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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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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레벨 : 100(정예)

 종족 : 게르만 (비유대)

 

대중적인 교양의 세계에서 헤겔은 더이상 읽히지 않는다. 아니 읽혀지는 것이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사상은 어렵고, 이제 유행도 많이 지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양의 세계에서는 아마도 현대 프랑스 철학자나 정신분석과 같은 심리학서가 유행이 아닌가 생각한다. 헤겔은 이제 한국에서도 퇴행길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헤겔 철학에 대한 차분한 반성이 가능해지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도 있다. 광신적인 찬사와 혐오적인 경멸을 떠나서 헤겔 철학의 공과 사를 차분히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헤겔은 하나의 방법만을 가지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였던 철학자인 것 같다. 그 방법이 바로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모든 것은 모순에 부딪쳐 이것을 끊임없이 극복, 지양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중에서 자기 자신은 새롭게 변화한다. 아주 단순한 원리이지만 헤겔은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에 적용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좀처럼 이해하기가 힘들다.

 

헤겔의 철학은 결국 변증법 하나를 가지고 이것이 어떻게 모순에 부딪쳐 극복지양하면서 발전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변증법을 겪는 주체는 바로 '정신'이다. 이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은 '인간정신'이라는 말처럼 우리 인간의 정신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집합된 정신, 공동체적 정신에 더 가깝다. 예를 들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교실에서 나타나는 반 특유의 분위기, 아우라, 집단적 목적의식, 다른 반이나 학교에 대한 태도 등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정신이다. 물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이러한 설명이 가능한 것이지, 헤겔의 정신 개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복잡한 논의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헤겔 스스로도 정신에 대하여 신비주의, 종교적인 묘사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에서는 우리의 단순한 의식이 그러한 공동체적 정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물론 그 세세한 변증법의 과정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헤겔이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헤겔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 근대 사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정신(민족정신이건 세계정신이건 시대정신이건)이 나타나기까지 지난한 의식의 변증법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하나이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텔레비젼을 켜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투표도 하고 사회를 까기도 하고 직장에 출근하여 일하는 것은 수많은 의식의 단계가 합쳐서 도달된 하나의 시스템이라는 말이다. 그 시스템을 헤겔은 '절대정신', 이 한마디로 압축한다. 따라서 이 세계는 과거의 모순이 축적된 하나의 필연이다.

 

그 변증법은 이렇게 인간학의 분야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논리학이라고 하는 헤겔의 저작은 우리의 형이상학적인 존재론, 개념론, 본질론 등의 추상적인 개념에서의 변증법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은 정신현상학과 방식이 똑 같다. 하지만 이때는 '정신'이라는 말보다는 '이념'이라는 말이 더 많이 등장한다.

 

논리학은 쉽게 보면 헤겔의 변증법적 세계관을 함축한 형이상학 저서이다. 마치 동양의 세계관이 음과 양이 있고 음양의 정동에 의해서 오행이 탄생하고 오행으로부터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이치로 설명되는 것처럼, 헤겔의 형이사학에서는 기본적인 존재의 영역에서도 변증법이 일관되게 통용된다. 존재와 무를 거쳐 생성이 산출되고 이로부터 현존재가 나타나며 또 계속 모순에 부딪치며 새로운 개념에 도달한다. 논리학은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적인 논리 즉, 인과성, 가능성, 필연성,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의 정의, 양과 질이라는 개념 등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게 아니라 변증법적인 자기 모순을 거쳐서 탄생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A이면 B이다'라고 말했을 때에도 사실은 그 안에 엄청난 양의 모순과 그 모순의 충돌과 분열과 극복, 지양, 통일의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 추상적 개념의 발전사이기 때문에 헤겔의 입장을 선뜻 이해하기는 힘들다. 추상적 개념이 발전하는 변증법을 다루는 것이기에 헤겔의 자의적인 설정으로 보이는 것도 많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철학도 있다. 이것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변증법적인 모순의 지양과 발전이 이어진다는 내용을 주로 하고 있다. 자연은 외타존재의 영역, 즉 우리 밖에 객관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영역이기에, 논리학 분야처럼 헤겔이 이리저리 썰을 풀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부족하다. 헤겔은 자신의 자연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자연의 영역에서 어떻게 변증법적 모순이 적용되는지를 다시 보여주는 재구성 작업에 착수한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작업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학적인 작업에 변증법을 덧씌워 자연에 적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대한 변증법적 파악. 이것이 자연철학의 내용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 헤겔은 논리학의 방식에서처럼 단순한 공간, 시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운동과 물질 개념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역학, 물리학, 유기학 등으로 나아간다.

