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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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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레벨 : 100(정예)

 종족 : 게르만 (비유대)

 

대중적인 교양의 세계에서 헤겔은 더이상 읽히지 않는다. 아니 읽혀지는 것이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사상은 어렵고, 이제 유행도 많이 지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양의 세계에서는 아마도 현대 프랑스 철학자나 정신분석과 같은 심리학서가 유행이 아닌가 생각한다. 헤겔은 이제 한국에서도 퇴행길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헤겔 철학에 대한 차분한 반성이 가능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광신적인 찬사와 혐오적인 경멸을 떠나서 헤겔 철학의 공과 사를 차분히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헤겔은 하나의 방법만을 가지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였던 철학자인 것 같다. 그 방법이 바로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모든 것은 모순에 부딪쳐 이것을 끊임없이 극복, 지양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중에서 자기 자신은 새롭게 변화한다. 아주 단순한 원리이지만 헤겔은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다.

 

헤겔의 철학은 결국 변증법 하나를 가지고 이것이 어떻게 모순에 부딪쳐 극복지양하면서 발전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변증법을 겪는 주체는 바로 '정신'이다. 이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은 '인간정신'이라는 말처럼 우리 인간의 정신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합된 정신, 공동체적 정신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교실에서 나타나는 반 특유의 분위기, 아우라, 집단적 목적의식, 다른 반이나 학교에 대한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정신이다. 물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지, 헤겔의 정신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논의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헤겔 스스로도 정신에 대하여 신비주의, 종교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서는 우리의 단순한 의식이 그러한 공동체적 정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물론 그 세세한 변증법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헤겔이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헤겔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 근대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정신(민족정신이건 세계정신이건 시대정신이건)이 나타나기까지 지난한 의식의 변증법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하나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젼을 켜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투표도 하고 사회를 까기도 하고 직장에 출근하여 일하는 것은 수많은 의식의 단계가 합쳐서 도달된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말이다. 그 시스템을 헤겔은 '절대정신', 이 한마디로 압축한다. 따라서 이 세계는 과거의 모순이 축적된 하나의 필연이다.

 

그 변증법은 이렇게 인간학의 분야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논리학이라고 하는 헤겔의 저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 개념론, 본질론 등의 추상적인 개념에서의 변증법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은 정신현상학과 방식이 똑 같다. 하지만 이때는 '정신'이라는 말보다는 '이념'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논리학은 쉽게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을 함축한 형이상학 저서이다. 마치 동양의 세계관이 음과 양이 있고 음양의 정동에 의해서 오행이 탄생하고 오행으로부터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이치로 설명되는 것처럼, 헤겔의 형이사학에서는 기본적인 존재의 영역에서도 변증법이 일관되게 통용된다. 존재와 무를 거쳐 생성이 산출되고 이로부터 현존재가 나타나며 또 계속 모순에 부딪치며 새로운 개념에 도달한다. 논리학은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논리 즉, 인과성, 가능성, 필연성,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의 정의, 양과 질이라는 개념 등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게 아니라 변증법적인 자기 모순을 거쳐서 탄생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A이면 B이다'라고 말했을 때에도 사실은 그 안에 엄청난 양의 모순과 그 모순의 충돌과 분열과 극복, 지양, 통일의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 추상적 개념의 발전사이기 때문에 헤겔의 입장을 선뜻 이해하기는 힘들다. 추상적 개념이 발전하는 변증법을 다루는 것이기에 헤겔의 자의적인 설정으로 보이는 것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철학도 있다. 이것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변증법적인 모순의 지양과 발전이 이어진다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자연은 외타존재의 영역, 즉 우리 밖에 객관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영역이기에, 논리학 분야처럼 헤겔이 이리저리 썰을 풀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부족하다. 헤겔은 자신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연의 영역에서 어떻게 변증법적 모순이 적용되는지를 다시 보여주는 재구성 작업에 착수한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학적인 작업에 변증법을 덧씌워 자연에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대한 변증법적 파악. 이것이 자연철학의 내용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 헤겔은 논리학의 방식에서처럼 단순한 공간,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운동과 물질 개념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역학, 물리학, 유기학 등으로 나아간다.

 

헤겔의 자연철학체계는 자연과학의 자연 탐구 방식이 아니라, 변증법적 시각에 따라서 자연의 세계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의 정신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넘어서 정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데에 목적이 있다. 자연 외부에 대한 정신 혹은 이념이 발전하여 결국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정신(정신현상학)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신의 체계에 자연철학을 맞추려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현대 우리의 자연과학적 상식에는 맞지 않는 서술이 곳곳에 보인다. 이것은 헤겔이 살았던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전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헤겔의 자연철학의 방법 자체가 관념적인 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러한 시각에서 뉴턴식의 기계적 자연관을 비판하지만 뉴턴의 자연과학의 엄청난 실용성에 밀려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 한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상대성 이론이후 새로운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변증법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통일로서의 물질을 바라본 것과 아인슈타인의 4차원 시공간의 유사성, 유기체적 자연관이 현대 생태학적 자연관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 등이 새롭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사실 변증법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만들어낸 철학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변화 혹은 역사라는 개념을 철학의 영역, 진리의 영역에 처음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라고 하는 하나의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변화하는 사회, 변화하는 진리관, 역동적인 민주주의, 변천하는 시대 정신 등 근대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여 우리는 헤겔에게 '근대철학의 완성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모든 것은 모순에 부딪쳐 변한다는 것, 지금의 진리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이제 우리시대에는 상식이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막는다든가, 사회가 말세임을 외치며 보수적으로 대응하였지만, 근대 사회의 특징은 이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 이것이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논의하고 연구한다. 헤겔이 말하 듯, 절대정신의 단계에 다다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단계를 한 눈에 파악하고 이것이 모든 변화의 과정이었음을 인식한다. 이 절대정신은 곧 근대의 정신에 다름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이른바 '국가정체성'을 운운하며 사회의 변화상을 탓하거나 낡은 세계관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직 정신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근대인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헤겔은 근대를 준비하고 그러한 근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마지막 근대 이전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후 니체가 등장하면서 근대 비판의 포문을 열면서 현대철학은 시작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재해석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헤겔 좌파의 입장에서 근대 사회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떠오른 사회주의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였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후 20세기 내내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대철학이 헤겔이라는 큰 산을 넘어뜨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서양철학자들이 그를 비판하며 제기했던 새로운 문제들을 나열하는 것은 또 하나의 글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헤겔은 그렇게 현대철학자들이 밟고 올라서서 극복해야 할 표적이 되어 주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독일의 비판철학은 헤겔의 동일성 철학을 하나의 폭력으로 바라보며 탈근대적인 이슈들을 다루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 시대는 여전히 근대와 탈근대의 중간지점에 서 있는 듯 하다. 지나간 세월과 그간 쌓여온 비판의 양 만큼이나 이제 누구도 헤겔의 변증법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은 거대한 산으로서 아직도 밝혀져야 할 사상이 남아 있는 철학적 발상의 보고이다. 이러한 그의 매력은 헤겔에 대한 많은 비판까지 우리가 섭렵한다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한 것인가. 오히려 유물론적 함정에 빠짐으로서 근대에게 발목을 잡힌 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아닐까. 비동일성을 외치며 동일성을 비판한 해체주의의 시도는 결국 또 다른 동일성에 다다르는 하나의 계기가 아닐까. 그들의 말대로 저 멀리서 헤겔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헤겔이 교양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의 노년의 초상화에서 나오는 매서운 눈빛을 보듯, 그의 철학은 설득이 아닌 믿음을 강요하는 듯 오만하고 난해하며,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건방짐과 자만이 엿보이며, 관념적이라는 엘리트주의적 향내가 짙게 배어나고, 정반합으로서 모든 반대와 모순을 절충하고 뭉뜽그려버리는 보수적인 변증법 사상가이다.

 

하지만 나는 헤겔의 철학을 단번에 무시할 정도의 자신감은 없다. 헤겔을 알면 알 수록 기존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스 고전에 열광하였고, 프랑스 혁명을 일평생 지지하였으며, 프로이센의 왕정복고의 반동 속에서도 저항하는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헤겔이었다. 그의 변증법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충과 봉합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 자신으로 탄생하는 것, 모순을 모두 받아들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일신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변증법은 역동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그냥 정반합이라는 보수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고, 해석학적 순환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마르크스식의 진보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아 속의 타자와 타자 안의 자아라는 실존주의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아이러니한 의존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정도 되면 헤겔이라는 산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헤겔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등뒤의 헤겔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는 맞닥드려야 할 던전의 보스로서 헤겔이 등뒤에 버티고 서 있다. 그는 참 두려운 철학자이다.

