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총서1]  미래문명을 이끌어갈 새로운 인간 / 법륜 / 정토출판

 

1. 일과 수행

 

1.1 정토행자와 수행

 

O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삶 -> 일과 인간관계가 복잡해진다 -> 시비분별이 일어나기 쉽다 -> 괴로움이 생겨난다.

 

=> 부지런하고 열심히 사는 건 수행의 기본 조건이다. 집중력 있고 능동적인 마음이 경계에 부딪히게 되면 시비분별이 일어날 때 내면을 관찰하게 되면 갈등이 해소된다.

 

O 삶 자체가 수행이고, 생활이 그대로 수행이다. 일과 수행은 어떠한 모순도 없다.

 

O 정토란 고통을 유발하는 조건이 사라진 사회, 탁한 마음이 사라지고 청정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이다.

 

O 사회운동가는 새로운 사회건설에 힘쓰고, 종교인은 마음 수행에 힘쓰는데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 정신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이 둘을 함께 해나간다는 뜻이고 따라서 일과 수행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일과 수행의 통일은 일하는 가운데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뜻한다.

 

- 수행 :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 일 :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려는 사회개혁의 의미

 

O 보살사상의 핵심 : 중생세계를 없앰으로써 바로 부처세계로 들어가는 것

 

O 수행이란? 행(行)으로 지은 업(業)을 없애는 것. 행이란, 십이연기와 오온에서의 행을 말하고, 업은 身, 口, 意(행동, 말, 생각)을 잘못해서 형성된 것을 말한다. 업은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수행은 행을 닦는 것인데, 身, 口, 意(행동, 말, 생각) 삼업을 닦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 수련 : 심신을 단련하여 강한자가 되는 것. 이것의 목적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함이다

- 수행 : 마음의 업을 닦아 이치에 맞게 행동하게 되는 것. 얻겠다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며, 받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에서 괴로움과 속박이 사라지는 이치를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수행을 한 자가 수련(기술이나 지식 습득)을 하면 다른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한다. 수행한 후에 수련은 필요에 의해 닦으면 된다.

 

O 우리가 일상적으로 얘기하는 행복이란?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기분좋은 상태. 불행은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느끼는 불쾌함. 똑같은 상황이라도 조건과 그때의 마음상태에 따라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

 

O 복받았다의 의미는? 노력보다 결과가 좋다. 노력을 적게 하고 결과가 좋았다는 말은 노력을 많이 하고도 결과가 나쁜 것을 전제로 한다. 복받은 사람이 있으면 복없는 사람이 있고, 다시 말해 나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EX) 거리에서 만원을 주워 행복함 = 만원을 잃어 불행한 사람이 있음 (동전의 양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실체는 적게 노력하고 명예, 재물, 권력을 많이 갖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생겨나고, 종교나 신을 찾게 되고, 신통을 찾게 되고 한다. 뇌물을 쓰기 보다 절에 보시하여 복을 비는 것이 더 싸게 먹히면서 심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에 절에 자기 자식, 자기 남편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들이 북적된다. 다 도둑놈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렇게 허황된 생각(전도몽상)에 빠져 헛된 기대를 하고, 총족되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이런 일은 존재의 본질, 즉 존재가 개별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공생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에서 생겨난다. 이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으면 너도 있고, 너가 없으면 나도 없는 연기그물에 놓여 있다.

 

O 참된 행복은 주는데 있고, 사랑하는데 있고,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의지처가 되어 주는데 있다. 그럴때 진정한 주인노릇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주고도 괴로울까? 거기에 받으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 한 생각 내려놓으라의 의미 : 뒤집혀진 생각을 내려놓으라. 한 번 돌이켜 다시 살펴보라.

- 현재에 집중하라 : 항상 깨어있으라

- 참회하라 :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

- 과정을 중시한다 : 매순간을 중시하고, 일단 한 번 해본다. 먼저 해보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결과를 중요시 하기 때문.

 

O 화두란?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관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즉, 모든 삶의 가치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변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전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박차고 나가는 것.

