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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시프다..

 

봄날이 기다려진다..

지금같은 날씨로는 대략 봄이다...

새봄엔 불완전한 나의 자전거 착지자세를 반드시 마스터하리라...

 

-

-

 

그래서 내 영혼의 자매들과

나무가득한 공원에 가

머리결 하나 하나에 바람가득싣고

머리아픈일들을 잠시 비워주시겠다...

 

그렇게 비워내기 위해 씽씽 달리고 싶다...

아주 세게~~ 씽씽!

 

 

2007.2.22/ D-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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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이름을 갖고파~~~

http://www.aspalta.cbc.ca/deaddog_asp/aininfo.asp 

 

위에 사이트 들어가셔서 해보세요.

영어로 성이 앞에오나 뒤에오나 똑같네요.

한글,영어 다르구요... 영어에 하이폰(-) 넣으면 또 달라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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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진짜 왜 그러니...

 

스팸 메일로 지겨운데..블로그까지..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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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난하다....

나에겐 8년을 함께 일했고 늘 자매처럼 지내는 선배언니가 있다.

그녀의 남편과 그녀의 딸래미하고도 두루 두루 잘 지내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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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에게 요즘 좋지 않은 일들이 있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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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집에 들어가는 길에

건장한 남자새끼 두명이 다가오더니 돈을 요구하더란다..

미련하게 주었으면 되었을걸...우리에게 약한고리가 '돈'인지라...줄돈이 없었단다...-_-

나름 반항도 했었나보다...한놈이 안경을 벗기고 눈을 마구 때렸단다...

이런 XXXXX!!!

눈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근육은 물론이고 뼈가 조각 조각 나서

바로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인공뼈를 심었다..

물론 자부담으로 -_-;;;

범인은 결국 찾지 못했다...

2주가 지났는데도 아직 부기가 안 빠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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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갑자기 하열을 시작했다...

느낌이 이상했는지 피검사에 검사란 검사를 다 받아보고.

의사샘이 '자궁외임신'이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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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7시,내가 자고 있는 사이...

그녀는 자궁외임신으로 한쪽 나팔관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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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거 참 만만치않다..

2007년에 그녀에게 참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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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허허헛...

 

2007년은 뭔가 새롭게~ 상큼하게~ 시작하고 싶었다.

2007년을 맞기위해 겪었던 2006년이

완전 다이나믹 다큐멘터리였던 관계로..

나에게 그정도 배려는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6년 1탄 다큐]

완전 또라이 개마초같은 자식때문에

나와 내친구들의 영혼은 상처로 덕지 덕지... 

 

[2006년 2탄 다큐]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하기 싫은 프로젝트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삶의 기쁨으로 넘쳐나는 프로젝트도 했지만...)

 

[2006년 3탄 다큐]

근 10년을 사귄 지난했던 남친과의 연애관계를 정리해야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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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입학은 나의 드림컴트루 프로젝트 1탄인데..말이야..

이게..자그만치 4,620,000원 어치라는거...

 

뭐? 대책도 없이 원서냈냐구?

쳇..

 

괜히 가난 자랑했다아....

 

2007.2.7..

 나의 스위트 사무실에선 사람들이 저녁먹으라 소리를 치고 있다.

밥 먹고 다시 고민해봐야지...

 

챌! 엄마가 물려주신 긍정백혈구를 일단 믿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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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싶다...

졌다..졌어...

내가 졌다....

아...머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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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초록에서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록에서 희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록의 회원이었던 한 평화 활동가의 성폭력 사건이 대책위에 의해 공개되던 무렵 초록에 있었던 또 다른 성폭력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피해자가 사건을 모두에게 공개하기를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사무국의 한 간사가 그 사건에 대해 듣고 알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건이 사무국에 전달됐지만 어떠한 적절한 조치도 가해자에게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초록 내부에서 발생했던 두 성폭력 사건 모두, 결국 가해자의 왕성한 초록 활동 때문에, 피해자가 초록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성폭력 사건이 접수되었지만 피해자를 위한 어떠한 특별한 조치도 마련되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 가해자가 자진 탈퇴하는 방식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저는 사무국이 이 두 사건을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그 어떤 적절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명백한 성폭력 사건을 사소한 두 개인 간의 문제로 인식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내 성명서를 쓰기 시작했고, 우리의 뜻에 공감하는 36명의 초록 회원을 모았고, 초록정치연대를 탈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결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무국의 요청에 따라 사무국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지만, 의견은 거의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이렇게 사무국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묻고 탈퇴하는 방식으로는 이전의 성폭력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의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초록 내부에 있을지 모를 또 다른 피해자를 막는데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당시 다른 사건과 불필요하게 연결될 수 있는 여러 연관성 때문에 잠시 탈퇴를 보류하고 노력해보기로 했습니다.