 

처음으로 돌아오면, 헤겔은 이제 그 누구도 읽지 않지만, 오히려 헤겔을 차분하게 읽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다양한 서양의 고전철학자 중에서 유독 헤겔만이 주목을 받고 대접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헤겔은 '과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이라는 서양철학의 불모지에서 아직도 주목받고 여러모로 밝혀져야 할 철학자들은 수두룩하다. 예를들어 쉘링, 피히테나 볼프,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는 지나가는 말로 다룰 뿐, 그들의 사상의 진수는 아직 완전히 소개되었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헤겔의 사상이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 계몽의 시대는 끝난 것인지, 탈계몽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계몽에 대한 계몽으로서, 즉 계몽의 연장선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물음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계몽과 탈계몽의 대립과 그로 인해 탄생할 새로운 사상을 고민한다면, 역시 출구에서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헤겔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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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좌파

진보정당의 분당이후 이제는 정치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진보진영의 자주파와 평등파, 혹은 엔엘과 피디의 세력 갈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네티즌의 일반적인 시선도 민주노동당 = 친북좌빨, 진보신당 = 그렇지 않은 좌파, 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진보가 살아나려면 친북좌파를 없애버려야 혹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히 진보진영의 성장에 대해 낡고 낡은 북한의 김정일 추장을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일반대중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는 데에 큰 방해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켜 진보세력은 김정일 찬양세력이라는 말도안되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진영에서 '친북'이라는 딱지는 떼어버려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하지만 '친북'이라는 딱지를 떼어야 한다는 것이 북한과 통일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를 던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친북'이라는 딱지를 뗀다는 것이 외교적으로 북한에 적대적인 기존 보수정당의 기조에 찬성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전에 글에서도 썼듯이, 나는 민주노동당과 같이 북한에 온정적인 정당이 하나정도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친북이라는 것이 반드시 김정일 체제를 옹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며 또한 의미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가르는 민주노동당의 진보적인 대북정책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나의 고민이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 서술할 생각은 없다. 그저 대북정책의 기조에 가장 민감한 것이 민주노동당이며 상대적으로 진보신당은 '對北'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일단은 민주노동당의 대북기조가 김정일 추종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며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보는 '친북'해야 한다는 것, 이때의 친북은 보수정당이 표방하는 '반북'의 반대로서의 의미이며 결코 북한찬양의 의미는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1. 북한은 어떠한 정권인가.

북한은 사회주의 정권을 표방하고 있다. 남한의 진보진영도 이른바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회주의에서 찾고 있다. 물론 현재 그 '사회주의'라는 스펙트럼은 실로 다양하다. 북한이 받아들인 사회주의는 소련의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사회주의 체제였다. 북한은 '그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동유럽을 비롯한 중국, 몽골, 베트남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사회주의 체제는 6,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는 그럭저럭 안정된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논외로 하겠다. 이에 대한 평가는 사회주의 국가마다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져 근 15년째 그 어려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원인은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먼저 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북한에게 경제적으로 우방이 될 수 있는 나라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의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또한 분단으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국방비 지출은 경제적 발전에 드는 비용을 많이 잡아먹는 비생산적인 국가운영을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스탈린주의 체제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그 체제를 더더욱 발전시켰다. 스탈린일인독재체제를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적인 독재체제로 이어나가는 "시대 역행적인" 시도를 행하였고 결과적으로 지금 북한의 상황을 좋게 만들어내지는 못하였다. 경제난으로 사회주의의 특유의 경제시스템은 무너졌고,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이 무너짐으로써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대가정'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주체사상이라는 그들의 체제 선전을 반영하면, 북한은 '사회주의의 기능을 상실한 주체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2. 북한에 대한 태도

북한에 대한 강경책을 유지하는 미국과 현 정권의 태도에서, 그들의 태도를 정당화하는 기조는 한마디로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을 나누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정권을 북한 인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극악한 독재 정권으로 규정하고 압박과 견제를 펼치되, 그들의 치하에 있는 북한 인민들에 대해서는 온정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돕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수정당의 이분법적 대북전략에 대해 진보진영은 지금껏 어떠한 대응을 해왔을까. 민주노동당이 지금까지 주사파라고 비난받는 대에는 대북 포용 정책에 대한 어떠한 청사진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우리 인민들에게는 민주노동당이 '무조건 북한 편만 드는 정당'이라고 평가받는 데에는 민주노동당의 탓이 크다.

 보수정당이 '북한 인권, 국군포로, 독재 반대, 북한 핵 반대'라고 외칠 때 민주노동당은 뭐라고 자신들의 온정적인 대북 정책을 변호했는지 의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을 나누는 강온양면 전략은 그 빈틈이 너무도 많다. 먼저 북한 내에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 드러나 있지 않으며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가 그들과 접촉하여 그들에게 외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정보가 없다. 북한은 은폐되어 있다. 한마디로 북한 정권과 북한 인민을 나누는 것은 관념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 북한 인민을 대표하는 것은 지금의 북한 정권이 유일하다. 북한에는 북한 정권을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자정작용을 주도할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북한 지도자의 '자기반성'에 의지할 뿐이다. 때문에 북한에 대한 제재는 곧 북한 인민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난 대북포용정책의 기조를 통해 이루었던 대북 지원,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 개성공단의 건설 등은 실제로 북한 정권 뿐만 아니라 북한 인민들의 생활에도 보탬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북한은 꾸준한 + 경제성장률을 나타내 보였다.

현 정권이 북한 정권은 밉지만 북한 인민들은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현재의 강경 기조에서 대북 민간 지원마저 좀처럼 수락하지 않는 것은 그들 전략의 모순을 잘 말해 준다. 북한의 인민에게 온정적이어야 할 정권이 아직도 북한의 탈북자들에 대해서는 지난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예로 들만하다. 그저 해낸 것이라고는 대북인권결의안에서 우리의 태도가 기권에서 찬성으로 바뀐 것 뿐이다.

민주노동당은 북한 정권의 향방이 북한 인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런 한에서 북한에 대한 포용적 기조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북한을 압박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인민들에게 가장 먼저 돌아갈 수 밖에 없다고 강하게 나와야 한다. 그러면서도 북한 정권이 아닌 북한 인민들의 자주적인 역량에 대한 무한한 지지를 표방해야 한다. 결국 북한의 정권을 선택하는 것은 북의 인민이요, 어떤 선택을 하든 북한 인민의 자주적 선택을 지지한다고 말해야 한다.

북한의 인민들은 그저 정일이에게 세뇌만 받은 판단력 제로의 인민들이라는 생각이 보수정당에게는 박혀 있다. 말로만 북한의 인민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지 사실 그들은 북한의 인민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민주노동당은 현재 김정일 정권이 북한 인민들의 자주적 지지를 받는 한에서 북한 정권을 통일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적극적인 교류와 협력의 대상자로 생각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족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 들어가야 북한에 대한 비판이 애정어린 비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의 3대 세습이 사실이라면 북한 인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결국 북한에 대한 태도는 북한 인민들을 대표하는 정권이 현실적으로 현 김정일 정권이기 때문에 그 정권이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기반하는 한에서 교류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겠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북한 정권을 무조건 비난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북한 정권을 추종하겠다는 것도 아닌, 조건적 지지이며 이런 토대 하에서 민주노동당은 북에 대한 비판과 우려 발언 역시 꺼리지 말아야 한다.

 

3. 북한 인권, 탈북자, 국군포로, 반핵

흔히 하는 비판이 민주주의를 그렇게 부르짖는 진보진영이 왜 북한의 인권문제, 탈북자문제, 독재체제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몇번 이야기했지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기인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은 우리에게 '괴뢰'도 아니요 '외국'도 아닌 특수한 존재이다. 한마디로 '적'도 아니고 '남'도 아니라는 것이다. 적이자 남이요, 남이자 남이 아닌 남이고, 적이자 적이 아닌 적이다.

보수정당과 일부 좌파들의 비판에 대해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대북정책의 기조는 1) 전쟁 반대, 2) 대립적 남북관계 반대이다.

북한의 인권이 심각한 문제이며 몹시 우려스러운 상황인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유엔 대북결의안에서 기권을 하든 찬성을 하든 이것은 형식적일 일이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북한의 인권을 외부에서 아무리 욕을 하고 지랄을 하여도 북의 인권이 나아지는 데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다. 실질적인 효과는 북의 경제가 안정되고 발전하여 북의 중산층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요, 이를 통해서 북의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깨닫고 해결해나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중국이 최근에야 빈부격차 문제와 인권 문제를 절실히 깨닫게 된 이유는 중국의 경제성장을 통해 그 이면의 어두운 측면을 실제로 느끼고, 또 불만의 목소리가 가중된 점이 크다. 모두가 굶어 죽는 가난한 상태에서는 굶어 죽나 수용소가서 맞아 죽나 마찬가지라는 무서운 동일성으로 빠져들기 마련이다.

탈북자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북에서 탈출한 우리 민족이 낯선 땅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생활을 하고 있으며 중국은 또 그들을 북으로 강제 송환하기까지 한다. 보수정당의 생각대로 이것을 완전히 해결하려면 북한을 전쟁을 통해 무너뜨리거나, 중국을 압박을 하든 뭘하든 닥달해서 탈출자들을 모두 한국으로 오도록 하는 길 뿐이다. 매우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것을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안은 북의 안정된 경제성장을 도와줌으로써 북의 인민들이 북에서 그냥 살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북의 지도자 역시 인민들이 북을 빠져나가는 것을 정통성 약화의 적신호로 받아들일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국군포로 문제는 북을 압박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할 일이다. 인도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서로 험악한 사이에서 무슨 인도적 차원 자시고 할 것인가. 북이 국군포로를 우리나라로 송환해도 자신들의 국가정통성에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그들이 자신감을 찾는다면 적십자 교류를 통한 이산가족 문제는 물론 국군포로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민주노동당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핵문제는 너무나 자주 말하였으므로 이제 그만하자. 진보진영의 해결책은 북이 스스로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1)전쟁반대 2)냉전시대회귀 반대로서 접근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길이다.

