뢰도 확보!

 

(예) 병에 걸린 어린이를 돕기 위한 모금 이후 수술 후 아이의 경과를 재포스팅 함으로써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이 뿌듯함을 느껴 재참여를 유도할 수 있음.

 

 

(파워 블로거의 요소)

 

1. 정보성이 풍부할 것 (독자가 얻어갈만한 것을 갖출 것)

2. 신뢰성을 확보할 것 (인증샷과 출처 등을 철저히)

3. 대중성을 갖출 것 (전문성과 대중성의 적절히)

 

 

(참고)  간디학교 교가, '꿈꾸지 않으면' 가사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하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하네    

   아름다운 꿈꾸며 사랑하는 우리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는 우리들    
   누구도 꿈꾸지 못한 우리들의 세상    
   만들어 가네                                    

   배운다는 건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우리 알고 있네 우리 알고 있네          
   배운다는 건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6/11 17:13 2009/06/11 17:13
Tag //

기사 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37&aid=0000003731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07년) 10월15일 미국 미네소타대학 레오니트 후르비츠(90) 교수,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소 에릭 S. 매스킨(57) 교수, 시카고대학 로저 B. 마이어슨(56) 교수를 올해 노벨경제학상 공동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수상 이유에 대해서는 ‘구조(제도)설계이론(Mecha-nism Design Theory)’의 기초를 설립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이 이론은 시장경제(완전경쟁시장) 이론의 비현실성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은 현실 경제에서 나타나는 ‘완전경쟁시장 실패’의 문제점과 대안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이란 무엇일까. 서강대 남재현 교수에게 이 이론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자. - 편집실 -

한 마을에 현명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이 재판관에게 갑과 을이 찾아왔습니다. 두 사람은 동업자로 함께 일을 시작해 양·소· 말을 열심히 키웠고, 그 대가로 이제는 큰 목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공동으로 소유했던 목장을 공평하게 절반씩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나눠야 할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떤 소는 다른 소보다 건강하고, 어떤 땅은 다른 땅보다 더 비옥해 동물 수나 면적으로 공평하게 나누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레오니트 후르비츠, 로저 마이어슨, 에릭 매스킨(왼쪽부터).


현명한 재판관은 다음 방식을 제안합니다. 먼저, 갑이 공동의 재산을 원하는 대로 둘로 나눕니다. 그 다음은 을에게 둘로 나뉜 재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입니다. 이 방식대로라면 을은 둘로 나뉜 재산 가운데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고, 이 사실을 잘 아는 갑은 최대한 공평하게 재산을 나눌 것입니다. 이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현명한 해법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죠. 그 목장의 재산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당사자인 갑과 을이지, 재판관이 아닙니다. 재판관으로서는 갑과 을이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 문제를 풀 수밖에 없습니다. 갑과 을이 각자 자신의 정보를 사실대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죠. 이런 ‘게임’을 만드는 데 관계된 경제학적 연구가 바로 ‘메커니즘 디자인’입니다.


정보 없는 계획자가 정보 있는 경제 주체에게 원하는 결과 얻는 법

조금 추상적으로 설명하면, 메커니즘 디자인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계획자가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경제 주체들을 상대로 게임을 설계할 때, 그 게임의 결과가 계획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오게 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 주체들이 반드시 게임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이 가진 정보를 제대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인(incentive)’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최근 미국 등 여러 국가가 경매를 통해 주파수를 민간기업들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경매라는 것도 정부가 가장 효율적인 기업에 주파수를 배정하기 위한 일종의 메커니즘입니다. 사실 ‘메커니즘 디자인’은 오랜 세월 전해오는 인류의 지혜로,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많은 문제에 적응이 된 것입니다.


남재현 서강대 교수·경제학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6/03 13:24 2009/06/03 13:24
Tag //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from 잡기장 2009/05/29 11:32
<항소이유서>


본 적 : 경상북도 월성군 내남면 망성동 163
주 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1동 한양아파트 11동 1107호
성 명 : 류 시 민
생년월일 : 1959년 7월 28일
죄 명 :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요 지

본 피고인은 1985년 4월 1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합니다.

다 음

본 피고인은 우선 이 항소의 목적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형량의 과중함을 호소하는데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이 항소는 다만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진보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는 노력의 소산입니다. 또한 본 피고인은 1심 판결에 어떠한 논란거리가 내포되어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본 피고인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라는 척도이지 인간이 만든 법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본 피고인으로서는 정의로운 법률이 공정하게 운용되는 사회에서라면 양심의 명령이 법률과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에 서게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소박한 믿음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올릴 수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집단과 인간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행위는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현재의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수준의 반영인 동시에 미래의 그것을 결정하는 규정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폭행법이라 함) 위반 혐의로 형사소추되어 1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본 피고인으로서는 자신이 관련된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떠한 정치적·사회적·도덕적 상태의 반영이며 또 미래의 그것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규명함과 동시에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책임을 명백히 밝힐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젊은 대학생들이 동 시대의 다른 젊은이들을 폭행하였다는 불행한 이 사건으로부터 “개똥이와 쇠똥이가 말똥이를 감금 폭행하였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다”는 식의 흔하디 흔한 교훈밖에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항소이유서는, 부도덕한 개인과 집단에게는 도덕적 경고를, 법을 위반한 사람에게는 법적 제재를, 그리고 거짓 성령 속에 묻혀 있는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하는 청원서라 하겠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은 법률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글 속에서 ‘책임’ ‘의무’ ‘과실’ 등등의 어휘는 특별한 수식어가 없이 사용된 경우, 그 앞에 ‘윤리적’ 또는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된 것으로 간주하여 무방합니다. 그리고 본 피고인이 특히 힘주어 말하고 싶은 단어나 문장에는 윗점을 사용하였습니다.

본 피고인은 우선 이 사건을 정의(定義)하고 나서 그것을 설명한 다음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과 현정권(본 피고인이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제 5 공화국이 합법성과 정통성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해 정부대신에 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각자가 취한 행위를 분석함으로써 이 글의 목적을 달성코자 합니다.

이 사건은 학생들에 의해서는 ‘서울대 학원 프락치사건’으로, 정권과 매스컴에 의해서는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으로 또는 간단히 ‘서울대 린치사건’이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명칭의 차이는 양자가 사건을 보는 시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본질 자체가 달라질 리는 만무한 일입니다. 본 피고인이 가능한 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사건을 정의하자면 이는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이 고조된 관악캠퍼스 내에서,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은 네명의 가짜학생을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이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약간의 혹은 심각한 정도의 폭행을 가한 사건입니다. ‘정권과 학원간의 상호적대적 긴장상태’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4월 민주혁명을 짓밟고 이땅에 최초의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한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반세기에 걸쳐 이어온 학생운동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혈사(血史)와 아울러 가열되어온 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사를 살펴 보아야 할 터이지만, 이 글이 항소이유서임을 고려하여, 1964~65년의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소위 6·3사태), 1974년의 민청학련 투쟁, 1979년 부산마산지역 반독재 민중투쟁 등을 위시한 무수한 투쟁이 있어 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데 그치기로 하고 현정권의 핵심부분이 견고히 형성되어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1979년 12월 12일의 군사쿠데타 이후 상황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사회적 갈등·정치적 비리·문화적 타락은 모두가 지난 날의 유신독재 아래에서 배태·발전하여 현정권 하에서 더욱 고도성장을 이룩한 것들입니다. 현정권은 유신독재의 마수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와 민주회복을 낙관하고 있던 온국민의 희망을 군화발로 짓밟고, 5·17 폭거에 항의하는 광주시민을 국민이 낸 세금과 방위성금으로 무장한 ‘국민의 군대’를 사용하여 무차별 학살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피묻은 권력입니다. 현정권은 정식출범조차 하기 전에 도덕적으로는 이미 파산한 권력입니다. 현정권이 말하는 ‘새시대’란, 노골적·야수적인 유신독재헌법에 온갖 화려한 색깔의 분칠을 함으로써 그리고 총칼의 위협아래 국민에게 강요함으로써 겨우 형식적 합법성이나마 취할 수 있었던 새로운 ‘유신시대’이며, 그들이 말하는 ‘정의(正義)’란 소수군부세력의 강권통치를 의미하며, 그들이 옹호하는 ‘복지’란 독점재벌을 비롯한 있는 자의 쾌락을 뜻하는 말입니다.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 발전을 위하여 ‘비효율적인’ 각종 민주제도(삼권분립, 정당, 노동조합, 자유언론, 자유로운 집회결사) 등을 폐기시키려 하는 사상적 경향을 우리는 파시즘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파시스트 국가의 말로가 온 인류를 재난에 빠뜨린 대규모 전쟁도발과 패배로 인한 붕괴였거나, 가장 다행스러운 경우에조차도 그 국민에게 심대한 정치적·경제적 파산을 강요한 채 권력내부의 투쟁으로 자멸하는 길 뿐임을 금세기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나찌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은 전자의 대표적인 실례이며,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합법정부를 전복시키고 등장했던 칠레·아르헨티나 등의 군사정권, 하루저녁에 무너져버린 유신체제 및 지금에야 현저한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 따위는 후자의 전형임에 분명합니다.