 

경전에는 이러한 이치가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이치를 터득해서 결국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O 무언가 얻고자 하니, 그것이 잘 안될 때 조급해지고,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즉, 깨달음을 얻으려 하면 깨닫지 못했다고 답답해하는 괴로움이 생겨난다. 얻으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는 한 결코 해탈이나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얻을 바가 없어지면 겁날 것도 없다. 삶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확신이 생긴다.

자각이 이루어지면 괴로움이나 두려움도 없어진다. 수행은 근본적인 관념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전제를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다.

 

O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지적 문제에 관해 :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지적하고 토론해야 한다. 문제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단, 이 경우 고쳐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면 그것은 자기문제가 되는 것이다.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관점이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충돌될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토론을 통해 해결하되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평등한가이다. 평등한 관계에서만이 참된 토론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에 근거하여 상대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이것 역시 수준있는 해탈의 세계와는 멀다. 상대방이 뭘 하든 간에 무조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지 말라는 건 괜시리 시시비비를 가리며 가르치려는 마음으로 참견하지 말라는 걸 의미하지 수행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론하고 지적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O 우리는 수행의 원칙과 태도가 무엇인지 먼저 명확히 이해 해야 한다.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의문과 답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옳고 그름을 내려놓는 것이 수행이지만, 일을 할 때는 다시 옳고 그름을 따져야만 한다. 일은 효율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 맞는 사람끼리 할 수밖에 없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할 경우, '저 사람은 성격에 문제가 있어 같이 못하겠다'와 같이 일을 못하는 이유를 상대에게서 찾는 것은 옳바른 수행의 관점이 아니다. '저 친구하고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혹은 '성격이 맞는 사람과 같이 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라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수행은 100% 자기를 돌아보는 자세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O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 : 우리는 밖의 대상과 경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다. 이러한 자신을 안으로 살피는 것이 수행의 출발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 깨어있는 것이 자등명이다. 그러나 주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법에 의지해서 다시 살펴봐야 한다. 이것이 법등명이다. 이렇게 두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분명한 선에 도달하게 된다. 몇 번만 해봐도 된다. 그러면 나중에는 하나하나 점검하지 않아도 분명해진다. 자기 느낌을 경전의 내용과 대비해 봐도 똑같고, 경전의 내용을 실천해 봐도 똑같을 때가 있다. 이렇게 되면 확신이 서는 것이다.

 

O 원칙을 가지고 기도문(정토회의 수행문)에 집중하면 틀림없이 자기 내부의 모순을 보게 된다. 모순을 보게 된다는 것은 갈등이 시작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모르고 있었던 문제의 뿌리를 보게 되거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을 근본적으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기도할 때 기도문에 집중하라고 하고 일상생활을 할 때도 기도문에 집중하라고 하는 것이다.

 

기도문은 나보다 나은 선지식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서 좀 더 심층의식에 있는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도문을 달라는 사람에게 함부로 주지 않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해 더 정확한 사람한테 듣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수행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명령이 아닌 이런 근본 원리를 터득해야 안심입명 할 수 있다. 그래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중심이 서고, 오뚝이처럼 왔다갔다 해도 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그런 정도는 되어야 인생을 확실히 살아갈 수 있다.

 

1.2 정토행자와 일

 

O 우리가 말하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의 기쁨을 높이고, 나와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는 데에 쓰이는 것을 가리킨다.

 

O 우리는 돈이 주인이 아닌 사람이 주인되는 사회, 생명이 주인되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 돈을 쓰더라도 그것은 좀 더 편하게 생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인간관계의 효율성을 위한 방법 중의 하나로 대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이지, 대가를 위하여 인간관계를 황폐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O 사람들은 쓰는 것만 좋아하고 쓰이는 것은 싫어하니 통제하지 않으면 수입과 지출에 큰 불균형이 생긴다. 사람을 써야 하는 사람은 돈을 미끼로 쓰이는 것을 강요한다. 그러니 노동은 괴로운 것이 된다.

 

O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수행에서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안 되고는 별개의 문제다. 괴로움이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일이란 앞에서 이야기한 수행과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필요로 한다.