 

진보진영, 특히 통일운동세력은 자신들이 정일이 빠돌이가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대북기조가 왜 필요하며 심지어 합리적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친북좌파는 버려야 한다든가, 종북주의자 때문에 우리가 싸잡아 욕먹는다는 오해를 받는 것이다.

통일운동세력은 북에 대해 합리적이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진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득해야 한다. 진보세력에게 '친북'은 필연이다. 이 친북은 정일이 빠돌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보의 미래를 위해서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과 전쟁의 방지, 그리고 전반적인 복지의 증대에 통일이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설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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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라 방송3사에서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제작, 방영하고 있다. 특히 KBS에서 방영중인 한국전쟁 다큐는 어릴때 보았던 6.25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풍부한 자료를 제시하고 당시 인민군이었던 생존자들의 증언을 곁들이면서 전쟁의 사실성을 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기존의 반공적인 시각과는 달리,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려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야 한국전쟁, 6.25라 부르겠지만 북쪽은 조선전쟁,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60년 전의 이 전쟁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지 고민된다. 마땅히 우리를 처들어왔으니 신이 처들어왔다해도 그것은 '적'이요, 우리가 무찔러야 할 대상임은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에서 6.25에 대한 기억을 반공주의로의 회귀라는 이유에서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 짓거리는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은 현실로서 인정하되 그안에서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적어도 도망칠 구멍은 마련하고 자기 주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6.25 60주년이라 해서 기념식을 열고, 참전국의 용사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감사하고, 한미 동맹 강화 어쩌고 하는 것을 한편으로 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북쪽에서도 조국해방전쟁 60주년이라 해서 기념식을 열고, 해방전쟁에서 산화한 용사들을 추모하고 중국에서도  항미원조라 하여 조중 간의 우호와 혈맹관계 강화 어쩌고 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착찹하기 그지없다.

 

대개 패자의 역사는 사라지는 것이어서, 전쟁에서 패한 측의 역사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남베트남의 경우 우리와는 달리 북베트남에 결국 패망하고 말았으니 그 누구도 기억해주는 이가 없다. 현재 사회주의 베트남에서 베트남 전쟁은 어디까지나 조국해방전쟁이었고, 부패한 남베트남과 제국주의 미국과 그 동맹국에 맞서 호치민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피를 흘러 싸운 전쟁이다. 그 패한 전쟁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헐리우드 전쟁영화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휴전으로 전쟁이 중단되어 한국전쟁은 두 개의 시각을 가진 두 개의 다른 전쟁이 되어버렸다. 한국전쟁과 조선전쟁으로 말이다. 누가 먼저 처들어 갔는지는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대해서 판정할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확실하지만, 남북 간의 대립을 중단하고 어떻게 다시 평화를 되찾고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줄 수 없다.

 

전쟁은 한반도 전체에 통일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김일성의 욕망에서 비롯되었고, 이러한 야망을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 하에 추진하고 실행하였다. 전쟁은 남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에 대하여 아직 직접 논문을 본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내전설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당시 남한 정부의 이승만은 간헐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38선 일대에는 산발적인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1948년부터 이미 내전상태였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전쟁은 누가 먼저 시작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는 견해이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은 일본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면서(물론 보편적인 학설은 아니겠지만) 이른바 '동아시아 30년 전쟁'이라는 학설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동아시아에서 30년 동안 전쟁이 일어났다는 의견인데, 대략 45년 부터 75년까지, 중국의 국공내전, 인도차이나 전쟁, 한반도의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한 무더기로 묶어서 30년 전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분야 역사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로서는 더 자세히 말할 능력이 되지 않지만 이념갈등과 식민지배 청산과 관련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같은 성격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 같다.

 

30년 전쟁이라 하니 스케일이 확 커져버려서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것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당시 동아시아가 이념 대립과 식민지배를 청산하는 과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여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같은 전쟁 다른 시각의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맹목적인 반공주의는 당연히 우리의 현재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는 있지만 앞으로의 미래는 전망해 줄 수 없다. 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무단침입으로 시작되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조국을 지킬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우리는 경제성장에 매진하여 현재와 같은 자랑스러운 조국을 이루어내었다. 이 얼마나 깔끔하고 명확한 시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런 시각을 가지고서는 남북 갈등 해결될 리 없고, 통일은 500년 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 우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보지만 그를 전범으로 여기거나 일본에게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났다면 한쪽의 시각은 승자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금기시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의 시각이라든가 베트남전에서 남베트남 정부의 시각, 그들만의 사명감, 정당성을 알기 힘들다. 우리는 휴전이 되어 서로가 생각하는 전쟁에 대한 상처로 60년 간 대립과 갈등을 이어왔다. 북한도 전쟁으로 인하여 정부가 개작살날 뻔하고 중공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만만치 않다.

 

6.25 전쟁을 추모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증오의 재생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말이 북에 대한 경계 태세의 소홀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복수하자, 오랑캐를 몰아내자라는 말만 많고 실상 아무 준비 없이 거덜났던 조선처럼, '북진통일', '김정일의 목을 따자', '주석궁에 탱크가 들어가는 날' 운운하는 보수 세력들의 허황된 주장은 사실상 국방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대북심리방송에서 소녀시대 음악을 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적의 침입을 방지할 무력을 소유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

 적을 적으로 보되, 복수해야 할 원수로 보아서는 안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복수심이 자신을 망친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았다. 마찬가지로 북에 대한 복수심으로 미쳐 날뛰게 되면 우리의 자산인 민주주의와 자유도 망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6.25 전쟁은 극심한 이념의 대립이 낳게된 산물이며 이제는 이러한 이념 대립을 지양하고 다시는 이런 전쟁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한쪽의 이념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은 세계적인 시각에도 전혀 맞지 않는 냉전 시대의 추억일 뿐이다. 현재 북한 사회주의의 모순과 병폐에 대한 사실이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맞물려서는 안 된다. 좋은 사회주의 정책이라면 도입하겠다는 정말 '실용적인' 시각이 요구된다.

 

사실상 6.25 전쟁의 후반부는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미 전쟁 초기에 한국은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겼으며 북한도 중공군 참전 이후 작전권을 중공군에게 넘긴 바 있다. 이때부터 사실상 국제전의 성격을 띄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맥아더와 팽덕회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6.25는 국내 이념대립이 국제전으로 확대되어 민족상잔의 고통을 겪은 전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중국이 친미적인 정권으로 통일 한국이 들어서는 것에 반대하듯이 미국도 친중적인 성격으로 한국이 통일되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중국과 미국의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6.25를 통해서 우리의 문제는 폭력이 아닌 방법으로 반드시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남북의 문제도 비록 핵문제는 거의 미국 전담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이런 핵문제 조차도 우리 남북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외교에 나섰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진보나 보수나 할 것없이 너무 자기 주장이 강해서 좀처럼 뒤를 돌아볼 생각을 안한다는 생각이 든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도망칠 구석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인데 전혀 그런 생각 없이 올인한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 축구에서 16강 이후 이게 허정무의 리더쉽이네, 박주영의 절치부심이네, 박지성 선수의 리더쉽이네 자화자찬이 난무하는 것과 같다. 이게 꼴사나운 것이 이러다가 우루과이 한테 대패하면 어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음에도 전혀 이를 지적하는 기사는 좀처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보진영은 6.25 추모 열기를 또 메가왕과 연결시키며 이러한 분위기에 대한 거부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6.25 추모 안 하려 하는가? 좌파는 언제나 옳기만 하고 전혀 잘못하는 것은 없을 줄 아는가?

보수진영은 천안함을 북한의 짓거리로 단정하는데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독일 총리실 직속 전문가가 지적하였듯이 애초에 조사단을 꾸릴 때, 중립적인 국가, 대표적으로 중국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자충수였다. 북한이 저질렀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좋은 데 제발 좀 도망칠 구석은 약간이라도 마련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어쩌다 글을 쓰다보니 이런 결론이 나버렸다. 6.25 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딱 잘라 말해서 앞으로 이젠 올인하지 말고 도망칠 구석은 마련하고 행동하자는 것이다. 제발 통일할 구석은 마련하고 서로 미워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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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수

가을이 오면서 이제 20대의 마지막을 절감하고 있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에는 10대의 연장선 같았고, 그래서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제는 좀 다르다. 30대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 없다. 뭐하나 이룬 것이 없으니 말이다. 해야 할 숙제는 많은데 이렇게 망연히 있게 된다.

 

예전 뉴스를 뒤적이며 보다가 진중권씨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이미 이쪽 사이트에서는 많이 이야기가 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희망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가 속 편하게 이야기하듯이 한신대라든가 성공회대 같은 나름대로 진보적인 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다시 교편을 잡는 일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굳이 대학이 아니더라도 이곳저곳에서 그의 강연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뭐 내가 듣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진중권이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소시쩍 생일 선물로 '아웃사이더'라는 일종의 잡지(계간지인지 뭔지는 모르것다만)를 받았을 때였다. 물론 그 잡지에는 여러명의 진보논객들이 쓴 글이 있었는데 진중권의 글은 그 중의 하나였다.

 

그때는 그저 좀 진보적인 지식인 중의 하나구나 생각하고 말았다. 그가 그렇게 독설적인 사람인지도 몰랐고, 어떠한 말을 하고 다녔는지도 개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한 여러가지 언설들이 언뜻언뜻 귀에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은 한번도 없다. 그리고 그가 쓴 책을 사거나 빌려서 본 적도 한번도 없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꾸준하게 이른바 진보진영의 다수파인 자주파를 비판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한 진보진영 내부에 대한 독설적인 비판의 글을 때때로 접하면서 이를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녔던 기억도 난다.