 

헤겔의 자연철학체계는 자연과학의 자연 탐구 방식이 아니라, 변증법적 시각에 따라서 자연의 세계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에서의 정신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자연을 넘어서 정신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데에 목적이 있다. 자연 외부에 대한 정신 혹은 이념이 발전하여 결국 자기자신을 이해하는 정신(정신현상학)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신의 체계에 자연철학을 맞추려 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현대 우리의 자연과학적 상식에는 맞지 않는 서술이 곳곳에 보인다. 이것은 헤겔이 살았던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전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헤겔의 자연철학의 방법 자체가 관념적인 산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헤겔은 이러한 시각에서 뉴턴식의 기계적 자연관을 비판하지만 뉴턴의 자연과학의 엄청난 실용성에 밀려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 한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상대성 이론이후 새로운 주목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변증법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통일로서의 물질을 바라본 것과 아인슈타인의 4차원 시공간의 유사성, 유기체적 자연관이 현대 생태학적 자연관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 등이 새롭게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헤겔의 철학은 사실 변증법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만들어낸 철학이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 변화 혹은 역사라는 개념을 철학의 영역, 진리의 영역에 처음으로 적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라고 하는 하나의 획기적인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변화하는 사회, 변화하는 진리관, 역동적인 민주주의, 변천하는 시대 정신 등 근대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여 우리는 헤겔에게 '근대철학의 완성자'라는 칭호를 붙인다. 모든 것은 모순에 부딪쳐 변한다는 것, 지금의 진리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이제 우리시대에는 상식이 되었다. 과거에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막는다든가, 사회가 말세임을 외치며 보수적으로 대응하였지만, 근대 사회의 특징은 이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면 이것이 우리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를 논의하고 연구한다. 헤겔이 말하 듯, 절대정신의 단계에 다다르면 지금까지의 모든 단계를 한 눈에 파악하고 이것이 모든 변화의 과정이었음을 인식한다. 이 절대정신은 곧 근대의 정신에 다름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이른바 '국가정체성'을 운운하며 사회의 변화상을 탓하거나 낡은 세계관을 고집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직 정신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근대인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이렇듯 헤겔은 근대를 준비하고 그러한 근대의 문제를 고민했던 마지막 근대 이전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후 니체가 등장하면서 근대 비판의 포문을 열면서 현대철학은 시작된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재해석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헤겔 좌파의 입장에서 근대 사회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서 떠오른 사회주의에 대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제시하였던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후 20세기 내내 전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현대철학이 헤겔이라는 큰 산을 넘어뜨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에서, 다양한 서양철학자들이 그를 비판하며 제기했던 새로운 문제들을 나열하는 것은 또 하나의 글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헤겔은 그렇게 현대철학자들이 밟고 올라서서 극복해야 할 표적이 되어 주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독일의 비판철학은 헤겔의 동일성 철학을 하나의 폭력으로 바라보며 탈근대적인 이슈들을 다루면서 크게 유행하였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 시대는 여전히 근대와 탈근대의 중간지점에 서 있는 듯 하다. 지나간 세월과 그간 쌓여온 비판의 양 만큼이나 이제 누구도 헤겔의 변증법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헤겔은 거대한 산으로서 아직도 밝혀져야 할 사상이 남아 있는 철학적 발상의 보고이다. 이러한 그의 매력은 헤겔에 대한 많은 비판까지 우리가 섭렵한다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판한 것인가. 오히려 유물론적 함정에 빠짐으로서 근대에게 발목을 잡힌 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아닐까. 비동일성을 외치며 동일성을 비판한 해체주의의 시도는 결국 또 다른 동일성에 다다르는 하나의 계기가 아닐까. 그들의 말대로 저 멀리서 헤겔이 웃으며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헤겔이 교양의 세계에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의 노년의 초상화에서 나오는 매서운 눈빛을 보듯, 그의 철학은 설득이 아닌 믿음을 강요하는 듯 오만하고 난해하며,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건방짐과 자만이 엿보이며, 관념적이라는 엘리트주의적 향내가 짙게 배어나고, 정반합으로서 모든 반대와 모순을 절충하고 뭉뜽그려버리는 보수적인 변증법 사상가이다.

 

하지만 나는 헤겔의 철학을 단번에 무시할 정도의 자신감은 없다. 헤겔을 알면 알 수록 기존의 이미지가 많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스 고전에 열광하였고, 프랑스 혁명을 일평생 지지하였으며, 프로이센의 왕정복고의 반동 속에서도 저항하는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던 헤겔이었다. 그의 변증법은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충과 봉합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 자신으로 탄생하는 것, 모순을 모두 받아들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일신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이다. 변증법은 역동적인 방법론인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그냥 정반합이라는 보수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고, 해석학적 순환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마르크스식의 진보로 이해할 수도 있고, 자아 속의 타자와 타자 안의 자아라는 실존주의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아이러니한 의존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정도 되면 헤겔이라는 산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된다. 서양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헤겔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등뒤의 헤겔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는 맞닥드려야 할 던전의 보스로서 헤겔이 등뒤에 버티고 서 있다. 그는 참 두려운 철학자이다.

 

처음으로 돌아오면, 헤겔은 이제 그 누구도 읽지 않지만, 오히려 헤겔을 차분하게 읽을 만한 여유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다양한 서양의 고전철학자 중에서 유독 헤겔만이 주목을 받고 대접을 받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헤겔은 '과도한' 주목을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이라는 서양철학의 불모지에서 아직도 주목받고 여러모로 밝혀져야 할 철학자들은 수두룩하다. 예를들어 쉘링, 피히테나 볼프, 라이프니츠 같은 철학자는 지나가는 말로 다룰 뿐, 그들의 사상의 진수는 아직 완전히 소개되었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헤겔의 사상이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제 계몽의 시대는 끝난 것인지, 탈계몽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마저도 계몽에 대한 계몽으로서, 즉 계몽의 연장선으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물음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계몽과 탈계몽의 대립과 그로 인해 탄생할 새로운 사상을 고민한다면, 역시 출구에서 웃으며 기다리고 있는 헤겔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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