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경찰 브리핑 자료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159941
|
| |||||
경찰 브리핑 자료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159941
|
출처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604867&RIGHT_DEBATE=R2
0. 들어가면서
---------------------------------------------------------------------------------
당신은 당신 국가의 최정상급 정치인이다.
당신은 평생동안 청렴함과 도덕성을 자부심으로 여기며 정치를 해왔다.
그러던 어느날 당신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당신의 정치적 지위를 본 수많은 정/재계 관계자들이 로비와 청탁을 시도했고, 당신의 배우자, 두 자녀, 당신의 형, 당신의 친구가 모두 부적절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검찰은 이 사실을 파악하고 수사를 시작했으며, 끝내 당신의 주변인들이 돈을 받은 단서와 정황증거를 모두 확보했다.
하지만 검찰은 실질적인 피의자로 당신을 직접 지목하며 당신의 배우자와 두 자녀가 받은 돈은 사실상 당신이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서 기소하려고 한다. 검찰은 배우자와 두 자녀는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에 불과하며, 배우자와 자녀에게 돈을 준 사람은 당신을 보고 돈을 준 것이지, 그들에게 돈을 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당신이 직접 받은 돈은 단 하나도 없다.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하려면 당신이 당신의 주변 가족들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알았음을 검찰이 입증해야 하는데, 검찰은 특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고 단지 '상식적으로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 1.) 나는 결백하다. 무죄를 주장한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공인으로서 나를 믿어왔던 나의 지지자들을 배신할 수 없다. 설령 내 배우자, 내 자녀가 감옥에 간다 해도 사실은 사실이다. 나는 돈을 받지 않았으며, 돈을 받은 것은 내 배우자, 내 자녀들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죄가 없다.
(선택 2.) 죄를 인정한다.
평생을 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내 배우자, 그리고 나의 자식들을 버려가면서까지 나의 명예를 지켜야만 하는가? 여기서 내가 받았다고 말만 하면 내 배우자도, 내 자녀도 모두 무사히 넘어갈 수 있다. 차라리 나의 명예를 포기하고 나의 가족을 살리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1. (서론) 노무현은 왜 '자살'을 선택했나?
많은 외국분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의 외국 언론은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이 '검찰의 비리수사'에 따른 심적 압박감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대로라면 이 사건에 대해서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로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비리를 저질렀다고 은연중에 간주해버리게 됩니다. 진짜 노무현이 고뇌한 것은 무엇인지, 진짜 노무현을 괴롭힌 것은 무엇인지, 진실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저는 '노무현의 딜레마'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2. 배경 법률지식의 이해.
법률적으로 보면 (대개 다른 외국도 똑같습니다.) 불법행위 / 위법행위를 저지른 피의자는 직접적으로 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 범죄 사실에 대해서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범죄자와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법률상 용어로 '선의와 악의'라고 합니다.
'선의'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전혀 몰랐거나 모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지칭하고,
'악의'는 국어사전의 의미와는 다르게 '해당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사람을 '악의'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법에서는 '선의'인 제3자는 철저하게 보호하는 반면, '악의'인 제3자는 가해자/피의자와 준하는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게 됩니다.
검찰이 굳이 돈을 직접적으로 받은 권양숙씨나 받은 돈의 실질적인 이익을 취한 노건호, 노정연씨를 피의자로 잡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을 피의자로 잡은 것은, 사실상 이번 사건이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며 노무현 일가에 간 뇌물은 실질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보고 준 것이지, 그 가족들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준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주변인들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양숙씨의 소환 조사, 노정연씨의 아파트 계약서, 노무현의 1억짜리 시계와 같은 것들을 예를 들며 '박연차가 이렇게 여러가지 형태로 돈을 줬는데 노무현 당신은 이것을 하나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고 검찰은 반문합니다.
검찰이 실질적으로 제시한 증거는 '박연차'의 구두 진술이 전부입니다. 그 이외에 물증은 존재하지 않으며, 물증에 준하는 증거 또한 거의 없으며 그나마 물증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환갑 선물인 1억짜리 시계 2개인데 이것을 권양숙씨는 잃어버렸다고 진술합니다.
그래서 검찰은 '상식적'으로, 그리고 박연차의 구두 진술로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소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구속/구속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소와 구속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구속을 하는 이유는 기소하는 과정에 있어서 피해자가 도주의 우려가 있거나,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기타 구속하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 사유가 있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한해서 구속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은
1) 검찰은 제시할 증거는 확실하게 없으며,
2) 그나마 구두로 증언하는 박연차는 노무현 대통령이 주변인들이 돈을 받은 사실을 알았고, 나아가 '상대가 대통령인만큼 자신이 돈을 주지 않으면 불측의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로비에 대한 처벌을 현저하게 줄일 수 있는 법적 이해관계자인 만큼 그의 진술에 진정성을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법정 공방에서는 자신의 결백함과 무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차례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해 왔구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끝까지 괴롭힌 것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밝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가져다주는 결과는 결국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노무현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3. 검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목적
검찰은 처음부터 노무현 대통령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가족들이 돈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주변 가족들을 피의자로 잡지 않았습니다. 분명 권양숙씨를 상대로 100만 달러 (+40만 달러) 에 대한 기소를 했으면 권양숙씨는 거의 100% 불법자금 수수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또, 노건호씨와 노정연씨는 나름대로 해당 수수자긍메 대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한 자로서, 혹은 '악의'의 제 3자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검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끝까지 노무현만을 피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이 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노무현 대통령인 만큼 그들은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연관시킬 무언가를 찾는 표적수사만 계속했고, 그들이 원한 것은 '죄인' 노무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 노무현이란 법적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도덕적인 '죄인' 노무현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과 도덕이라는 개념은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듯이 '법적 잘못은 처벌을 받지만 도덕적 잘못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잘못은 잘못이다.' 는 것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부분이 인정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4. 검찰이 만들어낸 '노무현의 딜레마'
글머리에서 밝힌 예제와 같은 상황에서, 당사자인 주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결국
(선택 1) 결백함을 계속 주장한다.