 

그가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은 몇 번 있는데, 역시나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재주가 매우 부러웠고, 그러한 그의 능력을 뒷받침하는 폭넓은 지식도 너무나 부러웠다.

 

진중권의 토론과 글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풍자와 비아냥이다. 그의 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로 인해 매우 통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상대방에 대해서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심한 모욕감을 줄 여지가 매우 크다. 그래서 그는 많은 적들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변희재씨 같은 경우가 그의 대표적인 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중권은 그를 괜히 건드려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적을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변희재는 진중권과는 뗄래야 뗄 수 없다. 그의 견해는 보수적인 시각을 대변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느정도는 필요한 다양성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진중권과의 논쟁 속에서 더더욱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나는 진중권이 독설로 흥해서 바로 그 독설로 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노무현 정권시절 대우건설의 남모 사장이 자살을 하고, 정몽준 회장이 자살을 하였을 때, 진중권의 독설은 정말 가관이었다. 이른바 '잘못한게 있으면 왜 자살을 해요? 감옥에 가야지.', '아무래도 자살세라도 받아야 할 것 같아요.'라는 발언은 최근의 노무현의 자살에 대한 그의 태도와 더불어서 그의 발목을 강하게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예전 발언들을 물고 늘어진 사람이 바로 변희재였다.

 

진중권이 드디어 제대로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심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진보의 개'였다. 그리고 더 좋은 말로 말하자면 그는 진보의 선봉대장, 진보세력의 한 자루의 '칼'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가끔씩은 진보세력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상처주기를 또 즐긴다.

 

진보신당으로 분당을 할때의 진중권의 말, 그리고 진보신당 내부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세력들을 비난하는 말은 그들을 이론적으로 납득을 시키기를 떠나서 인간적인 모욕까지 병행하고 있다. 덕분에 진보세력 내부에서도 그를 싫어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이고, 이것은 진보세력의 창조적인 경쟁과 협력을 방해하고 이들을 분열시키는데까지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초등학생에게 1+ 1 =2 라고 가르칠 때, 말끝마다 '병신아'라는 말을 붙인다면 그 초딩은 과연 아, 그래요 하고 납득할 수 있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진중권은 일종의 '짜증'을 글에서 발언에서 곳곳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것도 몰라, 병신아.'라는 말을 말이다.

 

그럴 경우 마음 약한 상대방은 아, 그렇습니다. 진사마. 하고 항복선언을 하고 진중권의 빠가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납득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다. 누구라도 모욕을 받으면 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나는 도올 김용옥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의 학문적 역량은 강단에 흡수되지 못하였고, 같은 이유로 진중권은 어디까지나 지식인이 아니라, 학자가 아니라, '논객'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강단과 도올, 진씨와 사회 모두에게 손해이다. 물론 그가 '학'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면 괜찮겠지만 그가 '정치인'으로서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그에게 큰 아킬레스 건이다.

 

그의 정치적 목적의식도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그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 것일까? 그 누구 아는 사람은 있는 것일까? 물론 그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원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견해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논객이라면 어떠한 사회가 되어야하는지 구체적인 틀을 제시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반대로 일관하는 중이다. 민족주의적 통일에 반대하며, 사회주의 혁명에 반대한다. 그러면 그는 사민주의를 원하는 것일까? 하지만 예전 촛불시위에서 칼라TV를 이끌었을 때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혁명을 꿈꾼다.'라는 말을 하였을 때, 그 혁명이란 과연 어떤 혁명을 말하는 것일까?

 

뭐 이건 좀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나는 진중권이 이제 보다 더 건강한 비판을 하였으면 좋겠다. 수많은 논적들을 칼로 베면서 상처를 입히지 말고, 그들을 자신의 부하로 삼을 만큼의 아량을 베풀었으면 좋겠다. 그보다 멍청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쌔고 쌨지만 그런 점을 인정하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중권같은 천재는 한 번 들으면 적어도 그 하나라도 잘 이해하겠지만 대한민국에는 그렇지 않는 멍청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아량있게 감안하고 보다 친절한 비판과 설명을 해주길 기대한다.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매우 친절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그 품격대로 세상은 그렇게 생각대로 급격하게 변하지 않고, 진중권보다 못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시면서 글에서 말에서 나타나는 그 '짜증'을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 이것이 그분에게 바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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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쓰벌...나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중요한 개념이긴 하고, 똑 다루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것을 주제로 뭔가를 이야기하기에는 내 머리에 뭔가 개념 탑재가 부족하다는 거....

 

본격적인 탐구를 하기 전에 일단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정말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대개 '시간'이라고 말하면 누구든지 '시계'를 떠올릴 것 같다. 하지만 시계는 인간이 만든 창조물로서 시간의 흐름을 재기 위한 객관적인 척도로서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시계를 만들게 된 이유, 즉 시간을 인식하고 그것이 흐른다는 것을 파악한 계기는 무엇일까.

 

시간에 대한 인식의 시초는 뭔가가 변한다는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시대에서 부터 인간은 낮이 밤이 되고, 유기체가 자라나서 결국 노회하여 죽는 다는 것, 계절이 바뀐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변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변화는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낮이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이 되며, 과일이 자라서 떨어지고 또 얼마가 지나면 또 과일이 자라고 열린다. 봄에 싹튼 새싹은 여름에 절정으로 이루다가 가을과 겨울을 지나 사라지고, 또 봄이 되면 다시 또 새싹이 열린다.

 

즉, 외부 환경으로 부터 얻을 수 있는 변화라는 개념은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직선 상의 시간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까지나 원환 과정으로서 변화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언제부터 직선 상의 시간관념을 가지게 되었을까?

 

시간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역사'를 인식하면서 부터 싹트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거쳐 내가 있고, 내가 이제 늙고 아들과 손자를 두며 이제 내가 죽으면 그렇게 인간 유기체의 운명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 더 나아가 한 나라가 세워지고 왕들이 이어받으며 여러가지 사건과 전쟁을 거쳐 곧 나라가 멸망하기도 한다는 것, 이러한 사건과 사고를 인식하면서 이를 시간이라는 관념을 도입하여 이해하였고, 그것은 변한다는 것, 그리고 예전의 사건은 오늘날 다시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시간이 직선 상으로 흐른다는 것은 근대 이후부터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돌고 도는 원환과정으로 시간을 인식하기도 하였고, 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철의 시대를 거쳐서 점점 타락하게 된다고 시간을 인식하기도 하였다. 중세의 시간 개념은 신의 구원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막혀있는 제한 시간의 세상이었다.

 

직선 상의 시간 흐름, 즉 발전적으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계몽주의자, 그리고 헤겔, 맑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은 발전하며 미래에는 더더욱 발전할 것이라는 것, 즉 진보사관은 이러한 직선적 시간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시간은 이렇듯, 뭔가가 변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인식에 자리잡게 된 하나의 형이상학적 전제이며 이 시간에 대한 성격 규정은 원환론, 발전론, 타락론, 종말론, 예정론 등 다양하고 우리 시대 인식에 중요한 기반을 이루어왔다.

 

시간에 대한 관념은 인과관계와 연관되어 철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서 중요한 이론적 논란 거리가 되었다. 시간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변한다는 것이 정말로 변하는 것인가? 뉴튼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우리의 시대 뿐만 아니라 전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절대적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내재적인 관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라이프니츠는 내가 잘 모르겠고, 칸트를 언급하자면 칸트의 시간 관념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외부의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적용하게 되는 인간의 인식에 불과하다. 칸트에게 있어서 절대적 시간이 존재하느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그저 인간이 외부의 사물들을 파악함에 있어서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념인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을 정말 무엇인가? 과거, 현재, 미래는 무엇인가? 어느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내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순간은 어느새 과거가 되어 버린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도 흐르는 것이라고 인식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시간이라고 하는 관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닐까? 그저 우리가 사건의 전후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적용한 관념이 아닐까?

 

현대 과학의 성과로 인하여 우리는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물체의 운동에 따라서 시간은 왜곡된다. 더 빨리 가거나 느리게 가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절대적 인식이 사라지면서 현재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는 다양한 신기한 현상들이 이론적으로 이미 증명되었다. 우주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은 지구의 인간들보다 나이가 덜 들어보인다 어쩐다 하는 이론적 가정을 생각해 보면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리적 법칙으로도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불러일으킨다. 중력의 법칙, 관성의 법칙처럼 말이다. 더 나아가 상대성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 각자의 나름의 고유한 시공간을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도 도출될 수 있다.

 

시간이 절대적, 상대적이냐를 떠나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면 인간의 환영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논란은 아직도 그 답을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것은 인간이 주변 사물을 파악하고 인간의 역사와 우주의 변화를 인식하는데에 이미 중요한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간은 과거에서 흘러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것일까? 아니면 미래에서 흘러들어와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들어가는 것일까? 전자의 견해라면 미래는 예정된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게 되며 후자의 견해를 따르면 미래는 언제든 우리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기제가 된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수는 있는가? 시간 여행이 가능하여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가볼 수는 없는 것일까? 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현재의 상식은 과거는 바뀔 수 없고, 다만 미래가 불확정적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하기에 우리는 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며 과거는 주로 반성의 수단으로서 상기될 뿐이다.

