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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느새 조선에 또 다시 여름이 왔다. 장마가 기승이라고 한다. 작년에는 장마가 2주 정도로 남부와 중부지방을 왔다 갔다 하며 지나갔던 것 같은데, 올해 여름 장마는 좀 긴 것 같다. 마치 열대지방의 우기, 스콜같은 기후라는 생각이 든다.

 

연구는 이어지고 있지만, 역시나 급박한 작업을 요구하고 있으며 해결되고 밝혀져야 할 의미도 꽤나 많다고 느껴진다. 정신이나 개념, 이념을 인간 주체나 인간 사회를 뛰어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고있는 헤겔 선생은 자연의 영역에 이 개념의 변증법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철학의 영역에서 헤겔 선생의 설명을 이해하는 것은 도통 힘든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대다수의 인민들은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개념이나 이념의 산물로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 선생은 한사코 이를 개념과 이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으니 고전물리학적 관점에 익숙한 자로서는 영 불편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마음을 가다듬고 쓸데없는 번뇌를 없애고자 요즘 붓다에 대한 책을 한 권 읽고 있다. 싯타르타의 일대기를 개략적으로 설명하고 중요한 그의 생각을 짚어주는 책인데, 불교에서 가르치는 주장과 사상을 알 수 있어서 마음 수양에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불교 경전을 직접 인용한 부분을 읽으면, 붓다가 너무 신격화되어 서술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세월 이어져오면서 덧붙여진 붓다에 대한 전설과 기적, 신통력 등을 사상시킨다면 그는 오래 전 인도에서 활동하였던 아주 리버럴한 지식인, 철학자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이 말했듯이 원시불교 서적에서는 싯타르타가 매우 리버럴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한자로 번역되어 오랫동안 전수되어 온 불교경전에서는 '세존', '여래' , '부처님' 등의 수사어가 많이 붙어 있지만 사실 당시 붓다는 그저 '싯타르타 선생'이었다고 한다.

 

불교 경전에서는 싯타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 만난 다른 수행자가 싯타르타를 '수행자'를 뜻하는 '사문'이라고 부르자 싯타르타는 '나는 이제 사문이 아니라능. 부처라능. 그니까 여래라고 부르라능' 하고 근엄하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각색이 분명해 보인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그따위로 잘난 척을 할리가 없으니 말이다.  싯타르타가 태어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동서남북을 한 걸음씩 걸은 이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것도 뻥 중에 상 뻥이 분명하다.

 

이른바 서양에서는 종교든 철학이든 역사학이든 가리지 않고 한때 종교적으로 각색되지 않은 예수의 참 모습을 파헤치고 연구하는 노력이 있었다. 민중신학도 그 한 갈래일 것이다. 헤겔도 한때 기적의 요소를 배제한 인간 예수의 모습을 연구한 논문을 써 놓기도 했었다. 예수에 대한 각양각색의 해석 속에서 예수는 종교 개혁가로, 급진적 지식인으로, 인품이 고결한 성인으로, 고대의 사회주의자로 묘사되고 설명되기도 하였다.

 

부처에 대해서도 이러한 해석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부처님을 만난다면 나는 그 분을 '부처님', '위대하신 세존이시여~' 혹은 '여래님' 이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냥 '싯타르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야 그의 자상한 인품을 알고 또 기꺼이 가르침을 받고 싶을 것 같다.

 

요즘은 불교용품점에 들러서 작고 아담한 불상을 하나 사고 싶다. 책상에 두고 보면서 번뇌에 빠지지 않고 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면서 집착을 벗어나 살고 싶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를 외적인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수양이 부족하여 그의 가르침을 떠올릴 만한 물건이 필요한 것 같다. 부족한 모습이지만 어쩌겠는가.

 

비가 계속 오고 있다. 조선은 비의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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