(선택 2) 억울하지만 죄를 인정한다.
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선택했었던 (선택 1) 결백함을 계속 주장한다를 선택할 경우, 법정 공방을 통해서 노무현 대통령은 '법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높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필연적으로 '자신은 죄가 없지만 자신의 가족들은 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수반됩니다. 즉, 자기 자신의 입으로 자기 자신의 가족들의 죄를 고발해야 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노무현 대통령은 '그래, 넌 직접 네가 돈을 받은 사람은 아냐. 그러니 뇌물 수수에 대해서는 죄가 없는 결백한 사람이야. 하지만 넌 너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서 가족을 고발했어. 넌 가족을 팔고도 네가 (평생 주장해왔던, 신념이라고 여겨왔던) - 결백하다고, 도덕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니?' 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배우자도, 가족도 팔아버린 비양심적인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로 노무현은 작년 말 노건평이 세종증권 비리로 수사중일 때, 왜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신의 형이 지금까지 죄를 부인하고 있는데, 동생된 입장으로 먼저 대국민 사과를 해버리면 형의 죄를 인정하는 형태가 되므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 가족을 매우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무현에게 자기 자신의 입으로 가족들을 팔아넘기는 행동을 하는 것은 매우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선택 2)를 고를까요? (선택 2)를 고르게 될 경우에는 가족들이 지은 모든 죄의 최종적 책임, 궁극적인 책임은 자신이 짊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가족들을 보호한다는 보장은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시켜서 내 가족을 통해서 돈을 받게 했다.'는 그림이 그려지는데, 이 경우 가족들은 범행의 주체는 아니지만 최소한 공범으로서 처벌은 받게 됩니다. 이 경우 노무현 대통령은 '평생 도덕과 청렴함만을 부르짖던 자가 전가족을 동원해서 비리를 저질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만약 제가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저 역시 (선택 1)을 선택할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식적으로 (선택 1)이 그나마 자신이라도 살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전 가족을 동원한 비리인'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선택 2)보다는 그나마 (선택 1)이 최악이 아닌 차악의 선택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선택지도 결국 자기 자신의 도덕적 파멸을 불러옵니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의 딜레마입니다.
도덕과 청렴함을 중요시하는 정치인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게 될 경우, 자신은 법적으로 무죄를 증명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팔아야 하는 과정은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의 가족을 기꺼히 팔고자 할까요? 그렇다고 자신이 평생동안 지켜온 신념을 배반하고, 자신의 명예를 버릴 수 있을까요?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몇주간을 매우 고통스럽게 보냈을 것입니다.
4. '노무현의 딜레마'에 숨겨진 무서운 메커니즘 경제학의 이론
노무현 대통령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검찰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도덕성과 청렴함이라는 브랜드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구속을 하든 법적 처벌을 받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평생 도덕으로만 먹고 살아온 노무현을 '도덕적으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검찰을 존경하고 싶습니다. '대통령 주변인들이 뇌물을 받았다'라는 사실(fact)에서 '주변인이 아닌 대통령 본인을 기소한다.'라는 행동(Action) 단 하나만으로 검찰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메커니즘을 조성하여 (시장) 참여자가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얻도록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200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애릭 메스킨 교수의 '메커니즘 경제학 이론'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유명한 존 내쉬의 게임이론(역시 노벨 경제학 수상, 죄수의 딜레마가 대표적인 케이스)을 한단계 더 발전시킨 최신 경제학 이론이지요.
메커니즘 경제학의 진정한 무서움은 과거 수많은 경제 이론들이 시장 참여자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때' 나오는 결과만을 설명한 것인데 비해 메커니즘 경제학에서는 시장참여자가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그의 선택에 따른 결과는 항상 최선으로 나옵니다.
성경에서 나온 내용인가요?
두 아이에게 케이크를 공평하게 나눠주려면 한 아이가 케이크를 자르고 다른 한 아이는 자른 케이크에 대한 선택권을 주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메커니즘 경제학의 기초입니다. 이 경우, 어느 한 아이가 비합리적이고 착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어서 케이크를 불공평하게 자르거나, 더 작게 잘린 케이크를 선택하거나 해도 그 결과는 항상 두 아이를 만족시킵니다. 설령 두 아이 모두 비합리적인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선택을 하는) 경우라도 결과는 항상 아이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검찰은 기소 대상자만을 바꾸는 행위 하나만으로 노무현을 자신들의 승리 메커니즘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노무현을 딜레마에 빠뜨림으로서 노무현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자신들에게는 이익만을 가져다 주도록 한다는 이런 잔혹한 메커니즘을 만든 검찰이 정말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본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고, 그는 항상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검찰이 만들어낸 이 승리의 메커니즘에 빠지게 되자 그는 어떠한 선택도 합리적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뇌 속에 그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이 자살이, 검찰이 만들어놓은 '완벽에 가까운 메커니즘'을 깨는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의 케이크의 예에서 부모가 만들어놓은 완벽한 공평의 메커니즘을 깨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이는 부모가 준 선택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거나, 케이크를 아예 먹지 않겠다고 하거나, 케이크를 바닥에 엎어버리거나, (섬뜩한 이야기입니다만) 다른 아이를 사라지게 하거나 자기 자신이 사라지면 메커니즘은 깨집니다. 애시당초 목적(두 아이에게 공평하게 케이크를 나누어준다)을 가지고 만든 메커니즘이 더이상 그 목적을 위해 작동을 하지 않게 되어버리지요.
그가 선택한 자살의 결과 검찰은 더 이상 노무현 일가를 몰아붙일 수 없게 되었고, 노무현의 도덕성에 더이상 흠집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노무현 일가의 비리는 영원히 의혹으로만 남게 되었고, 재판으로 판결이 확정되는 일이 없어진 만큼 노무현이 뇌물을 받거나 받는데 방조, 혹은 그 사실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포괄적 뇌물죄의 적용은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노무현이 도덕적으로 죄인이 될 가능성도 아예 사라졌습니다. 또 가족들이 기소될 가능성도 사라졌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노무현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그의 모든 것을 지켜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을 국민 그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슬퍼합니다. 애도합니다. 오열합니다.