 

O 우리는 상대에게 쓰여지는 동안 괴로워하고, 그 댓가로 받은 돈을 소비하며 만족을 얻는다. 쓰기 위해 버는 시간이 희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쓰이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것이 나의 존재 가치임을 깨닫는다면 쓰이는 것이 바로 여가가 된다. 그러면 노동과 여가의 구분이 사라진다. 생산과 소비의 구분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노동의 해방'이다.

 

물론 한 달 내내 일해도 배를 곯을 정도고 몸을 다쳐도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불구가 된다면 노동의 주체가 되기는 힘들어진다. 이런 사회구조는 극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동의 해방은 몇시간 일하느냐, 월급은 얼마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느냐 아니냐에 있다.

 

누구나 노동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원하면서도 그것이 안 되는 이유는 기존의 관념이 '쓰이는 것은 나쁘다, 쓰는 것이 좋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여기 있으면 손해보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O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토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일에 동참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수준을 최소한 대한민국의 중간 이하로 맞출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사무공간이 너무 좁아 비효율적이므로 그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우리의 잠자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공간을 넓힌다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을 지켜내면 우리의 도덕성은 그만큼 유지되는 것이고, 이것을 못 지켜내면 우리의 도덕성은 사라진다.

 

도덕성이 사라지면 당장은 영향이 없겠지만 조금 지나면 우리의 순수성을 보고 보시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연의 원리이다.

 

O 정토회에서는 일하지 않고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일이나 수행만 하겠다는 사람들은 옆에서 거들어주는 후원자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회원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정토회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분별심이 생기면 그것을 자기에게 돌려 마음을 편안히 해야 한다.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껴야 한다.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기술을 익히거나 노동과 직접 상관없는 수련을 할 때도 있다. 그것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그 자체도 일이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 낫을 만드는 일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 염불, 참선, 독경을 잘하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는 요구되고 있다. 이런 각종 요구들은 생활 속에서 조절되어야 한다. 일에도 필요하고 재정 여유도 있고 시간도 된다면 당연히 해야 하나 그렇지 않으면 기다려야 한다. 조건에 맞는 순위를 정해 놓고 조절해야 한다.

 

O 전체를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은 개인적 욕구가 아니다. 몸이 아팠을 때 한나절 쉬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면 쉬어야 한다. 이럴 때 일하면 오히려 전체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 이런 것을 개인적 욕구라고 몰아붙여서는 안되고, 본인도 그것 때문에 죄의식을 가져서도 안된다. 단지 거기에는 전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또 전체 회의에서 거절되면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된다. 한 번 없었던 것으로 했다고 해서 다시 안건으로 제시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생각해 보고 필요하면 다시 안건으로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일하면서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문제가 있으면 당당하게 제기하고, 나는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깨끗하게 철회할 수도 있어야 하고, 내가 보기에 아직도 옳다고 판단되면 다른 사람이 다 틀렸다고 해도 다음 회의 때 용기있게 제안도 해야 한다. 그것은 고집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늘 두가지 모순에 빠져 있다. 중구난방이 되더라도 자기 주장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시키는대로 고개 푹 숙이고 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주장하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고, 고개 숙이는 것도 수행이 될 수 있다. 수행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O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행의 원칙을 지켜나가면 어떤 경우에도 자기는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수행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주위 여건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정도가 심해진다. 모든 사람이 이 수행의 원칙을 적용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1) 환경문제 : 환경문제는 우리의 생존과 관계된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비를 적게 해야 한다. 소비가 줄면 생산이 준다.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아껴써서 자연이 정화시킬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소비하면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환경운동이 수행과 겹치게 되면 환경이 보존될 수 있는 생활을 하면서도 누가 환경운동에 돈을 대주든 안대주든 사람이 따르든 안 따르든 괴로울 일이 없다. 많이 쓰는 사람이 괴롭고 적게 쓰는 사람이 즐거우면 적게 쓰는 쪽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2) 제3세계 빈곤문제(기아, 질병, 문맹) :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 이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고 병에 걸리지 않고 문자 정도라도 터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3) 평화문제(차별이 아닌 함께 하는 삶) : 인종차별, 민족차별, 성차별, 문화차별 등 수많은 억압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이런 갈등 요인 탓에 내전, 민족전쟁, 인종전쟁, 종교전쟁이 일어난다. 우리가 정의를 지향한다면 차별이 개선되는 쪽으로 우리의 활동이 이루어져가야 한다.

