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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촛불현장-72시간 셋째날 국민행동 고고행진



△ <
10분 영상> 6.7(72시간 셋째날)촛불 국민행동 현장


 


△ 민주노동당은 6월 7일 오후4시 서울 마로니에공원에서 '고시철회 재협상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어 거리행진을 (사진 좌)청소년.대학생단체 및 제야단체와 함께 시청 앞을 향해 행진했다.

 


△ 한편 '2MB탄핵연대' 네티즌들은 시청 앞 근처에서 연일 민간구호 활동을 펼쳤다
또 다음 아고라 회원들과 연대해 서울 중심가 투어 행진을 벌였다.

 


△ 서울 시청 서울광장 앞 촛불문화제를 위한 환경단체 홍보 부스에서

 


△ 6월 7일 저녁 시청 앞 세종로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 25만여명의 시민이 참가했다.

 


△ 이날 촛불문화제 자유발언에서는 한승수 총리의 열린토론에서 한총리의 주장을 반박해
(총리를) 쩔쩔매게 했다는 (좌)고려대학생의 익살스런 발언이 있었다.
또 지방에서 온 완도 시민과 (우)제주도 시민의 절절한 발언도 펼쳐졌다.
(음성 안내) ▷ http://chmanho.ivyro.net/MidiFile/08.6.7고려대학생.mp3

 

∇ 7일 저녁 촛불문화제 피켓신들

 
 

 
 


△ 7일 시청 앞 촛불문화제 참가자들은 저녁8시 20분경 청화대를 향해 행진했다.

 


△ 행진 참가자들은 청화대를 향해 남대문 -> 을지로 -> 종로 -> 광화문 등을 거쳐 행진했다.
행진 중에는 행진 인원이 무려 30만여명으로 불어나, 참여수 고고행진을 기록했다.

 


△ 촛불행진단이 남대문로를 지나 명동을 거쳐 행진 중이다.

 



 


△ 촛불행진단이 광화문 앞에 다다랐지만, 며칠 전부터 미대사관 앞길은 차벽으로 막혀 있었다.
대부분의 촛불행진 참가자들은 광화문거리에서 마무리 시간을 갖고 귀가했다.

 


△ 한편 약 3만명여명의 촛불행진단은 밤 9시 30분경 청화대 우회도로인 서대문을 거쳐  행진했다.
그러나 독립문 도로(사직터널) 앞에 차벽으로 원천봉쇄 되어 진입이 불가능했다.
참가자들은 그곳 도로에서 한동안 연좌시위를 벌였다.

 


△ 독립문방향으로 간 촛불행진단은 밤 11시를 넘어 다시 광화문로를 향해 복귀행진 했다.

 


△ 행진중 뒤쪽에서 차량 행진단도 가끔 눈에 띄였다.

 


△ 한편 같은 시각 안국동 방향엔 300~600여명의 행진단이 산발적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이곳도 차벽으로 원천봉쇄 되어 진입이 불가능 했다고 한다..

 


△ 다시 대부분의 행진단이 모여있는 광화문 앞에는 아전투구식 격돌이 벌어졌다.
행진단 중 일부는 막힌 차벽을 산발적으로 흔들며 경복궁 방향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자 경찰은 소화기를 분사했고, 이에 격분한 행진단 중 몇은 경찰을 향해 소형 물패트통을 던졌다.
이에 질세라 경찰은 무심코 아예 오물석인 패트통까지 포함해 던졌다고 한다.
또 차벽을 올라타는 몇몇 행진단에게 방패로 내리 치고, 다뿌린 소화기를 내던지기도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행진단 중 학생으로 보이는 몇몇 청년이 뜬어낸 경찰 차벽에서 쇠파이프를 해체해
확보하여 방패를 든 경찰과 맞짱을 뜨는등 아전투구식 돌발상황이 연출됐다.
이러저러한 과정에서 시민과 전경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고, 11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 한편 선봉대 뒤에는 지난 6.1 경복궁역 대치현장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됐다.
아전투구식 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태를 진정시키거나 하지 않고 대부분 안타까워만
하거나 불구경하고 있는듯 있을 뿐, 40~50미터 밖에서는 아예 자고 있는 등 하고 있었다.
그곳 현장 주위에는 총 2만명 이상의 촛불행진단이 있었고, 그중 300~500여명만이 진입투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100여명만이 적극적으로 진입투쟁중이었고 나머지 수백명은
번을 갈아 좀 하다 쉬면서 했다. 알고보니 장년보다 미성년을 포함한 대부분 청년.학생들이었다.
당시 예비군들이 선봉대에게 경찰과 맞장뜨지 말고 진정하라고 종용했지만,
대부분 예비군에게 불신이 있는지라 설득이 않되었고, 지도부에게도 좀 그런 분위기였다.
즉 연배있는 시민과 열혈 선봉대와 서통이 잘 않된 안타까운 점이...
어찌됐든 진입투쟁의 수가 이렇게 극소수이고 하니, 지도부나 연배있는 어른들이 나서서
최대한 무력행사가 없는 평화시위를 종용하거나 함께 옆에 있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봉대를 좀 설득하다 않되는다 싶었던지 선봉대 멋대로 하라는 식으로 방치해 버렸고
급기야 이런 돌발사태가 발생해 버린것이다.

 


△ 8일 일요일 새벽 5시경 경찰은 경력을 2개 방향으로 증강하여
촛불행진단을 방패로 밀치며 도로 밖으로 1차 해산을 강행했다.

 


△ 8일 일요일 6시경 경찰은 2차로 행진단을 교보문고 밖으로 밀쳐냈다.
이날 예비군들은 경찰에게 진압작적 중 진압 수위를 약하게 할 것을 종용하고
시민이 다치지 않도록 선빵을 하고 보호하는 등 전체적으로 역기능 보다 순기능이 컸다.

 


△ 해산작전이 진행될 즈음에도 선봉대와 예비군 및 일부 인터넷 회원과 학생단체,
제야단체(LN) 회원 외에는 대부분 1차 진압때 좀 버티다가 도망치듯 현장을 벋어나 버렸다.
선봉대 왈 "당시 1만명 이상의 대오가 있는걸 감안하면 힘을 뭉쳐 비등한 수치의 경찰과 맞서
해산작전에 완강히 버티면 승산이 있다"고 하던데 그러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수천여명은 
시청과 서대문, 종로방면으로 흩어져 복귀 대기하는 인원도 있었다.



△ 8일 새벽 6시를 넘어 행진단은 세종로 앞 인도까지 완전히 밀려났다.

 


△ 한편 이날 새벽 7시경 다른데로 몸을 피한 일부 행진단 천여명은
다시 시청 앞 도로를 지나 세종로로 복귀해 가두시위 하러 나왔다.

 





 
△ 그후 경찰은 행진단이 스스로 해산할 것을 기약하고
일단 원하는 대로 시위하게 놔두고 철수했다.
행진단은 오전에 가두에서 연좌하다 인근 광장으로 이동해 토론하며 쉬면서 다음 일정을 이었다.
 


출처 : 미디어다음, 미디어몹(민중의소리 베타블로그 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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