곧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우석훈 정책실장이 웹에 올린 글이 초록 내외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물어 우석훈 씨를 정책실장에서 해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그 때 저는 반대했습니다. 단지 의견을 웹에 올렸고, 그 의견이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해임을 시킨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우석훈 씨가 올린 글과우리의 의견 차이를 분명히 하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판단이 들 때, 해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위해 우석훈 씨의 글에 대한 반박문을 쓰겠다고 이야기했고, 이김명란 회원과 회원간담회를 제안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초록 내부에서 합의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성평등이라는 가치가 무엇인지, 실제 성폭력 문제에서 어떤 것들을 원칙으로 우리가 지켜야 하는지를 함께 이야기해보는 시간을 마련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운영위에서 우리의 제안은 통과되었고, 성폭력 내규 제정을 위한 회원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간절히 바랬습니다. 최소한 이전 성폭력 사건에 대해 전사무국에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변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간담회에는 이전 성폭력 사건 당시 사무국의 책임 활동가였던 분들은 한 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이 포함된 성폭력 방지를 위한 회원 내규를 이렇게 그냥 통과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 당시 저는 첫 번째 성폭력 사건 때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폭력 내규 제정을 위한 소위를 꾸리는 데 합류했습니다

소위는 정원섭 간사, 운영위원 정보연, 이김명란, 이안지영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3번에 걸친 모임이 있었고, 매번 세 시간이 넘는 긴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이김명란과 이안지영이 준비한 초안을 기초로 해서 주로 작성되었습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그깟  A4  용지 몇 장이 뭐 대수롭냐고 여길지 모르시겠지만, 그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각 단체에 있는 활동가들에 연락해 단체 내규를 모으고, 각 대학교, 민노당 등 우리가 취합할 수 있는 조직의 내규들은 다 통합해 자료를 분석하고, 정리했고 우리의 뜻을 담아 한 문장 한 문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습니다.

내규를 만드는 내내 전 기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첫 번째 성폭력 사건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내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탕감받고 싶었고, 책임감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내규가 성폭력을 방지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초록 내부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최소한의 피해자(생존자) 보호와 2차 가해를 막을 수 있는 그런 내규로 기능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리고 내규안이 완성되던 마지막 날, 초록 사무국에 요청했습니다.
그 동안의 성폭력 사건들에 있어서 초록 사무국이 어떠한 적절한 대응도 하지 않았던 점과, 이전의 성명서에서 문제제기를 받았던 부분 중 인정하는 부분에 대해서 입장표명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요청했습니다. 이 제안은 삼 주전에 이루어졌고, 사무국은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하지만 총회 바로 전날인 어제 밤 10시에 전 아래와 같은 메일을 받았습니다.(전문 입장글에 첨부).

“성폭력 문제 관련해서 쭉 논의해왔던 자료들을 보아도 아직 사무국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 건지 정리돼 있지도 않고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래서 총회에서 참석한 모든 회원들을 대상으로 사과하거나 입장표명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꼭 사과해야 하더라도 그것은 사무국에 대해 문제제기 하신 회원들에게 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이제 저는 더 이상 초록에게서 어떠한 희망도 보지 않습니다.

