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an from Earth

from 잡기장 2009/01/11 13:07


♪ 'Forever', Chantelle Duncun ♪

 

만사천년을 살아온 크로마뇽이 있다.

 

그는 신기하게도 성인이 된 이후 늙지 않았기에 동료들로부터 때론 추앙받기도 하고, 때론 사탄으로 몰리기도 하였으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빙하기가 지나고 지구가 점차 따뜻해지자 그는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하였고, 새로운 부족과 문명을 만나면 한동안 거기에 합류해 살곤 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이 유독 그만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이 되면 그는 홀연히 떠나곤 하였다. 그는 질병에 걸려 여러번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케 살아남았다.

 

세월이 흘러 도시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 간 경계가 뚜렷하게 되면서 이동에 제약을 받게 되고 새로운 도시에서 그는 이방인으로 배척받거나 심지어 스파이로 오인받기도 하였다. 그는 몇 번이나 적응에 실패하게 되자 결국 도시국가를 떠나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갔으나 그곳에서도 그리 오래 생활하지 못하였고, 결국 다시 동쪽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 인도라 불리는 곳에 도달한 그는 당시 활동하던 부처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게 된다. 부처의 제자가 되어 크게 깨달은 그는 다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동양에서 배운 의술을 활용하여 병자들을 고치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전파하며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명성이 커지자 로마는 그를 국민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다시 떠나기로 마음 먹고, 동양에서 익힌 운신법을 활용하여 심장박동을 일시적으로 줄여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곤 사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빠져나오려 하였다. 그의 무덤을 지키던 추종자 몇몇은 죽었던 그가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는 사람들에 의해 부활한 신의 아들이라 칭해지며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곳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신화와 결합, 종교화 되어 2천년동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그는 자신이 훗날 예수라 칭해지며 자신이 전파하고자 한 가르침은 왜곡되고, 수많은 신화와 이권으로 점철된 조직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그 후에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며, 그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주위에서 알아차릴 즈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 'Man from Earth(2007)'의 줄거리를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는 1시간 반 동안 각계의 전문가들이 이사를 떠나는 한 교수의 집안에 모여 떠드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로 강추!!

 

원시인이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이 사실인가를 공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단연 하이라이트는 예수에 관한 부분이다. 주인공이 자신을 예수였다고 밝히며, 현재 전파되고 있는 대부분의 신화들은 구라이며 왜곡된 것이라고 말한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던 신학교수는 엄청난 혼란과 분노를 느끼며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최근 어머니께서 열심히 예수를 믿음으로써 행복을 되찾는 것을 봤던지라 종교에 대해 관심이 어느때보다 증가되어 있었던 나는 이 장면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신학교수의 혼란과 부정에 거부감이 들었을까?

 

거의 모든 종교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믿음은 진실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믿음은 경전에 기록된 사실에 기반해서 형성되는 듯 하지만 실은 믿음을 위해 기록이 사용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단 믿음이 만들어지고 나면 사실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믿음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나아가 믿음은 신앙의 시작이 된 토템사회부터 현재의 소위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믿음하면 십자군전쟁이 떠오르고, 히틀러와 일본 전체주의가 떠오르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떠오른다. 믿음에 기반하여 보면 모든 폭력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어버린다. 믿음(정확히는 종교)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음은 그 위험성 만큼이나 무척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믿음을 통해 암치료를 편안한 마음으로 극복하였으며 부정적인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머니의 변화를 통해 가정은 화목하게 바뀌었고, 행복함이 넘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본질은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생각하는, 다시 말해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타적 행위를 통해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종교인만 있다면 세상이 어지러울 이유는 없다.

 

결국 믿음이 갖는 강력한 긍적적 효용성을 고려한다면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가' 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아가 믿음이 행복을 위한 순수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행복을 위해 굳이 믿음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을 철저히 믿고, 그 신의 말씀에 충실히 따름으로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본다면,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킴으로서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행위는 비슷한 모습으로 구현되지만, 그걸 위해 사용되는 엔진은 '믿음'과 '성찰'이라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믿음에 나를 내던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교를 택하였다.

 

 

믿음은 빠르지만 위험하나

성찰은 느리지만 안전하다.

 

나는 성찰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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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13:07 2009/01/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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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9/05/19 04:3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 전우진 2009/10/13 17:3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혹시 죄송한데요.. 이 음악 구할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