 

4) 민족 통일문제 : 민족 분단은 엄청난 군비 허비, 젊은이들의 시간 소요, 사상적 제한 등 많은 제약이 따른다. 또한 북한 동포들이 굶어죽는 일은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북한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한다.

 

5) 개인문제 : 살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수행을 통한 해결방법

 

O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사회,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이루어질 때 우리가 지향하는 이상사회, 즉 정토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사회를 지향해 가는데 수행법이나 사회개혁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전환만 일어나면 개인도 편안하고, 상대를 해치려는 생각을 버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관계가 경쟁 관계가 아닌 벗의 관계가 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된다.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면 이런 세계는 다 실현 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은 인연 닿는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수행이 가장 큰 문제이므로 수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볼 때 가장 큰 문제가 환경문제이므로 환경운동을 시작했고, 인연이 되어 제3세계 빈곤구제 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문명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다면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정신문명을 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서서히 개척해도 되는 문제인데 반해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은 비록 인류 문명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응급치료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당분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 중에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일단 병원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것처럼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기본적인 일의 방향이다. 앞으로 일은 얼마든지 새로운 것이 개척될 수도 있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역량이 늘어나는 만큼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면 될지, 다음 세대까지 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이런 방향으로 우리 세대에는 최소한 30년(만일결사)을 잡고 어느 정도 해 보겠다는 계획이 잡혔다.  우리는 이런 큰 틀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떻든 이런 포부를 지니고 일을 하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2. 새로운 문명, 새로운 인간

 

2.1 자기 실현의 길

 

O 봉사자란? 누군가가 내가 쓸 이불과 옷과 쌀 등을 만들어준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이 생존에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 이처럼 누군가 사랑가는데 필요한 일을 하고 필요한 곳에 쓰여지는 사람이 봉사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봉사자 아닌 사람이 없다.

 

뭔가 비장한 각오와 결심을 해야 봉사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봉사자의 삶인 것이다. 태어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봉사자로서 존재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봉사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참 모습,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봉사자의 흉내만 냈지 근원적 사상과 행위가 일치되지 않는다. 봉사활동에 대가를 기대하고, 봉사활동이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O 존재의 생명은 쓰임(용도)에 있다 : 빗자루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지만 모두 먼지를 쓸기 위한 용도를 가지고 있다. 먼지를 쓸기 위한 용도가 있을 때 빗자루이며 때를 닦는 용도가 있을 때 걸레다. 생긴 것이 빗자루나 걸레처럼 생겼다 하더라도 먼지를 쓸지 못하고 때를 닦지 못한다면 그것은 빗자루도 걸레도 아니다. 빗자루와 걸레의 존재의의가 없어진다.

 

모양과 용도에 따라 이름하여 존재를 이룬다. 이것을 명색(名色)이라 한다. '걸레' 할 때도 용도인 명과 그 생긴 모양인 색이 결합했을 때 하나의 존재가 된다. 만약 그 용도가 쓸모없을 때, 즉 명이 사라졌을 때 색만 가지고는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없다. 그 때는 이미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아내'도 한 남자와 결혼을 통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아내로서의 역할을 안한다면 이름만 아내지 실제로는 아내라 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존재고, 선생은 학생들의 배움과 그 요구에 쓰이는 존재다. 빗자루나 호미 역시 다 쓰임이 있다. 호미가 풀을 매는데 쓰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호미가 아니라 단순한 고철더미다.

 

그렇다면 잘 사는 삶, 좋은 삶은 어떤 삶일까? 아내로서 좋은 삶은 남편에게 잘 쓰이는 것이고, 선생으로서 좋은 삶은 학생들에게 잘 쓰이는 것이다. 내가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은 내 존재 가치가 높다는 얘기와 같다. 그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길이다.

