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때문에 Nick Mansfield란 사람이 쓴 Subjectivity(NYU Press, 2000)을 읽다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서 옮겨본다.(강조는 내 것이다.)

 

"우리는 (남성성을 일방적인 가부장성과 동일시하는 대신에) 오늘날의 남성성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재정의할 수 있다. 대상화된 여성(혹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상징적 여성)을 두고 싸우는 두 남성은, 실제로는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하나의 거대하고도 포괄적인 남성 주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남성적 주체는 폭력의 세계를 추구함과 동시에 그러한 폭력의 세계를 정화하려고 한다.......(오늘날의) 남성 주체는 모든 가치에 "yes"라고 대답하려고 한다. 그는 섬세하면서도 거칠고, 진보적이면서도 보수적이며, 성실하면서도 범죄적일 수 있다.

 

결국에 특정한 권력 관계 안에서 동시에 서로 상반되는 특징을 가질 수 있는 이러한 능력을 나는 마조히즘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남성) 마조히스트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지배할 것을 명령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단일한 행위 내에서,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권력이 없는 것처럼 남아있을 수 있다..... 영화 <다이하드(Die Hard)>에서 맥클레인 형사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격렬히 싸운 후에, 자신이 부인의 사회생활에 좀 더 지지를 보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그의 미친듯한 폭력은, 믿을 수 없게도 일종의 친-페미니스트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모순적인 남성성의 등장은, 남성 권력을 재구성하기 위한 시도의 일부분이다. 오늘날 '가부장제의 단일하고 획일적인 남성 권력'이라는 상(像)은 너무 단순하고 적나라해서 손쉽게 반박될 수 있다. 우리는 좀 더 미묘한 형태의 남성성으로 이것을 대체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 모순적이며 포괄적인 남성성은, 자신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부인(disavow)하는 듯 보이면서,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이를 마조히즘적 남성성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100-102)

 

 

이 글에서 Mansfield의 입장은 간단하다. 과거의 지배적인 남성성과 그것에 대한 비판이 모두 남성성의 사디스트적 측면, 즉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고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가부장적 남성성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러한 모델은 오늘날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오늘날의 지배적인 남성성이자 우리가 싸워야할 '주적'은 자신이 권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마조히즘적 남성성이다. (얼핏 이러한 변화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단적으로 과거의 이대근식 남성성과 오늘날 가수 비나 축구스타 베컴의 이미지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상상해보시면 되겠다. 전자가 남성적 '힘'을 중심으로 단일하게 의미화된다면, 후자는 남성적인 신체적 조건과 소위 '친-여성적인' 특성들의 결합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비와 베컴의 울퉁불퉁한 근육은, 이대근의 그것만큼 여성들에게 위협적이지 않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Mansfield는 이러한 남성성의 변화를 진보의 결과로 보는 입장에 반대한다. 오히려 Mansfield가 보기에 이러한 변화는, 탈-외디푸스적 사회에서 남성 권력을 재구성하기 위한 전략 변화의 일부일 뿐이다. 오늘날 과거의 전형적인 남성-쇼비니스트(소위 마초)의 사디스트적 이미지는, 주류사회에서조차, 아니 주류사회에서 더 환영받지 못한다. 우리는 곳곳에서 가부장적인 폭군 남성보다는 가정적이며 세련된 남성성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어떤 진보의 산물이라기보다는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지배를 부인하면서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남성 권력의 생존 전략 중 하나라면? Mansfield가 "마조히즘적 남성성"이란 생경한 개념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혹시 사디즘/마조히즘에 대한 기본 정보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정신분석학적으로 마조히스트는 흔히 미디어에서 통속적으로 묘사되듯이, "자신이 지배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마조히스트는 "자신에 대한 지배를 통제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마조히스트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고통의 양을 정확히 계산하여 파트너에게 요구한다.(예컨대, 바늘 몇 땀, 채찍 몇 대, 어느 정도의 조이는 강도.. 같은 식으로..) 따라서 Mansfield의 말처럼, 마조히스트는 '지배를 받는 동시에 자신이 권력을 행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역시나 일반화된 통속적 묘사에도 불구하고) 마조히스트의 이상적인 짝은 사디스트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디스트는 이러한 마조히스트의 세밀한 요구들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디스트는 자기 스스로가 상황을 통제하는 입법자가 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진정한" 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의 만남은 언제나 불행하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어쩌면 전체주의적인 사디스트적 권력형태와 구분되는 모든 "자유주의적" 권력형태의 기본적 특징은 마조히스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신이 국민의 종"이라고 외쳐되는 수많은 "입법자들"이 존재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선거 때마다 국회의원들이 외치는 이러한 주장은 피지배자라는 외피 속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마조히스트의 전형적인 담론 전략이다.) 푸코의 개념을 빌어와 설명하자면, "자유주의적 통치성(governmentality)"은 피지배자에게 단순히 복종만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피지배자 자신이 지배자의 위치에 있다는 환상 속에서 작동한다.