국가는 그것이 국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만이 구성원 모두에게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복과 자아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지난 수년간,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며 투쟁한 노동운동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땅에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양심적 종교인,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한 언론인과 교수들, 그리고 민주제도의 회복을 갈망해온 민주정치인들의 선봉에 섰던 젊은 대학인들은, 부도덕하고 폭력적이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반민중적이기 때문에, 국민이 자유롭게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조건 아래서라면 단 한주일도 유지될 수 없는 현 군사독재정권이 그토록 존귀한 우리 조국의 대리인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 국민은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가질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정권은 12·12 군사쿠데타 이후 4년동안 무려 1,300여명의 학생을 각종 죄목으로 구속하였고 1,400여명을 제적시키는 한편 최소한 500명 이상을 강제징집하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바로 병영으로 끌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 구석구석에 감시초소를 세우고 사복형사를 상주시키는 동시에 그것도 모자라 교직원까지 시위진압대로 동원하는 미증유의 학원탄압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이러한 사실을 시인한 적이 없으며, 1982년 기관원임을 자칭한 괴한에게 어린 여학생이 그것도 교정에서 강제추행을 당하는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을 때조차, 최고위 치안 당국자는 국회 대정부 질의에 대하여 “교내에 경찰을 상주시킨 일이 없다.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밝혀내 발본색원하겠다”고 태연하게 답변하였을 정도입니다. 현재 학원가를 풍미하고 있는 전경 특히 경찰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이와 같은 정권의 학원탄압 및 권력층의 상습적인 거짓말이 초래한 유해한 결과들 중의 한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솝우화의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양떼를 잃어버리는 작은 사건을 낳는데 그쳤지만 주 유왕(周 幽王)이 미녀 포사(褒似)를 즐겁게 하기 위해 거짓봉화를 울린 일은 중국대륙 전체를 이후 500여년에 걸친 대 전란의 와중에 휩쓸리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양치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한 마을사람들이나 오랑캐에게 유린당하기까지 주(周)왕실을 내버려 둔 제후들을 어리석다 말하지 않습니다. 정권의 주장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불신은 과연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더욱이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학원탄압은 전국 각 대학에서 목숨을 건 저항을 유발하였고 그 결과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당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만도 고 김태훈·황정하·한희철 등 셋이나 되는 젊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83년 12월의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주전선(主戰線)이 교문으로 이동하였다는 단 한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변함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특히 지난해 9월 총학생회 부활을 전후하여 더욱 강화되었던 수사기관의 학원사찰, 교문앞 검문검색, 미행과 강제연행 등으로 인해 양자간의 적대감 또한 전례없이 고조된 바 있습니다. 즉 소위 자율화조치 이후에도 ‘학원과 정권 사이의 적대적 긴장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건 하에서 수명의 가짜학생이 수사기관의 정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을만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예기치 못한 사건입니다. 이들의 의심을 받게된 경위 및 사건경과는 이미 밝혀진 바이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지만 여기에서 가짜 학생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보원인지 그 여부는 극히 중요한 정치적 관심사임에 분명하지만 사건의 법률적·윤리적 측면과는 거리가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연행·감금·조사 또는 폭행한 것은 결코 정보원이나 단순한 가짜학생이 아닌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폭력 자체가 정당할 수는 없으며 또 아니라고 해서 학생들의 일체의 행위가 모두 부당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이 문제에 대해 재론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정보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의 이유에 의해서 입니다.

갖가지 목적으로 학생처럼 위장하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수많은 가짜 학생들, 이들은 소위 대형화·종합화된 오늘날의 대학에서, 졸업정원제·상대평가제 등 대학을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양성소로 전락시키기 위해 독재정권이 고안해 낸 각종 제도가 야기한 바 대학인의 원자화·고립화 등 비인간화 현상을 틈타 캠퍼스에 기생하는 반사회적 인간집단으로서, 교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절도·사기·추행·학원사찰의 보조활동(손형구의 경우처럼) 등과 복합적인 관련을 맺고 있음으로 해서 대학인 상호간에 광범위한 불신감을 조성하고 대학의 건강한 공동체문화를 파괴하는 암적 존재입니다. 현정권은 이들이 대학인의 일체감을 파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내에 사복경찰을 상주시킴으로써 야기된 숱한 문제들마저 이들에게 책임전가시킬 수 있다는(여학생 초생사건 때처럼) 이점 때문에 가짜학생의 범람현상을 방관 또는 조장하여 온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평소 품고 있는 혐오감이 어떠한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들이, 이들 가짜들이, 혹은 복학생들의 소규모 집회석상에서 혹은 도서실에서, 법과대학 사무실에서, 강의실에서, 버젓이 학생행세를 하면서 학생활동에 대한 정보 수집활동을 하다가 탄로났을 경우, 법이 무서워서 이를 묵과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일이겠습니까? 상호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바로 그들을 보냈으리라 추정되는 수사기관에, 정보원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짜학생의 신분조사를 의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대학의 교정은 개방된 장소이므로 은밀한 사찰행위뿐만 아니라 예전처럼 수백 수천의 정·사복 경찰이 교정을 온통 휘젓고 다닌다 할지라도 이는 전혀 비합법 행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이러한 행위가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이러한 부도덕한 학원 탄압행위에 대한 학생들의 여하한 실질적 저항행위도,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일이지만, 현행법률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그 누구도 이 상황에서 법과 양심 모두를 지키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우리 사회 전체가, 물론 대학사회도 포함하여, 당면한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학생들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은 논거에 입각한 것입니다. 법은 자기를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만 양심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은 일시적 상대적인 것이지만 양심은 절대적이고 영원합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양심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피고인은 양심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의 명령을 따르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뿐만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이 사건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어느 사건에서도 그랬습니다.

지난해 9월, 10일간에 걸친 일련의사건은 이렇게 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자체로서 그리 복잡하지 않은 이 사건은 서울대생들의 민한당사 농성사건, 주요 학생회 간부들의 제적·구속, ‘학생운동의 폭력화’에 대한 정권과 매스컴의 대공세, 서울대 시험거부 투쟁과 대규모 경찰 투입 등 심각한 충격파를 몰고 왔으며 공소 사실을 거의 전면부인하는 피고들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단락된 바 있습니다. 사건종료 다음날인 9월 28일 전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과 뒤늦게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겸 사회대학생장 오재영군 등이 지도한 민한당사 농성은 자연발생적·비조직적으로 일어난 이 사건을 부도덕한 학원사찰 및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조직적 투쟁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가짜 학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법률적·윤리적 과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학원사찰의 존재라는 별개의 정치적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 투쟁은 그 자체로서 완전히 정당한 행위였다고 본 피고인은 생각합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 날인 9월 29일 저녁 학교당국은 이정우·백기영·백태웅·오재영 등 4명의 총학생회 주요간부를 전격적으로 제명 처분하였으며 본 피고인은 9월 30일 하오 경찰에 영장없이 강제연행 당한 후 며칠간의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습니다. 본 피고인이 가장 먼저 연행당한 것은 미리 도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피하지 않은 것은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은 도망칠만큼 잘못한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경찰·검찰에서의 조사 및 법정진술시 기억력의 한계로 인한 사소한 착오 이외에 여하한 수정·번복도 한 바 없었으며 오직 사실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입니다. 어쨌든 서울시경국장은 10월 4일 소위 ‘서울대 외부인 폭행사건’의 수사결과를 도하 각 신문·TV·라디오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4명의 외부인을 감금·폭행한 이 일련의 사건이 복학생협의회 대표였던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합의 아래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10월 4일 이전에 경찰에 연행된 몇몇 학생들 중(본 피고인을 포함) 어느 누구도 이 발표를 뒷받침해줄 만한 진술을 한 바 없으며, 이후에 작성된 구속영장·공소장 및 관련학생들의 신문조서들이 모두 이 발표의 기본선에 맞추어 만들어진 것임은, 만일 이 모든 서류를 날짜별로 검토해 본다면, 누구의 눈에나 명백한 일입니다. 한마디로 10월 4일의 경찰발표문의 본질은 모종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견강부회·침소봉대·날조왜곡 바로 그것입니다.

