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 중 하나는 Wendy Brown의 Regulating Aversion: Tolerance in the Age of Identity and Empire(Princeton Univ. Press, 2006)
저자인 Wendy Brown은 페미니즘이나 정치사상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 권의 책도 한국에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Politics out of History, Edgework: Essays on Knowledge and Politics 같은 책의 저자로, 현재 UC Berkeley 정치학부 교수로 있다.(이 중에서 읽어본 것은 Politics out of History인데, 맑스, 푸코, 데리다 등 정치철학의 주요 인물들을 Brown 자신의 문제의식에 맞추어 해석한 책이다. 미국에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정말 많아서 별로 정이 안가기는 하지만, 그런 책들 중에서 재밌는 축에 속하는 책이었다.)
이 사람의 지적 작업이 흥미로운 것은, 푸코의 개념틀을 가지고 후기자본주의의 탈정치적(post-politics) 성격을 비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푸코의 권력론이나 사고틀은 현대사회 변혁운동들의 탈정치화를 가져온 주범으로 오해(?)되고 있는 상황인지라, Brown의 이러한 시도는 상당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푸코 패러다임이 가지는 탈정치화 효과에 대해서는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사실 발리바르도 푸코에게는 단절의 문제의식이 없다는 비슷한 비판을 한 적이 있고, 한국 사회에서의 푸코 이해도 크게는 이러한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의 부제에 있다. Tolerance.. 톨러런스.. 아마 한국어로 '관용'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똘레랑스"로 옮기는 것이 좀 더 느낌이 쉽게 올 수도 있겠다.(이 용어를 한국에 처음 들여온 홍세화 씨의 책이 워낙 빅히트를 기록한 바 있기 때문에 "똘레랑스"란 단어는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Wendy Brown의 지적처럼 tolerance란 단어는 각 사회마다 특이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쓰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Brown이 분석하고 있는 tolerance 개념은 홍세화 씨가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말하는 "똘레랑스"와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물론 문화적 맥락이 약간 상이하기는 하지만, 그 속에 담긴 기본 논리 구조는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책 전체에 걸쳐 Brown은 이 "관용" 혹은 "똘레랑스"를 말그대로 "잘근잘근" 씹고 있다. 우선 목차를 보자. 책의 첫번째 장의 제목은 "탈정치화 담론으로서의 관용"이고, 두 번째 장의 제목은 "권력 담론으로서의 관용"이다.
그 동안 의견 및 정체성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받는 것이 사회적 소수자들의 주요 정치적 과제 중 하나로 사고되어왔던 한국 사회에서는, '관용'이 하나의 '탈정치화 담론'이자 '권력의 담론'이라고 비판하는 Brown의 논지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사실 Brown의 이러한 비판은 그리 '튀는' 주장이 아니다. 최소한 내가 알기론, 탈근대적 전환(postmodern turn)이후 다양성과 차이의 인정을 그 자체로 진보적인 것 혹은 급진적인 것과 연결시키는 '진지한' 좌파 이론가는 아무도 없다. 이는 그만큼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이에 대한 관용"이 피지배자들의 담론이 아니라 지배 담론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키워드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은 여전히 획일성/다양성의 구도가 핵심적인 대립처럼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논쟁틀이 얼마나 고전적인 상상력에 갇혀 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관용이 어떻게 당면한 문제들을 탈정치화시키고 권력의 작동을 정당화시키는지에 대한 Brown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우선 Brown은 관용이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완벽한 쌍을 이루고 있음을 지적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이른바 공적 영역에서의 형식적-추상적 자유와 평등을 보장한다. 이 체제 하에서 공적 영역은 개인의 인종, 종교, 성별 등에 관계없이 작동하는 텅 빈 추상화된 주체성의 영역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공적 영역의 기본 성격이 이렇다면 이러한 개인의 "사적인" 특성들(예컨대, 인종, 종교, 성별)은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가? Brown에 따르면, 이 관리의 기제가 바로 "관용"이다.(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된 90년대 중반에 동시에 홍세화씨 식의 똘레랑스 논의가 활발히 수용된 것은, 과연 우연일까?) 따라서 Brown은 이 관용의 기제가 개인 간의 차이와 갈등을 공공화 시키기보다는 이를 개인화-자연화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은 탈정치화의 두 방향을 따라 작동한다. 그것은 문제를 개인화시키고, 그것을 자연화(naturalization)시키거나 문화화시킨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관용은, 불평등과 사회적 모순들을 개인과 집단의 "편견"의 문제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즉, 관용 담론은 사회적 갈등을 정체성들 간의 내재적인 마찰로 축소시키고, 종교적-인종적-문화적 차이가 그 자체로 갈등의 장소임에도 관용의 실천을 통해 이러한 갈등을 희석시킨다... 예컨대, 관용의 대상은 관용의 주체와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차이를 가진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자연적 차이 때문에 그것은 관용할 만한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15)
개인적으로 관용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의 "자연화"를 오늘날 동성애를 둘러싼 논의들에서 대표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소위 "지각있고" "관용적인"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는 타고난 "자연적인" 속성이라,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와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사실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정도의 관용적 태도를 가지기만 하더라도 "훌륭한 수준"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식의 차이를 자연화시키는 담론은 불만스럽다. 혹시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동성애자의 성적 취향을 "타고난 것"으로 만드는 것(자연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성적 취향이 동성애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위한 이성애자들의 담론전략이라면? 자신의 이성애적인 성적 동일성을 붕괴하는 것을 막으면서, 동성애자를 자신들과 말그대로 "다른" 사람으로 정의하기 위한 거리유지의 전략이라면? 동성애의 자연화는 (그 자체로 권력의 산물이자 투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이성애의 자연화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동성애자의 자연적인 차이를 인정하라는 말은, 현존하는 이성애의 지배적 형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하나의 지배 담론일 뿐이지 않은가?