과거가 바뀔 수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여러가지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과거를 변화시킨다면 우리의 현재는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리는 것인가?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서 과거를 바꾼다면 현재로 돌아왔을 때, 마치 영화처럼 모든 것이 바뀐 현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또는 이러한 상상은 공간과도 연관되어 우리의 과거는 불변인 채로 있고 과거를 변화시켰을 때에는 다른 현재라는 새로운 공간이 우리의 기존 현재와 병행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될수도 있을까? 그럼 시간 여행을 떠난 자는 자신이 돌아올 현재는 기존의 현재가 될까? 바뀌어버린 새로운 공간 상의 현재가 될까? 혹은 우리가 아무리 과거를 변화시킨다 해도 미래는 하나의 법칙처럼 일관된 모습을 유지하게 될까? 즉 미래는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일까?

 

시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상상은 모두다 무용지물일 뿐이다. 우리가 사실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그때 그때의 변화일 뿐이며 그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어떤 연속체로 수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때 그때의 변화는 거대한 불변함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유일한 하나의 공간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다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시간에 대한 판단 여부에 따라서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도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파악은 자연과학의 연구와 철학적인 탐구를 통해서 이미 많은 것이 드러났으며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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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뻘글이 되었다. 아, 씨발 그냥 잊자. 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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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여름이다. 그래도 비가 와서 오늘은 참으로 선선했다. 요즘 비도 자주 안오고 가뭄걱정이라는데 비가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 푹푹 찌는 8월에는 태풍도 적절한 규모로 가끔 조선반도에 들러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독일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난이도는 어느새 중급으로 올라와 있다. 뭐 일단은 그렇다. 실제 실력은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강의 시간이 아침 7시라서 생체시간으로는 그야말로 꼭두새벽인 5시에 일어나서 학원에 갔다.

 

수업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나는 퇴근인데 다른 인민들은 모두 출근 중이었다.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모두 출근하는 사람들...그 속에 나 우두커니 퇴근하는게...내가 정말 백수인가봐아아아~

 

집에 돌아오니 갑자기 꼭두새벽에 일어난 나의 신체가 놀라서 피곤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에 와서 또 잤다...;;;; 일어나니 11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잔 것 같다. 개운하긴 했는데 이런 짓을 8월까지 해야 한다니 좀 암울하다. ㅋ

 

서원 생활은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이제는 절간 생활이 문제이다. 이제 절간이 방학을 하면 나는 친구 스님이 일하는 다른 절간에 가서 '여름불경학교' 방학보충강의를 맡을 것 같다... 가르치는 것은 힘들고 나의 적성에도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어찌하랴....돈은 벌어야지....그래서 절간이 방학하는 7월 중순이 되면 나는 되려 또 바빠질 것 같다.

 

공부는...그럭저럭 마치 관광열차 타듯이 느릿느릿 진행중이다. 책상에는 읽어야 할 책들이 쌓여만 간다. 이게 다 외국어 때문이다. 그래도 세미나라고 몇 개 하는 게 강제적으로라도 공부를 하게 만든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독일어 학원도 다니니, 이것도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든다. 모두들 뭔가를 하고 있는데 나만 왠지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내가 선택했으니 내가 죽을 곳은 여기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 좀더 공부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화상아, 생각만 하고 앉아 있냐.....ㅜㅜ

 

이공계가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 우리 주변에 나오는 얘기는 이공계가 죽어간다지만, 인문학은 이미 죽어서 관에 못을 박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우리 선배를 보더라도 그것은 빤히 보인다.

 

인문학을 하는 것은 누구나 말하듯이 당장 효용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돈이 되는 학문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인문학자들이 가난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마땅히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풍토는 조금 다르다. 주변 동양2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먼저 대학의 교수가 되면 마치 가난한 고학생이 고시에 합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수혜와 혜택과 명예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만큼 그 자리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른바 학도들과 교수 사이에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게 조금만 좁혀지면 비록 엄청난 혜택은 사라지더라도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텐데 말이다.

 

누군가 니가 교수가 되고 싶으냐? 라고 말한다면 나는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아직까지는'그렇다. 아직은 대학에 다니면서 가오잡고 강의하는 말그대로의 교수는 되기가 싫다. 차라리 니 꿈이 뭐냐? 라고 묻는 다면 자랑스럽게(?) 시간강사요~라고 말하고 싶다. 허허

 

유럽의 예를 들어서 나 자신에게도 미안한데,,,특히나 진보세력들이 툭하면 우리나라 욕하면서 잘사는 유럽의 예를 들어주시는데 이게 좀 현실상 맞지 않는게 많기 때문이다. 역사도 다르고, 경험도 다르고 지역사회도 다르고 국제관계도 다르니 말이다. 아무개가 북한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 이상한 좌파들이 '그럼 북한으로 가!'라고 하듯이, 나도 이들에게 '그럼 유럽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배울 건 배운다는 측면에서 그들에게 최소한의 동의를 표하면서 나도 유럽의 예를 들겠다. 유럽의 교수직은 당연히도 우리나라 교수의 수보다 월등히 많다. 그리고 봉급도 많지 않아, 유럽의 노동자 수준이라고 한다. 이건 좀 괜찮은 것 같다.

 

유럽의 인문학자들이 진보적인 이유가 이러한 경제적인 토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그렇다고 유럽이 교수 되는 것이 쉬우냐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교수가 되려면 '교수자격논문'이라는 것도 제출하고 시험도 본댄다. 그래서 유명한 데리다도 그 시험 많이 떨어졌단다....(이거 맞나...어쨌든^^)또한 비정규 시간강사들도 어느정도 생계를 보장해주고 말이다.. (송두율 선생도 아마 정교수는 아니라지...)

 

우리나라도 교수 수를 더 확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수를 늘리고 중고등학교 교사 수준의 봉급만 받는 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교수들이 너무나 특권화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여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망할 놈의 반골기질...

 

뭐 딱히 공부를 하고 나면 교수가 되고자 하는 생각은 없기에, 일단 목표는 학위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거 끝나면 뭘하나.....그제서야 교사를 하겠다고 설레발을 칠지도 모르겠다. 그래, 뭔가 자신만의 일을 하면서 공부한 것을 가지고 논문도 쓰고 저술도 한다면 좋지 아니한가...뭐, 이상이겠지. 그런 짓 하는 것도 좀 힘들 것이다.

 

우리나라에 정말로 자유로운 학문 연구는 가능할까. 이걸 생각하면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않다. 우리나라에는 어느 학문이든지 아직 유명한 '사상가'는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은 모두들 외국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말이다. 정말 자유로운 학문 연구는 자연과학 쪽에 국한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그마저도 요즘 이공계가 어렵다니 암울하긴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말이다.

 

왜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을까. 혹은 적어도 학계의 성과가 일반 시민 사회라든가 문화계로 전파되거나 토론되거나 공생하지 못하는가. 우리나라에 과연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긴 한 것인가... 학계는 학계 따로, 사회는 사회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학문 연구라고 보기는 힘들다. 말그대로 상아탑(이말 좀 맘에 안든다. 차라리 장막 정도가 우리 현실에 맞는 말일듯..상아탑? 웃기지 않냐? 상아탑은 개뿔..학자가 뭐 잘났다고..ㅋㅋ)에서 쳐박혀 공부나 해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현실이 아직 자유로운 학문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뭔가 피드백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그러니까 강정구 같은 학자가 6.25 내전설 같은 걸 주장하면 사회는 발칵 뒤집히는 것이다. 아니 왜? 그 사람 전부터 그거 주장했었는데? ㅋㅋ....

 

이러한 현실 때문에 학자는 학자대로 우리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그저 외국학자 성과 빌려서 이러쿵 저러쿵 지들끼리 노가리만 까다가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사회는 외면하고 말이다. 이러한 현실은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분단과 직결된 문제는 아닌지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은 그만큼 폭넓지가 않다는 것이다. 뭔가 말을 하려해도 이게 안되고 저게 안되고 하니 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닐 것 같다. 같은 동양 2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국 같은 경우는 요즘 동양철학분야에서 엄청나게 떠오르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 정체성을 초월한 자유로운 논의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인문학에 있어서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일본은 엄청난 학문적 역량으로 아시아의 학자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서양의 학문성과들도 빠르게 번역이 되고, 서양에서도 유명한 성과들이 배출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일본도 전후문제와 천황제라는 금기가 존재한다는 측면이 일본의 학문역량이 제대로 배출되지 못하는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학적 성과가 일본 사회에는 제대로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정말로 일본에서도 유명한 사상가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 않나? (틀리면 제보바람)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된 사상가가 배출되기까지는 아직 지대한 관문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꼭 사회가 변해야 학문이 발전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는 정말로 훌륭한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아니 우리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할일도 없는데 한번 생각해 본다.

 

1. 이성과 진리의 문제

과연 우리 사회에는 이성이 존재하고 지성이 존재하는 가? 혹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진리를 찾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 사회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불가능하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에 대한 회의라는 측면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서양은 이미 이성의 단계를 이미 거친 이후에 이성의 문제점을 반성하는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해방 이후에 치열한 좌우대립과 현재에도 지속되는 분단의 이념갈등으로 인해서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것이 많이 희생된 측면이 있다. 즉, 아직 모두가 동의할 이성과 진리가 정립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쇠고기 파동과 관련해서 보자면, 우리는 이성적 협의, 동의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수 있다. 쇠고기 파동은 엄연히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냉철한 이성적 입장으로 보자면 광우병은 발생할지 말지 정말로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긍정도 부정도 유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광범위한 불안 심리가 작동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작년에 활개를 치고 다녔었다.