그 목적이란 다름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폭력지향적인 파괴활동으로 중상모략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은 물론 현정권 자체의 폭력성과 부도덕성을 은폐하려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이 비조직적·우발적으로가 아니라, 학생단체의 대표들에 의해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몇몇 관련 학생뿐만이 아니라 학생운동 전체를 비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학생회장,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프락치사건 대책위원장, 복학생협의회 대표 등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이며 어떤 행위를 실제로 했는가에 관계없이 선전을 위한 가장 손쉬운 희생물이 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수법은 지난 수십년간 대를 이어온 독재정권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상투적으로 구사해온 낡은 수법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현정권은 막 출범한 서울대 학생회의 주요 간부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60만 대군을 동원해도 때려 부술 수 없는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마치 자신이 더 도덕적인 존재가 된 듯한 자기만족조차 조금은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역시 사실을 밝혀내는 일보다는 경찰의 발표를 뒷받침하기에만 급급하여 대동소이한 내용의 공소를 제기하고 그것에만 집착하여 왔습니다.

사건 발생후 일개월도 더 지난 작년 11월, 관악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김도형·손택만군 등 무고한 학생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함으로써 공소사실과 일치하는 허위자백을, 형사들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짜내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즉 경찰은 본 피고인들이 ‘폭행법’을 위반하였다는 증거를 바로 그 ‘폭행법’을 위반하여 관련된 학생들을 고문함으로써 짜낸 것입니다.

그 짜내어진 허위자백이 증거로 채택된다는 사실을 못 본 체 하더라도 ‘법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전혀 정당한 윤리적 기초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양심인으로서는 복종의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었던 지난날의 긴급조치나 현행 ‘집시법’과 달리 이 ‘폭행법’은 지켜져야 하며 또 지켜질 수 있는 법률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인은 현정권에 대한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이 법 앞에서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본 피고인은, 과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폭행·고문하는 각 대학 앞 경찰서의 정보과 형사들이 그 때문에 ‘폭생법’ 위반으로 형사소추당했다는 비슷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19일,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 주최한 광주항쟁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귀가하는 길에, 그녀 자신 제적학생이면서 역시 고려대학교 제적학생인 서원기씨의 부인 이경은씨가 동대문 경찰서 형사대의 발길질에 6개월이나 된 태아를 사산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부부는 이 법의 보호 밖에 놓여 있음이 누구의 눈에나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고소장을 접수하고서도, 검찰은 수사조차 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 역시 여러 차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폭행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 법의 보호를 요청할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에게도 협박 또는 폭행을 가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 피고인은 폭력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이 굳이 지난 일을 이렇듯이 들추어냄은 오직, 흔히 이야기되고 있는 바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의 존재를 환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역시 앞에서 밝힌 바 현정권의 정치적 음모와 무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검찰이 주장하는 바 공소사실의 대부분은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경찰이 날조한 사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서, 한편에 있어서는 정권과 매스컴이 공모하여 널리 유포시킨 일반적인 편견이 기초 위에 서 있으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이 고문수사를 통해 짜낸 관련 학생들의 허위자백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공허한 내용으로 가득찬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학생들의 과실과 본 피고인 자신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이렇듯 정권의 부도덕을 소리 높이 성토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가짜학생에 대한 연행·조사가 윤리적으로 정당하다손치더라도, 이들에게 가한 폭행까지를 정당화할 의향은 없습니다. 조사를 위한 감금은 가능한 한 짧아야 하며 폭행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폭력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본질상 다 폭력의 영역에 속할 수는 없지만, 무력한 개인에게 다중이 가한 폭행은 비록 그것이 경찰에 대한 이유있는 적대감의 발로인 동시에 그들이 상습적으로 학생들에게 가해온 고문을 흉내낸 것이라 할지라도 학생운동의 비폭력주의에서 명백히 이탈한 행위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또 폭행을 가한 당사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책임을 감당하지 않은 것 또한, 비록 그것을 어렵게 만든 당시의 특수한 정치적 사정이 개재됐다손치더라도, 학생들이 가진 윤리적 결함의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자신 폭행과 절대로 무관하며사건 전체와도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하여 틀림이 없을 총학생회장 이정우군이 스스로 모든 책임을 떠맡아 항소조차 포기했다고 하는 아름다운 행위가, 그 누구도 선뜻 폭행의 책임을 감당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윤리의 공백상태를 어느 정도는 메꾸어 주었다고 본 피고인은 확신합니다.