5. 반드시 검찰이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이유.
법에서는 간단하지만 절대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잘못한 자가 그 잘못에 대해서 처벌을 받는다.'
이 명제는 간단하지만 많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이 잘못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겠지요. 또, 그 잘못을 주체적으로 행한 사람인지, 아니면 직 간접적을 관여한 사람인지, 혹은 무관한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행위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여러모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많이 했습니다.
첫번째로, 100% 기소 + 처벌 가능한 권양숙, 노건호, 노정연이 아닌 불확실한 노무현을 피의자로 잡은 점.
(잘못한 자의 선택)
두번째로, 100% 입증가능한 확실한 잘못을 입증하기보다는
오히려 입증하기 어렵고 그 결과가 불확실한 노무현의 혐의를 계속 입증하려고 한 점 (잘못의 입증)
마지막으로, 150% 이해 가능한 불법자금 수수 등등... 정말로 일반적(?)인 죄명이 아닌,
'포괄적 뇌물죄'라는 불확실한 죄명을 적용하려고 한 점 (잘못에 대한 결론)
이러한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메커니즘 경제학이라는 툴로 설명하면 은근히 쉽게 풀립니다.
1. 어디까지나 노무현 대통령만을 노리는 표적의 고정.
2. 행위의 결과는 노무현 대통령의 브랜드 훼손으로 이어질 것.
3. 노무현 대통령이 어떠한 선택을 하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것.
이상의 전제 하에, 검찰은 완벽에 가까운 메커니즘을 만들어 냈습니다. 무죄라고 주장해도 도덕적 죄인이 되고, 유죄라고 인정하면 법적 죄인이 되는 무시무시한 메커니즘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이 메커니즘안에 노무현 대통령을 집어넣기만 하면 어떤 형태로든 노무현 대통령은 죄인이 됩니다. 무시무시한 메커니즘이지요? 이 메커니즘을 위해서 검찰은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한 것입니다. 행동 하나하나가 메커니즘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이고 완벽한 재료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분명 검찰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한 자가 그 잘못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분명 권양숙씨가 정상문 비서관을 통해서 박연차로부터 돈을 수수했습니다.
노건호씨와 연철호씨도 박연차로부터 투자자금을 받았습니다.
노정연씨의 집도 노정연씨 혹은 권양숙씨가 주도적으로 돈을 받아 산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잘못들은 모두 명백하고 확실한 '사실' 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그 사실에 관여하고 행동한 사람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권양숙씨가 돈을 받았으면 권양숙씨가, 노무현 자녀들이 돈을 받았으면 노무현 자녀들이 수사를 받고 처벌을 받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이번 사건을 '원칙'과는 어긋나게 핵심과 몸통찾기에만 주력했고, 수사 흐름을 시종일관 '노무현'을 중심에 두고 진행해 왔으며, 언론에 공개하는 내용도 어디까지나 주체는 노무현인 것으로 흘렸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행동입니다. 나아가, 기소 대상을 노무현의 가족들 혹은 노무현을 포함한 노무현 가족 전원으로 잡지 않고 모든 사태에 대해 뭉퉁그려서 노무현으로 잡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검찰의 명백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검찰은 정말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노무현 대통령을 수사했다고 확신합니다.
앞서 설명한 메커니즘에 대해서 검찰은 우연의 일치라고 일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반문합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인간이 고도의 정신행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의도가 없이, 정말로 우연히 노무현 대통령을 저런 딜레마에 빠뜨릴 가능성은 0%입니다.
만약 검찰이 정말로 우연히도 노무현 대통령을 메커니즘속에 몰아넣었다면, 2007년 노벨 경제학 수상자인 애릭 메스킨은 노벨 경제학상이 아닌 노벨 화학상이나 물리학상 혹은 사회과학과 관련된 상을 받았어야 합니다. '위대한 이론'을 창시한 것이 아닌 '위대한 발견'을 한 게 되니까요.
애시당초 수사에 목표를 설정한 자.
그리고 그 수사를 설계하고 계획한 자.
마지막으로 그러한 수사를 하도록 처음부터 의도를 가진 자.
이 모든 사람들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 신분인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한 자가 그 잘못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하니까요.
Ps 1.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사건에서 '무죄' 혹은 '유죄'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받았건 가족이 받았건 노무현 일가는 분명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최소 100만 달러 이상) 분명 공직자로서는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고, 이러한 잘못을 추궁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을 수사하고 추궁해나가는 검찰의 수사과정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노무현 대통령을 딜레마에 빠뜨려야만 했을까요? 왜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줘야만 했나요?
검찰은 분명 이번 사건을 '노무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이기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수사기간이 작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그리고 주변인, 지인, 정치적 동지 모두를 훌어내는 데다가 자신의 신념까지도 부정하도록 만드는 수사방법. 그리고 소환조사 후에는 최대한 시간을 끌어 언론에 노출시키는 시간은 최대화했습니다.
이러한 수사방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분명 이러한 수사방법은 '노무현이 진실이다 아니다'를 가리기 이전에 노무현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게 됩니다. 무죄로 추정되는 피의자 보호는 전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검찰이 매번 언론의 의혹제기에 사실을 확인해주는 형태로 수사 중계를 해 왔습니다.
강호순같은 연쇄살인마가 경찰에 붙잡히면 그들에게 마스크를 씌워줍니다. 그것은 강력범죄 현행범도 최소한 법원의 판결 전까지 그의 인권을 존중해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그 최소한의 마스크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의 비리 여부 이전에 수사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명백하게 검찰이 져야만 합니다.
[정토총서1] 미래문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 / 법륜 / 정토출판
1. 일과 수행
1.1 정토행자와 수행
O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삶 -> 일과 인간관계가 복잡해진다 -> 시비분별이 일어나기 쉽다 -> 괴로움이 생겨난다.