 

쓰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말한다. 빗자루가 방바닥을 쓰는데 쓰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형상은 있지만 빗자루로서는 이미 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존재의 의미는 색보다 명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색에 집착하기 때문에 명이 사라졌는데도 그 색을 가지고 판단한다.

 

O 잘 산다는 것은 결국 잘 쓰인다는 말이다. 즉, 필요로 하는데 쓰이는 게 잘 쓰이는 것이다. 그 필요는 누구의 필요인가? 당연히 상대의 필요이다. 상대의 필요에 따라 쓰이는 것이니 내가 어떻게 쓰여야 할까는 상대한테 물어봐야 한다. 내가 어디에 쓰일까를 고민하기 보다 상대가 필요하다고 할 때 쓰이면 된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데 잘 쓰이려면 내 요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언제든지 '예'하고 달려갈 수 있다. 쓰이기를 거부하면서 억지로 하면 괴로움이 생긴다. 기꺼이 해야 한다.

 

잘 쓰이는 것이 잘 사는 길이고 잘 쓰이는 길은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것이다. 그가 써줘서 내가 잘 쓰였으니 내가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한다. 써준다는 것은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고, 따라서 나를 써준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쓰였으니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사고방식은 쓰이는 것보다 쓰는 삶이 더 좋다는 가치관에서 나오는 생각이다.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면 상대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대가가 없어도 섭섭한 마음이 없어진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많이 쓰는 것이 좋은 줄 착각하고 있으면 중생이고, 그 이치를 알고 받아들여 살면 보살이다. 진정한 보살행이 되려면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보살행 흉내만 내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보살행과 깨달음이 별개인 것처럼 생각한다.

 

이치를 깨달으면 행위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 깨달은 후에 얼마 더 노력해서 행위가 따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큼 깨달으면 손톱만큼의 행위가 나오고 손만큼 깨달으면 손만큼의 행위가 그냥 나오는 것이다.

 

O 깨달음은 곧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며, 쓰임새 있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영화 시티오브조이에서 의사인 주인공이 인도에서 가난한 여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난 뒤 진정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회복해 가는 과정.

 

정토회에서 일을 하면 왜 월급이 없을까? 그것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50만원을 받고 일하면 50만원짜리 월급쟁이이고, 100만원을 받고 일하면 100만원짜리 월급쟁이이다. 그러면 다른데서 2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손해라는 생각에 항상 후회를 하게 된다. 월급을 받기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 자체가 자기 존재의 실현이다.

 

O 쓸때는 살리도록 써야 한다. 아이가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가르치고 키워야 한다. 애완동물처럼 보호하기만 하고, 쓸 줄만 알게 키우면 사회에서는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때문에 아이에게 혹사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기 싫어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일을 배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즉 아이를 살리도록 써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쓰이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은 삶이 그만큼 주체적이고 안정되어 있으며 괴로움이 적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자기가 편안해지는 자기 실현의 길과 정토 실현의 길은 둘이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봉사하는 것은 자기 실현의 길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를 정상적인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O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데 지금 어떤 용도가 더 강렬한가의 문제다. 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고, 내가 없으면 안되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용도가 더 강렬한 것이다. 이럴 때 우리의 쓰임새는 필요가 강렬한 쪽으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 거기에 자신의 보람이 있다.

 

봉사조직을 모은다고 할 때도 그렇다.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조직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그들에게 먼저 쓰여져야 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인다.

 

어떤 사람이 절에 나왔는데 법문을 듣고 상담을 통해 자기 고민이 해결되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 절에 나오는 것이 재미있고 이득이 있다. 스님은 그 사람에게 잘 쓰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쓰이기만 하면 이 조직이 오래 유지될까? 그 사람은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나올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도 절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조직에 필요에 의해 쓰이면 나온다. 즉, 그 조직이 그 사람을 필요로 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가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쁘게 나온다.