본 피고인은 역시 언행이나 조사를 지시한 사실이 없지만(지시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만일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직접 그들을 연행·조사하였을 것입니다(그것이 위법임은 물론 잘 알지만). 본 피고인은 복학생 협의회의 사실상의 대표로서 개인적으로 비폭력의 원칙을 준수해야 할 소극적 의무에 부가하여 학생운동의 전체수준에서도 이 원칙이 관철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적극적 의무 또한 완수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9월 26일 밤 전기동·정용범 양인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잠시 목격하고서도 그것을 제지하려 하지 않았던 본 피고인에게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큰 윤리적 책임이 있음에 분명합니다(법률적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또한 임신현·손형구의 경우에도 본 피고인이 사건에 접했을 때는 이미 감금 및 조사가 진행 중이었으므로 어떠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 가능한 한 짧은 감금과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실제로 이 원칙이 관철되었으므로 본 피고인은 아무런 윤리적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어쨌든 상당한 정도의 법률적·윤리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떠맡기 위해 이정우군처럼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너무나도 명백한 정권의 음모의 노리개가 될 가능성 때문에 본 피고인은 사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결코 시인하지 않으리라 결심하였고 또 그런 자세로 법정투쟁에 임해 왔습니다. 그래야만 본 피고인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책임감이, 공소사실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해 우격다짐으로 요구하는 그것과는 성질상 판이한 것임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본 피고인은 이 사건의 재판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며 이 사건을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진보의 계기로 삼으려면 사법부가 본연의 윤리적 의무를 완수해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사건은 누적된 정권과 학원간의 불신 및 적대감을 배경으로 하여 수명의 가짜학생이 행한 전혀 비합법적이라 할 수 없지만 명백히 부도덕한 정보수집행위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지 않으나 명백히 비합법적인 학생들의 대응행위를 유발함으로써 빚어진 사건입니다. 지난 수년간 현정권이 보여준 갖가지 부도덕한 행위들 - 학원내에 경찰을 수백명씩이나 상주시키면서도 온국민에게 거짓증언을 한 치안당국자의 행위, 소위 자율화조치라고 하는 아름다운 간판 위에서 음성적인 확원사찰을 계속 해온(이에 관해서는 법정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음) 수사기관의 행위,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사건조차 서슴지 않고 날조·왜곡한 행위 등 - 은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사건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여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행위중 비합법적인 부분만을 문제삼아 처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마도 사법부 자체는 이처럼 부도덕한 정권의 학원난입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가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사태의 전후맥락을 모조리 무시한 채 조사를 위한 연행·감금마저(폭행부분이 아니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한 1심의 판결은 지금 이 시간에도 갖가지 반사회적 목적으로 위해 교정을 배회하고 있을 수많은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신변안전을 보장한 ‘가짜학생 및 정보원의 안전보장 선언’이 아니라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결코 학생들의 행위 전부에 대한 무죄선고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부도덕한 자에 대한 도덕적 경고와 아울러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하며, 허위선전에 파묻힌 국민에게는 진실의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것, 사태의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의 도덕적 향상은 기대될 수 없는 것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법정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법정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며, 그곳에서만은 허위의 아름다운 가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때로는 추악해 보일지라도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날의 사법부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正義)를 세우며, 또 그 정의가 강자(强者)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1심의 재판과정에서 매장당한 진실이 다시금 생명을 부여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 피고인은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마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쉽게 허물어버리기 어려울 만큼 높아져 있는 현재의 불신과 적대감의 장벽 위에 분노의 가시넝쿨이 또 더하여지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더욱 격렬한 형태로 폭발할 유사한 사태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5년간 현정권에 반대했다 하여 온갖 죄목으로 투옥되었던 1,500여명의 양심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신성한 법정’에서 정의로운 재판관들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야수적인 유신독재 치하에서도 역시 그만큼 많은 분들이 전대미문의 악법 ‘긴급조치’를 지키지 않았다 하여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긴급조치 위반사건의 보도 또한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아무도 그 일을 말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변론을 하던 변호사도 그 변론 때문에 구속당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긴급조치가 정의로운 법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그리고 그때 투옥되신 분들이 ‘반사회적 불순분자’ 또는 ‘이적행위자’였다고 말하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분들을 ‘죄수’로 만든 법정은 지금도 여전히 ‘신성하다’고 하며 그분들을 기소하고 그분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검찰과 법관들 역시 ‘정의구현’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외면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법정이 민주주의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정의를 세워왔다”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 진지한 인간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정의란 독재자의 의지이다”고 굳게 믿는 인간일 것입니다. 본 피고인은 그곳에 민주주의가 살해당하면서 흘린 피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만은 진실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신성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본 피고인은 자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재판관이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정의에 관심을 갖는’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현명한 재판관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는 일이야말로 정의가 설 토대를 건설하는 일이라 믿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본 피고인은 1심판결에 승복할 수 없는 이유를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본 피고인은 판결문을 받아보았을 때 참으로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려 7회에 걸쳐 진행된 심리과정에서 밝혀진 사건의 내용과 거의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피고인이 그토록 진지하게 임했던 재판의 전과정이 단지 예정된 판결을 그럴듯하게 장식해주기 위해 치루어진 무가치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선, 「판결이유」의 ‘범죄사실’ 제 1 항 중 “······임신현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피고인 유시민은 성명불상 학생들에게 위 임신현의 신분을 확인·조사토록 하고···”라는 부분은 형식논리상으로조차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본 피고인에게 지시를 받은 학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면, 어떻게 그가 성명불상일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본 피고인이 한번도 이를 시인한 바 없으며, 백수택군 등 여러학생들의 진술은 물론이요, 임신현 자신의 법정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할지라도, 본 피고인이 임신현이 연행 구타되던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기란 불가능한 일인데 하물며 본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누군가에게 어떠한 지시를 내렸다는 일이 어찌 증명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본 피고인은 그 때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 ‘범죄사실’ 제 2 항 중 “·····위 김도인은 피고인 백태웅과 피고인 유시민 앞에서····· 구타하여 동인(손형구를 말함)에게 전치 3주간의·····다발성 좌상을 가한·····” 부분 역시, “백태웅과 유시민에게 조사받는 동안 한번도 폭행당한 일이 없다”고 한 손형구 자신의 법정진술에조차 모순됩니다.