=>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건 수행의 기본 조건이다. 집중력 있고 능동적인 마음이 경계에 부딪히게 되면 시비분별이 일어날 때 내면을 관찰하게 되면 갈등이 해소된다.
O 삶 자체가 수행이고, 생활이 그대로 수행이다. 일과 수행은 어떠한 모순도 없다.
O 정토란 고통을 유발하는 조건이 사라진 사회, 탁한 마음이 사라지고 청정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다.
O 사회운동가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힘쓰고, 종교인은 마음 수행에 힘쓰는데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 정신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이 둘을 함께 해나간다는 뜻이고 따라서 일과 수행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은 일하는 가운데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뜻한다.
- 수행 :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 일 :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회개혁의 의미
O 보살사상의 핵심 : 중생세계를 없앰으로써 바로 부처세계로 들어가는 것
O 수행이란? 행(行)으로 지은 업(業)을 없애는 것. 행이란, 십이연기와 오온에서의 행을 말하고, 업은 身, 口, 意(행동, 말, 생각)을 잘못해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 업은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수행은 행을 닦는 것인데, 身, 口, 意(행동, 말, 생각) 삼업을 닦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 수련 : 심신을 단련하여 강한자가 되는 것. 이것의 목적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 수행 : 마음의 업을 닦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것. 얻겠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에서 괴로움과 속박이 사라지는 이치를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수행을 한 자가 수련(기술이나 지식 습득)을 하면 다른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한다. 수행한 후에 수련은 필요에 의해 닦으면 된다.
O 우리가 일상적으로 얘기하는 행복이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기분좋은 상태. 불행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불쾌함. 똑같은 상황이라도 조건과 그때의 마음상태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O 복받았다의 의미는? 노력보다 결과가 좋다. 노력을 적게 하고 결과가 좋았다는 말은 노력을 많이 하고도 결과가 나쁜 것을 전제로 한다. 복받은 사람이 있으면 복없는 사람이 있고, 다시 말해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EX) 거리에서 만원을 주워 행복함 = 만원을 잃어 불행한 사람이 있음 (동전의 양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실체는 적게 노력하고 명예, 재물, 권력을 많이 갖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생겨나고, 종교나 신을 찾게 되고, 신통을 찾게 되고 한다. 뇌물을 쓰기 보다 절에 보시하여 복을 비는 것이 더 싸게 먹히면서 심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에 절에 자기 자식, 자기 남편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이 북적된다. 다 도둑놈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렇게 허황된 생각(전도몽상)에 빠져 헛된 기대를 하고, 총족되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이런 일은 존재의 본질, 즉 존재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에서 생겨난다. 이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으면 너도 있고,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연기그물에 놓여 있다.
O 참된 행복은 주는데 있고, 사랑하는데 있고,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데 있다. 그럴때 진정한 주인노릇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주고도 괴로울까? 거기에 받으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 한 생각 내려놓으라의 의미 : 뒤집혀진 생각을 내려놓으라. 한 번 돌이켜 다시 살펴보라.
- 현재에 집중하라 : 항상 깨어있으라
- 참회하라 :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
- 과정을 중시한다 : 매순간을 중시하고, 일단 한 번 해본다. 먼저 해보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결과를 중요시 하기 때문.
O 화두란?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관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즉, 모든 삶의 가치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변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전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박차고 나가는 것.
경전에는 이러한 이치가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이치를 터득해서 결국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O 무언가 얻고자 하니, 그것이 잘 안될 때 조급해지고,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즉, 깨달음을 얻으려 하면 깨닫지 못했다고 답답해하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얻으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는 한 결코 해탈이나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얻을 바가 없어지면 겁날 것도 없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확신이 생긴다.
자각이 이루어지면 괴로움이나 두려움도 없어진다. 수행은 근본적인 관념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전제를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다.
O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 문제에 관해 :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지적하고 토론해야 한다. 문제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단, 이 경우 고쳐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면 그것은 자기문제가 되는 것이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관점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충돌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해결하되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평등한가이다. 평등한 관계에서만이 참된 토론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이것 역시 수준있는 해탈의 세계와는 멀다. 상대방이 뭘 하든 간에 무조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건 괜시리 시시비비를 가리며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참견하지 말라는 걸 의미하지 수행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론하고 지적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O 우리는 수행의 원칙과 태도가 무엇인지 먼저 명확히 이해 해야 한다.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의문과 답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옳고 그름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지만, 일을 할 때는 다시 옳고 그름을 따져야만 한다. 일은 효율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할 수밖에 없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할 경우, '저 사람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같이 못하겠다'와 같이 일을 못하는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는 것은 옳바른 수행의 관점이 아니다. '저 친구하고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혹은 '성격이 맞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라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수행은 100% 자기를 돌아보는 자세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O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 : 우리는 밖의 대상과 경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이러한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것이 수행의 출발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 깨어있는 것이 자등명이다. 그러나 주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법에 의지해서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법등명이다. 이렇게 두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분명한 선에 도달하게 된다. 몇 번만 해봐도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하나하나 점검하지 않아도 분명해진다. 자기 느낌을 경전의 내용과 대비해 봐도 똑같고, 경전의 내용을 실천해 봐도 똑같을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확신이 서는 것이다.
O 원칙을 가지고 기도문(정토회의 수행문)에 집중하면 틀림없이 자기 내부의 모순을 보게 된다. 모순을 보게 된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모르고 있었던 문제의 뿌리를 보게 되거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기도할 때 기도문에 집중하라고 하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기도문에 집중하라고 하는 것이다.
기도문은 나보다 나은 선지식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서 좀 더 심층의식에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문을 달라는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않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 더 정확한 사람한테 듣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수행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명령이 아닌 이런 근본 원리를 터득해야 안심입명 할 수 있다. 그래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중심이 서고, 오뚝이처럼 왔다갔다 해도 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인생을 확실히 살아갈 수 있다.
1.2 정토행자와 일
O 우리가 말하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의 기쁨을 높이고, 나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는 데에 쓰이는 것을 가리킨다.