 

광우병 파동은 과장이고 거짓이고, 그야말로 정치적 의도를 가진 불순한 이들이 조장한 것인가? 이러한 태도 역시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광우병이 그저 '의혹'에 불과하다고 과학적 수치를 들이대며 '안심해'라고 말하고 그냥 지나가도 되는 문제였을까? 정말로 사회적으로 차분한 이성, 적어도 그러한 이성적 태도를 유지할 줄 아는 사람들이 지도층, 지식인층을 형성하고 있었다면 그 사태는 양 극단의 중간쯤이 되었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정부와 시민으로 대표되는 양 극단의 강한 충돌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결과는 흐지부지....

 

분단과 관련되어 있었던 예전의 송두율 사건, 강정구 사건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강정구가 말한 '만수대 정신', 혹은 6,25 내전설 등은 강정구가 간첩이라서가 아니라,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입장을 표방한 것인데 그것이 여타저타 말도 없이 빨갱이 마녀사냥이 진행되었다. 송두율도 마찬가지 나는 송두율 선생이 북한의 간첩이 아니라 그저 북한과 친했을 뿐이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데, 그 사람의 학문적 입장과 저서들을 통해서 추구하는 바를 보지 못하고 그저 사회적으로 매도하기에 바빴다.

 

내가 알고 있는 송두율은 제3세계와 제1세계를 화해시키는데에 자신의 학문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른바 안티근대를 표방하는 미국적 시각의 '적국'들에게 따뜻한 시각을 가지고 우리가 근대 혹은 현대를 극복하자는 데에 있어서 그들 제3세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불만도 마땅히 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각을 가진 학자를 사회에서는 그저 빨갱이로 몰았다. 조선의 큰 불행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사건으로만 보는 일이 우리 조선에서는 허다하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일들을 보면 그것이 그저 사건의 연속이었지 그게 우리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황우석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우리사회에서 이성적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있는가? 혹은 진리 자체가 가능한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와 입장, 방법론을 만들어내야 앞으로의 사태에 적절히 대처하고 그저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저 외국학자들의 책이나 파고 그거 가지고 장막 속에서 학자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 봤자 아무런 성과를 낼 수가 없다. (뭐, 그게 중요한 과정이긴 하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뭘 얘기하고 했는지 수천번 말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있는가? 스포츠 처럼 그저 지적 유희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2. 삶의 문제

우리는 왜 살아 씨발? 지금까지 우리는 그저 살아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 그럼 학원, 학교에 가래. 그래서 학교에 가. 그럼 대학에 가야 한대. 그래서 씨발 대학에 가. 그러면 취직을 하래. 씹탱 그래서 취직을 좆나게 열심히 노력해서 해. 그럼 씨발 또 결혼하래. 결혼을 해. 그래서 애를 낳아. 그래서 늙어. 그래서 뒤져. 씨부랄 개씹탱 아가리 좆나 씨댕 우라질 염병 탱탱부랄~!!!!

 

다른 나라 인민들? 학교에 가.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어 있어. 우리나라처럼 대학 못가면 죽어!! 처럼 그런 비인간적이고 살벌한 합의가 아냐. 그럼 거기에서 인민들은 대학에 갈지, 직업을 구해서 직장을 구할지 결정을 해. 중간에 사랑하면 결혼이나 동거도 가능해. 자신의 인생 가치관에 따라 갈라지겠지.

 

자신이 어떻게 살지 다른나라 인민들은 그렇게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얼마전 방한한 히딩크? 그 나이에 여자친구있대? 우리나라 허정무 감독이 여자친구 데리고 다니면 '미친새끼' 하겠지.

 

삶의 문제는 이제 우리나라도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자유로운 인간을 양성할지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삶의 목적이라든가 쉬운 말로 삶의 질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기 않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경제적 규모에 비해 복지 제도는 형편없다. 이러한 합의의 부재로 인해 우리나라에서는 파업이 일어나면 그들이 왜 파업을 일으켰는지 이해하는 태도 없이 그저 국가 경제 운운하며 나는 일하는데 너는 왜 노냐? 하면서 매도하기에 바쁘다.

 

이제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행복하게 살지 결정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것은 경제적 제도와도 관련이 된다. 이미 유럽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제도들에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경제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사'자도 꺼내기가 힘든 측면이 많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 혹은 삶 그 자체를 반성하는 사상가가 나올 수가 없다. 자본주의도 하나의 가능태로서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태도가 우리 학자들 사이에서는 부재하지 않은가? 그저 극단적인 찬성과 반대만이 있을 뿐이다. 삶의 문제도 극단적인 국가주의적 삶, 경쟁적 삶과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적 삶이 우리나라에서 충돌하고 있다.

 

3. 이념의 문제

이미 다른나라에서는 정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념갈등을 겪고 있다. 극단적인 맑스레닌주의적 정파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 정파의 활동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정파들만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극단적인 좌우대립만이 잠재해 있다.

이것은 좌우 이념이 무엇이 잘못되고 어떤 점에서 이것은 옳은지 합의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사회주의가 상존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툭까놓고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있긴 한가? 그저 말도 못하게 막고 있지 않은가? 국가보안법도 그렇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을 늦추고 있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면 왜 반대하는지, 즉 스탈린 식의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의 본질인지, 아니면 다른 방향의 사회주의가 가능한지 공평하게 마찬가지로 지금의 자본주의가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본질인지, 아니면 다른 방향의 대안적 자본주의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인지 합의가 부족하다.

 

그런 합의의 부재는 학문적 역량에서도 나타난다. 아직까지도 맑스, 레닌, 스탈린 사회주의 3부자의 저작이 완역되지 못하고 있다. 유명한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나 케인즈의 저작도 완역되지 못하고 주요 서적이 있다해도 절판되거나 있어봤자 매우 오래된 번역서만 있을 뿐이다. 뭔가 서로 토론하고 싸울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니 논의를 해봤자 허공만 가를 수 밖에 더 있겠는가?

 

학자간의 토론도 부재하고, 그만큼 시민들 사이에서도 웃기게도 21세기에 아직 사회주의는 금기시되어 있다. 이제 툭 까놓고 논의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 점에서 학자들의 할 일은 정해지지 않았는가? 이런 저서들을 빡세게 공부하고 토론하고 번역해서 시민 사회의 품으로 돌려야 한다. 이른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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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지 않고 노가리만 깠다. 그냥 내 생각이다. 해야 할 일은 많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상하게 예술이나 영화나 평론하고 어려운 형이상학을 이야기하고, 생소한 학자들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더 더 한걸음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거 뻘소리 아냐......쓰고나니까 제대로 뻘소리 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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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아마도 8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은 산업화된 조선의 성과를 어린시절부터 만끽하며 자라온 세대가 아닌지 생각한다. 그런만큼 우리세대부터 물질적 풍요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세월이 바뀜을 알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태어날때에는 컴퓨터는 없었다는 것, 휴대폰은 말할 것도 없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살고 있으니 아마도 아직은 젊다고 할 수 있나보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쯤 곳곳에서 컴퓨터 학원이 생겨나며 컴퓨터 붐이 일어났던 것 같다. 이른바 8비트 컴퓨터가 처음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곳이어 등장한 16비트 컴퓨터...나의 가족은 형을 컴퓨터 학원에 보내기로 결정하였고, 물론 나도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부모님은 눈이 나빠진다며 만류하였고(돈이 없기도 했었겠지..ㅋㅋ)그 결과 지금 형은 최첨단의 인생을 살고 있고, 나는 책냄새 풀풀 나는 고리타분한 길을 걷고 있다.

 

당시 컴퓨터를 모르는 나조차도 컴퓨터에 매력을 느낀 것은 당연하게도 게임이었다. 당시 8비트, 16비트 컴퓨터에 무슨 재미난 게임이 있었겠냐만은 당시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슈팅게임부터 특히나 당시 국민학생들을 사로잡은 것은 삼국지1, 더블드래곤 등이었다. 당시 잡기놀이, 딱지치기나 하고 있던 우리로서는 정말로 큰 문화충격이었다. 하지만 어린나이였기에 변화에 무심하였고, 그냥 게임이 있구나 하고 재미나게 즐길 뿐이었다.

 

중학교 때 386컴이 나오고, 그 이후 쏟아진 게임은 정말 현란했다. 3D게임을 처음으로 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집에 있는 개인용 컴퓨터에 게임을 저장시켜 노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고등학교 때에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이 나오고, pc방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게임개발의 역량도 차츰 증가하여 온라인 게임의 영역에서 한국 게임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고2때 최초의 온라인 게임인 '바람의 나라'에 빠져든 친구들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중독성이 장난이 아니었고, 그 당시에 난 왜이리 보수적이었는지 공부한다고 그런 것은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뭔가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게임의 장르가 어드벤처, 롤플레잉, 슈팅 게임 으로 확연히 구분되던 시절이었다. 어드벤처 게임으로 생각나는 것은 유명한 '원숭의 섬의 비밀 1,2,3, 이다. 원숭이 섬의 비밀 1,2,3는 모두 다 해보았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다만 단점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는 게임에서의 자유도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 메뉴얼을 모르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여 스토리를 전개할 지 막막했다는 것이다. 특히나 어드벤처 게임은 한국판으로 번역도 안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어에 짧은 나로서는 서울역에서 김서방 찾는 것과 진배없었다.