그리고 ‘범죄사실’ 제 3 항 중 “피고인 유시민은·····동일(9월 26일을 말함) 21:00경부터 익일 01:00까지 피고인 윤호중, 같은 오재영 및 백기영, 남승우, 오승중, 안승윤 등과 같이·····(정용범을)·····계속 조사하기로 결의하고·····” 및 ‘범죄사실’ 제 4 항 중 이와 유사한 대목 역시, 본 피고인이 당시 진행중이던 총학생회장 선거관리 및 학생회칙의 문제점에 관해 선거관리 위원들과 장시간에 걸쳐 논의한 사실을 왜곡해 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는 오승중, 김도형 등의 진술에 의해서도 명백히 밝혀진 일입니다. 이 몇 가지 예는 특히 현저하게 사실과 다른 부분을 지적한 것에 불과하며 판결문 전체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한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습니다. 이는 사건 전체가 본 피고인 및 학생대표들의 지휘 아래 의도적으로 진행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반영하는 현상으로서, 기실 판결문의 내용 중 대부분이 침소봉대·견강부회·날조왜곡된 지난해 10월 4일 경찰발표문을 원전(原典)으로 삼아 구속영장·공소장을 거쳐 토씨하나 바꾸어지지 않은 그대로 옮겨진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1심판결은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사건과 관련된 각 개인 및 집단의 윤리적 법적 책임을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체의 도덕적 향상에 기여해야 할 사법부의 사회적 의무를 송두리째 방기한 것이라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거니와 본 피고인이 이처럼 1심판결의 부당성을 구태여 지적한 것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이유에 의한 유죄선고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현재 마치 '폭력 과격 학생'의 본보기처럼 되어 버린 본 피고인은 이 항소이유서의 맺음말을 대신하여 자신을 위한 몇 마디의 변명을 해볼까 합니다. 본 피고인은 다른 사람보다 더 격정적이거나 또는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빨간 물이 들어 있거나 폭력을 숭배하는 젊은이는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장 평범한 청년에 지나지 않으며 늘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말라",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하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신, 지금은 그분들의 성함조차 기억할 수 없는 국민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말씀을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오히려 조금은 우직한 편에 속하는 젊은이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변명을 통하여 가장 순수한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곧 민주주의의 재생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투쟁 전체를 옹호하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인 1978년 2월 하순, 고향집 골목 어귀에 서서 자랑스럽게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길을 등뒤로 느끼면서 큼직한 짐보따리를 들고 서울 유학길을 떠나왔을 때, 본 피고인은 법관을 지망하는 (그 길이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좋은 옷, 맛난 음식을 평생토록 외면해 오신 부모님께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또 그 일이 나쁜 일이 아님을 확신했으므로)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열아홉 살의 촌뜨기 소년이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로부터 따뜻한 축복의 말만을 들을 수 있었던 그때에, 서울대학교 사회계열 신입생이던 본 피고인은 '유신 체제'라는 말에 피와 감옥의 냄새가 섞여 있는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유신만이 살길이다"고 하신 사회 선생님의 말씀이 거짓말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오늘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했으며,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설레던 미래는 오로지 장밋빛 희망 속에 감싸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벌써 시들었지만 아직 아카시아 꽃은 피기 전인 5월 어느 날,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푸르러만 가던 교정에서, 처음 맛보는 매운 최루 가스와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오던 눈물 너머로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가던 여리디 여린 여학생의 모습을, 학생 회관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서 겁에 질린 가슴을 움켜쥔 채 보았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 입구 전망대 아래에 교내 상주하던 전투 경찰들이 날마다 야구를 하는 바람에 그 자리만 하얗게 벗겨져 있던 잔디밭의 흉한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저릿해지는 가슴속 묵은 상처로 자리잡았습니다.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맥주를 마시다가도, 예쁜 여학생과 고고 미팅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다 ‘문제 학생’이 될 조짐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겨울, 사랑하는 선배들이 ‘신성한 법정'에서 죄수가 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신이 법복 입고 높다란 자리에 않아 있는 모습을 꽤나 심각한 고민 끝에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해 여름 본 피고인은 경제학과 대표로 선출됨으로써 드디어 문제 학생임을 학교 당국 및 수사 기관으로부터 공인받았고 시위가 있을 때면 앞장서서 돌멩이를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점증하는 민중의 반독재 투쟁에 겁먹은 유신정권이 내분으로 붕괴해 버린 10·26정변 이후에는, 악몽 같았던 2년간의 유신 치하 대학 생활을 청산하고자 총학생회 부활 운동에 참여하여 1980년 3월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그 봄의 투쟁이 좌절된 5월 17일, 본 피고인은 갑작스러이 구속 학생이 되었고, ‘교수와 신부를 때려준 일’을 자랑삼는 대통령 경호실 소속 헌병들과, 후일 부산에서 ‘김근조 씨 고문 살해'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치안 본부 특수 수사관들로부터 두 달 동안의 모진 시달림을 받은 다음, 김대중 씨가 각 대학 학생회장에게 자금을 나누어 받았다는 허위 진술을 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속 석 달 만에 영문도 모른 채 군법 회의 공소 기각 결정으로 석방되었지만, 며칠 후에 신체 검사를 받자마자 불과 40시간 만에 변칙 입대당함으로써 이번에는 ‘강집 학생'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입영 전야에 낯선 고장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이면서 본 피고인은 살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축복이 아니요 치욕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 제대하던 날까지 32개월 하루동안 본 피고인은 ‘특변자(특수 학적 변동자)'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늘 감시의 대상으로서 최전방 말단 소총 중대의 소총수를 제외한 일체의 보직으로부터 차단당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하 20도의 혹한과 비정하게 산허리를 갈라지른 철책과 밤하늘의 별만을 벗삼는 생활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인 그해 저물녘, 당시 이등병이던 본 피고인은 대학시절 벗들이 관계한 유인물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 동안 서울 보안사 분실과 지역 보안 부대를 전전하고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재조사를 받은 끝에 자신의 사상이 좌경되었다는,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쓴 다음에야 부대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다른 연대로 전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그런데 제대 불과 두 달 앞둔 1983년 3월 또 하나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난해 세상을 놀라게 한 ‘녹화 사업' 또는 ‘관제 프락치 공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벗을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태의 억압이 수백 특변자들에게 가해진 것입니다. 당시 현역 군인이던 본 피고인은 보안 부대의 공포감을 이겨 내지 못하여 형식적으로나마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타협책으로써 일신의 안전을 도모할 수는 있었지만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 탄압에 대한 공포감에 짓눌려 지내던 본 피고인에게 삶과 투쟁을 향한 새로운 의지를 되살려준 것은 본 피고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징집당한 학우들 중 6명이 녹화 사업과 관련하여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동지를 팔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 순결한 양심의 선포 앞에서 본 피고인도 언제까지나 자신의 비겁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순결한 넋에 대한 모욕인 탓입니다. 그래서 1983년 12월의 제적 학생 복교 조치를 계기로 본 피고인은 벗들과 함께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이 야수적인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폐지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복교하지 않은 채 투쟁하였습니다. 이때에도 정권은 녹화 사업의 존재, 아니, 강제 징집의 존재마저 부인하면서 우리에게 ’복교를 도외시한 채 정부의 은전을 정치적 선동의 재료로 이용하는 극소수 좌경 과격 제적 학생들'이라는 참으로 희귀한 용어를 사용해 가면서, 어용 언론을 동원한 대규모 선전 공세를 펼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여러가지 사정으로 복학하게 되었을 때 본 피고인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 계속되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복학생 협의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복학한 지 보름 만에 이 사건으로 다시금 제적 학생 겸 구속 학생이 되었슬 뿐만 아니라 본 피고인의 이름은 ‘폭력 학생'의 대명사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 피고인은 이렇게 하여 5.17폭거 이후 두 번씩이나 제적당한 최초의 그리고 이른바 자율화 조치 이후 최초로 구속 기소되어, 그것도 ‘폭행법'의 위반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폭력 과격 학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몸은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본 피고인은 이 시대의 모든 양심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에 비추어, 정통성도 효율성도 갖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여 민주 제도의 회복을 요구하는 학생 운동이야말로 가위눌린 민중의 혼을 흔들어 깨우는 새벽 종소리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오늘은 군사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한 위대한 광주 민중 항재의 횃불이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날이며, 벗이요 동지인 고 김태훈 열사가 아크로폴리스의 잿빛 계단을 순결한 피로 적신 채 꽃잎처럼 떨어져 간 바로 그날이며, 번뇌에 허덕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이 성스러운 날에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바치고 가신 숱한 넋들을 기리면서 작으나마 정성들여 적은 이 글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을 기원해 봅니다.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격언인 네크라소프의 시구로 이 보잘것 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1985년 5월 27일 성명 류시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 재판장님 귀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5/29 11:32 2009/05/29 11:32
Tag //

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21319&hisBbsId=total&pageIndex=5&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저는 모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이번 노통 서거 사건에 관련되어 여러가지 의문사항이 있습니다.

 

아침 기상 시점부터 시작해서 추락할 때까지의 여러 의문점들도 다 풀린 것은 아니나 일단은 노통의 신체에 손상이 가해져서 의학적인 처치가 필요하게 된 이후의 상황들에 대해서만 글을 써보렵니다.

 

참고로 가장 최근에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기술하겠습니다.(사실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가지고 기술하는 것입니다. 다만 언론에 의하지 않은 개별네티즌의 글이나 댓글들에 보이는 내용은 참고하지 않았습니다.)

 

 

오전 6시 40분 ~ 오전 7시 (부엉이바위에서 추락이후 세영병원 이송 전)

 

노통이 부엉이바위에서 추락한 이후 산위에 있던 경호원은 20분만에 산을 내려와 쓰러져 있는 노통을 찾은 후 환자를 들쳐업고 인근의 세영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양산부산대병원장의 발표를 보면 두정부의 11cm 정도의 열상이 관찰되었으며 두개골의 골절과 기뇌증이 확인되었는데 두부의 외상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간략하게 머리쪽은 해부학적으로 바깥쪽에서부터 시작해서 두피, 두개골, 경막, 지주막하 공간, 뇌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의학적 관점에서 '두정부의 11cm 정도의 열상'과 '두개골의 골절 및 기뇌증이 확인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자. 두정부는 머리의 정수리 부근을 의미한다. '열상'이란 피부가 찟어져서 생긴 상처를 의미하고 기뇌증이랑 두개골 안의 공간에 공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어의 의미와 발표문에서 나온 환자의 상태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두부의 두정부 부위로 엄청난 외력이 작용하면서 두피를 파열시키고 두개골을 골절시킨다. 두개골 골절이 발생하면서 찟어진 피부를 통해 외부의 공기가 그 틈을 통해 두개골 안으로 들어간다.(기뇌증의 발생) 그런데 두개골 골절이 있다고 모두 기뇌증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기뇌증이 발생하려면 경막이 뚫려야 하고 경막이 뚫리면 지주막하공간이 손상을 받는다.(두개골 골절이 생기더라도 경막이 뚫리지 않으면 경막외출혈이 되고 이 경우 기뇌증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 지주막하출혈이 발생하게 되는데 외상에 의한 두개골 골절이 동반된 지주막하출혈은 엄청난 양의 출혈을 야기한다. 영화에서 보셨을거다. 등장인물들이 땅에 떨어지거나 서로 싸우다가 땅에 머리 부딪힌 경우 땅에 쓰러진 등장인물의 머리 뒤로 서서히 피가 흘러나와 동심원이 커지는 모양으로 땅을 적시는 모습을...

 

 결론은... 추락한 부위의 혈흔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말이 안된다!! 또한 그런 상황에 처한 환자를 들쳐업고 뛰었다? 머리에 피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무의식적으로 지혈부터 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뭐 물론 지혈을 하려고 노력해도 지혈은 잘 안된다. 저정도 출혈이면.. 양손으로 눌러막아도 지혈은 안된다. 어쨌거나 그 상황에 진짜로 일단 데리고 내려가자는 생각에 들쳐업고 뛰었다면 그 경호원은 온몸에 피칠갑을 했을거다.

 

 밝혀야 할 문제점1

 노통이 추락한 지점을 찾아야 한다. 혈흔이 없을 수 없다.!! 혈흔이 없다면 그건 노통이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밝혀야 할 문제점2

 당시 경호원이 착용했던 의복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 피칠갑된 의복의 상태를 보면 경호원이 어떤 방식으로 노통을 옮겼는지 알 수 있다. 경호원의 의복은 어디 있나? 설마 빨아버린 건 아니겠지??