이 예에서 우리는 관용(혹은 똘레랑스)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관용은 관용의 주체 자신의 동일성을 붕괴시키지 않은 하에서, 더 나아가 주체 자신의 동일성을 확고히하는 한에서만 "작동하게" 된다. Brown 역시 이러한 관용의 성격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관용의 모든 용법은, 외부적인 것-문제적인 것-위험한 것-타자적인 것이 주인(host)을 파괴하지 않는 한에서, 주인과 공존할 수 있는 한계를 지칭한다..... (따라서) 위험한 것 혹은 낯설은 것이 문제가 될 때, 관용의 한계는 이들의 독성이 얼마나 기존의 가치와 주장, 몸체 등을 파괴하지 않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다면 관용은 내부의 위험한 타자를 규제하고 통합하는 하나의 양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관용은 데리다의 보충(supplement)의 지위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동일성/차이, 내부/외부의 이분법을 개념적으로 침해하지만, 결국에는 통합성과 자족성 그리고 지배의 연속성이라는 생각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27)
앞서의 예를 확장시켜 이해해보자. 동성애가 "자연적인" 속성이므로 그것의 차이를 "관용"해야한다는 논리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에 의해 지배적인 형태로 구성되어 온 자신의 "이성애"는 문제삼지 말아달라는, 따라서 위협적인 존재로서의 동성애자로부터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타자성 관리"의 한 양태이지 않은가? 차이와 다름을 절대화하고 그렇기에 상호인정이 필요하다는 관용 혹은 똘레랑스의 태도는, 기존에 존재하는 "나" 혹은 "사회"의 동일성을 해체하지 않는 한에서만 타자를 수용하겠다는 태도가 아닌가?
지젝을 인용하자면, 관용은 위협적인 타자성에 대해 "제발 거기에 그대로 있어줘"라는 호소이다. 나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에서, 나는 너희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주겠다는 논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들이 꿋꿋이 자신의 일터를 지키면서 자신들의 토착 문화를 재생산할 때 그들은 소수자로서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대상이 되지만, 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사회전복을 꿈꾼다면 그들은 더 이상 관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프랑스식 "똘레랑스"의 한계는 이미 방리유사태에서 드러난 것이 아닌가?) 동성애자들이 "자연적인"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휴머니즘적인 관용의 대상이 되지만, 그들이 자신의 이성애적 동일시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때 사람들은 극도의 호모포비아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관용은 현존하는 각자의 동일성을 유지한 채 "서로 그대로 내버려두기"를 협약하는 나르시즘적 주체들의 논리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은밀히 인정되는 것은 현존 사회를 떠받드는 게임의 룰이며, 기존 사회와 자아의 안정성-연속성-동일성이다. 따라서 관용은 기본적으로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우파의 논리이다. 기존 사회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경계를 파고들며,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좌파의 임무와 관용은 기본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개념쌍이다.(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아마도 오늘날 관용과 똘레랑스의 실천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지식인들의 사교 장소인 학회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관용-똘레랑스란 가치는 왜 그렇게 과대평가되었던가/혹은 되고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다. 아직 Brown의 책을 절반도 못 읽은 상태이고, 포스팅이 너무 길어지고 있으므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 기회에 정리해볼 예정이다. 오늘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