O 우리는 돈이 주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되는 사회, 생명이 주인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 돈을 쓰더라도 그것은 좀 더 편하게 생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관계의 효율성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이지, 대가를 위하여 인간관계를 황폐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O 사람들은 쓰는 것만 좋아하고 쓰이는 것은 싫어하니 통제하지 않으면 수입과 지출에 큰 불균형이 생긴다. 사람을 써야 하는 사람은 돈을 미끼로 쓰이는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노동은 괴로운 것이 된다.
O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수행에서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안 되고는 별개의 문제다. 괴로움이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일이란 앞에서 이야기한 수행과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필요로 한다.
O 우리는 상대에게 쓰여지는 동안 괴로워하고, 그 댓가로 받은 돈을 소비하며 만족을 얻는다. 쓰기 위해 버는 시간이 희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쓰이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것이 나의 존재 가치임을 깨닫는다면 쓰이는 것이 바로 여가가 된다. 그러면 노동과 여가의 구분이 사라진다.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노동의 해방'이다.
물론 한 달 내내 일해도 배를 곯을 정도고 몸을 다쳐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불구가 된다면 노동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어진다. 이런 사회구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의 해방은 몇시간 일하느냐, 월급은 얼마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느냐 아니냐에 있다.
누구나 노동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안 되는 이유는 기존의 관념이 '쓰이는 것은 나쁘다, 쓰는 것이 좋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여기 있으면 손해보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O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토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수준을 최소한 대한민국의 중간 이하로 맞출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사무공간이 너무 좁아 비효율적이므로 그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우리의 잠자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을 지켜내면 우리의 도덕성은 그만큼 유지되는 것이고, 이것을 못 지켜내면 우리의 도덕성은 사라진다.
도덕성이 사라지면 당장은 영향이 없겠지만 조금 지나면 우리의 순수성을 보고 보시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연의 원리이다.
O 정토회에서는 일하지 않고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일이나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옆에서 거들어주는 후원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회원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토회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분별심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에게 돌려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한다.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껴야 한다.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기술을 익히거나 노동과 직접 상관없는 수련을 할 때도 있다. 그것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도 일이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낫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 염불, 참선, 독경을 잘하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는 요구되고 있다. 이런 각종 요구들은 생활 속에서 조절되어야 한다. 일에도 필요하고 재정 여유도 있고 시간도 된다면 당연히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야 한다. 조건에 맞는 순위를 정해 놓고 조절해야 한다.
O 전체를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은 개인적 욕구가 아니다. 몸이 아팠을 때 한나절 쉬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 쉬어야 한다. 이럴 때 일하면 오히려 전체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개인적 욕구라고 몰아붙여서는 안되고, 본인도 그것 때문에 죄의식을 가져서도 안된다. 단지 거기에는 전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 전체 회의에서 거절되면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된다. 한 번 없었던 것으로 했다고 해서 다시 안건으로 제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생각해 보고 필요하면 다시 안건으로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일하면서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문제가 있으면 당당하게 제기하고, 나는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깨끗하게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하고, 내가 보기에 아직도 옳다고 판단되면 다른 사람이 다 틀렸다고 해도 다음 회의 때 용기있게 제안도 해야 한다. 그것은 고집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늘 두가지 모순에 빠져 있다. 중구난방이 되더라도 자기 주장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시키는대로 고개 푹 숙이고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고, 고개 숙이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다. 수행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O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행의 원칙을 지켜나가면 어떤 경우에도 자기는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주위 여건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정도가 심해진다. 모든 사람이 이 수행의 원칙을 적용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1) 환경문제 : 환경문제는 우리의 생존과 관계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비를 적게 해야 한다. 소비가 줄면 생산이 준다.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아껴써서 자연이 정화시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비하면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환경운동이 수행과 겹치게 되면 환경이 보존될 수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누가 환경운동에 돈을 대주든 안대주든 사람이 따르든 안 따르든 괴로울 일이 없다. 많이 쓰는 사람이 괴롭고 적게 쓰는 사람이 즐거우면 적게 쓰는 쪽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2) 제3세계 빈곤문제(기아, 질병, 문맹) :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 이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고 문자 정도라도 터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3) 평화문제(차별이 아닌 함께 하는 삶) : 인종차별, 민족차별, 성차별, 문화차별 등 수많은 억압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이런 갈등 요인 탓에 내전, 민족전쟁, 인종전쟁, 종교전쟁이 일어난다. 우리가 정의를 지향한다면 차별이 개선되는 쪽으로 우리의 활동이 이루어져가야 한다.
4) 민족 통일문제 : 민족 분단은 엄청난 군비 허비, 젊은이들의 시간 소요, 사상적 제한 등 많은 제약이 따른다. 또한 북한 동포들이 굶어죽는 일은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북한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한다.
5) 개인문제 : 살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수행을 통한 해결방법
O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사회,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이루어질 때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사회, 즉 정토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사회를 지향해 가는데 수행법이나 사회개혁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전환만 일어나면 개인도 편안하고, 상대를 해치려는 생각을 버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관계가 경쟁 관계가 아닌 벗의 관계가 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된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면 이런 세계는 다 실현 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인연 닿는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수행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수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볼 때 가장 큰 문제가 환경문제이므로 환경운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되어 제3세계 빈곤구제 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문명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다면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정신문명을 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서서히 개척해도 되는 문제인데 반해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은 비록 인류 문명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응급치료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당분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 중에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일단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것처럼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일의 방향이다. 앞으로 일은 얼마든지 새로운 것이 개척될 수도 있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역량이 늘어나는 만큼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면 될지, 다음 세대까지 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이런 방향으로 우리 세대에는 최소한 30년(만일결사)을 잡고 어느 정도 해 보겠다는 계획이 잡혔다. 우리는 이런 큰 틀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떻든 이런 포부를 지니고 일을 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2. 새로운 문명, 새로운 인간
2.1 자기 실현의 길
O 봉사자란? 누군가가 내가 쓸 이불과 옷과 쌀 등을 만들어준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이처럼 누군가 사랑가는데 필요한 일을 하고 필요한 곳에 쓰여지는 사람이 봉사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봉사자 아닌 사람이 없다.