 

 밝혀야 할 문제점3

 의식 잃은 대통령을 들쳐업고 내려와 경호차량으로 세영병원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당시 경호차량은 어떤 차였고 탑승했던 사람은 전부 몇명이었나? 차량 내 좌석은 어떤 식으로 배정되었고 노통은 어떤 좌석에 어떤 자세로 태워졌나?

-> 차량탑승자에 대한 개별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차량 내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 차량에서 분명히 혈흔과 함께 추락지점의 흙이나 나무조각, 풀 등이 나와야 한다.

 

  

 오전 7시 ~ 오전 7시 35분 (세영병원)

 

 내 생각으론 노통은 양산부산대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거나 혹은 세영병원에서 사망하였을 것이다.

 

 오전 7시경에 세영병원에 도착한 노통은 거기서 심폐소생술을 시행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없어 상급병원인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심폐소생술은 심장이 정지한 환자의 소생을 위해 시행되는 술식이다. 여기서 환자의 소생이란 사실 환자 심장의 소생이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였으나 호전될 기미가 없다는 말은 멈춰버린 심장이 아예 안 돌아왔거나, 심폐소생술로 인해 심장박동이 되살아 났다라도 금방 다시 멈춰버렸음을 의미한다. 이 상황은...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손을 더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상급병원으로의 이송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번째 세영병원에서 사망하고 나서 의전상 대형병원으로 옮겼을 가능성, 두번째 이송하다가 사망한다는 것을 100% 확신하면서도 의전상 대형병원으로 옮겼을 가능성이다. 어쨌거나 세영병원에서는 노통이 곧 사망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의사입장에서.. 상태가 호전될 기미가 없어 타병원으로 이송하였는데 그 상태라고 하는 것이 거의 심폐소생술에 반응을 하지 않는 심장사에 준하는 상태였다면.. 그건 의사 자신이 환자의 사망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 역시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세영병원에서의 가상기록1

 응급실로 노통 내원 -> 즉시 환자 상태 확인 및 당직의사 콜 -> 바이탈싸인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상태였다면 바이탈 유지하면서 즉시 뇌CT 및 X-ray 촬영 시행 -> 뇌CT상 심한 두부손상 관찰되어 상급병원 전원 필요하나 환자 상태 점차 나빠짐 -> 심장기능 정지하여 즉시 심폐소생술 실시 -> 지속적인 심폐소생술 시행에도 환자 상태 호전 없음 -> 이후 환자는 세영병원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사망가능성 경고하고 상급병원 전원. 이송도중 사망가능성이 아주 높으나 세병병원에서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음.

 

 세영병원에서의 가상기록2

 응급실로 노통 내원 -> 즉시 환자 상태 확인 및 당직의사 콜 -> 바이탈싸인 좋지 않아 즉시 심폐소생술 실시 -> 심폐소생술 시행에도 불구하고 심장기능 정지 상태를 유지 혹은 잠깐씩 심장박동 돌아왔다가 얼마 안가 심장기능 정지 상태로 회귀 -> 이후 환자는 세병병원에서 사망하거나 혹은 사망가능성 경고하고 상급병원 전원.

 

 내 생각엔 '가상기록1'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이유는 노통이 입은 환자복 및 세영병원에서 시행한 X-ray 기록 때문이다. 언론보도를 보면 양산부산대병원 내원시 노통은 세영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한다. 응급실로 이송되어 온 그 상황에 환자 상태가 좋지 않다면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또한 3차 진술에서 의사는 노통에게 두부외상 외에 척추 및 오른발목 골절 등이 있었다고 한다. 두부외상과 골절 여부를 알았다는 것은 CT와 X-ray를 촬영할만큼의 생체징후는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영병원 의사는 인터뷰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었고 호전기미가 보이지 않을만큼 상태가 위독했었므로 상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언론보도로 재구성해 본 당시 세영병원에서의 상황

 내원 당시 노통은 심각한 외상에도 불구하고 바이탈싸인은 유지되는 상태였으며, 두부외상을 제외하고 신체 다른 곳의 외상 여부를 알기 위해 노통의 의복을 잘라내고 수액라인을 확보하고 기타 필요한 처치 후 뇌CT 및 X-ray 촬영을 갔을 것이다.(세영병원의 CT가 몇채널짜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통상 CT 찍는데 시간은 5분 정도면 되고 X-ray도 금방 찍는다.) 이후 환자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심장기능이 정지해 버렸다. 즉각적인 심폐소생술이 시행되었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의사는 신경외과적인 처치를 위한 상급병원으로의 이송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송할 수 있을 정도로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다. 이송 도중 사망할 가능성이 거의 99%이다. 하지만 환자 보호자(경호팀)들은 상급병원으로의 이송을 강력히 요구한다. 의사는 이송 도중의 사망가능성을 경고하고 이송을 지시한다.

  

 밝혀야 할 문제점1

 세영병원에서 시행한 의료적인 처치는 무엇인가?

-> 의료기록 및 검사내역에 관해 전부 공개해야 한다. 그러면 세영병원 내원 당시의 환자 상태를 알 수 있다.

 

 밝혀야 할 문제점2

 노통이 당시 착용한 의복은 어디 있는가?

-> 언론보도에 의하면 노통의 외투가 사고현장에서 발견되었다. 경호원이 추락한 노통의 외투를 벗기고 병원으로 이송을 했다고 진술했다는데... 외상환자의 의복을 함부로 탈의하고 심지어 업고 가는 건 다른 네티즌들이 많이 지적을 했으니 넘어가고.. 난 세영병원으로 노통이 이송되어 올 당시 어떤 의복을 착용한 상태였는지가 궁금하다.노통 추락사에 대한 의혹 중에 '피 묻은 노통의 외투가 발견된 지점에 혈흔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고 이후 누군가가 외투를 가져다 놓은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 이 의혹은 세영병원 내원 당시 노통의 의복 상태를 알면 바로 해결될 의혹이다. 또한 의복의 피묻은 상태로 노통의 외상여부를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더.. 병원에 내원한 외상환자의 의복은 응급실에서 벗겨내는 것이 아니다. 가위로 의복을 전부 잘라서 제거한다. 외상환자는 함부로 몸을 움직여서는 안되므로...

 

 밝혀야 할 문제점3

 이송시에 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헬기를 동원하여 이동하지 않았는가? 또한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을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 전직대통령급의 VIP에 저 정도의 응급상황이면 당연히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으로 가장 빠른 이송수단을 이용해서 가야한다. 신경외과가 있는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은 마산삼성병원이었다. (세영병원-마산삼성병원 16km, 세영병원-양산부산대병원 52km) 아무리 환자가 사망에 준한 상황이라도 살리겠다는 의지가 있는 경우 신경외과가 있는 대형병원으로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 필요하다. 양산부산대병원이 마산삼성병원보다 더 좋은 병원이라서 그 쪽으로 갔을 수도 있었겠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빨리 신경외과적인 처치를 시행하는 것이므로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또한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을 결정한 사람은 누구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경호팀인가. 통상 상급병원으로 환자를 전원할 때 어느 병원으로 이송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이다. 왜냐하면 이송할 병원에서 그 환자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는지를 먼저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송할 환자가 생기면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상급병원에 먼저 전화해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보내도 되는지 여부를 물어본다. 그래서 보내도 된다는 허락을 맡으면 그 때 환자를 보낸다. 당시 노통을 담당했던 의사는 누가 이송을 결정했는지, 자신이 양산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을 지시했으면 왜 그렇게 지시한 것인지에 대해 공개해야 한다.

 또한 전직대통령의 응급상황에 왠 자동차??? 헬기 불렀어야 한다.(의료장비가 탑재된 구급차량이 더 낫지 않으냐는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시 상황에서 필요한 장비는 휴대용 산소통, 심실제세동기, 환자상태 감시할 감시모니터, 수액 및 기타 의약품, 그리고 동승할 의료진이 전부다. 헬기에 다 실을 수 있다.)