 

어드벤처 게임으로 또 생각나는 것이, 당시 추리소설에 빠져있던 나는 셜록홈즈 게임을 찾아서 해본 적이 있었는데, 영어가 짧으니 사건 해결이 불가능했던 것은 자명한 일었다. 셜록 홈즈가 영어도 모르고 낯선 영국 땅에 와서 탐정 일을 하고 있는 동양인이었으니 당최 말이나 되는 일인가..

 

게임이 시작되면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빨리 사건현장으로 오라는 말을 듣게 되지만 영어를 잘 모르는 나는 사건 현장에 가지 않고, 경찰서를 먼저 가버렸고 그곳에서 노가리를 까다가 사건현장에 가게되니 이미 현장은 말끔히 치워져 있는 상태였다...;;; 스토리 상 먼저 현장에 가서 중요한 단서들을 찾아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곳저곳 방황하다가 게임을 그냥 접고 말았다..

 

롤플레잉 게임으로는 말할 것도 없이 삼국지 영걸전, 로봇대전 등이 기억이 난다. 모두 한창 빠질 때에는 새벽까지 했었던 게임이었다. 그나마 대학 때 그랬으니 다행이지....^^;;

소문으로만 듣던 온라인 게임을 했던 것은 '와우'가 처음이었고, 가장 빠졌던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온라인 게임의 매력은 대단하다.

 

앞으로 또 어떤 게임들이 쏟아질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게임산업의 발전으로 우리말로 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크나큰 축복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 좀 제대로 된 어드벤처 게임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게임 산업이 발전했음에도 완벽한 자유도를 구가하는 어드벤처 게임은 잘 나오지 않는 것 같다. 이미 온라인 게임으로 헤게모니가 넘어가기도 했고 말이다. 원숭이 섬의 비밀 같은 인간적인 그래픽을 구사하면서 편하게 생각하며 즐길 수 있는 어드벤처 게임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GTA 같은 게임이 있기도 하다. 전에 해봤었는데 너무 비사회적인 임무만을 요구하는 바람에 흥미가 떨어졌고, 나는 치트키를 써서 모든 무기로 무장을 하고 곳곳에서 민간인을 아무 이유없이 죽이고, 저격하고 하면서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경찰들과 한바탕 격전을 치르기도 하고 말이다. 계속 그러다보니 내 머리도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

 

지금 다시 셜록홈즈 같은 게임을 하게 되면 영어를 해석하면서 소소하게 즐길 수 있을 것도 같다. 아니 뭐 한글로 된 게임을 하면 더 좋고 말이다.

 

몇 년 전에는 코삭이라는 게임을 한적이 있는데, 나폴레옹 시대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전투를 펼치는 전략 시물레이션 게임이었다. 고증도 꽤 잘되어 있어서 당시의 전쟁을 실감나게 바라보고 조종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재미였다. 그렇게 고증이 잘 된 전투 게임도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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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히는 생각

할 일도 없는 판에 예전에 말한 P선생의 "국가"에서 S가 말하는 정의에 대한 대화가 어떻게 종결되는지 정리해 두고자 한다.

 

예전에 우리의 S선생께서는 정의의 절대적 기준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논쟁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현실적' 정의관을 하나하나 논박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의 사유 실험으로서 국가를 하나 만들어 보고 그안에서 국가의 정의부터 발견하고 이후에 미시적으로 개인의 정의를 찾아보자고 말한다.

 

S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결코 민주적인 국가도 혹은 귀족정도 과두정도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로운 국가는 각 계급이 그 계급의 성향에 맞는 역할에 충실한 사회를 말한다. 그렇다면 각 국가의 계급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먼저 지배계급 이른바 S선생이 수호자라고 부르는 계급이 있다. 그리고 수호자를 보좌하여 국가를 방위하는 전사 계급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생산 계급이 존재한다.

 

수호자 계급에게 필요한 역할은 이른바 '이성'이다. 이성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며 그렇기에 S는 나라의 지도자는 마땅히 '철인왕'이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호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체계를 세세하게 이야기한다. 7~15세 까지 음악, 체육 교육을 하고, 그 이후에는 수학, 변증술과 같은 이성을 단련하는 교육을 실시한다. 그리고 3,40대에 이러한 소양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9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말단으로 내려가 나라 일을 맡아 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5,60대가 되어서야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가장 훌륭한 이에게 철인왕의 자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전사 계급에게 필요한 역할은 이른바 '용기, 기개'로서 적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자신의 국가와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산자 계급에게 필요한 것은 이른바 '절제'에 해당한다. 물론 이러한 절제는 생산자 계급 자체에게만 해당하는 덕목은 아니다. 모든 계급이 이러한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고 S는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생산 계급에게는 따로 어떠한 덕이 요구되지는 않고, 이러한 '절제'의 덕만이 소극적으로 요구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S는 국가의 정의는 무엇이냐? 바로 이들 세 계급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 이것이 바로 국가의 정의일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국딩 때나 배웠듯이, 우리나라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요!~ 와 같은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 S가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민주정이 아니다. S는 민주정을 어중이 떠중이가 모여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한 국가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결국 과두정이나 귀족정, 참주정으로 이어질 만한 혼란상을 조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S는 철저한 교육으로 양성된 엘리트와 같은 철인들이 나라를 이끌어야 하며, 이러한 정치 체제는 왕정이 아니라, 그때 그때 적합한 철인이 추대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를 말한다.

 

솔까말로 어떨까? 이런 나라가 말이다. 극히 회의주의적인 사람은 이런 국가는 사실상 독재국가라고 보고 있다. 북한과 같은 나라 정도가 아마도 S의 이상을 올바로 실현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양성된 당성이 강한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며, 주체사상에 가장 충실하고 이에 대한 해석의 권한을 가진 김씨 할아버지가 이른바 철인왕으로서 역할하고 있지 않은가..

 

전사들은 선군의 영도 아래에 적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고, 지도자 동지를 옹호하기 위해 마치 개처럼 용맹성을 과시하고 있다. 인민들은 철저히 이러한 사회 엘리트 계급의 지도와 솔선으로 인해서 사회를 바라보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히 하고 있다.

 

사회 엘리트가 국가를 운영한다는 점에 있어서 아마도 반론을 제기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쨌든 보다 덕이 있고, 똑똑한 사람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오히려 속 편한 일이 아닌가. 이러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편하게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오락도 하면서 편한 인생을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도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지배 엘리트 계급이 타락할 가능성, 금전이나 자기의 사적인 이익의 측면에서 반동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물론 S는 그런 측면은 철저한 교육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S가 말하는 교육방식은 스스로도 스타르타에서 많은 것을 가져왔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해도 말이다.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는 철저한 유교 교육을 거친 선비들이 그 어려운 과거 시험을 2차, 3차에 걸쳐서 붙어서 관직에 진출했음에도 나라는 결국 타락하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도 간파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논의를 다시 이어 가자. S는 이것이 바로 국가의 정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며 논쟁자들의 아가리를 쐬랍하도록 강제한다. 씨벌, 이렇고 저렇고 일단은 맞는 말이자나..?

그렇게 평정한 S는 이제 개인의 정의를 알아보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국가에 세 계급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에도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뜨아아아악...유명한 영혼 삼분설이 이렇게 등장한다.

S는 금의 영혼은 '이성'에 해당할 것이고, 은의 영혼은 '용기 혹은 기개'에, 동 혹은 철의 영혼은 '욕구'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개인의 정의는 이러한 영혼의 세 가지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상태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래야 그 개인의 정의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최상위에 있는 이성은 기개와 욕구를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이성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신의 역할을 다 해야만 한다. 기개는 이성과 연합하여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용기를 발휘하여 이를 지적하고 항의하며, 적에 대한 적개심을 발휘해야 한다. 욕구는 적절하게 통제되어 이성이나 기개의 통제를 넘어서 과도하게 추구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S의 정의이다.....논쟁자들은 어느새 yes맨이 되어 있다. 국가 10권 중에서 3,4권까지는 간혹 S에게 반론도 제기하던 이들이 7,8,9권 쯤 가면 '옳습니다요~ 맞습니다요~그렇지요~'를 연발하는 지지자가 되어 있다. 아아 대화술의 마법이여..~

 

이러한 S의 정의는 그동안 논쟁시되어 왔던 정의에 대한 논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논쟁자들은 정의가 과연 강자의 이득이냐, 아니면 강자와 약자의 일종의 약속이냐, 정의는 무엇이며 이것을 따를 시에는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느냐, 오히려 걸리지 않고 부정의를 행하는게 행복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데, S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답을 제시하고 있다.

 

S 가라사대, 정의는 영혼의 세 부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야. 그래야 인간이 행복해져..

 

논의의 철저함으로 논쟁자들은 자신의 최초 의문을 잊어먹은 채로 S의 논변에 그대로 따라가 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S의 동문서답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S가 제대로 논쟁자들에게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논쟁자들은 '아 오늘 참 좋은 거 배웠다.'라고 말하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으응?'하면서 벌떡 일어나겠지....

 

그래서 정답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나 버렸다. S는 정의로운 자들이 부정의한 자들보다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다할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저 마지막 10권에 가면 현실적으로 그들이 불행할 수도 있지만 내세(이데아 세계)에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말을 할 뿐이다. 으응?

 

이건 또 뭔가..마치 교황이 착하게 살어. 어쨌든 입 닥치고, 그러면 천국에서 행복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우리는 수업시간에 이러한 S의 사기극을 2000년이 지난 후에 책으로 살펴보면서 스스로 경악할 뿐이었다. 공소시효는 이미 지났고(오래전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문 그것 뿐이었다.