뭔가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해야 봉사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봉사자의 삶인 것이다. 태어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봉사자로서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봉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참 모습,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자의 흉내만 냈지 근원적 사상과 행위가 일치되지 않는다. 봉사활동에 대가를 기대하고, 봉사활동이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O 존재의 생명은 쓰임(용도)에 있다 : 빗자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지만 모두 먼지를 쓸기 위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먼지를 쓸기 위한 용도가 있을 때 빗자루이며 때를 닦는 용도가 있을 때 걸레다. 생긴 것이 빗자루나 걸레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먼지를 쓸지 못하고 때를 닦지 못한다면 그것은 빗자루도 걸레도 아니다. 빗자루와 걸레의 존재의의가 없어진다.
모양과 용도에 따라 이름하여 존재를 이룬다. 이것을 명색(名色)이라 한다. '걸레' 할 때도 용도인 명과 그 생긴 모양인 색이 결합했을 때 하나의 존재가 된다. 만약 그 용도가 쓸모없을 때, 즉 명이 사라졌을 때 색만 가지고는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그 때는 이미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도 한 남자와 결혼을 통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아내로서의 역할을 안한다면 이름만 아내지 실제로는 아내라 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존재고, 선생은 학생들의 배움과 그 요구에 쓰이는 존재다. 빗자루나 호미 역시 다 쓰임이 있다. 호미가 풀을 매는데 쓰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호미가 아니라 단순한 고철더미다.
그렇다면 잘 사는 삶, 좋은 삶은 어떤 삶일까? 아내로서 좋은 삶은 남편에게 잘 쓰이는 것이고, 선생으로서 좋은 삶은 학생들에게 잘 쓰이는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은 내 존재 가치가 높다는 얘기와 같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길이다.
쓰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말한다. 빗자루가 방바닥을 쓰는데 쓰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형상은 있지만 빗자루로서는 이미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색보다 명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색에 집착하기 때문에 명이 사라졌는데도 그 색을 가지고 판단한다.
O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잘 쓰인다는 말이다. 즉, 필요로 하는데 쓰이는 게 잘 쓰이는 것이다. 그 필요는 누구의 필요인가? 당연히 상대의 필요이다. 상대의 필요에 따라 쓰이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쓰여야 할까는 상대한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어디에 쓰일까를 고민하기 보다 상대가 필요하다고 할 때 쓰이면 된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데 잘 쓰이려면 내 요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지 '예'하고 달려갈 수 있다. 쓰이기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하면 괴로움이 생긴다. 기꺼이 해야 한다.
잘 쓰이는 것이 잘 사는 길이고 잘 쓰이는 길은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것이다. 그가 써줘서 내가 잘 쓰였으니 내가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 써준다는 것은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따라서 나를 써준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쓰였으니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사고방식은 쓰이는 것보다 쓰는 삶이 더 좋다는 가치관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면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대가가 없어도 섭섭한 마음이 없어진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많이 쓰는 것이 좋은 줄 착각하고 있으면 중생이고, 그 이치를 알고 받아들여 살면 보살이다. 진정한 보살행이 되려면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보살행 흉내만 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살행과 깨달음이 별개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치를 깨달으면 행위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 깨달은 후에 얼마 더 노력해서 행위가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큼 깨달으면 손톱만큼의 행위가 나오고 손만큼 깨달으면 손만큼의 행위가 그냥 나오는 것이다.
O 깨달음은 곧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쓰임새 있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영화 시티오브조이에서 의사인 주인공이 인도에서 가난한 여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난 뒤 진정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회복해 가는 과정.
정토회에서 일을 하면 왜 월급이 없을까? 그것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50만원을 받고 일하면 50만원짜리 월급쟁이이고, 100만원을 받고 일하면 100만원짜리 월급쟁이이다. 그러면 다른데서 2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손해라는 생각에 항상 후회를 하게 된다.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자기 존재의 실현이다.
O 쓸때는 살리도록 써야 한다. 아이가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애완동물처럼 보호하기만 하고, 쓸 줄만 알게 키우면 사회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때문에 아이에게 혹사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기 싫어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일을 배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즉 아이를 살리도록 써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쓰이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삶이 그만큼 주체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괴로움이 적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자기가 편안해지는 자기 실현의 길과 정토 실현의 길은 둘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봉사하는 것은 자기 실현의 길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O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데 지금 어떤 용도가 더 강렬한가의 문제다. 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고, 내가 없으면 안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용도가 더 강렬한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쓰임새는 필요가 강렬한 쪽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거기에 자신의 보람이 있다.
봉사조직을 모은다고 할 때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들에게 먼저 쓰여져야 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인다.
어떤 사람이 절에 나왔는데 법문을 듣고 상담을 통해 자기 고민이 해결되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절에 나오는 것이 재미있고 이득이 있다. 스님은 그 사람에게 잘 쓰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쓰이기만 하면 이 조직이 오래 유지될까? 그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나올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절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조직에 필요에 의해 쓰이면 나온다. 즉, 그 조직이 그 사람을 필요로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쁘게 나온다.
조직을 잘 관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써줘야 된다. 써줄때 보람을 느낀다. 그러니까 일을 계속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떠 넘기듯 주면 그 사람은 얻으러 왔는데 무엇인가 뺏긴다는 기분이 들고, 쉬려고 왔는데 자꾸 하기 싫은 일을 시킨다는 생각에 도망가 버린다.
조직을 만들어 함께 일할 때 두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지도자가 사람을 시키기만 하고 그 사람의 필요에 쓰이지 않는 경우, 사람들이 모두 가버린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에도 사람들이 나중에 안 나와 버린다.
존재는 쓰고 쓰이는 관계다. 써야 된다는 것은 서로 일을 나누어 맡겨야 된다는 것이다. 모르면 가르쳐 주면서 맡겨야 한다. 쓰일 때는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고, 쓸 때는 상대를 살리도록 써야 한다.