 

 밝혀야 할 문제점4

 두부의 상처는 어떤 상태였는가? 그리고 신체 내 다른 부위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 두부손상에 있어서 두부에 작용한 외력은 그 종류에 따라 서로 다른 흔적을 남긴다. 예를 들어 기다란 작대기에 맞은 상처와 망치로 맞은 상처는 모양이 다르다. 추락시에 바위에 부딪힌 상처와 땅바닥에 부딪힌 상처는 모양이 다르다. 노통은 부엉이바위에서 추락사하였는데 부엉이바위는 경사가 70도라고 한다. 경사 70도의 바위라면 멀리서 도움닫기를 하고 뛰지 않는 이상 떨어지다가 바위에 몸이 부딪힌다. 당연히 낙하도중 바위에 부딪히고 나서 튕기고 다시 다른 바위에 부딪히고 구르고를 반복하다가 산의 흙바닥에 떨어진다. 바위에 부딪히면서 두부손상이 발생하였으면 두부열상의 가장자리가 단단한 바위에 부딪히면서 으깨질 것이고 상처의 표면에 주로 흙이 묻어있거나 할 것이다. 바닥으로 직접 추락한 경우는 두부열상 깊숙히 흙이나 풀 등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말하자면 직접사인으로 지목되는 두부외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신체내 다른 외상의 정도를 알아야 한다. 당연히 온몸은 긁힌 상처로 가득해야 하고 팔다리의 일부분은 거의 꺽이거나 적어도 깊은 열상 정도는 있어야 한다.

 

밝혀야 할 문제점5

응급실 CCTV를 공개하라.

-> 응급실을 운영하는 병원은 응급실에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 이를테면  응급실에서의 난동, 환자 사망시의 책임여부공방 등에 대한 증거수집을 위해 CCTV를 가동하게 된다. 노통 내원 당시의 CCTV를 공개해서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밝혀야 할 문제점6

 권양숙 여사는 노통의 상태를 언제 처음 보고받았나? 왜 세영병원으로 직접 오지 않았나?

-> 권양숙 여사는 9시 30경이 되어서야 양산부산대병원에 도착했다는데... 도대체 오전 6시 40분 사고 이후 세영병원으로 노통이 이송될 때까지 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인가? 혹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인가?

 

밝혀야 할 문제점7

세영병원 내원 당시 현재 세영병원 내과과장말고 다른 당직의사가 있었다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먼저 노통의 상태를 살펴본 의사로서 그 사람의 진술이 꼭 필요하다.

 

 오전 7시 35분 ~ 오전 8시 13분 (이송중)

 

 차량을 통한 양상부산대병원으로의 이송이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밝혀야 할 문제점1

이송 중의 노통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 당시 동승한 의료진은 이송시의 의료기록을 공개해야 한다.

 

 

 오전 8시 13분 ~ 오전 9시 30분 (양산부산대병원)

 

언론보도에 의하면 노통이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실로 내원하였을 때 다들 DOA(death on arrival)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망한 채로 실려왔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응급실 의사들은 어쨌거나 소생술을 시행한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위해... 하지만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여도 반응이 없어서 9시 30분 경 심폐소생술을 중단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사망시각을 의사가 사망선고를 한 시간으로 잡는다. 그래서 외부에서 실려온 환자의 상태가 DOA라 하더라도 심폐소생술을 끝내는 그 시점을 사망시간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심폐소생술을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환자의 사망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에 보도된 사망시간은 그래서 오전 9시 30분이다. 오전 9시 30분에 양산부산대병원의 어떤 의사가.. 노통에게 사망선고를 내렸을 것이다....

 

 

 

 

결론..


 

1. 증거를 토대로 결론을 내리십시오. 사건의 중대성에 비해 도무지 증거가 없습니다!!!! 수사당국은 증거부터 수집하십시오. 길가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까지 수집해야 합니다!


 

2. 노통의 시신은 부검해야 합니다. 전신의 상태에 관한 정확하고도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합니다. 

3. 사고현장감식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현장에 대한 증거 없이 자살로 결론내리면 안됩니다. 모든 증거를 총괄하여 자살이라는 결론이 도출되기 전까지 노통의 죽음은 의문사입니다.

4. 사건관련자들은 모두 다 재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유일한 목격자인 경호원의 진술이 번복되는 상황입니다.

5. 상기 2,3,4에서 나온 자료들을 토대로 사건 발생 당시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야 합니다. 몇시에 어디서 어떤 자세로 어떤 바위들에 충격 후 추락했는지까지 모든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6. 의혹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납득할 수 있는 누군가가 수사 전체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사를 맡은 경남지방경찰청은 유일한 목격자인 경호원의 진술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하려 했습니다.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진실을 알려주십시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님.. 편안하시길 빕니다.

 

p.s.)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니 인근의 회사원이 등산 도중 경호원을 만났었다고 하더군요. 그 회사원에게 노통을 경호한 사람의 사진을 보여 주고 그 때 만난 경호원이 그 사진 속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게 하십시오. 만약에 두 인물이 다르다면 그 날 산속에는 노통과 경호원 두 사람말고 또 다른 제3의 인물이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글은 마음대로 퍼가셔도 됩니다. 일개 소시민 의사가 그냥 답답해서 쓴 글입니다. 저작권 어쩌고 그런거 모릅니다. 퍼가시려거든 그냥 퍼가세요.

 

죄송합니다만 퍼가실때 출처는 좀 써주셨으면 합니다. 진술이 계속 번복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 글의 내용이 최종 보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updated by PM11:10)

 

글을 퍼가실 때 제가 글에서 썼던 논지는 바꾸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 글의 요지는 노통이 추락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추락사라면 그에 해당하는 증거들을 제시하여야 하고 그 증거들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노통의 죽음은 의문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게시판에는 '노무현 전대통령 추락사 아니다', '현직응급실 의사, 노무현 대통령 추락사망 아니다' 등의 제목으로 글이 달려 있더군요.

 이런 식으로 글 전체의 내용이 호도되면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쓴 글이 편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즉 부실수사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당연한 의혹제기가 엉뚱한 음모론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가급적 글의 제목은 바꾸지 마시고 출처는 명기하여 주십시오. (updated by 5/28 00:36)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21319&hisBbsId=total&pageIndex=5&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원본글)

 

덧글1>

언론에서 노통 사고 당시의 혈흔을 공개했네요. 가소롭습니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외상성지주막하출혈을 야기할 정도의 두개골 골절 및 11cm 두피열상이면 적어도 수도꼭지를 쫄쫄쫄 들어놓은 듯한 출혈이 발생합니다. 저 사진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저 혈흔 주위로 대량의 혈흔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2. 두피손상은 떨어지는 도중 언덕 중턱 바위에 부딪히면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낙하예상경로 주위로 흩뿌려진 여러 개의 혈흔들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3. 혈흔의 모양이 원형이고 주위로 튄 듯한 양상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을 보아 혈액이 튄 방향은 바위면에서 봤을 때 수직 90도 방향이며 바위면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높이에서 혈액이 떨어졌을 것이다.

4. 혈액을 채취해서 DNA 감식을 의뢰하여 혈액의 주인이 노통인지를 알 수 있다.

5. 서거 다음날 봉하마을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어떻게 저 혈흔은 그대로 있지?

 

덧글2> 혈흔 관련해서 추가사항

1. 제가 위에서 말한 바위면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높이라 함은 말 그대로 몇십센티미터 높이입니다. 혈액은 구성성분 중 40% 정도가 적혈구 등의 고체성분입니다. 물보다 점성이 좀 있는 편이죠. 그래서 바닥에 떨어져서 튀는 피가 다시 주위로 튈 때는 좁은 반경 내에 대부분 있게 됩니다.  응급실에서 외상환자들 받아볼 때 경험으로 볼 때 혈액 한 방울이 30센티미터 위에서만 떨어져도 좁은 반경을 가진 피 튄 자국이 나타나게 됩니다. 공개된 혈흔은 꼭 바위 바로 위에서 살며시 떨어뜨린 것 같더군요. 마치 그 혈액을 떨어뜨린 사람이 자기 몸에 그 피가 튈까봐 걱정하면서 떨어뜨린 것처럼....