초록 사무국이 사과를 해야 하는 대상은 문제제기를 하는 회원들이 아닙니다.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서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활동해야 했기에 초록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던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침묵했던 사무국의 무책임성에 대해 모든 회원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이전 사건의 가해자가 자발적 의지로 초록을 떠난 상태이지만, 앞으로는 가해자 때문에 피해자가 초록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 모두가 만들지 않겠다는 그런 다짐을 함께 하는 입장 표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무국에게 입장 표명을 요청 드린 것이었고, 의견을 미리 주면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의견도 총회 전에 드리겠다고까지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우리 역시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함께 책임을 통감하며, 관련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명서와 탈퇴까지 결심했던, 우리의 심정을 분명하게 밝히고, 피해자와 연대하고, 앞으로는 모두가 책임을 나눠 갖자는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김박** 사건과, 시민의 신문 이형모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운동 사회 내 성폭력은 만연해 있습니다, 또한 가해자들은 오랜 시간 가해 사실을 숨긴 채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해자의 위장에 속고, 피해자의 고통에 연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성폭력은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피해자의 고통과 연대하지 못하는 단체에서, 그러한 피해자에게 사실을 알고도 최소한의 조치도 취하지 않은 사무국의 일원으로서 최소한의 사과조차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단체에서 성평등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더 이상 활동하고 싶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고통에 연대하는 그런 새로운 공간을 위해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초록정치연대 회원 물꽃 (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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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치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전날부터 긴강하는 회의는

오늘 하루종일 지속된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진행해야 하는 회의가 좀 힘들다.

 

그동안 모든 운동단체들의 주요한 의제 중 하나였던 것이

"소통"이었다는데...

나는 이제 좀 소통이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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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민중가요의 흐름 4 -80년대말~

민중가요의 흐름 4 -80년대말~

민중가요의 성립과 전개과정(4)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노동가요-
<꽃다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8월호

(1)87년 항쟁과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급성장

87년 6월 시민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5공화국은 종말을 맞이하고,
87,88년부터 시작하여 90, 91년 경에 마무리되는 이 시기에 민중가요는 두 개
의 대중화를 실현한다. 그 하나는 대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노동자대중을 비롯한 기층민중으로까지 확산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직된
대중을 중심으로 하던 민중가요가 대중문화 공간의 미조직 중간계층으로까지 확
산된 것이다.
또한, 음악운동 집단이 수적으로 늘어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성향이
다양화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성과라 할 수 있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90년 민족음악협의회의 창립도 가능해졌다.

(2)노동가요의 의의

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립하게 된 노동가요의
의의를 크게 두 가지로 살펴 본다면, 먼저 근대 음악사.노래사 이래 최초로, 이
전에 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던 진보적노래문화, 노래운동(음악운동)을 기층민중
중심으로 대중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것은 7.8.9
월의 노동자 대투쟁과 함께 이루어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들의 각
계급계층운동이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의 발전을 이루게 된 것에 크게 힘 입은
것이다.
또 한가지의 의의는 노동자대중의 경험과 인식, 정서 등을 담은 작품적 성과를
남김으로써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3)87년 7,8,9월 노동자 대투쟁 기간의 노래

87년 이전까지는 노동가요라는 독자적인 노래문화가 만들어질 여건이 이루어지
지 않았다. 이는 노동자 대중이 대중적으로 노래를 부를 공간이 없었고, 따라
서 작품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87년 7.8.9
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당연히 그 시기 광범위한 투쟁공간에
서 불려질 노동가요가 제대로 없었음은 물론이다. 여태까지 학생.지식인 중심
의 민중가요가 주를 이루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도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소시민적 지식인적 티를 벗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
직 이 시기 노동자대중에게 대중화될 만한 작품이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 시기 불렸던 노래는 주로 행진곡으로서 <임을 위한 행진곡>, <늙은 군인의
노래>, <노동해방가>, <광주 출정가>, <진군가>, <동지>등이었다.
그 외에 대중가요들이 재해석되어 불리기도 하고, 개사곡이 만들어져 노래의
공백을 조금이나마 메우고자 하기도 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 <막장을 간
다>, (<전선을 간다>개사곡) 등
반면, 투쟁기였으므로, <사노라면>, <불나비>와 같은 일상적 분위기의 노래는
상대적으로 잘 불려지지 않았다.

(4)<파업가>와 <노동조합가>, 노동가요의 시작

1) 88년 가을 김호철<파업가>, <노동조합가>의 발표
전국적인 빠른 확산과 호응으로 88년 말, 89년 초부터는 새로운 노동가요의 시
대가 열렸다. <동지여 내가 있다>(마산), <딸들아 일어나라>, <단결투쟁가>,
<진짜 노동자 2>, <해방역에 닿을 때까지>, <노조 연대가>, <총파업가>(이상
김호철) 등의 노래가 이 시기에 발표되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갔다.