 

재미있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사디스트적 권력과 마조히스트적 권력의 충돌 사례를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앞서 말했듯이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이다.) 예컨대, 오늘날 열우당 류의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은 한국 사회를 여전히 "반공 규율 사회"로 규정하면서 강압적인 사디스트적 권력(예컨대, 가부장적인 반공수구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과제라고 주장한다.(이는 학계 그리고 운동계의 수많은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가 Mansfield의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이들이 그어놓은 대립전선 속에서 잊혀지는 것은 마조히스트적인 권력이 아닐까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 형태가 여전히 사디스트적 권력인가? 오히려 Mansfield의 말처럼 우리의 주적은 이제 자신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부인(disavowal)하면서 여전히 지배를 행사하려는 마조히스트적 권력이 아닐까?

 

좀 더 쉬운 설명을 위해 교육현장의 예를 들어보자. 오늘날 과거의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교육 체계(사디스트적 교육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조선일보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데 제일 열심이다.) 오늘날 교육 현장의 지배자는 사디스트적 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교육 체계는  '획일적'이고 '강압적'인 (사디스트적인) 공급자 중심의 교육 대신에, 교육 소비자들이 '주인이 되는' 다양하고도 유연한 경쟁력있는 교육을 펼치겠다는, 다만 그 대신에 경쟁 사회에 대한 적응이라는 지배적인 자본주의 룰은 지켜달라는 전형적인 마조히스트적 권력 전략에 의해 짜여지고 있지 않은가? (90년대 이후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적인 6차 교육과정/7차 교육과정 개혁은 바로 이러한 마조히스트 권력 형태의 정착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지배적인 권력 형태는 (사디스트적 권력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사디스트적 권력보다는 마조히스트적 권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마조히스트적 권력은 한층 더 교묘해서 그에 대한 저항은 사디스트적 권력에 대한 저항보다 한층 더 어렵다는 데 있다. (여기서 사디스트적 권력에 대한 저항이 "쉽다"는 의미는 대항 담론 구성의 용이성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전체주의적 권력에 대한 저항과정이 수많은 피로 물들여진 지난하고 험난한 과정임은 물론이다.) 강압적인 사디스트적 권력에 맞서 우리는 그것의 획일성에 다양성을, 외부적 강압에 자발적 선택을, 국가주의에 개인의 자유를, 가부장성에 구성원 간의 평등을 대비시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마조히스트적(자유주의적) 권력에 대한 저항은? 표면적으로 피지배자들의 다양성/자발성/자유/평등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이 은밀히 부과된 자신의 자본주의적-자유민주주의적 게임의 규칙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마조히스트적 권력에 우리는 어떠한 대항 전략을 구축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반공규율사회 대 민주화된 자유사회라는 마조히스트  권력자들에 의해 그어진 대립선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혹은 진보적인 외피를 쓰고 마조히스트 권력자의 신자유주의적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새로운 정치전략들을 사고할 수 있을까? 

 

몇 년째 계속하고 있는 고민들과 겹쳐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질문들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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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2 23:02 2006/08/22 2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