 

덧글3> 세영병원에서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것은 맞는가?

1. 상기 질문에 대해 저는 일단은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을 걸로 생각합니다. 양산부산대병원 응급실로 노통이 내원할 때 기도삽관(intubation, 자발호흡이 없는 사람에서 저환기 및 저산소증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기도에 관을 집어넣고 강제로 호흡을 시키는 것)을 하지 않았다는 글을 저도 다른 네티즌이 쓴 글을 읽고 알긴 했는데 언론사 보도로 확인한 내용이 아니라 기술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응급실에서 이루어지는 심폐소생술의 경우 기도삽관 상태에서 시행하는 것이 정석이죠.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죠. 예를 들어 의사가 기도삽관에 실패하거나, 경추손상 가능성으로 통상적인 기도삽관이 불가능한데 코를 통한 기도삽관을 할만한 장비가 없거나 등...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에 따라 심폐소생술 시행 여부는 논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관련 의무기록 및 CCTV 공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덧글3-1> 기도삽관에 대해 부가 설명

1. 통상 환자 이송시 특히나 중환을 이송할 때는 기도삽관을 반드시 하고 가는 것이 정석입니다. 왜냐하면 이송중에 어떤 이유에서건 호흡곤란이 발생하면 구급차 안에서는 대처 자체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분께서 지적하셨듯이 정말로 기도삽관 없이 자가호흡이 없는 심한 두부외상 환자를 52km 거리의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은... 제 짧은 식견으로 비추어 봐서는 거의 환자의 소생가능성을 0%로 잡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덧글4> 부검에 관해..

1. 부검에 대한 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부검은 사인이 불분명한 사체에 관하여 그 사인을 밝히기 위한 작업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망한 경우 우리나라는 주로 의사가 망자를 1차적으로 검안하고 그 사람이 평상시 가지고 있었던 질병이나 사망에 이르게 된 외인(external cause)을 판단기준으로 사인을 작성하지요. 하지만 의사가 봤을 때 사인이 정말로 불분명하거나, 사인이 명확한 듯 해도 망자의 유족이 그 사인에 반발하여 경찰에 변사신고를 하면 부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노통의 경우 양산부산대병원에서 두부손상을 사인으로 판정하였으므로 일단은 부검의 케이스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유족이 원할 경우는 가능하지요. 부검은 신체 내외를 총괄하는 아주 자세한 신체검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체 내부의 모든 공간(머리속, 목, 가슴, 배 등)을 열어서 그 내부 장기를 적출하여 장기의 상태 관찰 및 약물반응검사 등을 진행하는 과정입니다. 유족의 입장에서는 망자를 두번 욕되게 하는 것이라 여겨져서 꺼려할 수 있는 작업이죠. 하지만 노통의 경우 부검이 필요하다면 단순한 신체관찰 및 방사선학적인 촬영 등 최소침습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검사만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일뿐이고 결정은 유족들이 해야 하는 겁니다.

 

덧글5> 노통 추락후 28분간 방치되었다는 기사.(기사의 행간을 주목하세요.)

1. 6시 14분~17분 사이에 노통이 부엉이바위에서 추락했고 이후 28분여간 혼자 남겨져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네요. 노통의 두부손상 상태로 보았을 때 노통의 사인은 두부손상이 아니라 과다출혈일 수도 있겠습니다. 의식소실상태에서 지혈시도조차 없이 30여분을 그 상태로 있었다면 출혈양이 상당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인체의 혈액응고작용으로 피가 저절로 멎어서 경호원이 발견할 때까지 노통은 살아계셨겠지요.

일단은 출혈은 많았으나 목숨은 붙어 있었다는 가정하에... 지금 상태에서는 추락한 현장이 더 이상 손상되기 전에 그 장소를 빨리 찾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식소실상태에서 과다출혈하면서 한 자리에 머물렀으니 분명히 과다출혈의 흔적을 간직한 혈흔의 흔적이 부엉이바위 아래에 있을 겁니다. 상황이 저런데 현장조사에서 혈흔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노통의 사인이 추락사가 아니거나 경찰이 초동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덧글6> 자살이 아니라서 의문사인 것이 아닙니다.

1. 의문사가 꼭 타살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의문사라는 말의 성격을 명확히 해야 할 듯 합니다. 제가 사용한 '의문사'라는 용어는 사인에 상관없이 사망 당시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노통의 죽음은 일단 자살로 생각되고 있지만 자살까지의 행적이 불분명하고 경찰의 공식발표로는 해결되지 않는 점들이 너무나 많아서 의문사인 것입니다. 모든 증거들이 수집되어 노통의 그날 행적이 명확해지면 이 문제가 해결될 듯 합니다.(정말로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의문사'라는 용어는 '사인이 불분명하다' 라는 말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또한 사인이라는 것은 망자를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사망 당시 행적과는 독립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3. 결론을 말하자면... 경찰에서는 노통의 의문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그날의 노통의 행적을 모두 추적해야 합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노통의 진짜 사인을 밝혀야 합니다. 현재까지의 노통의 사인은 양산부산대병원에서 내린 '두부손상'입니다. 하지만 환자가 거의 사망한 상태로 내원하였으므로 응급실에서 진짜 사인을 밝히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노통은 추락사하면서 두부손상을 입었지만 즉각적인 지혈시도가 없어서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추락하면서 입은 심장파열로 사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너무나 명확해 보이는 상황이라 따로 사인을 밝혀내야 하는 노력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 노통의 행적이 불분명한 이 때 노통의 진짜 사인을 밝히는 것은 노통의 죽음에서 의문사를 굴레를 벗기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족들이 용기를 내어 시신을 부검토록 했으면 합니다. 역시나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덧글7> 장파열 가능성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

1. 제 글의 댓글은 아니고 다른 분이 제 글을 퍼다가 올린 글이 베스트로 올라가 있어서 그 쪽 댓글을 좀 읽어보았습니다. 장파열의 가능성을 제기한 글이 있더군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복부손상에 대해서는 관통상과 둔상 두가지로 배운 것 같습니다. 관통상은 말 그대로 칼에 찔리거나 총 맞는 것이고 둔상은 둔탁한 외력이 복부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손상입니다. 복부둔상 발생시 장파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장 먼저 손상받는 장기는 복부 우상부의 간과 좌상부의 비장입니다. 특히나 간은 복부 내 장기 중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가장 크므로 복부손상시 가장 먼저 의심을 해야 하는 장기입니다. 간손상에 관해서만 본다면 외력의 크기에 따라 간좌상(간에 멍이 든 것)에서부터 간이 찢어지는 것까지 상태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부검에 대한 의견을 지속하는 것은 그러한 신체의 모든 상태들이 사인을 밝히고 그 날의 행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늑골골절과 혈흉이 발생할 정도로 흉부손상 있었고, 골반뼈가 골절될 정도로 골반부 손상이 있었는데 흉부와 골부 사이의 복부는 손상이 전혀 없다면 그건 좀 이상한 거죠. 이러한 정보는 모두 부검에서 나옵니다. 

 

덧글8> 경호원의 진술번복 (updated by PM11:10)

1. 의학적인 부분은 아닙니다. 그냥 경호원의 진술번복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수사를 맡고 있는 경찰은 경호원의 진술번복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전직대통령에 관련된 상황이란 것을 배제한다 하더라도 처음의 진술을 번복하고 있는 사람의 진술을 또 그대로 받아적기식으로 발표하는 것이 도무지 말이 안됩니다.(그건 수사할 의지가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 경호원의 진술이 나중에 또 바뀔 줄 어떻게 압니까? 중요한 것은 그 진술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겁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당시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팅을 하십시오. 각각의 시각에 어떤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게 실제로 진술한 것처럼 물 흘러가듯이 자연스러운지 각각의 순간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어떤 것들인지, 각각의 시각에 만났다는 목격자들의 인원을 파악해서 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지 목격자들과 경호원의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모두 파악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거짓이 아닌 신뢰할 수 있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정리된 글 : http://blog.daum.net/cleansoul79/4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05/28 11:20 2009/05/28 11:20
T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