2) 행진곡 주도
왜 이 시기의 노래는 행진곡 뿐일까? 노동가요가 경직 되었기 때문일까?그 이유
는 민주노조가 없었던 당시의 상태에서 노동조건개선투쟁, 임금인상투쟁, 민주
노조설립투쟁 등의 투쟁이 막바로 벌어졌기 때문에,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공간이란 이러한 투쟁공간 밖에 없었고, 따라서 주로 행진곡이 이 시기 노동가
요의 주를 이룬 것이라 볼 수 있다. 당시에도 <단순조립공>, <짤린 손가락>,
<공장엔>, <공장가는 길>(이상 김호철), <나의 이야기>, <친구야>, <서울에서
살꺼야> (이상 안혜경) 등, 꽤 여러 편의 일상가요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퍼져 나가지 못하고 사장 되었던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하
지만, 이 시기에는 일상가요들도 이미 80년대 중반의 노동자 소재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던 연민주의적 시각을 잘 극복하고 있다.

3) '혜성같이 나타난 김호철'의 존재가 말해주는 몇가지 사실그 사실 중의 첫번
째는 우선 새로운 노동가요의 생산에 이전까지의 노래운동집단들이 완전히 무
력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87년의 노동가요 부재의 공백이 빨리 메워지지 않
았고, 이러한 상황은 '김호철'이라는 개인을 부각 시키게 되었다. (마산 등에
서 몇 편의 작품이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다 채울 수는 없었
고, 상대적으로 그 공백을 메운 김호철의 존재는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것으로
부각 되었다)또 한가지 사실은 지식인인 김호철이 당시 노동자 대중에게 호응
을 받는 노동가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경험을 통해 노동자의 체험, 인식, 정서, 인식태도,
예술적 관행 등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노동가요의 본격적인 성립의 바탕 위에서 89년 하반기
에 들어서서, 서울의 노동자노래단, 삶의노래 예울림, 안양의 새힘, 마산의 소
리새벽 등 노동자 대상의 활동(창작, 공연과 노래교육)을 전담하는 노동가요 전
문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5)89년 하반기 부터 90년까지의 변화

1)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의 시작
89년 하반기를 지나 90년에 들어서면서, 물론 행진곡의 주도가 계속 되긴 하
였지만, 광범위한 민주노조의 설립으로 민중가요를 부를 수 있는 일상공간이 창
출되었고,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라는 새로운 종류의 노래가 노동가요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행진곡 주도의 노동가요에서도 일상가요와 기타
서정가요가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다.

2) 일상가요
<포장마차>, <사랑과 행복>, <진짜노동자 3>, <참사랑>, <부모님께>(이상 김
호철), <내가 왕이다>, <서울에서 평양까지>(이상 윤민석), <달동네의 부푼
꿈>,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이상 이건), <내사랑 민주노조>, <우리들의 세
상>(이상 조민하)등이 이시기에 창작되어 불리워진 일상가요들인데, 이러한 노
래들은 <사노라면>, <불나비>의 뒤를 이으면서, 노동자의 일상체험과 정서를
담고 있으며, 일상적 낙관성과 역동성을 획득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낙관성
과 역동성은 투쟁적 낙관성, 역동성과 상호 전환하고 변증법적으로 상생하는 관
계를 가지고 있어다.
이 시기의 일상가요들은 여태까지는 민중가요에서 잘 쓰지 않았던, 뽕짝과 스
탠다드, 속화된 포크의 영향을 받은 통속적 대중가요의 어법을 사용하면서 마
치, 여태까지 포크, 군가, 가곡, 느린 단조 스탠다드, 찬송가 등을 민중가요의
음악적 자산으로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민중가요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 시기 일상가요가 이러한 새로운 음악적 경향을 가지게 된 것은 노동자 대중
의 노래문화적 관행 때문이었다.