 

그렇게 연극은 끝이 났다...오우....젠장...

 

 

이렇게 우리에게 사기를 치고, 지가 철학자라는 권위만 챙기고 달아난 S이후로 이런 문제에 대답하기 위한 수 많은 사기꾼들이 재등장하게 된다.  근대 이후의 공리주의가 그렇고, 정의는 오직 요청된 개념일 뿐이라고 얘기하는 칸트도 등장한다. 좆까고 있네, 그런 것은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헤겔도 있고, 이른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도 정의라고 하는 개념이 보편적인가, 아니면 개별적인가를 두고 벌인 긴 논쟁이었다.

 

사기꾼들.....힘들게 공부해서 얻은 결론은...모두가 사기꾼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우리도 사기꾼이라는 것이었다..

턱 하고 생각이 막히는 것을 느낀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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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불만

여기 블로그홈에서 이상한 글을 보고 이 글을 쓴다.  아니, 그렇다고 까자는 게 아니라, 그냥 드는 생각이 있어 이 글을 쓴다. 바빠 죽것는데...(여기는 절간이다..)

 

그래 우리 조선에 두 개의 진보세력이 있다지? 이것은 이제 운동세력만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어느정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

 

피디들이 보기에 얼마나 자주세력들이 한심해 보일까? 그들은 한물 뿐만 아니라 두물, 세물은 갔다고 하는 민족주의에 아직도 기대고 있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은 그다지 이상적이지도 않다. 통일을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 통일이 어떠한 통일이 되어야 하는지 확고하게 잡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만들어 가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낡고 낡은 구좌파와 맞닿아 있는 그들은 미국에 반대하기는 하지만, 그 미국을 쓰려뜨리고 만드는 것은 또하나의 제국일 뿐이다. 그럴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결국 그들은 결국 서구에 맞선 동양을 얘기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다른 패권을 불러올 뿐이다.

 

내가 보기에, 내가 보기에 말이다. 피디들은 그럼 어떠한가? 그들은 하여튼 뭔가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이렇게 말할 것 같다.

 

" 그러니까 말이야, 어느날 불현듯이 모든 노동자와 인민 대중들이 들고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사람들을 억압했던 모든 수탈 기관을 철폐하지. 해방구였던 광주를 생각해봐. 파리 꼬뮌을 보자구. 아, 그날이 오면 말이야. 모든 사람들이 성, 인종, 재산에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누리며 우리의 위대한 예언자 성 마르크스가 얘기한 대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거야....언젠가는 말이야. 나는 아직도 혁명을 꿈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나는 영원한 불만자라는 칭호와 함께 '영원한 진보'라는 그들이 좋아할 만한 칭호도 선사하고자 한다. 매우 존경스러우며 숭고한 생각을 가진 당신은 인간을 사랑하는 진정한 휴머니스트, 로맨티스트이다.

 

역사는 단번에 경험계를 뛰어 넘어 예지계로 들어서는 혁명을 경험한 적은 없다. 즉, 정말로 유토피아가 실현된 세상은 역사상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꿈꾸는 유토피아도 우리의 현실 세계에 갇혀 있는 제한적인 꿈일 수 밖에 없다.

 

과거 농본사회에서 이상사회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모든 백성들이 자신만의 땅을 부치고 살며 부족함 없이 살게 되는 요순 시대일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농민 반란 때마다 터져 나왔던 농본사회의 이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상은 실현되었을까? 역사를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의 진전은 있었다. 결코 농민이 주인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반 대신, 귀족 대신 다른 계층이 시대를, 사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노예의 해방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도식화해보자. 서양 고대사회에서는 노예가 속박을 당했고, 그래서 노예해방이 이상이었다. 결국 이것은 실현되지 못하고 더이상 노예가 필요없는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시시껄렁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에는 농노가 속박을 당해서 농노해방이 이상이었지만 결국 시대가 농노가 필요없는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시시껄렁한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이른바 피디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현실 사회에서의 최하층민의 이상을 꿈꾸며 그만큼 이상적이다. 농본사회에서 토지평등분배를 외치던 과거 수천년 동안 이어져온 농민군처럼 그들은 영원히 불만자, 진보주의자로 남을 것 같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을 꿈꾸며 말이다.

 

사회와 역사의 발전은 결코 최선의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았으며 차선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차선에 갇혀 있다는 것은 영원한 인류의 한계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최선을 꿈꾸지만 그것은 결국 차선으로 미끄러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누가 앞으로의 발전에 기여를 할 것인가. 전자와 후자 중에 차라리 나는 전자에 걸겠다. 그들만큼 현실적인 사람들은 없으며,  현실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없다.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다수의 후자들이 외면해 버릴 정도로 말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좌파와의 연계는 엄청난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언젠가는 장점으로서 부각될 날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통일은 그 누가 어디에 관심이 있건 마치 수험생이 치러야 하는 필수 과목, 대학생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전공필수처럼 우리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다. 답하지 않으면 졸업이 불가능하다.

 

발전은 현재 진보이지만 앞으로 보수가 될 준비가 된 세력이 주동하게 된다. 그리고 또 후배들에게 진보의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진보는 영원히 막혀 있는 진보로서 그 시대의 메아리만을 울려 제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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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막힘

공부를 하게 되면 철학에 대해 쓸 말이 많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모른다는 생각 뿐이고,  철학을 알기 이전에 영어, 독어 해석이 급하고,  뭔가 공부는 하는데 '내가 지금 뭘 공부했지?' 싶은 생각이 자꾸 자꾸 든다. 그래, 지금까지 내가 뭘 배웠지? 아아..공허하다. 너무나 공허하다.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지금까지의 플라톤의 생각은 일단 그냥 그렇다.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극중의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정의의 순수성, 정의의 절대적 기준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요즘에 와서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보는 데 별로 감흥이 없다. 하지만 스토리의 전개상 소크라테스는 그의 견해에 반대하는 논쟁자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간다. 아아 재미없다. 이 사람은 진 적이 없다. 마치 계속 이기는 어린이 만화영화 주인공을 보는 듯 하다.

 

정의는 무엇인가? 논쟁자 중의 한명은 정의는 결국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다. 힘이 센자가 권력을 얻고, 국가를 지배하면서 자신의 이득과 자신을 따르는 계급의 이익에 맞는 법을 만들고 이것을 '정의'라고 규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상당히 시니컬한 지적이고, 사회에 불만이 있는 젊은이라면 '옳거니!'할 내용이다.

 

하지만 S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의가 강자의 이득이고 자시고가 아니라, 정의는 어떠한 절대적 기준을 가진 것이다.  즉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길고 긴 대화법이 시작되는데 여러가지 질문을 하면서 상대방 논변을 격파해 나간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리속에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예를 든다고 하는 것이 자꾸 의사, 항해사 등의 기술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데 즉 S는 의사가 의술을 자신의 기술로 가지고 있듯이,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를 마치 자신의 기술처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정의라고 하는 일종의 덕목을 기술에 비유할 수 있을까? 요즘의 시각과는 너무도 다른 비유이다.

 

S는 일종의 주지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즉, '알아야 실천한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의술, 항해술을 익히듯이 정의라고 하는 것도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S의 생각은 정의로운 사람은 마치 의사가 의술을 펼치는 것, 즉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잘 하려고 하는 것처럼 정의로운 사람도 정의를 펼치는 것, 즉 약자를 배려하고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고 올바른 통치를 행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실력 없는 의사가 욕을 먹듯이 우리는 더 잘하라고 강요하고 강제하고 심지어는 내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의 노홍철, S는 이빨까면서 정의가 강자의 이득에 불과하다는 논쟁자의 견해를 무너뜨려 버린다. 나의 입장에서는 논쟁자는 현실을 보고 있고, S는 당위의 세계를 보는 평행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제2의 논쟁자가 나타나서 일종의 절충으로서 사실 정의라고 하는 것은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정치가들은 실제로 이를 잘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 겉으로는 정의로운 채 하며 약자에게 어느정도의 양보도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돌+아이, S는 그것마저 부정한다..........아아, 우리의 S는 완벽히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어 김정일처럼 정의로운 자들의 열병식을 서열하고 싶은가 보다.  만세~ 만세~ 일심단결, 백전백승~

 

이를 위해 S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물으면서 개인의 정의를 다루기 이전에 보다 더 큰 규모에 해당하는 국가의 정의를 생각해 보자고 말한다. 그러면서 S만의 국가를 머리속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천일야화의 시작이다.

 

먼 옛날, 태초에 인간이 있었는데...........................아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주말의 명화 BGM)

 

 

일단 여기 까지 얘기하자.

 

 

이제 H로 가보자. 아, 불쌍한 H........H가 누구냐고? 아, 왜 내가 젤 좋아하는 사람 있잖은가..그 H는 참 불쌍하다. 자기는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데 그 누구도 그의 말을 이해해주지 않는다. 불쌍한 H...미안해..내가 미안해...내가 더 잘 할게....미안해....ㅋㅋㅋ

 

생각의 막힘. 그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것이 너무도 많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당장의 개념들 보다는 눈 앞의 단어의 뜻이 더 급하기 때문이리라. 언제쯤 '사고'라는 것이 가능할 지..지금은 보다 더 준비해야 할 때일 것이다.  아아 언제까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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