상대를 아낀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하는 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온실속의 화초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양로원에 봉사를 갔다고 하자. 빨래와 같이 그곳의 어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기만 해서는 반쪽의 봉사이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 줄 것이 있어야 그 분들도 보람을 느낀다.
O 뭔가 자비심이 많아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어려움에 대해 많이 알고 거기에 내 쓰임새가 필요로 하니까 거기에 쓰이지 특별한 이념과 사상이 있어야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쾌히 가서 봉사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19 이상으로 유명하고 공신력 있는 단체를 조직하여 연락만 하면 달려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해결해 준다면 우리 사회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편안해질 것이다. 이런 단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다.
지금까지는 각 개인이 괴로워 죽겠다 하는 문제에 빠져 있었다면 이제는 이렇게 모두의 요구를 해결하는 데 쓰임새 있게 삶이 전환되어야 한다.
2.2 어떻게 살 것인가
O 농부가 씨앗만 보고도 언제 심어야 하고 언제 싹이 트고 자라 무슨 꽃이 피고 수확량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듯이 자기 업식을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다. 또한 농부가 어떤 씨앗을 심고 틔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듯 우리의 인생 또한 마음의 밭에 어떤 종자를 심어 키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O 폐가 좋지 않는 사람은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와 인류, 그리고 내가 처해 있는 현실도 병행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수행은 포기할 줄 아는데 그 묘미가 있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혼란스럽다.
O 북풍한설에 굶어도 희망이 있으면 기쁨이 있다. 목표를 놓치면 오히려 사소한 욕구들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효율적일까?'하는 주제로 토론하고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의식주 문제는 놓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되는 기초다.
결혼했으면 혼자 산느 것보다 진리에 대한 탐구의 정엵과 사회 정의를 위한 추진의 힘이 커야 하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희망이 더 커야 된다. 그래야 논리가 맞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 둘이 사는 사람보다 생각이 더 바르고 행복하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혼자 사는 보람이 있다.
O 결혼했으면 부부간에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원리를 터득하여 책 한 권 낼 정도는 되어야 하고, 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야 된다.
O 인생은 허망하고 연극인 줄 아니까 이왕 꾸며진 무대에서 신나게 놀아보자~ 하는 것이다. 조건에 순응하고 그 조건을 즐길 줄 알면 된다.
2.3 어떻게 살 것인가
O 미래문명은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과거 문명의 세계관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대립의 관점에서 보았다면 미래문명은 이들을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행복은 대립의 관점에 서서 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것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연관 속에서 상호 의존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승리한 순간에 행복감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거문명이라면, 미래문명은 그렇게 서로 연관속에서 서로 돕고 서로 쓰여지는 과정 자체가 그대로 좋다는 행복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보살에게 있어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는 세계다' - 화엄경
- 대부분의 동물은 먹이를 재배하거나 저장할 줄 모른다. 때문에 그때그때 사냥을 해야 하고, 개체수를 급격히 늘릴 수가 없다. 먹이사슬의 균형이 깨지면 결국 그 피해는 자신들에게 돌아오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다.
- 인간도 이 순환계에 포함되었던 존재였다. 인간은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뿔과 같은 신체적 이점도 없고, 달리기가 빠르지도 않았기 때문에 맹수들에게 피해다니며 지금의 원숭이와 같은 중간포식자로 살았다. 인간에게 있어 유일한 장점은 머리가 좋았다는 것이다.
- 인간이 결정적으로 생태계 전면에 나선건 농업혁명에 의해서다. 농업은 음식을 저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굶어죽는 사람이 줄어들게 되자 개체수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최재천교수는 이를 두고 악순환의 사슬에 빠졌다고 하였는데,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는 노동을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먹을만큼만 먹고 나머지 시간을 여유있게 보내는 동물들과 달리 한평생을 하루종일 논과 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생태계의 규칙을 거부하는 대신 생명을 연장하게 되었지만 인간은 빼앗길 것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야수는 더 이상이 인간의 적이 될 수 없었지만 새로운 적이 생겨났다. 바로 인간이다.
- 하이에나가 치타의 포획물을 가로채듯, 인간은 생산물은 다른 인간이 가로채기 시작했다. 인간은 누구보다도 인간이 영악한 존재임을 알았기에 인간 사이의 다툼은 무척 잔인하였으며, 역설적으로 이런 경쟁을 통해 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문명의 발전은 인간의 수를 더욱 급격히 증가하도록 하였지만, 전쟁을 통해 자연이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개체수 조절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놀라운 안락함과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한평생 먹고 살기 위해 바삐 일하고, 경쟁을 통해 남을 누르고 올라가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정신적 행복을 추구할만큼 배부른 존재가 되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다. 가진 것에 대한 상실의 두려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 단순하게 보면, 인간은 굶어죽지 않게 되었지만 굶어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하며, 그 결과로 쌓아놓은 부를 잃지 않게 고심해야 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축적해놔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최재천교수의 악순환이란 말은 그래서 이해가 된다.
- 이런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나의 것이 있다(즉, 잃을 것이 있다)는 집착을 없애야 한다. 나의 것이 없으며, 잃을 것도 없고, 더 쌓을 것도 없다. 그냥 지금 현재의 것을 즐기면 된다. 돈을 벌면 가장 가치있게 쓰고, 없으면 구하면 된다. 제도상 굶어죽기는 쉽지 않은 사회니... 나머지 시간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부하면 된다.
- 이런 자유로움을 막는 것은 사회적 '눈'이다. 사회적 관계가 깊고 넓을수록 자신에 대한 평판은 자신에게 족쇄로 다가온다. 자신도 모르게 신분상승이 행복추구의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 되고, 그런 노력이 고단하지만 오히려 가장 속 편하게 느껴진다.
- 집착은 모든 족쇄의 출발점이 된다. 집착의 끝은 결국 남의 시선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내 마음(욕망)에 대한 집착이다.