3) 서정가요
이 시기의 서정가요로는 <끝내 살리라>, <열사의 그 뜻대로>, <꽃다지>, <골리
앗의 그림자>(이상 김호철) 등이 있는데, 주로 단조 스탠다드를 받아들인 단조
서정가요의 전통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이전의 민중가요에 비해 훨씬 통속적
가요의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4) 행진곡(투쟁가)의 다양화 - 전술적 투쟁가의 등장<전노협 진군가>, <구속동
지구출가>,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이상 김호철), <연대투쟁가>(윤민
석) 등, 그 시기의 전술적 투쟁과제를 담은 노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 노동
가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6)91년부터의 변화와 새로운 모색

1) 91년 상반기의 당혹감
91년 상반기부터 이전과 같은 엄청난 호응을 동반한 인기곡이 사라지고, 행진
곡의 퇴조, 특히 전술적 행진곡의 퇴조가 뚜렷해졌으며, 일상가요도 별로 재미
가 없어지는 당혹스런 현상이 벌어졌는데, 이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정체 내지
는 침체가 뚜렷해지면서, 투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공권력 투입, 대
량 구속, 자본 철수, 공장 이전, 생산감축과 감원 등 노동운동탄압으로 노조
가 현저하게 약화되는 상황이었다), '단결', '투쟁', '총파업' 등의 주장을 담
은 선 굵은 투쟁가는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가볍고 즐거운 낙관적 일
상가요를 부르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중에도 많이 불려진 노래를 굳이 꼽는다면, <철의 노동자>(안치환 작사.
작곡), 그리고 이전의 작품중에서는 <단결투쟁가>와 <진짜노동자 2>등을 들 수
있겠는데, 이들 노래의 공통점으로서, 투쟁의 주장보다는 세곡 모두 '멋있는
노동자'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2) 91년 하반기부터의 의도적 생산
이러한 91년 상반기의 당혹감이 주는 교훈에 입각하여, 91년 하반기부터 노동
가요의 창작자들은 노래의 내용과 정서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생산하게 되는
데, 주로 슬픔과 절망에 대한 위로,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삶, 지나간 2,3년 동
안 투쟁을 반추하면서 성숙하게 어려운 시기를 버텨가는 의지적인 노동자의 모
습을 부각 시키는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 노래들로는 <희망의 노래>(김호
철 작사.작곡),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하지 않았네>(조호상 시, 김성민 작
곡) <다시한번 투사가 되어>(조민하 작사.작곡), <사람이 태어나>(유인혁 작사.
작곡)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노래패 꽃다지의 단결투쟁가 대편성(신양묘 편곡, 92년)과 같이 이전의 투
쟁가를 2,3년간의 투쟁을 담은 느낌으로 편곡하는 시도도 있었으며, 그 이후 자
신을 되돌아보는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런 노래들은 이전의
노래들보다 더욱 개인의 느낌이 강해지고, 개인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왔으며,
더 섬세해진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민들레처럼>, <동지들 앞에 나의 삶은>,
<전화카드 한 장>(이상 조민하), <편지 3>,(윤민석 작사, 김신애 작곡), <내일
엔 내일의 태양이>(유인혁) 등이 그 대표적인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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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은 한번밖에 오지 않는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탓으로
내 곁에서 사라지게했던 사람들

한때 서로 살아가는 이유를
깊이 공유했으나 무엇때문인가로 서로를 저버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관계의 죽음에 의한 아픔이나 상실로 인해
사람은 외로워지고 쓸쓸해지고
황폐해지는 건 아닌지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신뢰
서로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사람이 주변에 둘만 있어도
살아가는 일은 덜 막막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마음 평화롭게 살아가는 힘은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내 아픔과 기쁨을 자기 아픔과
기쁨처럼 생각해주고 앞뒤가 안 맞는 얘기도
들어주며 있는 듯 없는 듯 늘 함께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행복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라는 생각도
언제나 인연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가도
생각하며 살았더라면.
그랬다면
지난날 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덜 줬을 것이다.

결국 이별할 수 밖에 없는 관계였다 해도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시의 한 구절처럼

우리가 자주 만난 날들은 맑은 무지개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게 이별했을 것이다.

진작,
인연은 한 번 밖에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면..


-<신경숙> "인연은 한번밖에 오지 않는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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