 

조직을 잘 관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써줘야 된다. 써줄때 보람을 느낀다. 그러니까 일을 계속 만들어줘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떠 넘기듯 주면 그 사람은 얻으러 왔는데 무엇인가 뺏긴다는 기분이 들고, 쉬려고 왔는데 자꾸 하기 싫은 일을 시킨다는 생각에 도망가 버린다.

 

조직을 만들어 함께 일할 때 두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지도자가 사람을 시키기만 하고 그 사람의 필요에 쓰이지 않는 경우, 사람들이 모두 가버린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모든 것을 자기 혼자서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에도 사람들이 나중에 안 나와 버린다.

 

존재는 쓰고 쓰이는 관계다. 써야 된다는 것은 서로 일을 나누어 맡겨야 된다는 것이다. 모르면 가르쳐 주면서 맡겨야 한다. 쓰일 때는 상대의 필요에 의해 쓰이고, 쓸 때는 상대를 살리도록 써야 한다.

 

상대를 아낀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하는 건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온실속의 화초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양로원에 봉사를 갔다고 하자. 빨래와 같이 그곳의 어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해주기만 해서는 반쪽의 봉사이다. 어른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해 줄 것이 있어야 그 분들도 보람을 느낀다.

 

O 뭔가 자비심이 많아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어려움에 대해 많이 알고 거기에 내 쓰임새가 필요로 하니까 거기에 쓰이지 특별한 이념과 사상이 있어야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쾌히 가서 봉사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가 사회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19 이상으로 유명하고 공신력 있는 단체를 조직하여 연락만 하면 달려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기꺼이 해결해 준다면 우리 사회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편안해질 것이다. 이런 단체를 만드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다.

 

지금까지는 각 개인이 괴로워 죽겠다 하는 문제에 빠져 있었다면 이제는 이렇게 모두의 요구를 해결하는 데 쓰임새 있게 삶이 전환되어야 한다.

 

2.2 어떻게 살 것인가

 

O 농부가 씨앗만 보고도 언제 심어야 하고 언제 싹이 트고 자라 무슨 꽃이 피고 수확량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듯이 자기 업식을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알 수 있다. 또한 농부가 어떤 씨앗을 심고 틔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듯 우리의 인생 또한 마음의 밭에 어떤 종자를 심어 키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O 폐가 좋지 않는 사람은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 건강과 스트레스 해소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와 인류, 그리고 내가 처해 있는 현실도 병행할 수 없는 모순이 있다면 하나를 놓아야 한다. 수행은 포기할 줄 아는데 그 묘미가 있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혼란스럽다.

 

O 북풍한설에 굶어도 희망이 있으면 기쁨이 있다. 목표를 놓치면 오히려 사소한 욕구들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효율적일까?'하는 주제로 토론하고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의식주 문제는 놓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수행자가 되는 기초다.  

 

결혼했으면 혼자 산느 것보다 진리에 대한 탐구의 정엵과 사회 정의를 위한 추진의 힘이 커야 하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희망이 더 커야 된다. 그래야 논리가 맞다.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은 어떠해야 할까? 둘이 사는 사람보다 생각이 더 바르고 행복하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혼자 사는 보람이 있다.

 

O 결혼했으면 부부간에는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는 원리를 터득하여 책 한 권 낼 정도는 되어야 하고, 학교 선생님이 되었으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야 된다.

 

O 인생은 허망하고 연극인 줄 아니까 이왕 꾸며진 무대에서 신나게 놀아보자~ 하는 것이다. 조건에 순응하고 그 조건을 즐길 줄 알면 된다.

 

2.3 어떻게 살 것인가

 

O 미래문명은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과거 문명의 세계관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을 대립의 관점에서 보았다면 미래문명은 이들을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행복은 대립의 관점에 서서 투쟁을 통해 승리하는 것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연관 속에서 상호 의존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다. 승리한 순간에 행복감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거문명이라면, 미래문명은 그렇게 서로 연관속에서 서로 돕고 서로 쓰여지는 과정 자체가 그대로 좋다는 행복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보살에게 있어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는 세계다' -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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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4 08:58 2009/05/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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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사합니다 2011/07/28 14:3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글을 좀 퍼담아갔습니다. 혹시 싫으시면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