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 21>에 실린 정성일씨의 <괴물> 평을 봤다.

꽤 길지만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있는 것 같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클릭하시길..

 

 

노골적이고 단단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1)

노골적이고 단단한 정치적 커밍아웃, <괴물>(2)

 

 

언제나 그렇듯이 정성일씨의 평은 어떤 부분에서는 날카롭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나간다. 

 



 

일단 <괴물>은 명백히 정치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평들이 이 영화가 정치적 영화란 사실을 부인(disavowal)하고 있는 현실이 의심스럽다는 정성일 씨의 진단엔 동의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괴물>에서 묘사되는 정치적인 것(정성일 씨의 표현을 빌자면, le politique)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과의 대면을 회피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했던 것인지에는 의심이 든다. (영화가 담고 있는 현실(reality)을 관람자들이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 그것은 실재(the real)가 된다. 이 때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묘사된 현실을 보면서도 모른 척, 다시 말해 부인한다. 예를 들어 <씨티 오브 갓>에서 묘사된 브라질 빈민가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해서 많은 평론가들은 이 영화의 미학적 측면(핸드 헬드의 급진적 사용)을 언급하는 데 그친곤 했다.) 

 

정치적 상상력의 측면에서 <괴물>의 내러티브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는 미국-국가권력-미디어권력-의학권력으로 연결되는 지배구조의 유착에 맞서 '괴물'이라는 실재의 출현에 직접적이자 사적으로 저항하여 성공하는 (괴수 영화나 공포 영화에 전형적인) 일종의 소시민 영웅주의.

 

다음으로는 소시민들은 괴물에 맞서 싸우고 그들을 물리치지만, 괴물은 그들의 진정한 적이 아니었다는 식의 냉소주의. (괴물은 처리되지만 괴물을 만들어낸 미국과 박강두 가족을 탄압하는 현실의 권력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둘 모두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유쾌한 정치적 입장은 아닌데, 후자의 냉소주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전자의 영웅주의는 봉준호 감독의 정치관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 아마 "이 영화를 정치적 코드로 바라보는 것은 오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첫번째 관점에서 괴물을 바라봤을 것이고, 따라서 "명색이 한국 영화의 기린아라는 봉준호 감독이 설마 그런 의도로..?" 라는 의구심을 품었던 것 같다.

 

나로서는 (봉준호의 정치성을 좌파냉소주의로 파악하는)정성일씨의 평가와는 달리 <괴물>의 내러티브는 두번째 측면보다는 첫번째 측면으로 읽힐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사실 봉준호의 소시민 영웅주의에 대한 찬양은, 그의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살인의 추억>에서는 부재하는 실재(범인)을 찾아헤매는 말단 형사들이 '권력'을 대변하다보니 이들에 대한 양가적 태도가 유지되었지만, 권력 대 가족이라는 단순 대립구도의 <괴물>에서는 이러한 양가적 태도가 영웅주의로 퇴행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여기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덧붙이자면, 봉준화의 이러한 퇴행은 어쩌면 그가 대변하는 386세대의 정서적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란 막무가내식 가설도 제기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는 가설적인 주장이고 <괴물>을 본 여러 사람들이 <괴물>은 <플란다스의 개>와 같은 계열에 있다고 지적하기에, <괴물>에 대한 최종 판단은 언젠가 시간이 날 때 <플란다스의 개>를 보고 난 후에 내려야 할 것 같다. 그 때가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덧.

 

주변에 보면, 정성일씨의 영화평은 호/오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일단 나는 그의 꼼꼼한 영화관람을 사랑한다. 영화 한 장면, 한 장면을 붙잡고 고민하는 그의 작업 방식은, 멋진 글솜씨로 대충 지면을 채우는 다른 평론가들과는 구분되는 일종의 장인정신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종종 지적하듯) 그의 글쓰기 방식이 쓸데없이 자기 과시적이란 사실은 지적할 필요가 있겠다. 이번 <괴물> 평만 해도, 굳이 정치학 혹은 맑스주의 전공이 아니라면 생소할 풀란차스의 le politique/la politique의 구분을 들고 나올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현실 정치나 제도 정치와는 구분되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을 다룬 영화"라거나 혹은 "현실 정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무의식 혹은 정치적 상상력 차원에서 정치적인 영화"라고 썼어도 충분히 의도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아는 체 하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말도 있다지만, 그 아는 체라는 것이 의미 전달의 명료성을 높이기보다는 흐린다면 이건 안하느니보다 못하다.

 

더 나아가서 정성일씨의 영화평을 좋아하지만 또 불만인 것은, 그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이론들이 종종 불완전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잘못 쓰이곤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이번 <괴물>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자.

 

" <괴물>의 역설은 ‘괴물’이 맥거핀이 아니라 실재라는 데 있다. 상징으로 통합되지 않는 그 무엇, 그것을 상징적으로 만드는 것에 대항하면서 <괴물>의 상징적 요구에 그것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그 안에서 최종적으로 버티고 있는 고정점. 정치적 상징들 모두를 떠안고 그 모든 무게를 버티면서 위협하는 현실성의 상실로서의 대상."

 

정신분석을 특히 (아마도 이 문장에서 정성일씨가 참고하였을) 지젝을 읽어본 이라면, 괴물은 '맥거핀'이 아닌 '실재'라는 첫번째 문장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젝이 히치콕에 대해 해설하면서 이야기하듯이, '맥거핀'은 상징계 내에서의 '실재'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거핀'이 아닌 '실재'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며, 개념적으로 잘못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대충 이해는 된다. 아마도 '괴물'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영향을 미치는 맥거핀식의 '실재'가 아니라 눈에 보여지는 그야말로 '실존'하는 '실재'라는 것이겠지. 지젝의 최근 구분에 따르면, '맥거핀'이 '상징계적 실재'라면, '괴물'은 '상상계적 혹은 실재적 실재'가 되겠다.

 

지젝 얘기가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한다면, 지젝 식의 구분을 따를 때 <살인의 추억>이 전형적인 모더니즘 영화라면, <괴물>은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영화다.  <살인의 추억>에서 실재(범인)은 영화 전체를 구조지으면서도 본인의 모습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 맥거핀같은 실재, 즉 영화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이다. 반면, <괴물>에서 실재는 자신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활동하며 결국엔 응징된다. 이러한 변화가 앞서 이야기한 <살인의 추억>과 <괴물> 간의 정치성의 차이와 연관이 있을까? 봉준호의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이에 대해서 좀 더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아.. 결국엔 이 사이트를 소개하려고 덧을 단 거였는데.. 덧이 본문보다 더 길어졌다.

다음은 정성일 씨 영화평을 모아놓은 사이트다.

 

http://php.chol.com/~dorati/critic/

 

89년부터 2006년까지 쓴 글이 모두 모여있다. 꽤 재밌는 글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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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8 19:03 2006/08/18 1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