대안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희망제작소(www.makehope.org)
아름다운 가게 대표인 박원순 변호사가 상임이사로 있으며, 각종 프로젝트를 통해 보다 나은 사회를 고민하는 민간싱크탱크이다. 후원금으로 운영되며, 만들어진지 올해로 3년이나 되었다. (왜 이제야 알게 된거지 -_-)
낯익은 사람들이 강사로 눈이 번쩍 뜨이는 각종 강연회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강연한 내용을 동영상으로 올려놓아 언제든지 볼 수 있게 해놓았다.
직원도 모집하는데 모집대상이 딱 나와 맞다는 느낌이다^^
대안을 고민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사람.
앞으로 자주 들리면서 강연회와 활동에 참여하고 싶다.
오늘은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동영상으로 들었다.
http://www.makehope.org/hopetv/view.php?category=0&id=55&numbering=34
아침에 기사를 검색하던 중 경기도 기술학교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링크 : 경기도 기술학교 관련 기사
기사를 정리해 보면,
<경기도 기술학교>
- 경기도 화성시 기산동에 위치
- 올해 신입생 319명 (당초 1년과정 200명을 포함 270명 정원이었으나 인재들이 몰려 추가 선발)
- 수강료, 교재비, 실습비, 기숙사비, 구내식당 식사비 전액 무료. 한달 20만원 수당 지급
- 첨단기계, 전기에너지, 특수용접, 컴퓨터시스템, 자동차정비 등 5개 학과(1년 정규과정)와 2ㆍ3ㆍ6개월의 단기취업교육과정을 운영. 정규과정 교육생의 경우 취업률이 매년 90%를 웃돔
교과서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말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한 소위 먹물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경로를 보면 무척 단순하다.
1) '사'자 자격증 공부나 공무원시험 2) 대기업 입사 3) 대학원 진학 (이후 취업)
나를 포함하여 내 동기들과 친구들도 모두 이 세가지 범주 안에 포함된다. 이런 직업들은 일정한 부를 보장하고 사회적으로 체면을 차릴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우량직업'으로, 그러니까 바꿔말하면 밟고 밟히는 박 터지는 전장과 같단 의미다.
비정규직을 양성하는 신자유주의의 채찍질을 피하기 위해 남은 양지바른언덕을 찾아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점은 십분 인정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우량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직업 만족도가 결코 높지 않다고 본다면, 젊은이들은 직업선택에 있어 좀 더 다양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론 국가와 사회가 우선적으로 이들의 길을 터주는 것이 문제해결의 가장 근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외수 선생은 무슨 직업이든 한 분야에서 상위 10% 정도의 범주에 들면 먹고 사는 것 이상을 누릴 수 있다고 하였는데, 경험상 일리가 있다고 본다. 오히려 요즘 같은 때 젊은이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자신의 성을 쌓는다면 결과적으로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의 연장에서 경기도 기술학교는 나에게 의미를 갖는다.
두시가 되어서야 억지로 잠을 드는 건 요즘 예삿일이 되어버렸고,
퇴근하고 나면 쉬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간을 소모한다.
자기 전에 조금씩 읽고 있는 금강경 이야기는 읽을 땐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이지만,
세상의 무게는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죄로
마음 한구석에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마치 노예의 족쇄처럼 나를 옭아매고 있다.
족쇄는 나를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 너무나 슬픈 이야기...
서 있기도, 앉아 있기도 어정쩡한 그런 기분...
1. 밥굶고 다니지 말자.
2. 살 좀 찌자.
<쉽고 간단하면서도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식단>
밥(잡곡) + 참치 + 계란(후라이&삶은것) + 우유&바나나 + 고구마 + 하루 물 2L + 야채
아침 : 밥, 참치, 김, 반찬, 우유&바나나
간식(회사에서) : 고구마, 계란 삶은 것, 물 2L
점심 : 회사
저녁 : 밥, 고기류(닭이나 소) or 생선, 아채
간식(운동 전후) : 우유&바나나, 고구마
참고카페 : http://cafe.daum.net/1004victory
주식시장은 파도타기와 같다.
오르다가도 내리고,
내리다가도 오른다.
파도타기를 제대로 즐기려면
넘어져도 다시 올라타기를 끊임없이 반복,
머리가 아닌 몸으로 타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악기나 기술이나 어학을 배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주식도 결국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기술 습득의 하나일 뿐,
거창한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주식판을 떠나는 사람들은 머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재미를 잃고 포기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어학코스에서 연말까지 남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 특이점(Singularity) : 천체물리학에서는 블랙홀 내 무한대 밀도와 중력의 한 점을 뜻하는 용어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책에서는 사회경제적인 의미로 차용하여 너머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단속적 변화가 이루어지는 시점을 가리킨다.
25p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인공지능이 어떤 영역에든 조금이라도 부족한 면을 보이면 그 영역이야말로 인간의 능력이 인간 창조물의 능력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영원한 보루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정보 기반 기술들은 수십 년 내에 인간의 모든 지식과 기량을 망라하고 궁극적으로 인간 두뇌의 패턴 인식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 감정 및 도덕적 지능에 까지도 이르게 될 것이다.
27p 특이점은 생물학적 사고 및 존재와 기술이 융합해 이룬 절정으로서, 여전히 인간적이지만 생물학적 근원을 훌쩍 뛰어넘은 세계를 탄생시킬 것이다. 특이점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또는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진화의 여섯시기>
제1기 물리학과 화학정보가 원자 구조에 있다 (초창기 우주)
(진화) DNA가 진화한다
제2기 생물학 정보가 DNA에 있다 (생명 탄생 시기)
(진화) 뇌가 진화한다
제3기 정보가 신경 패턴에 있다 (인류의 등장)
(진화) 기술이 진화한다
제4기 정보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설계에 있다 (현재)
(진화) 기술이 생물(인간지능을 포함)의 방법론을 터득한다
제5기 기술과 인간 지능의 융합 (가까운 미래)
(진화) 무한히 확장된 인간 지능(주로 비생물학적임)이 우주로 퍼진다
제6기 우주가 잠에서 깨어난다.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의 패턴이 지적 과정과 지식으로 가득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